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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 강의 작품
탁설, 공空을 깨우다/윤미영(천강문학상)
바람을 기다린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발밑을 살핀다. 제자리에서 돌아서지도 벗어나지도 않는다. 하안거 동안거가 끝나고 수행 스님이 돌아와도 하늘 언저리에 고요히 빗금만 긋는다. 바람이 오면 바람이 치는 대로 소릿결을 만든다.
능선을 넘어온 산바람은 길을 내지 않는다. 모양도 빛깔도 없다. 사물에 부딪혔을 때 길을 보여주고 소리를 듣게 한다.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을 맞이하여 응답한다. 산빛을 담아 청아한 음색을 울린다 하여 풍령風鈴, 풍탁風鐸이라 불리는 풍경이, 서기瑞氣 감도는 하늘에 얹혀 묵언 수행 중인 사찰을 깨운다.
풍경 안에는 물고기 모양의 단단한 금속이 달려 있다. '탁설鐸舌'이다. '목탁의 혀'라는 두 글자가 '탁'치는 듯, 얇은 혀가 경종을 울리는 듯, 작은 몸이 벽을 깨듯 내는 소리라 하여 종어성鐘魚聲이다. 수행자가, 잘 때에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있으라는 의미가 침묵을 뒤집어쓴 듯하다.
사찰에 가면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경내에는 법구경이 있고, 산문 밖에는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 낙엽 지는 소리도 법어로 들린다. 법고는 축생을, 범종은 중생의 영혼을, 날짐승을 깨우는 목어와 운판과 경쇠다. 법고를 두드리는 스님의 뒷모습을 보노라면 '마음 심心'을 수없이 그리며 번뇌를 끊어 내려 하는지, 심장 박동마저 고요해진다. 새벽 예불 때 목탁은 잠든 천지 만물을 깨우고 중생을 미혹에서 깨운다. 범종각에서 속이 훤한 목어가 '너도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속을 파내어 비우라.'며 엄포를 놓는다.
절간 곳곳의 소리를 허투루 들을 게 아니다. 목탁 소리와 어우러지는 법음구法音具가 죽비와 같아서 사찰을 찾는 이들의 불성을 일깨운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경배하는 마음 자세도 달라진다. 불성을 깨우는 소리가 중생에게 경更을 치는 것이 아닐는지.
‘경을 치다’는 꾸지람이나 나무람을 들을 때 쓰이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밤 시간을 알리는 방법으로 경更에는 북을 치고, 점點에는 꽹과리를 쳤다고 한다. 자정인 삼경에는 북을 스물여덟 번을 쳐서 도성의 사대문을 걸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했다. 돌아다니다 걸리면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경에 풀려났으므로 경을 치르고 나왔다는 말이 생겼다. 풍경에도 그런 경책이 있을 터이다.
사람 사이에도 경을 쳐야 할 때가 있다. 몇 년 전, 친구에 대한 글을 써서 절연하다시피 한 아픈 경험이 있다. 그녀는 허리병을 앓다가 수술 후 외출할 때마다 휠체어에 의지했다. 그 무렵 내가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면서 친구가 겪은 고통에 대해 쓴 글이 화근이었다. 친구는 자신의 사연이 글이 되어 떠도는 것이 불쾌하다며 소식을 끊고 이사를 가버렸다. 일말의 용기를 주려던 것이 심리적 거리만 넓히고 말았다. 글도 세 치 혀가 되는 걸 절감했다.
풍경 속 탁설이 사람의 입속 혀처럼 군다. 입 안에서 혀가 갖가지 말을 만들듯, 탁설은 바람이 치는 대로 다른 소릿결을 만든다. 혀가 들어가는 속담 중에 '더운 죽에 혀 데기'는 대단치 않은 일에 낭패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다. ‘혀에는 뼈가 없어도 사람의 뼈를 부순다’의 의미는, 혀가 단단한 뼈를 부술 만큼 위세를 지녔음을 경고한다. 풍경 속의 쇳고리가 겉쇠를 칠 때마다 내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베란다에 대나무로 만든 풍경을 걸었다. 앞산 너머 해풍이 건너오거나 뒷산의 바람이 다가오면 신호를 보낸다.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대숲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서걱거린다. 마음을 수시로 살피며 우유부단하다 싶으면 경을 쳐서 당겨주고, 매몰차다 싶으면 풀어준다. 빈틈없이 채워진 마음자리가 비워지고 맑아진다. 풍경이 제 몸을 치면서 좋은 기운을 집 안으로 들이고 악귀는 내모는 벽사수나 다름없다.
