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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아모스 2장 4-16절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아모스는 남유다 출신이지만 북이스라엘을 위해 세워진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에 앞서 북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전하는데, 저들이 저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처럼 너희도 그러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북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혈통적으로 먼 나라로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다메섹이나 블레셋, 두로 지역은 북이스라엘과는 상관이 없는 나라입니다. 반면 에돔, 암몬, 모압은 형제 나라와 먼 친척쯤 되는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좀 더 가까운 형제 나라인 남유다에 대해서도 말씀하는데, 저들 모두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면 너희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좀 더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 대해여 말씀하시는데,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두 나라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 야곱, 그리고 열 두 아들로 이어져오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비록 400년 동안 애굽의 종으로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여 모세 시대 때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은총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민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죄에 대하여는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물론 이런 내용이 우리가 성경을 따라 고백하는 예정론을 거절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시되 어떤 이들을 선택하신다면 그 선택은 불변합니다. 그러나 불변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과 반대되는 죄에 거해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과 반대되는 죄에 거할 때 선택의 불변성 때문에 버리시는 일은 없지만, 버리시는 일이 없다고 해서 죄에 대하여 그냥 내버려두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같이 거룩하도록 하는 목적을 모든 택자에게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죄에 대하여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되 일시적인 심판도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지난 시간까지 살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주변국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는 결코 일시적인 심판 내용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으로까지 나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게 될 남유다,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적어도 택자에게는’ 영원한 심판으로까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적어도 택자에게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선택된 민족이라고 할지라도 그들 모두가 택자는 아닐 수 있다는 것 때문인데, 성경에서 선택이라는 표현을 쓸 때 택자로서의 선택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의미의 선택이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택자로서의 선택은 불변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에 대하여 반드시 구원의 시작과 함께 구원의 완성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민족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고 할 때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 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는 육적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로 제한해서 볼 때 영적 이스라엘은 다 육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육적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영적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전자는 택자이지만, 후자는 결코 택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롬9:6).
여러분,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되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칭하신 바가 있습니다(눅6:13). 단어적으로는 택자로서의 선택과 동일하지만, 이때 택하다는 것은 사도라는 직분을 위하여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 선택을 택자로서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가룟 유다는 결국 유기자로서의 길을 갔기 때문에 선택의 불변성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택자로서의 선택과 사도로서의 선택이 같은 단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선택이 택자로서의 선택, 택자이기 때문에 불변하도록 하는 선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남유다, 북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주변의 나라들처럼 심판받을 수 있습니다. 단지 일시적인 심판이 아니라 그런 심판이 영원한 심판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택자조차 버리신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신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육적 이스라엘일 뿐 영적 이스라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육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지만, 영적 이스라엘 백성으로 나타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닌 것처럼, 이방인이라고 해서 다 이방인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모스 선지자로 하여금 지금 북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할 때 그 유익은 누가 받는가? 아모스 선지자로부터 대략 30년 후에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지금 아모스 선지자는 헛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멸망할지라도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구약에서는 ‘남은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로 하여금 이 말씀을 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의 유익은 택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알곡이 있고 가라지가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유익,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유익은 가라지가 아닌 택자에게만 있습니다. 일시적인 의미에서의 유익이 가라지에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처럼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기도 하고, 또 즉기 기쁨으로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택자가 아닌 유기자는 뿌리가 없습니다.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는 환난,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집니다.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이런 현상이 택자에게도 있지만, 하나님은 택자에게는 반드시 말씀으로 말미암은 유익을 주셔서 결국 결실까지 하게 만드십니다. 남유다, 북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와서 먼저 남유다에게 하시는 말씀을 보면, 4절과 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구조 자체는 지난 시간에 살핀 북이스라엘의 주변국들에 대한 말씀과 같습니다.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벌을 돌이키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들의 죄는 무엇인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고,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다른 민족에 비해 유대인의 나음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3:1-2) 또한 신명기 4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8) 그만큼 하나님은 다른 모든 민족보다 나은 이스라엘을 만들고자 했으며, 공의로운 큰 나라로 다른 나라 위에 이스라엘을 두시고자 했던 것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고 기뻐하지 않는지를 앎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한 자로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경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유익을 위해 주신 율법을 멸시하면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말씀이 남유다를 향한 말씀이라고 할 때 남유다에는 그나마 참된 예배가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처럼 거짓된 예배로 있지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이름만 있을 뿐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예배로만 있었다면, 남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했다는 것이고, 그 율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사사기에 보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이 있습니다(삿17:6). 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는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두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왕정 시대인데, 사실 이러한 본성은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그래서 하와가 금지 된 열매를 따 먹습니다. 또한 아담도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하나님이 왕이심을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내가 앉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는가? 왜 여호와의 율례를 지키지 않는가? 우리 안에는 이런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율법을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지만, 인간의 죄성은 그것이 자신을 억압하는 것처럼 생각할 뿐입니다. 자유가 박탈된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으면 자신이 율법의 제정자가 됩니다. 율법을 멸시하고 율례를 지키지 않는 자리에 머물지 않고, 거기에 다른 것을 대체시키는데 오늘 본문은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거짓된 것, 즉 하나님 자리에 우상을 올려놓게 되는 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 자리에 자신을 두면서 자신이 우상이 되고 있지만, 더 심각한 것은 만물의 으뜸으로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오히려 다른 피조물들을 우상으로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의하면 이방인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컫는 자들 안에 있더란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라고 해서 늘 순수하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우상의 소굴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있지만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영광을 받고 나아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어떤 형상들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패한 교회로부터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 교회 역사 안에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역사는 그때만의 역사가 아니라 이미 남유다 안에도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일이 아모스 선지자 시대만이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예배가 부패되고, 그 부패로 인하여 단지 형식적인 예배로만 있게 되는 일이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없겠습니까?
