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진양기맥 02차(남덕유산~수망령) 경남 거창군, 함양군. 산 행 일 : 2020. 08. 22.(토) 산행코스 : 영각사 ~ 영각재 ~ 하봉 ~ 남령 ~ 수리덤 ~ 월봉산 ~ 큰목재 ~ 거망산갈림길 ~ 수망령 + 월산리 내계마을 (13.8km, 9시간 소요) 산행참가 : 나홀로
<산행지도>
진양기맥(晉陽岐脈)은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분기하여 월봉산(1287m), 금원산(1353m), 기백산(1331m), 황매산(1108m) 등의 우람한 산들을 지나 진양호로 잦아드는 도상거리 약 159km의 산줄기다. 이렇듯 진양기맥상에서 1,000m가 넘는 산이 줄비하기에 어느 산을 지목하여 특별나게 이름을 붙이기에 어려움이 있고, 또한 어떠한 강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도 못하여 강이나 산에서 기맥 이름을 따오기가 난감하므로, 산길의 대미를 장식하는 진양호에서 그 이름을 빌려와 진양기맥이라 부르기로 하였다고 한다. 진양기맥 갈림봉인 남덕유산을 출발할 때 좌측은 거창군 북상면이고 우측은 함양군 서상면으로 맥길이 갈려 남동방향으로 거망산 갈림봉인 1,150m 봉까지 이어지고, 이 1,150봉에서 기맥길이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좌측은 계속 거창군 북상면이지만 우측은 거창군 안의면과 경계 지으며 수망령 이후까지 달리게 된다.
두어번의 시도 끝에 다시금 진양기맥 첫번째 산행일을 이틀 남겨두고 실시된 '코로나 확산에 따른 산행 추진'을 묻는 재투표에서, 회원 전원의 찬성으로 진양기맥 산행이 취소되었다. 금방 끝날듯이 보이던 코로나19가 길게 이어지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되었음을 아직도 인식하지 않으려는 듯이 저항하고 있다. 이제 모두가 새로운 세상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상황에 적극 대처해야 할 때이다. 즉 코로나19를 피하고 불평하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을 뉴노멀로 받아들이고, 이번 사태가 종식되기만을 앉아서 기다리며 '코로나 불루'에 빠져 있을게 아니라, 코로나19가 만들어 놓은 뉴노멀에 적응하며 각자의 상황에 가장 적합하게 행동해야 할것 같은데 말이다. 진양기맥 종주를 두고 벌써 세번째로 그 첫출발이 무산되었다. 도대체 진양기맥이 어떤 비경을 숨겨놓았기에 이리도 첫걸음을 떼기가 어려운 것인지 그 궁금증이 더욱 커져며, 코로나19가 만들어 놓은 뉴로멀이 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적응하여 생존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며 홀로이 진양기맥 첫구간을 걸어보기로 한다.
진양기맥 첫구간인 남덕유산~수망령 구간 중에서, 백두들은 이미 남덕유산~영각사 구간과 남령~기백산 구간을 걸은 바 있기에, 굳이 진양기맥 두번째 구간인 바래기재까지는 걷지않고 건너뛰어도 무방할 것이라 판단하여 바래기재까지는 나홀로 걷기로 한다.
원점산행이 아니 대간이나 정맥산행은 하는 산꾼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출발지와 목적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산우회 버스로 가게 될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개별 산행을 하며 대중교통이 아닌 자차로 이동하는 경우는 출발지에 세워둔 차량을 회수하는 게 가장 큰 난제다. 금번 진양기맥 첫구간도 도착지인 수망령에서 출발지인 영각사까지 어떻게 돌아나와 차를 회수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수망령 아래 월성리 내계마을 방향 적당한 곳에 자전거를 두었다가 하산하여 자전거로 남령을 넘어 차량을 회수하기로 한다.
대전통영고속도로 서상IC를 나와 남령을 넘어 월성마을에서 수망령으로 오르다가는, 포고장골 등산로 입구쯤에 도착하여 수망령으로 더 올라갈까를 고민하다가, 혹여 길이 막혀있으면 곤란을 격을 듯하여 이쯤에서 자전거를 두기로 한다. 마침 화장실 뒤편에 철재 울타리가 있어서 자전거를 묵어 두기도 좋고, 뒤쪽에 계곡이 있어서 하산 시에 간단히 세수라도 할 수 있을 듯한 장소다.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하산 지점에 두고는 다시 영각사 주차장으로 돌아와 혼자서 주차장을 독차지하여 차박을 한다.