바람결에 스님의 선방에서 보았던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글귀가 묻어난다. ‘발밑을 살펴보라’는 말 속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마음을 더 쓰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호젓한 절간에서 풍경을 유심히 올려다보는 이는 조고각하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그를 알지 못하나 지긋한 미소에서, 진중한 음성에서 기품이 우러난다. 인생의 연륜이 빚어내는 신뢰감과 반추하는 낯빛에 화색이 돈다.
탁설이 부딪힌다. 바람이 운다. 소리 없이 자취 없이 흐르던 바람이 마침내 소리 내어 운다. 가람을 오가며 들었던 법문 중에 '소리를 듣고 도를 깨친다'는 문성오도聞聲悟道가 있다. 풍경의 진언 같아서 들을수록 먹먹해진다. 옛 선비들은 '경敬'자를 해낭에 넣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챙겼다 한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일상에서 의미 있는 글자 한 자쯤 심중에 지닌다면 마음의 소리가 느긋해질 것이다. 서걱거림이 어느새 가라앉는다.
마음이 탁설만큼 가벼우면 무탈할까. 천지간 한 점 풍경에 묻고 싶어진다. '살면서 늘 마음의 거리를 살펴라. 인연에 따라 서로 의존해서 살아라.'는 조언을 해 줄 법하다. 허공에 있어도 발밑이 두렵지 않은 자. 움츠리는 기색 없이 사붓이 주위를 추스르는 자. 찰나에 스칠 바람 같은 연緣을 알고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익힌 수행자의 모습이 저럴까.
풍경 속 쇠고리가 경쇠를 친다. 비었다고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공간 가득 세상 만물의 숨소리를 품었다. 탁설은 숨의 진동에 따라, 아우르고 다독이고 스미듯 변화무쌍한 울림을 준다. 울림이 사람마다 다르게 와 닿는다면 진리를 통해서 깨치는 마음자리의 차이일 것이다.
굳게 닫힌 법당 문을 연다. 쇠고리와 마른 공기가 부딪쳐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를 가만히 비집고 절을 올린다. 고개를 드니 법당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더욱 초연하다. 탁설이 벽을 친다.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산중에 파문을 일으키는 저 푸른 음성. 공空을 깨운다.
구멍, 늧을 읽다/김원순(흑구문학상)
떨켜가 드디어 잎자루의 물구멍을 닫아버렸다. 체념한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별리의 가을이 못내 아쉬워 흘리는 나무의 눈물이다. 열정의 구멍이 스르르 닫혀버린 내 몸에서 떨어진 잎들이 생의 겨울이 올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의지, 도전, 끈기, 인내, 용기, 목표 그리고 믿음의 잎들.
결기의 겨울을 건너기 위해 잎자루를 야멸치게 내치는 수문장, 떨켜. 떨켜가 수문의 기척을 낼 때까지 봄은 준산빙벽을 오르내리며 오기와 극기로 심신을 단련시킨다. 눈 속의 노란 복수초와 매화의 안위를 살피는 눈, 동장군보다 매서운 봄이다. 내 열정의 구멍마다 풍구를 돌려보지만 기척도 않는다. 구멍이 한 생명을 키우거나 버린다는 것을 생의 구멍을 진중히 여닫아본 사람만이 안다.
다람쥐, 청설모도 겨울을 건너기 위해 나뭇구멍, 바위틈을 총총대고, 날짐승들은 설한풍을 막아낼 둥지에 세 드느라 꽁지가 빠지고 쇠골이 되겠다. 능갈맞은 해는 여름을 달달 볶던 심장을 꺼내 저무는 노을강에 담금질하고, 심술궂은 바람은 허파를 부풀려선 차도녀 같은 겨울을 휘파람 소리로 유혹한다. 불쑥, 삶의 허기가 심장 깊숙이 파고든다. 뼛구멍마다 냉기로 가득하다. 구멍에서 부는 바람소리를 세상 밖으로 날려 보낸다.