오늘 본문과 관련해 칼빈은 이런 설명을 합니다. “예언자가 비난하는 가장 무거운 죄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법 안에 자신을 한정시키지 않고 그 법을 새롭게 지어내려는 자유를 가지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희생제사보다 순종을 더 가치 있게 보신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삼상15:22).”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게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예배,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의 예배, 순종으로서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래서 지키지 않고, 도리어 거짓 것을 만들어내는 예배는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예배입니다.
이러하기에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어 예루살렘 궁궐들을 사른다는 것입니다. 이때 남유다의 주변국들과 다를 바 없는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저들에게는 말씀이 없고 남유다에게는 말씀이 있다는 것으로 사실은 남유다에게 더욱 강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눅12:47)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방인이나 맺을 법한 일을 주의 백성이 한다면 모르고 한 것보다 더욱 많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모르고 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방인들은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성격이 분명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살핀 것처럼 그들 모두가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말씀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는 분명 말씀이 주어졌다는 점에서는 더욱 큰 심판과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런 심판과 형벌은 이방인처럼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시는 목적과 동일하게 심판과 형벌도 사실은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더욱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과는 매우 가까운 형제 나라인 남유다에 대하여 말씀하고 난 뒤 이제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북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는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6절 이하 8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북이스라엘은 그 시작부터가 참된 예배가 아닌 거짓된 예배였습니다. 남유다의 경우는 참된 예배가 지속되었지만 그 예배가 부패해가면서 거짓된 예배로 전락하는 것에 대하여 지적했지만, 북이스라엘은 이미 거짓된 예배가 그들에게 익숙해 있었습니다. 죄의 무게로 하자면 하나님과 관계된 첫 번째 돌판 부분이 더 무겁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예배가 거짓된 예배일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이 인식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죄로부터 시작하시는데, 그것이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과 관련해서입니다.
북이스라엘에 앞서 북이스라엘 주변국들의 죄를 드러내실 때 율법의 두 번째 돌판으로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유를 모릅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핑계할 수 없는 죄목을 저들에게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죄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드러내시는데, 비교하자면 저들에게는 말씀이 없었다면 북이스라엘에게는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으로 너희의 죄가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럼 북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인가? 먼저 6절 후반부를 보시면, 그들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판다고 말씀합니다. 의인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불의한 자가 의인을 돈으로 판다고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지만, 신 한 켤레 받는 헐값으로 가난한 자를 판다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잡아 인신매매하듯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빚을 지고 그 빚 때문에 팔린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빚을 갚지 못할 때 종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레25:39-40) 즉 빚으로 인해 종이 되는 일도 있지만 종으로 여기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물질이 목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 한 켤레라는 헐값이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돈이라는 물질만능주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무엇을 버렸는가? 공의와 공평, 정의, 사랑, 긍휼, 자비와 같은 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7절 상반부에도 보시면, 그들은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개역한글성경은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우리말 속담으로 하자면 벼룩의 간을 내어 먹는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그래서 힘이 없는 자에게 있는 티끌 먼지조차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탐욕을 부리되 자신을 것을 채우기 위하여 가난한 자의 작은 몫까지 탈취해 갈 정도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발로 밟는다는 것은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행동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로 말미암아 탐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고 멸시하면서 강탈해 간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한다는 것은 가난한 자로 하여금 길에서 밀쳐버린다는 것인데, 특별히 재판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출애굽기 23장 6절에 보면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라는 말씀이 있는데, 가난하기 때문에 더욱 올바르게 공의와 공평으로 해야 하지만 오히려 정의를 굽게 함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재판관의 불의가 있는데, 결국 공의로워야 할 재판관이 돈에 매수되고 그로 인해 가난하고 힘이 없는 연약한 자들은 그런 부조리에 의해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7절 하반부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이 사실은 간음입니다. 한 남자가 자기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취하는 것,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만 해도 정상적이지 않은데, 북이스라엘의 죄를 다루면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닌다고 말씀합니다. 정상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간음의 형태에 있어 더욱 문란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하여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고 말씀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게 아니라,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는 것은 그만큼 7계명에 대하여 심각하게 여기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기 9장 6절에 보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살인이라는 죄가 심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요,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음이라는 죄가 심각한 것은 거룩의 가장 주된 적이 성적인 타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신 것은 거룩함을 위해서입니다. 그런 거룩함이 성적인 타락으로 덮여버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8절을 보시면,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신다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22장 26절에 의하면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의도는 가난한 자에게서 생명과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전당물로 잡아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북이스라엘에는 전당 잡은 옷을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옷 위에 누워 주지를 않습니다. 또한 벌금으로 얻은 것을 마치 자기의 것처럼 사용한다고 말씀합니다. 