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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람 상대할 때 예수님 잊지 않는 법>의 줄거리:
예수 믿음의 실체적 내용인 십자가 생활화의 관건은 생활 속에서 사람을 상대하거나, 일이나 문제나 과제를 대할 때 어떻게 십자가 예수님을 잊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믿음의 축복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을 통해서 요한복음은 사람 상대할 때 예수님 잊지 않음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사람 상대할 때 예수님 잊지 않는 법
(요한복음 1:19~34)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람 상대할 때 예수님 잊지 않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람 상대할 때 예수님 잊지 않는 법’
본문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과 대답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질문에 대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대답을 끝내 듣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없이 곧바로 공생애에 관한 이야기로 진입해 들어갑니다. 1절에서는 태초가 언급되었습니다. 여기서 태초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영원함 속에 있던 천국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천국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곧바로 연결시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영원한 천국에 계시다가 방금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계시던 영원한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이 지금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게 되는 것 같이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 안에는 영원함 속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격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예수님께 다 담겨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아버지의 인격성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것은 아버지를 마주 대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하신 예수님의 출현을 예고하는 세례 요한의 기록 또한 특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시점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려는 순간입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기 직전에 세례 요한을 언급합니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우리를 위해 준비된 상황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실제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본문에서는 그 구체적인 대답이 제시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상태에서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도록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삶이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모든 일과 과제와 문제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동안에 믿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과 관계를 맺는 동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도록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대답을 세례 요한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 예수님은 도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하고, 예수님을 상대하는 중에 어떻게 사람을 만나야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는 중에도 예수님과 관계해야 하며, 예수님과 관계하는 중에 사람을 만나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이 상황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도록 이어나가기 위해서 세례 요한에게 배울 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공생애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란 유대인들의 대표였던 산헤드린공회를 말합니다. 산헤드린공회에서 요한을 판단할 사람들을 골라 보내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활동은 온 이스라엘을 시끄럽게 만들었고 산헤드린공회는 요한에 대해 진상을 파악하고자 합니다. 산헤드린공회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이루어진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이들 중에 제사장들은 사두개인이고 레위인들은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세례 요한을 만나서 제일 먼저 물었던 것은 요한 본인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공기관에 가면 우선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한 후에 일을 처리하듯이 이들은 먼저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요한의 대답은 이들의 질문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어서 알 수 있지만 산헤드린공회가 파송한 대표단의 질문과 세례 요한의 대답은 맞아떨어지지를 않습니다.
“네가 누구냐”라고 묻는 대표단의 질문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거의 동문서답과도 같았습니다. “나는 누구다”라고 대답하면 될 것을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주석을 보면 세례 요한이 대표단의 질문의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대표단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를 궁금해하는 입장에서 질문을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해석은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그리스도 즉 메시아의 개념에 비추어볼 때 다소 억지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메시아의 개념은 다윗 왕국을 재현할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결코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 살면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야생 꿀이나 메뚜기를 먹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메시아라면 마땅히 조국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이스라엘 민족을 모든 민족 위에 우뚝 서게 할 수 있는 위엄을 가진 백마 탄 임금이어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이러한 메시아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세례 요한을 메시아에 연결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대표단의 궁금증은 오히려 세례 요한의 목적에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따로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푸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세례 요한에게 이러한 일을 하라고 허락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께 시비를 걸 때와 똑같습니다. “도대체 누가 허락한 권세로 이러한 일을 하느냐?”라는 것이 이들의 궁금증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과 답변은 계속됩니다. 21절을 보면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선지자”란 모세가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하였던 것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해 모두 부정한 세례 요한은 23절에서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동문서답은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24~25절을 보면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라고 하니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대표단은 왜 세례를 베푸냐고 물었는데 요한은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흔히 말귀를 못 알아듣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을 비아냥거릴 때 사오정이라고 하는데 요한의 모습이 마치 이와 같아 보일 지경입니다.