사각구멍 속의 작은 사각구멍들에 둘러싸인 방, 화장실, 거실, 현관을 거쳐 수문장인 대문을 나선다. 일 년이 넘도록 입, 코를 단속하는 마스크가 일상의 구멍들을 닫거나 막아버린 탓이다. 어느새 분신이 된 마스크를 끼고 을씨년스런 거리를 달팽이처럼 걷는다. 발자국 소리로 무성하던 미로가 겨울 연지처럼 괴괴하다. 어깨를 부딪던 무표정한 그림자들이 울컥, 그립다.
거리 양쪽으로 빽빽이 늘어선 유리벽 구멍들. 투명한 빙부(氷膚) 속의 우아하고 세련된 것들이 행인들의 눈을 현혹한다. 미련스런 더듬이로 멀뚱거리던 나는 유리벽 구멍으로 소리 없이 빨려 든다. 순간, 유리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지고 다니는 집 한 채 없는 민달팽이가 은빛길을 끌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구멍이 하 많아도 마음자리가 눅눅하면 ‘마땅한’ 구멍이 아니라고 말하는 달팽이의 늧이 기껍다.
타인 같은 유리벽 구멍을 황급히 빠져나와 파장머리 난전으로 발길을 돌린다. 일상의 체증과 변비를 뚫어줄 풋것들을 주섬주섬 바구니에 담는다. 민달팽이가 잣는 은빛길이 될 환상의 그린푸드다. 초록 구멍을 뚫으며 야금야금 갉아먹는 맛, 둥근 초록세상을 다 가진 맛이다. 방구멍의 개수나 대소유무를 차별하지 않는 풀밭 같은 세상의 맛이다. 세상살이의 온갖 맛을 골라먹는 희열을 느끼려면, 세상을 보고 읽는 혜안을 가질 일이다.
말[言]구멍, 살림구멍, 사람구멍에 곧잘 빠지는 나를 노심초사 지켜보던 땅거미가 내려와 수굿한 내 등을 떠민다. 나를 기다릴 섬 같은 구멍이 문득 떠오른다. 보잘것없고 가년스럽지만 돌아갈 구멍이 있다는 것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의지와 위안이 되는지! 산마루에 걸린 생, 등 따습고 두 다리 뻗을 구멍만 한 방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벌집 가슴은 밀봉들에게 다 내주겠다. 행여 구멍마다 ‘분별’과 ‘분수’의 꿀들로 채워지면 ‘자만’과 ‘부정’으로 가득 찬 가슴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다.
유일한 은신처이자 안식처인 사각구멍으로 돌아와 딸깍, 스위치를 올린다. 저무는 생의 고적한 밤을 환히 밝히는 따스한 구멍이다. 물속처럼 나른한 평온과, 켜켜이 쌓인 적막의 평담한 결이 구멍난 가슴을 속속들이 헹군다. 한평생 길이 아닌 길을 헤쳐온 뒤꿈치 굳은살 같은 구멍에, 고단한 하루를 끌고 온 두 다리를 경건히 뉜다. 영원한 꽃잠에 들고 싶은 구멍이다. 삶과 죽음을 공유하는 구멍에서 700년 전 ‘아라홍련’의 숨결이 되살아나 싹을 틔울 듯하다.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야 할 신혼시절, 시댁은 나갈 구멍조차 없는 우리 부부를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내쳤다. 우듬지에 둥지를 튼 까막까치, 여럿 구멍을 마음대로 드나들던 두더지, 생쥐가 참 많이 부러웠다. 부러움은 어느새 절망이 되고 체념의 뿌리마저 뻗었다. 눈물로 나를 바라보던 친정어머니께서 바늘구멍만 한 방을 마련해주셨다.
가을의 어귀 그 방에서 떡두꺼비 같은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막 들어섰을 때 하혈을 쏟았지만 어머니의 약손으로 겨우 붙든 아이다. 징검다리처럼 문구멍만 한 방, 대통 같은 방을 건너서 물항아리만 한 방에 왔을 때 백설공주 닮은 딸도 얻었다. 복덩이였을까, 방구멍의 개수도 늘고 비둘기 같은 화평도 깃들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 구멍은 기적과 신화를 낳는 신전이었다.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구멍을 열 손가락도 넘게 옮겨다녔다. 하지만 아이들은 비 온 뒤 죽순처럼 자라서 멀리, 높이 바라보는 독수리처럼 제 둥지를 찾아 날아갔다. 어쩌다 아이들의 둥지를 가보면, 마침맞은 구멍에서 제 새끼들에게 절벽에서 날아오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구멍은 더 이상 바닥이 아니었다. 그 바닥을 차고 오르는 발구름판이었다.