공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모든 제단 옆에서’, ‘그들의 신전에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북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제단’, ‘신전’은 예루살렘 성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종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쩌면 북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 혹은 종교에 열심인 자들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오늘날 목사가, 혹은 교회를 가까이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긍휼도 없고 공의롭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종교성만 있을 뿐 믿음에 합당한 열매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북이스라엘의 주변국들에 대해서는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한 가지만을 말했다면, 심지어 남유다에 대해서도 한 가지,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하는 것과 관련해서 말하고 있다면, 지금 북이스라엘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죄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숨겨져 있는 것을 하나씩 수면 위로 드러내시듯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도 다른 민족들 못지않게 심각할 정도로 부패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아모스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과 나라들에 대하여 말할 때 북이스라엘은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향해 너희는 그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알리십니다. 같은 죄라도 모르고 짓는 죄와 알고 짓는 죄 중 알고 짓는 죄가 더 심각한 것처럼, 또한 한 가지 죄보다 여러 가지 죄를 짓는 것이 더 심각한 것처럼 너희의 죄는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 나라보다 더욱 심각하다고 알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은 이전에 그들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상키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 수준이 이렇다는 것은 그만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9절 이하 11절입니다.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아모리 사람은 가나안 땅의 대표적인 민족입니다. 그들을 쳐서 멸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모리 사람은 어떤 자들인가?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모세가 열 두 정탐꾼을 보내어 보고를 들을 때 한 말이 이것입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민13:27-29) 여기에 대해 갈렙이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하니까 다른 열명의 정탐꾼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1-33)
간혹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적은 군대로 대군을 물리친 일을 듣습니다. 힘으로가 아닌 지략으로 이긴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아모리 사람의 키는 백향목 높이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다고 할 때 그 말은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처럼 그들 스스로 능히 올라가 그 백성을 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보다 강한 것이 맞습니다. 싸우면 백이면 백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의 힘과 지혜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지 아니하였으냐고 하십니다. 즉 너희가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이미 출애굽 역사에서부터 있었고, 또한 광야 40년 동안에도 있었으며, 그런 동일한 역사가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인도하셔서 이끄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다고 말씀하시는데, 나실인이란 ‘성별된’, ‘봉헌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민6:18,19). 하나님은 선지자를 일으켜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나실인을 일으켜 그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의 모범을 보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나실인의 대표 인물로 삼손을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이런 삼손과 같은 사사를 일으켜 어려움에 있는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사랑을 끊임없이 베푸셨는데도 너희가 행한 것은 무엇인가? 12절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의 규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민6:3) 하나님께서 나실인을 일으킨 것은 말씀에 합당한 삶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떠한가? 나실인으로 하여금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지만 그 법을 어기게 만듭니다. 어겨도 괜찮은 것처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처럼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말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겠다는 것이요,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은 무엇입니까?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 보이신 것, 광야 40년 동안의 역사를 통해 보이신 것, 가나안에 들어가 싸워서 이기게 하시고 정복하게 하신 모든 역사를 통해 보이신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방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요,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런 하나님을 더 이상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순종만이 생명인데, 더 이상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힘과 방패이지만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세상을 힘과 방패로 삼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순종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고, 마음껏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힘과 방패가 아니라 자신을, 세상을 힘과 방패로 여기지 않습니까? 물질만능주의의 사고처럼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말씀에 귀를 열기보다는 취사선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 주의 뜻에 합당한 말씀보다는 내 귀에 듣기 좋은 말들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습니까?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자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것인데, 우리는 공로주의적인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 무엇과 같은가?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죄가 이러하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자로 있기에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그 벌을 돌이키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는데, 13절 이하 16절입니다.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금까지 나왔던 북이스라엘의 주변국들, 그리고 남유다까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할 때 불을 보내어 사를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북이스라엘을 향해서는 내가 너희를 누르리라고 말씀합니다. 누르는데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른다고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 원문에는 없습니다. 그냥 수레가 누르는 것처럼 그렇게 누른다는 것입니다. 수레에 깔려도 힘든데 곡식 단을 가득 실은 수레에 깔린다는 것은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희를 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흙을 누른다고 번역한 부분을 살려서 이스라엘은 수레의 무게를 견딜 수 없는 흙에 불과한 존재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고,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고,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도망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도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수치스러운 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나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과 방패로 삼지 않고 자신을 힘과 방패로, 세상을 힘과 방패로 삼는 자들은 바로 자신이, 또한 세상이 아무런 힘도, 아무런 방패도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힘이라고 생각하고 방패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너희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말씀 앞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저들은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조차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특별이 다음 주에 성찬식이 있는데,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남유다, 북이스라엘과 같지 않은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지키지 않고, 오히려 거짓된 것에 미혹되어, 결국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정의와 공의, 긍휼과 사랑은 버리고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열매만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 주간 우리는 회개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통해 다시금 주의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주를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