넓은 영각사 주차장을 독차지하여 차박을 하고 일어나니, 텅 비었던 주차장에는 SUV 한대와 낯익은 제로쿨버스가 한대 들어와 있다. 어느 용감한 산악회에서 대간 산행을 왔을거라 짐작해 본다.
남덕유산 정상에서 일출을 볼 요량으로 서둘러 산행 준비를 마치고, 출발에 앞서 텅 빈 화장실에서 셀카를 남기고는 남덕유산을 향해 산행을 시작한다.
주차장에서 영각사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오르는데, 좌측으로 경상남도 덕유학생교육원 입구를 지나고,
잠시 더 도로를 따르면, 영각사 직전에 좌측으로 남덕유산 방향 들머리가 있다.
<영각사(靈覺寺)>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남덕유산 산록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해인사의 말사다. 영각사(靈覺寺)는 877년(신라 헌강왕 3)에 심광대사(深光大師)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 온다.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을 1449년(세종 31) 승려 원경(圓瓊)이 중창한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쳤다. 1834년(순조 34)에 불의의 화재가 발생하여 화엄전을 제외하고 전부 소실되었으며, 1886년(고종 23) 승려 강용월(姜龍月)이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산신각과 구광루만 남기고 다시 소실되었다. 영각사는 19개 동의 건물과 비로암(毘盧庵), 봉황대(鳳凰臺) 등 13개의 소속 암자가 있을 정도로 대규모였지만 6·25전쟁 때 소실되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그동안 소장되어 온 화엄경판(華嚴經板) 81권 3,284판과 범망경(梵網經) 2권 68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1959년 화엄전(華嚴殿), 1966년 극락전(極樂殿)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3년 11월 3일 전통사찰 제55호로 등록되었다.
영각사는 산행을 마치고 차를 회수하러 오면서 둘러보기로 하고, 남덕유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선다. 이곳 영각사 입구의 고도가 700m 정도이고 남덕유산 정상이 1,507m이니, 3.8km를 걸어서 800m 이상의 고도를 높여야 하고, 돌계단과 철계단을 올라야 하는 난코스에 무더운 여름이라 체력 안배를 하며 천천히 오르기로 한다.
남덕유산 방향으로 들어서니 널찍한 등로가 이어지며,
등로 우측으로 영각사의 부도탑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옛날 영각사를 이 길로 드나들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잠시 널찍한 등로를 따르니 한밤중인데도 안내판 불빛이 켜져 있는 영각탐방지원센터가 나오고, 인기척이 없는 탐방센터를 뒤로하고 남덕유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선다.
좌측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급하지않은 오름길을 이어가니,
어둠 속에서 계곡인지 너덜인지 구분이 애매한 돌길을 한참 동안 오르게 되고,
남덕유산이 2.4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게 되는데, 1km를 오는데 30분이나 걸린 것으로 보아 오늘 산행이 쉽게 않을 것임을 예감하며,
가파른 돌계단길을 천천히 오른다.
계곡을 넘는 첫번째 다리를 건너고,
남덕유산이 1.9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며 돌계단 등로는 더욱 가팔라지고,
두번째 다리를 건너니,
돌계단 등로는 더욱더 가팔라진다.
일출이 임박해 오면서 주변 사물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고, 영각재로 오르는 데크목 계단길이 나온다.
꾀나 길게 이어진 데크목 계단길을 올라서면, 진양기맥 능선의 영각재에 도착하게 된다.
<영각재((1,355m)> 영각재 남쪽 아래에 있는 영각사(靈覺寺)에서 유래된 고개 이름으로, 이곳 영각재(1,355m)에서 직진으로 넘어가면 월성재에서 황점마을로 이어지는 등로로 이어진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영각재는 옛날 황점마을에서 영각사로 넘나들던 고개가 아닌가 짐작해 볼 뿐이고, 지금은 영각재에서 황점마을 방향 등로는 수풀이 우거져 보이지를 않는다.