어머니는 한동안 그 방으로 김치며 된장, 간장을 이고 오셨다. 삶의 맛 같은 시고 짠 국물들이 이마를 타고 구멍난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싱크홀만 한 구멍이 생긴 줄 몰랐다. 부부의 연을 끊으려고 울부짖을 때 악마의 입 같은 크레바스가 어머니 가슴을 두 쪽으로 쩍, 갈라놓는 소리가 들리긴 했다. 그러나 내 어머니니까, 세상의 어머니들은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러려니 했다. 자수정동굴 천장을 녹여서 자란 종유석과 석순을 보면, 어머니의 애간장을 녹인 나 같아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막무가내 구멍을 메우기보다 구멍의 변명을 뭉근히 들어주고, 구멍의 통절이 잦아들 때까지 묵상하는 것. 그 구멍의 진물이 마르면 딱지가 앉도록 마음의 연고를 발라주는 것. 이것이 헐은 구멍에 새살을 차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처방이다. 채 아물지 못한 구멍난 가슴을 안고 귀천하신 어머니 영전에 촛불을 켠다. 눈물 같은 촛농이 나 대신 구멍을 메운다.
어느덧 봄이다. 느슨해진 흙구멍에 개미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고사리며 둥굴레는 연둣빛 봄을 쏘아올리고, 개나리와 산수유는 간지럼 태우는 햇살을 향해 깔깔댄다. 이 찬란한 봄날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리는 생명도 있고, 세상 구경 끝내고 귀천하는 생명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구멍에서 태어나 구멍놀이를 하다가 구멍으로 돌아간다. 이 구멍 저 구멍 기웃대다 길을 잃고 헤매거나, 천 길 구멍 속에 처박히거나, 숨겨놓은 덫에 걸려 낭패를 보거나, 용케 빠져나와 ‘개’나 ‘용’이 되거나. 생성과 소멸의 꽃이 무궁무진 피고지는 구멍은 돛이고, 닻이고, 덫이다. 어떤 구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늧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나의 늧은 가을하늘처럼 창창할까, 검은 옥 같은 야삼경일까. ‘늧이 사납다’, ‘늧이 글렀다’는 말이 타인의 입질에 오르내리지 않으려면 마음자리를 수시로 닦고, 다듬고, 치우고, 비우고, 버릴 일이다.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처럼 모난 것, 못난 것, 앵돌아앉은 것, 숨거나 허공에 뿌리내리려는 것들을 품는 마음자리를 넓히는 일이다. 거짓없고, 솔직하고, 진실된 삶을 사는 사람들의 구멍은,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우는 연근 같은 것. 내 탓이라며 가슴을 치고, 뉘우치며, 용서하는 향연이 회한처럼 피어오르는 거룩하고 위대한 성지다. 내가 살고 있는 구멍자리를 들여다보며 늧을 읽고 있다.
바람의 섬, 슬도의 파도가 켜는 비파소리를 듣는다. 일백만 개의 구멍이 뱉어내는 한(恨)의 소리다. 거친 파도와 먹이사슬로부터 제 육신을 지키기 위해 피눈물로 판, 석공조개들의 은신처이자 안식처였던 구멍이다. 폭풍우와 풍랑이 하 거셌으면 바위를 뚫어 은신했을까.
곰보섬. 석공조개들이 목숨을 걸고 지어준 이름이며 피땀으로 빚은 위대한 예술품이다. 제 몸 하나 살자고 살을 파내고 뼈를 추려도 가부좌를 틀고 묵상에 잠겼을, 작지만 어느 섬보다 품이 넓고 깊은 바위섬이다. 그러나 해골의 입 같은 백만 개의 구멍이 없었다면 파도가 감히 비파를 켤 수 있었을까.
석공조개들이 지어준 이름 슬도를 보면, 슬도보다 더 크고 많은 구멍을 품은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다. 아프다고, 괴롭다고, 힘들다고, 화난다고, 죽고 싶다고 어머니 가슴을 막무가내 후벼 판 내가 마치 못난 석공조개인 듯 섧다. 슬도의 파도처럼 비파를 켜서 용서를 빌고 싶은데, 어머니는 이제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 슬도의 파도는 밤낮으로 제 몸을 부숴서 비파를 켜는데... . 그런데 내 가슴의 구멍은 누가 비파를 켜주지?