이 대화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고 모든 의식이 예수님을 향해 꽂혀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표단이 무슨 질문을 하든 그 대답은 예수님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눈에는 대표단이 보였고 귀에는 대표단의 질문이 들렸지만 그의 의식은 예수님께 꽂혀있었기에 대답 또한 예수님을 향하게 됩니다.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해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사역을 하시기 전에 자신이 그 길을 예비하는 자임을 깨달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또 “왜 세례를 베푸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것 또한 예수님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함에 앞서 예수님을 의식하던 세례 요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믿게 됩니다. 눈에는 사람들이 보이고 귀에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를 믿을 것인지를 세례 요한의 모습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의식은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께 꽂혀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을 통해 제시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더는 사람들의 관심사에 정확하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자 한다면 이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의 기준은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저는 누구의 남편입니다.”라는 말에서 결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일남이녀를 두었습니다.”라는 말에서 자녀를 둔 아버지임을 알게 됩니다. “저는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한다면 독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를 언급함으로써 내가 누구임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저는 LG에 다닙니다.” 혹은 “저는 현대에 다닙니다.”라는 말에서도 회사와의 관계에서 나라는 사람을 드러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그 직장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서 이해가 부족하다 싶으면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를 추가적으로 말함으로써 내가 누구인지를 밝힐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세례 요한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세례 요한의 의식은 예수님께 꽂혀있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관계의 상대로 삼아 자신을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내 앞에서 남편으로 규정되고, 자녀 앞에서는 아버지로 규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배우자가 없으면 독신으로 규정이 됩니다. 이처럼 나를 규정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내가 관계하는 대상이 나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꽂혀있었기에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규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래 세례 요한은 아비야 제사장 반열에 속한 사가랴를 아버지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자손에 속했던 엘리사벳이라는 어머니를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레위인이었고 제사장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이 가족관계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사람이었다면 “네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나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인 사가랴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아론 계통의 엘리사벳이다.”라고 대답했다면 대표단은 금세 납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부모나 레위지파로써 규정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규정함에 있어서 예수님만을 유일한 관계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제시되는 사람들 관계에서 예수님을 믿는 방법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님과 관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혼을 했어도 배우자와의 관계가 우선시 될 수 없고, 자녀가 있더라도 자녀와의 관계가 우선시 될 수 없습니다. 회사에 다닐지라도 그 회사가 나를 규정하는 관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산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나를 규정하는 관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 나를 규정하는 관계의 대상이 되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아의식은 예수님께 꽂혀있어야만 합니다.
산헤드린공회가 보낸 대표단은 세례 요한의 의식이 꽂혀있던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이 아무리 예수님에 의해서 규정된 자신을 이야기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누구고 어떤 사람인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기에 예수님을 통해 규정되는 나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믿는 사람들을 진정한 참 기쁨의 자리로 이끄실 구세주이십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등의 어떤 문제가 있어도 상관없이 항상 기쁠 수 있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실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나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을 하고 왜 저렇게 행동할까?”라고 생각할 뿐이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대표단이 세례 요한을 만나고도 왜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야생 꿀과 메뚜기를 먹으며 광야에 살면서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푸는지에 대해 알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는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정체성이었기에 예수님을 몰랐던 대표단은 결국 요한이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여겨질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세례 요한의 의식은 예수님께 꽂혀있었지만 아직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기에, 그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9절에서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어린 양”이란 바로 상번제의 제물로 드려지는 어린 양을 의미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꽂혀야 할 예수님은 번제단에서 죽는 어린 양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각자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는 예수님이 바로 번제단의 어린 양인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같이 못 박혀 죽은 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시면류관을 쓰고 죽은 자이고, 예수님과 함께 배를 창에 찔려서 죽은 자이고, 예수님과 함께 채찍에 맞아 살갗이 다 찢어져서 죽은 자이고, 예수님과 함께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죽은 자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이해받기를 기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이 이해할 수 있도록 나를 소개하고자 할 때 십자가의 예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대표단이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이것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규정하고 있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가운데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나를 이해 못 할 것을 알고 인정하고 감내하고 각오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의식하여 그들에게 맞춰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잊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냐”고 물을 때에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향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아닌 세상의 다른 상대를 가져와야만 합니다. 상대가 알아주는 나, 상대에게 인상적인 나, 상대에게 기억되고 싶은 나,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가 알고 있고 좋아하는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동원해야만 나를 규정하고 소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현대 영업부 상무”라면 그 명함 한 장만으로도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나로써 존재하고 싶다면 예수님을 잊어버리면 됩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을 각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십자가에 죽은 자로 있을 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그 말과 행동은 진리입니다. 은혜도 없고 진리도 없는 사람에게 맞추어 주는 삶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바로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리해봅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소개하려고 하면 나를 규정하는 상대방을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 속에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의식이 예수님께 꽂히는 것이고, 예수님을 나를 규정하는 유일한 관계의 대상으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더라도 그렇게 할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은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꼭 필요하고 정답인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어느 길을 택할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세례 요한과 산헤드린공회 대표단의 대화는 동문서답이었습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을 통해 세상의 대답에 동문서답하는 삶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본문의 취지를 기억하며 오늘도 내일도 여생동안 동문서답을 할 수밖에 없는 자아의식을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나를 규정하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은혜와 진리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의아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끝없이 사람을 만나야 하는 삶 속에서 세례 요한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의식이 예수님께만 꽂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로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