진양기맥은 영각재에서 좌측으로 0.9km 떨어져 있는 남덕유산 정상에서 출발하게 되므로 좌측 남덕유산을 올랐다가 이곳 영각재로 다시 돌아내려와 우측 남령 방향으로 진양기맥을 이어가게 된다. 지난번 진양기맥 1차 산행에서 토옥동 계곡으로 서봉을 올라 남덕유산에서 남령으로 기맥길을 이어가던 중, 중봉 계단공사장에 막혀 다시 남덕유산으로 돌아가 황점마을로 하산했었던지라, 이번에 다시 남덕유산 정상에서 출발하기로 한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주변 등로 옆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배낭을 벗어두고, 가뿐한 몸으로 진양기맥 분기점인 남덕유산 정상으로 향한다.
중봉을 오르는 데크목 계단길이 나오며,
자욱한 안개에 가려진 중봉을 향한 가파른 데크목 계단길이 길게 이어지고,
중봉 직전 암봉에 올라서니 앞쪽으로 뾰족해 보이는 중봉이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불어오는 바람에 안개가 잠시 흩어지며 중봉이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남덕유산 정상에서 보려고 했던 아침해는 벌써 동쪽 하늘로 솟아올라 있다.
중봉(1,408m) 정상에서 바라본 남덕유산 정상 방향. 데크목 전망대가 설치된 중봉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멋지다고 하야 무척 기대를 했건만..ㅉㅉ
중봉 정상에서 본 우측 황점마을 방향은 깎아지른 절벽인데, 안개가 자욱하여 아쉬움만 삼키고 남덕유산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예상보다 30여분이나 늦게 남덕유산 정상에 도착하여, 부지런한 산객 한분에게 부탁하여 진양기맥을 새로이 시작하는 인증을 남긴다.
<남덕유산(南德裕山, 1,507.4m)> 경남 거창군 북상면, 함양군 서상면,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사이에 위치한 산으로, 덕유산 최고봉이자 남한 제4봉인 향적봉(1,610.6m)의 남쪽 15km 지점에 위치한 덕유산 제2봉이다. 지리산 다음으로 넉넉하고 덕이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덕유산 연봉들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다고 하여 남덕유산이라고 하는데, 조선 중기의 풍수가인 남사고는 '덕유산 일대에 사람을 살리는 기운이 가득 차 있다'라고 하여 병란을 피하는 십승지지로 예언하기도 하였고, 산기슭에는 신라 헌강왕 때 심광대사가 창건한 영각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봉황산(鳳凰山) 혹은 황봉(黃峯)이라고 하였다. 「여지도서(보유)」(안의)에 "황봉은 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달려 나와 이 산봉우리를 이룬다. 관아의 서북쪽 65리에 있다."라고 하였고, 「대동지지」(안의)에는 "봉황봉(鳳凰峯) 즉 덕유산 동쪽 지맥은 서북쪽 70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남덕유산은 3대 강의 발원샘을 갖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구들과 싸웠던 덕유산 의병들이 넘나들었던 육십령은 금강(錦江)의 발원샘이고, 정상 남쪽 기슭 참샘은 거룩한 논개의 충정을 담고 있는 진주 남강(南江)의 첫물길이 되며, 북쪽 바른 골과 삿갓골샘은 낙동강(洛東江)의 지류 황강(黃江)의 첫물길이다.
이른 시간임에도 남덕유산 정상에는 산객들 몇몇 분이 올라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갈길 바쁜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정상을 출발하여 진양기맥 종주를 시작한다.
잠시 내려서니 진양기맥의 첫번째 봉우리인 중봉이 안갯속에서 불쑥 나타난다.
중봉(1,408m) 정상은 데크목 전망대로 조성되어 있지만, 주변은 짙은 안개로 덮여 있어서 아쉬움만 가득 안은 채,
보이지 않는 남덕유산 정상을 배경으로 인증을 남긴다.
중봉에서 내려서는 데크목 계단이 아찔하게 이어지고,
거의 수직의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니 앞쪽으로 넘어야 할 암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암봉을 넘어서도 이어지는 데크목 계단길을 조심스레 내려서면,
영각재까지 100m 남았다는 이정목을 지나게 되고,
영각재 인근 나무숲에 숨겨두었던 배낭을 회수하여, 수망령을 향한 진양기맥 걷기에 나선다.
이곳 영각재에서 남령까지 약 2.5km 구간은 통제구역으로 묶여있는데, 이곳을 통제하는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별반 볼거리도 없어서 일반 산객들은 가라고 떠밀어도 싫다고 할 것이지만, 맥을 이어간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나 같은 산꾼에게는 아무리 막아도 어떻게든 가게 되는 것인데 말이다.