무인도 등대에 기대어 비파소리를 듣고 싶다. 석공조개에게 육신을 다 내준 곰보바위를 닮고 싶다. 천지가 구멍인 세상 한가운데 서서 비파를 켜고 싶다. 그러면 내 삶의 떨켜도 수문을 활짝 열고 생의 봄날을 길어올리지 않을까, 무진장 꽃비를 뿌리지 않을까. 웅크렸던 구멍이 기죽지 않게 가슴을 활짝 편다.
구멍난 가슴에 휘파람소리가 들리면 한걸음에 달려갈 것이다. 슬도 앞바다가 구멍난 내 가슴에 비파를 켜주려고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늧을 보시고, “그만하면 됐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처럼 덥석 안아줄지도 모른다.
처얼썩, 철썩. 예까지 들리는 파도소리가 아직도 희뿌연 내 늧을 속속들이 맑힌다.
종자의 시간/조현숙(천강문학상)
햇살이 하루를 깁고 있다. 분주한 도시에 너볏하게 들앉은 채종답採種畓은 묵묵히 써 내려간 붓을 거두고 빈 몸체이다. 논바닥을 훑던 까치들이 쌍쌍이 허공에서 만났다가 떨어지고 다시 만난다. 퍼덕거리는 날개로 성급하게 봄을 부른다.
바람의 허밍에 햇살이 낮게 출렁인다. 질주하는 속도도, 번잡하게 엉키는 조음도 이곳에선 휴지와 묵언으로 스며든다. 때를 쫓아가는 것도, 때를 기다리는 것도 동질의 빛과 시간 속에 있지만 같이 흐르지 않는다. 화려한 문장이 아니다. 볍씨의 시간은 더디고 질박해도 시절이 되면 기어이 제 빛깔의 문장을 보여준다.
늘 마음이 조급했다. 뭔가에 화가 나고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절박해도 열심만으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결과에 지쳤다. 꽉 막혀 내려가지 않는 응어리가 가슴을 쪼개는 것 같았다. 숨통을 틔우려고 쏘다니다 만난 도시의 들판이 기묘했다. 넘치고 급하고 수선스러운 소용돌이 속에 고요하고 아늑한 시간이 차란차란 담겨있다. 이곳에 서면 바람은, 태양은, 흙내는 온통 날것으로 내 속을 휘돌아 훑었다. 그러면 나한테서도 새물내가 나는 것 같았다.
스치듯 지나가는 걸음에도 참새떼가 화르르 날아오른다. 바람에 쓸리는 가랑잎 같다. 새들이 깃들였던 잡목 덤불이 마른 잎을 파들거린다. 성깔 있는 까치들은 가까이 갈 때까지 앙버티다가 마지못한 듯, 두 발로 콩콩, 조금씩 길을 비킨다. 흙구덩이에 고개를 박고 있던 비둘기들이 빛살을 안고 일제히 날아올라 건너편 논배미로 간다. 드문드문 서 있는 백로가 처연하다.
종자의 시간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날마다 떼 지어 모여드는 새들이 논바닥에 부리를 박고 땅을 흔들어 깨운다. 사시랑이 발로 흙을 차고 두드려 바람길을 낸다. 놀란 벌레들이 흙덩이로 숨어들며 포슬포슬 숨을 불어 넣는다. 논두렁에서 얻어 가는 만큼 살아있는 흙으로 만들어 놓는다.
겨울 오후 4시의 해는 예각으로 빛살을 긋는다. 동지를 지나면서 조금씩 각의 크기를 늘려 한동안 가슴에서 만나던 햇살이 어깨로 쏟아진다. 벼 그루터기를 안고 혼곤한 겨울잠에 취해 있는 흙덩이를 슬며시 지르밟아본다. 축축하고 흐벅지고 싱싱하게 흘러넘치던 땅은 그 몸에서 나고 거둔 것들을 내보내느라 지친 삭신을 뒤척인다. 퍼석거리면서도 푹신하다. 세상의 입들을 먹여 살리느라 조금씩 닳아지면서도 살아 있는 것들의 기운으로 따뜻하게 차오르고 다시 생기를 찾아가는 중이다.
