서로 다른 견해에 대하여
2025. 1. 향기 영란
고속터미널까지 마중 나온 만나는 아들은 반가웠다. 그리 오래된 건 아니지만, 핏줄은 늘 그럴 것이다.
육회랑 연어초밥, 연어사시미를 파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밑반찬은 깔끔했고 연어는 부드럽고 비린 맛 없이 담백했다. 젊은 친구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면서 준비한 음식을 올리고, 친절하게 손님을 부르고 포장해 가려는 사람에게 음식을 전달했다. 버스 안에서 2~3시간동안 허우적 대면서 잤다. 아이들 졸업을 마치고, 방학을 맞아 급격히 느슨해진 시간과 밀도에 심드렁해 있었던 나는 서울이라는 복잡하고 낯선 환경에 떨어지자, 대번에 군기가 들었다.
1년여간의 자취생활 경력 끝에 어수선하던 방은 안정적으로 자리잡혀 있었다. 바닥은 깨끗했고 바지, 스웨터는 옷걸이에 잘 개어져 있었다. 수건은 옷걸이에서, 요리학원에서 썼다는 행주는 하얗게 잘 말라가고 있었다. 원룸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식당 덕분에 아들은 아예 밥을 안해 먹고 있었다. 그래도 지장이 없어 보였다.
나보다는 남편의 유전자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나와는 사고의 결이나 행동 방식이 달랐다.
지금도 나에게는 정리 정돈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 나이에 나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 밖으로 밖으로 촉수를 대고 있었다. 예쁘게 꾸밀 줄도 모르고 날씬하지 않았던 나는 예쁜 여학생들과 외모를 비교하며, 속으로는 시기하거나 폄하하면서 나는 나대로 잘 났다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지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나는 그저그런 수많은 여학생들 중 하나였다. 학보사를 한답시고 부산대, 인천교대, 경희대, 고려대(?) 등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대학들을 선후배, 동기들과 휩쓸려 다녔다. 학과 공부를 잘하지도, 그렇다고 학생운동이나 신문기사를 똑부러지게 하는 축에도 들지 못했다. 학점은 늘 2점 대 중반 언저리였고, 사회관련 기사도 한겨레 신문이나 다른 기사를 그럭저럭 편집해서 썼다. 대학 캠퍼스 커플을 은근히 깔보았지만, 나는 그런 변변한 사랑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늘 친구들과 같이 다녔고, 그럴듯한 연애의 기회는 내게 오지 않았다.
어설픔과 어리숙함, 주변부에서 탐색하기,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정 욕구 등으로 나는 아들의 나이를 보냈다. 저렇게 운동으로 자신을 다지고 주변 관리를 하지 못했다. 처음 진학했던 대학을 그만두고, 제 힘으로 편입을 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을 했다. 독립한 이후부터 어느 것 하나 걱정하게 만드는 구석이 없었다. 속 안 썩이고 착실한 아이를 두어서 좋겠다는 시기 어린 질투를 받을 수도 있으려나.
나는 아들이 방을 엉망으로 해 두고 다닌다든지, 섣부른 투자로 커다란 손실을 보거나, 몇번의 실연으로 고주망태가 되어 추태를 부린다든지, 어설픈 학생회 활동으로 부모를 상심하게 만들든지, 해외로 어디로 싸돌아 다니든지 그런 행동들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을 지나가는 통행료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나 모임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8~90 이상 신뢰하는 사람과의 만남에 참여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단정지음으로써 잃어버릴 수 있는 기회에 대한 미련조차 없는 아들이 안타깝긴 하지만 뭐라고 비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견해 차이가 나는 결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아들은 지난 대선 때 2번을 찍었다. 요즘 이십대 남자들의 평균적인 추세에서 벗어나지 않는 쪽이라고 해야 하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우리 부부와 완전히 다른 정치적 견해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들은 그런 대화를 굳이 선택하지 않았고 우리도 그걸 애써 들추지는 않았다.
서로 얼굴을 대할 기회가 없는 것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우리의 내면에 숨어 있는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사람이 없는 동네에서 온 내가 10시가 넘어도 삼겹살, 족발 가게에 젊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걸 구경했다. 맛있다는 호떡 가게 앞을 지나면서 현재 대통령이 내린 계엄의 정당성과 불가피함을 말했다. 전 정부가 북한에 비밀리에 넘긴 usb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이 주제에 관련한 대화를 중단하자고 이야기했고 아들도 동의했다. 아들과 엄마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에 들어가서는 화장실 청소를 조금 한 것 외에는 내가 손 볼 구석은 없었다.
둘쨋날 나는 연수를 듣다가 대통령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후에 아들이 과천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영문을 몰라 거긴 왜 갔냐고 물었더니, 대통령 체포되어 들어간 곳인데 체포 반대 집회에 왔단다. 집에서 얼마 안 멀어서...
이런 무슨 고양이가 서핑하는 소리란 말인가!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느끼는 것이 분노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우리는 강남에서 저녁을 먹고 영화 <하얼빈>을 보기 위해 만났다.
“엄청난 인원이 모였어! 만 명쯤 되려나? 거기서 사람들이 사탕하고 초콜렛 나눠주고, 핫 팩도 하나씩 줬어.”
“너처럼 젊은 사람도 많았나?”
“10퍼센트쯤? 40대로 보이는 사람도 제법 있었고, 나이 드신 분도 많고. 대통령이 육성 메시지도 보냈더라고. 사람들이 막 흥분하고 했어.”
“넌 계엄이 정당했다고 생각하니?”
“계엄은 대통령의 권한이지”
“권한은 맞는데, 어떤 상황일 때 내려야 하는 건 알지? 계엄을 내릴 조건이 아니었고, 정당한 절차도 거치지 않았지”
“부정선거 의혹을 밝혀야 했어. 선관위에서 의혹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고...........”
이것 외에도 우리가 나눈 대화의 양은 상당히 많았다. 나는 너무 당연한 것을 설명해야 하는 일이 피곤했다. 그리고 많이 화가 났다. 아들은 나의 논리를 납득하지 않았다. 내가 아들의 논리에 설득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논리와 설득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들은 나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나의 의견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같이 밥 먹으러 갈 때 내 의견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며, 괜찮냐고 자주 묻는다. 그리고 나도 좋은 영화를 아들과 함께 많이 본다. 절제된 시나리오 속에서 더욱더 빛났던 안중근과 독립운동가들을 다룬 <하얼빈>을 보고도 서로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커다란 여지를 두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극우 유튜브를 보는 모양이다. 그런 사람들이 내세우는 의견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좀 객관적인 자료나 의견을 듣고 균형 잡힌 지식을 취하라고 말했다. 이런 다정한 말들이 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는데 훨씬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 더! 아들처럼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많다는 것에도 적잖이 놀란다. 좀더 신중하게, 냉철하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상황을 지나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또하나의 교훈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