영각재 직전 등로변에 두었던 배낭을 다시 매고, '탐방로 아님' 팻말 뒤편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남령을 향해 통제구역으로 들어서니,
우려했던 것보다 등로가 훨씬 뚜렷하고 상태도 나빠 보이지 않는다. 이게 다 진양기맥을 먼저 걸은 선답 산꾼님들의 은혜가 아닌가 싶어 감사하는 마음까지 든다.
수풀이 뒤덮은 하봉(1,360.7m) 정상쯤에서 인증을 남기고 내려서려는데,
특이한 형태의 하봉(1,360.7m) 이정판이 서 있다. 이정판 우측으로도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지만, 진양기맥길은 이정판에서 좌측으로 내려서야 한다.
하봉(1,360.7m) 이정판의 글씨가 오래되어 정확한 해독이 어렵다.
우장풀이 싱그러운 내림길이 이어지고,
폐헬기장 쯤으로 짐작되는 봉우리를 지나서 내려서다가,
마땅한 전망바위를 찾지 못하여 등로에 있는 바위에 앉아 아침식사를 한다.
20여분 동안 아침식사를 마치고 잠시 내려서니 폐헬기장을 지나게 되고,
등로는 이슬을 잔뜩 머금은 산죽숲으로 이어지는데,
산죽숲 등로는 한동안 지나다닌 산꾼이 없었던지 온통 거미줄이 그득하다.
안개 자욱한 능선을 따라 이어진,
암릉길을 더듬어 잠시 오르니,
별 특징없는 1208봉 정상을 지나게 되고,
1208봉 정상 인증.
가끔씩 바위들도 보이는 육산 능선길을 따라 내려서는데,
산죽으로 덮힌 능선길은 온통 거미줄이 그득하고,
이슬과 거미줄에 바짓가랑이가 온통 엉망이 되어서야 1013봉 헬기장에 도착한다.
1013봉 삼각점 뒤쪽 나뭇가지에는,
'준.희'님의 1013봉 표지기도 걸려있다.
가야 할 수리덤 방향은 구름에 싸여 있고,
돌아본 남덕유산 방향도 구름에 가려서 짐작이 어렵다.
산죽에 맺힌 이슬에 젖은 바짓가랑이에서 흘러내린 물이 등산화 안으로 흘러들어 ~~~.
1013봉에서 남령으로 이어지는 훨씬 양호한 등로에는 도근점(圖根點)도 있고,
억새가 무성한 언덕을 지나서 내려서니,
함양군과 거창군의 경계를 알리는 표지판이 걸려있는 남령이 내려다 보인다.
절개지 낙석방지 철망을 내려서는데 미끄러워 위험한 순간을 겨우 모면하고,
37번 지방도가 지나는 남령에 도착하니, 도로 건너편으로 월봉산 방향 들머리가 있다.
<남령(藍嶺, 910m)>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거창군 북상면을 연결하는 2차선의 37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다. 이곳은 경남의 서북부 지역으로 지대가 높고 험하여 예전에는 오지 중의 오지였지만, 지금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많이 발전한 곳이다. 옛날부터 수목이 울창해 짙은 색깔이 쪽(藍)과 같다 하여 남령이라 하였다고 한다.
남령 월봉산 방향 들머리에는 거창군 관광안내도와 월봉산 등산안내도 등이 즐비하고,
돌아본 남덕유산 방향 날머리에는 위반시 과태료 30만원이라는 출입금지 표시판이 있다.
남령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월봉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니 월봉산까지 3.6km라는 이정표가 있고, 등로는 기맥능선 우측의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지계곡을 건너서 이어진다. 원 기맥능선으로는 등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진양기맥 산꾼들도 계곡을 건너는 쉬운 등로를 따라 진행하는 모양이다.
등로는 잠시전에 건넜던 지계곡을 다시 건너 진양기맥 능선으로 이어지고,
이내 등로가 가팔라지며 데크목 계단길을 오르게 된다.
첫번째 암릉을 만나 매여진 밧줄을 잡고 오르면,
지나온 남덕유산 방향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 전망바위에 오르게 되는데,
서쪽 방향으로는 새벽에 출발했던 영각사 아래에 있는 경남학생수련원 건물도 보이고,
가야할 월봉산 방향으로는 새의 부리를 닮은 봉우리가 위협적이다.