이 도시의 논은 그 아래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뭇 생명의 씨앗들은 땅속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까? 그렇게 기대하면서 지난겨울, 날마다 오후 4시를 이곳에서 보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신묘했다.
논바닥 엉그름처럼 쩍쩍 갈라진 내 목마름도 언젠가 이렇게 맹렬하게 피어날까?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던 논둑이 푸른 봄까치꽃으로 뒤덮였다. 노랗게 민들레가, 뽀얗게 냉이가 피어났다. 제비꽃이, 토끼풀이, 뽀리뱅이가 논틀길의 나를 비틀거리게 했고 흔전만전 퍼진 쑥은 주저 없이 주저앉게 했다.
환하면서도 어쩐지 슬프기도 한 봄이었다. 때때로 죽은 새의 깃털이 논두렁에 흩어져 있고 개똥이 뒹굴고 다리가 절단된 개구리의 사체가 말라갔다. 그런 날이면 까마귀가 낮게 날고 도마뱀이 튀어나올까 봐 장딴지가 땅겼다. 들짐승이 만든 크고 작은 구멍에도 햇살이 고이고 바람이 들락거렸다.
일꾼들은 논을 뒤집어 땅심을 채웠다. 햇빛이 널뛰는 못자리가 김 양식장처럼 검푸르게 반들거렸다. 사름이 시작되고 생생하게 초록을 세운 벼들은 백옥찰, 무복토, 다솜쌀, 일품 등의 머리말과 파종 5.16, 이앙 6.15 같은 숫자를 명찰로 달고 바람에 흔들렸다. 여름밤이면 그악스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양수기 물소리가 장단을 맞췄고 도시의 휘황한 불빛이 물꼬에 부스러기 그림자를 만들었다. 초승달이 반달로, 보름달로 익어갔다.
가을이 채 여물지 않은 어느 날, 군데군데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 아이의 버짐 핀 머리통을 하고 있었다. 농사를 몰라도 수상쩍었다. 낫을 들고 있는 한 아저씨에게 다가가 물었더니, 그걸 또 비밀이라며 입을 다무는 게 아닌가. 무안해진 내가, “혹시 젤 좋은 벼를 젤 먼저 골라서 높은 사람에게 갖다 주려는 거냐?”고 되물었더니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품종별로 우량종자 상태를 살피기 위해 논배미마다 조금씩 먼저 수확하는 거란다. 가을이 되도록 여전히 빈손인 나는, 누구의 화급한 욕심 때문이 아니라 모두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일이라는 게 안심이 되었다. 밥 먹는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드는데 쌀을 수입하고 또 한쪽에서는 우수한 미질 개량을 위해 채종하고 보급하고 있다. 누구는 화급한 오늘을 살고 누구는 다가올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의 종자의 시간도 더디게 흐를 뿐, 시절이 되면 거두게 될 거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돌아섰다.
발밑에 쓰러졌던 잡풀이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갈변한 초록을 굳게 보듬고 논두렁에 깊이 뿌리내린 채 강풍을 견디는 로제트 잎들이 둥글게 터를 넓히고 있다. 머지않아 이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상가가 형성되고 대로가 생길 것이다. 그때도 이 땅은 수굿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가장 밑바닥에서 뿌리가 되어줄 것이다. 오늘도 논두렁 옆에서는 매연이 날리고 경적이 울리고 욕지거리가 들리고 새 건물이 들어서고 아파트가 올라간다. 그래도 땅은 잠잠이 늙고 낡아가며 세상을 기르고 배불리 먹일 궁리를 하고 있다.
싹둑싹둑 잘린 볏짚들이 논흙을 덮고 있다. 풀 내가 난다. 쇠죽 내 같기도 하다. 기억이 전해주는 냄새다. 길섶에 뒹구는 벼 이삭을 주워서 들여다보니 쭉정이다. 손톱으로 낟알을 까보려고 했던 적이 있다. 알갱이를 감싼 낟알의 투지가 내 손톱으로는 어림없었는데 용케도 새들의 입으로는 들어간 걸까. 혼자 뿌리내리고 피어나고 영그는 수고로움에 깃든 외로움을 생각한다. 땅심이 해와 달빛과 비바람과 어우러져 우리의 밥심을 키워줬던 시간을 바라본다.