전망바위에서 한참을 쉬고 월봉산을 향하는데, 남령에서 월봉산을 향한다는 산꾼 한분이 걸음이 더뎌진 나를 추월해서 암릉을 올라간다.
등로가 급경사로 이어지며 더운 날씨에 몸이 더욱 무겹게 느껴지며 걸음이 자꾸만 더뎌지지만,
능선 위의 시원한 바람을 기대하며 올라서니 월봉산이 3.0km 남았고, 남령에서 0.6km 왔다는 이정표가 있다. 남령에서 600m를 오는데 30분 이상이 걸렸다. 오늘 산행은 그리 길지 않아서 쉽게 생각했는데, 앞으로의 산행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깨닫는다.
이정표 우측에 있는 전망바위에서 돌아본 남덕유산 방향.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의 할미봉(1,026.4m)이 오뚝 솟아 보이고, 할미봉에서 좌측으로 대간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육십령일 터이다.
능선 이정표 옆에는 옛날 이정표도 보인다.
다소간 완만해진 능선을 따르는데,
우측으로 할미봉이 자리한 백두대간도 보이고, 서상에서 남령으로 오르는 37번 도로가 꾸불꾸불 이어져 있다.
수리덤(칼날봉) 전위봉 쯤에 올라서니,
앞쪽으로 칼날봉이라고도 불리는 수리덤이 위용을 드러낸다.
<수리덤/칼날봉(1,167m)> 칼날봉이라고도 불리는 수리덤은 '수리'의 부리처럼 뾰족한 바위 봉우리여서 수리덤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봉우리 아래에 영취사(靈鷲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영취봉이라고도 한다. 덕유산 국립공원의 남쪽 줄기로, 북쪽으로는 남령을 거쳐 남덕유산으로, 남쪽으로는 월봉산(1,279m)을 거쳐 거망산(1,184m)으로 이어진다.
수리덤(칼날봉) 아래에서 봉우리로 바로 오르는 등로는 보이지 않고, 좌측으로 우회하여 반대편에서 오를 수 있다.
잠시 수리덤 좌회길을 따르니,
사면 아래쪽으로 이어진 데크목 계단길을 내려서게 되고,
좌측 사면길을 따르다가,
다시 능선 위로 오르는 데크목 계단을 올라서면,
칼날봉(수리덤)이 우측 100m 지점에 있다는 갈림길이 나온다.
칼날봉을 우측 암릉을 따라 100m 지점에 있다는 옛 이정표도 나무에 동여매여 있다.
칼날봉 갈림길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는,
배낭을 두고 칼날봉을 향하니 이내 암릉이 나타나는데,
주변은 구름에 가려 칼날봉 정상에 오르더라도 조망이 없을 듯하고, 홀로하는 산행이라 위험한 짓은 하지 말자며 칼날봉 정상 오르기는 포기하고,
다시 갈림길로 돌아나와 두었던 배낭을 매고는 월봉산을 향한다.
앞쪽으로 조망이 트인 전망바위에 서니, 구름에 가려진 가야할 월봉산도 가늠되고 그 우측으로 거망산 쯤도 조망되고,
우측으로는 할미봉이 자리한 백두대간 능선도 어렴풋이 가늠되며,
돌아본 수리덤(칼날봉)은 어느새 구름에 가려 있고,
좌측 월성리 내계마을 방향으로는 최근 개설된 임도가 푸른 산에 내어놓은 생채기 모습이 선명하다.
등로는 길이 없을 듯이 보이는 암릉으로 이어지고,
꾀나 까다로워 보이는 암릉으로 가녀린 밧줄이 걸려있는데,
내려서는 암릉에는 어느 분이 통나무를 받쳐 놓아서 어렵잖게 내려설 수 있고,
가야할 월봉산 방향으로는,
통과가 어려울듯 보이는 암릉이 위협적이다.
잠시 진행하니 꾀나 까다로운 암릉이 다시 나타나고,
작지않은 몸집이 무척이나 거추장스럽게 여겨지는 암릉을 겨우 통과하여 내려서니,
비교적 유순한 바위지대가 이어진다.
남령에서 1.5km, 월봉산이 2.1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오며 다시 암릉이 나타나는데, 이번에는 우회길이 없는지 표지기가 암릉 위로 안내 한다.
암릉 위에 올라서 돌아본 칼날봉 방향.
가야할 수망령과 금원산 방향.
가야할 월봉산 방향.
한결 유순해진 능선길이 이어지며,
앞쪽으로 가야할 월봉산이 구름모자를 벗고서 인사를 건네고,
이제 월봉산까지 가야할 길이 남령에서 걸어온 길보다 짧아졌고,
다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서니,
선답자들의 표지기가 걸려있는 1099봉이 나온다.
1099봉에서는 우측 서상면 방향으로 할미봉이 자리한 백두대간 능선이 가늠된다.
다시 밧줄이 매여진 암릉이 나타나고,
암릉을 올라서니 우측으로 할미봉과 육십령 그리고 좌중앙 멀리로 깃대봉 쯤도 가늠되고,
돌아본 칼날봉이 안개에 희미하다.
제법 까다로워 보이는 암릉이 앞을 막아서고,
암릉길에 들어서니 바위를 우회하게 밧줄이 매여져 있어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통과가 가능하다.
돌아본 남덕유산 방향.
육십령 방향.
등로는 좌우가 낭떠러지인 바위 날등으로 이어지고,
지나온 칼날봉은 그 자리에 있는데,
가야할 월봉산은 성큼 다가선 듯하다.
앞에 월봉산 직전 우뚝 솟은 봉우리가 월봉산 전위봉인 1,234m봉이다.
월봉산이 8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
암릉을 우회하여 오르고,
제법 널찍한 바위에 오르면,
가야할 1,234봉이 성큼 다가서고,
이내 월봉산이 500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는 1234봉 정상에 도착한다.
월봉산 전위봉인 1234봉에서 월봉산으로 향하는 등로는 싱그러운 숲으로 이어지고,
월봉산 직전 전망바위에서 본 칼날봉이 진짜 칼날인 듯 날카롭다.
월봉산 오름길은 완만한 산죽숲으로 이어지고,
거인이 쌓아 놓은 듯이 보이는 암봉을 지나서 오르면,
남령에서 3.6km인 월봉산(1,281.6m) 정상에 3시간만에 도착하여, 정상에서 쉬고 있는 산꾼에게 부탁하여 인증을 남긴다.
<월봉산(月峯山, 1281.6m)> 경남 거창군 북상면과 함양군 서상면에 걸쳐 있는 덕유산국립공원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북쪽 능선은 남령(藍嶺)을 지나 덕유산(1,614m)에 이르고, 남쪽 능선은 큰목재·은신치(隱身峙)를 지나 거망산(擧網山, 1,184m)에 이른다. 동쪽사면은 함양으로 흐르는 남강(南江)의 상류인 지우천(智雨川)의 수원이 되며, 동쪽의 기백산(箕白山, 1,331m)과의 사이에 좁은 계곡을 이룬다. 서쪽 사면은 완만하며 남강의 상류 하곡을 이루고, 이를 지나 서쪽의 장수군 계내면과의 사이에는 육십령(六十嶺)이 있어 영남·호남지방의 주요한 교통로로 이용된다.
남서쪽 방향으로 백운산과 지리산 반야봉이 조망되어야 하지만 흐린 시야로 아쉬움만 남기는데, 먼저 도착해 있던 두분의 산객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 수망령을 향하며 등로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조심하라는 인사를 건넨다.
가야할 금원산 방향으로도 멀리 가야산도 조망되는 곳이라는데 아쉽기가 짝이 없다.
북쪽 덕유산 방향으로는 구름만 짐작될 뿐이다.
월봉산을 뒤로하고 수망령을 향하는데, 빼곡한 산죽숲이 조금 걸리적거리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등로에 비해서는 비단길 수준이다.
1275봉 헬기장을 지나는데,
우측으로 서상면 대남리 대로마을 방향 갈림길이 있다.
큰목재를 향한 내림길에서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갈림길이 나온다. 큰목재 방향 기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 우측길은 노상마을 쯤으로 이어질듯 보인다.
산죽이 없는 편안한 내림길이 이어지더니,
억새가 자라난 잘록이 안부에 내려서는데 큰목재다.
<큰목재/살목재(1,050m)> 월봉산에서 헬기장을 지나 내려서면 좌측 월성리와 우측 노상마을을 잇는 옛길이 있는 안부를 만나게 되는데 큰목재다. 이 재는 활처럼 생겼다 하여 '살목재'로도 불리는데, 사거리안부 우측 노상마을 방향은 등로가 선명한 반면에, 좌측 월성리 방향으로는 수풀로 덮여 옛길의 흔적이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큰목재 이정표.
큰목재를 지나 거망산갈림봉 오름길은 산죽이 키높이로 자라나,
키 작은 산객들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지 싶다.
거망산 갈림봉 도착.
<거망산갈림봉(1,150m)> 함양군 서상면과 안의면, 거창군 북상면이 만나는 삼면봉이다. 남덕유산에서 동남쪽으로 금원산~기백산 줄기와 거망산~황석산 줄기가 갈라지는 갈림길 삼거리봉이다. 삼거리봉에서 수망령은 1.32km, 거망산은 4.85km이다.
<거망산(擧網山, 1,184m)> 경남 함양군 서상면 도천리에 있는 거망산은 여름 산이다. 이 산에 가려면 태장골과 지장골을 오르내려야 하고 그사이 진입로에는 천혜의 용추계곡이 있어 산행 중 땀을 씻어 더위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쪽으로 기백산·금원산이 위치하고 남쪽으로 황석산의 스카이라인이 유장하게 흐른다. 장거리나 거친 산행을 즐기는 등산객은 30㎞가 넘는 황석산 거망산 수망령 금원산 기백산을 한번에 종주하는 '기금거황' 산행을 한다. 네 개의 산에서 흐르는 청류는 지우천, 용추계곡, 용추폭포를 형성한다. 거망(擧網)은 글자 그대로 ‘그물을 던진다’는 뜻이다. 일설에 따르면 중생들에게 불법의 그물을 던져 제도하겠다는 무학대사의 의지를 반영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물을 던져놓은 것 같은 산세라 해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산 곳곳에 무학대사가 머물렀다는 은신암(隱身庵)을 비롯해 지리산 빨치산의 마지막 생존자 ‘남도부(南到釜, 1921년 ~ 1955년)’ 하준수, 여자 빨치산 정순덕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하준수는 거망산 은신골에서 일제의 징병을 피한 바 있으며, 정순덕은 1963년 체포될 때까지 남장 빨치산으로 불리며 거망산을 거점으로 군경을 괴롭혔다. 거망산의 산세가 워낙 깊다 보니 몸을 숨기는 장소로 애용된 것 같다. 6·25전쟁 때 빨치산이 된 남편의 겨울옷을 전하려 산에 들었다가 같은 길을 가게 된 정순덕의 활동무대가 거망산이기도 하다. 폭풍과도 같은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산 비운의 여성 정순덕(1933년 6월~2004년 4월). 이홍이와 함께 1963년까지 지리산에서 최후까지 버텼으나, 11월 12일 새벽 생가 근처인 지리산 삼장면 상내원리에서 국군과 교전 끝에 부상을 입고 체포됐다.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2004년, 그는 72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이곳 거망산에서 국군 1개 소대를 잡아 억류한 뒤 무장해제시켜서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황석산(黃石山, 1,192.5m)> 황석산은 산봉우리 주변에 노르스름한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함양의 마터호른이라 한다. 안의면(安義面)의 주산인 황석산은 범상치 않은 바위산으로 풍수에서 말하는 화산(火山)이다. 이는 산봉우리가 뾰족하고 멀리서 보면 마치 활활 타는 불꽃을 닮았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안의 고을 사람들의 불같은 열정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부녀자들은 천 길 절벽에서 몸을 날려 지금껏 황석산 북쪽 바위 벼랑이 핏빛이라는 전설이 있는 황석산성이 있다. 황석산에서 능선 따라 북으로 거망산을 지나 수망령 너머 덕유산이 조망되고 금원산, 기백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수도산에서 가야산까지, 가깝게는 거창의 보해산, 의상봉, 오도산, 합천의 황매산, 의령의 자굴산, 한우산 등등이 층층겹겹을 이룬다. 남쪽에는 지리산의 웅석봉을 비롯해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주능선의 영봉(靈峰)들이 하늘금을 긋는다. 백두대간의 마루금 따라 오른쪽으로 백운산, 깃대봉이 아스라하고 대봉산, 도숭산은 손을 내밀면 잡아 줄 것 같다. 온 사방에 널린 높고 낮은 첩첩산중 고봉준령들을 모두 헤아리기도 벅차다.
삼거리 갈림길 이정표.
거망산 갈림봉에서 지친 몸뚱이를 한참동안 달래고는 수망령으로 향하는데, 수망령으로 이어진 등로는 거의 수레길 수준이다.
나무계단을 내려서니,
철망으로 울타리를 해 놓은 조림지를 지나게 되고,
다시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수망령에 도착하여 진양기맥 1구간 산행을 마감한다. 영각사에서 남덕유산을 올랐다가 이곳까지는 13km 남짓으로 7시간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무려 9시간 남짓이나 걸렸다. 아무리 여름철이라고는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 것으로 보아 산행의 난이도가 상당히 어려운 곳이었나 보다.
<수망령(水望嶺, 940m)> 경남 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북상면을 잇는 고개로,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 있고, 멋진 팔각정자가 서 있다. 월성마을과 옛 안의면의 심진동을 넘나들던 고갯길로, 옛날부터 가뭄이 들 때 이곳에서 먼저 비가 오기 시작하면 많은 비가 온다고 해서 인근 주민들이 이곳에서 비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수망령 또는 물바라기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망령 날머리 이정표.
용추계곡 등산 안내도.
금원산 기백산 산행 안내도.
정자가 있는 수망령 전경.
다음 구간 금원산 방향 들머리 이정표.
자전거를 두고 온 월성리 내계마을 방향 도로 모습. 자동차가 서 있는 곳 직전 우측에 거망샘이 있다.
<월성리(月星里)> 월성리는 북상면의 남서쪽 끝에 자리하여 전라북도와 함양군 서상면에 맞닿는데 월성, 내계, 심동, 답동, 황점 다섯 마을이 있다. 그중 황점(黃店) 마을은 봉황산(鳳凰山) 밑에서 쇠를 만드는 점(店)이 있으므로 황점이라 했다고 한다. 월성계곡의 ‘월성’이라는 이름은 월성리 마을 남쪽 월봉산의 옛 이름인 월성산에 유래했다. 이태의 자전소설 '남부군’에서 월성리전투와 북상지서 습격사건이 나온다.
수망샘에서 땀을 닦고 싶지만 먹는 샘물이라 목만 축이고는,
자전거를 가져다 놓은 월성리 내계마을을 향하여 시멘트 포장 도를 따라 내려서는데, 진양기맥은 걷는다는 홀대모 산객 한분이 오늘 수망령에서 바래기재까지의 두번째 산행을 마치고, 택시로 수망령으로 돌아와 차를 회수하여 집으로 향하다가, 홀로 걸어가는 나를 보고는 선뜻 차를 세워 주었다.
홀로 진양기맥을 걷는 비슷한 처지라서 이런저런 예기를 나누며 자전거를 놓아둔 포고장골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여,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는 차에서 내리니 간밤에도 별일이 없었던 듯 자전거가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다.
옆쪽 계곡에서 땀이나 씻을까 하고 내려서는데, 계곡에는 피서객들이 더위를 피하고 있어서 발길을 돌려,
자전거를 타고 영각사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수망령에서 자전거를 세워 두었던 곳까지 데려다주었던 차가 기다리고 있다. 논산에서 오셨다는 홀대모 마당쇠님은 나를 내려주고서 가다가, 내가 자전거로 남령을 넘을 것을 생각하니 차마 그냥 갈 수 없었다며 영각사까지 태워주겠다고 호의를 베푼다. 염치불구하고 차에 동승하여 맥산행에 대한 이런저런 예기를 나누며 편안하게 영각사 주차장으로 향한다.
자전거로 남령을 넘는 고생을 마당쇠님의 호의로 쉽게 영각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진양기맥 첫구간 산행 일정을 마무리 하고 집으로 향한다. 다시한번 따뜻한 호의를 베풀어 주신 마당쇠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여 홀로하는 산행 내내 안전한 산행이 되기를 빈다.
영각사 주차장에서 본 남덕유산 방향.
수리덤과 월봉산 방향.
월봉산 방향 진양기맥 능선 모습.
살짝 당겨본 칼날봉(수리덤) 방향.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된 진양기맥 첫구간을 홀로 걸으며 살면서 맞닥뜨리는 일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어차피 정답이 있는 의문들은 아니었기에 결론을 구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몇 가지 엉클어진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은 정하였고, 그렇게 길지 않아 보이는 남은 삶을 역어갈 밖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