5시 반에 바투 선 겨울 해가 오늘의 마지막 빛을 뿌린다. 그 순정한 햇덩이에서 나오는 빛살은 한오라기 허투루 날리지 않고 뜨뜻하게 흙을 비춘다. 땅도 가슴을 열어 빛살을 남김없이 담는다. 이윽고 빛은 한순간, 툭 떨어져 땅에 잠긴다. 살아있는 것들이 부스럭거리는 곳으로.
아득한 시원으로부터 저벅저벅 걸어와 이곳에서 다시 피어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이 장하다. 세상을 돌아오던 바람이 흙과 씨앗을 건들며 건네줬을 탄생과 소멸의 이야기, 푸르스름한 동살이 환하게 내려앉으며 보여주던 숨탄것들의 흔적과 서사, 흙빛을 객토하고 촘촘히 글씨를 뿌리던 시간, 연두의 밑그림에 초록을 더하고 볼품없는 꽃에 열매도 달아주면서 붓질은 더 누런빛으로 익어가는 한 생을 그렸다. 이제 논두렁은 통속의 하루를, 어제에 덧댄 오늘과 내일의 서사를, 발걸음을, 숨결을 품고 있다가 새봄이 부풀어 오르면 재채기처럼 터뜨릴 것이다.
내 키보다 더 기다란 접시꽃 대가 허공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다. 꽃과 이파리, 씨앗까지 다 떠나보내고 한 모라기 바람 따라 낭창거린다. 쓰러져 땅에 눕지 않고 그 뿌리에 봄을 보듬고 있다. 겹겹으로 껴입고도 추운 나는 접시꽃 마른 뼈에 코를 대고 내 영혼의 허기를 채운다. 조급증을 벗어던지면 저 먼 곳의 봄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만灣, 만滿, 만晩/윤정인(천강문학상)
만灣 - 만나고 굽어지다
물마루가 밀려온다. 둥근 띠를 이루는 파도의 능선이 아래로 꺼졌다 위로 솟구친다. 바람을 따라 공중으로 물보라를 뿜어 올리다,방파제에 부딪쳐 포말로 흩어지기도 한다. 사납게 내달리던 파도는 만灣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진다.
파도는 과감하게 경계선을 넘어온다. 무방비로 서 있던 해안선은 뒷걸음치며 물러나지만 소용없다. 바다는 기어이 빈틈을 찾아내 자리를 만들어간다. 물굽이의 시작은 그랬을 것이다. 역동적인 바다는 제 몸피를 육지의 가슴속 깊이 밀어 넣었고, 망설이던 육지는 둥글게 몸을 말아 껴안았을 것이다. 만의 탄생이다.
어느새 훅 들어왔더라는 지인의 말처럼 그도 그렇게 내게로 왔다. 처음 만난 건 친구의 하숙집에서였다. 같은 학교 다니는 몇 년 동안 존재조차 몰랐는데 알고 나니 자주 마주쳤다. 테니스장과 생맥주집에서 몇 번 어울렸을 뿐인데 얼마 안 가 캠퍼스 내에서 사귄다는 소문이 났다. 얼떨결에 우리는 연인이 되어 있었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기수지점에 이르면 둘은 하나로 섞인다. 바다가 육지 안쪽으로 점차 휘어져 굽어지는 것은 그때다. 파도의 구애는 거침없고 지칠 줄 모른다. 물러서는가 싶으면 다시 밀려오고 멀어졌는가 하면 눈앞에 서 있었다. 선을 그어놓고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들기를 바랐던 나는 그의 넉살에 매번 밀리기만 했다.
노르웨이의 피오르는 빙하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만을 말한다. U자 모양의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와 만들어진 협만峽灣이다. 지극한 시간으로 빚어진 안온한 풍경을 보면 왠지 마음이 고요해졌다. 세상이란 너른 바다에서 빈 배처럼 부대끼고 흔들릴 때, 만처럼 든든한 곳이 있다면 거기 닻을 내리고 정박하고 싶었다.
미완의 만 안쪽으로 거센 물결이 밀려와 자주 요동쳤다. 거기엔 튼튼한 방파제도, 등대도 하나 없었다. 우리는 요령 없이 삐걱댔고 가끔 비틀거렸다. '여기까지'라 말하곤 다시 돌아섰던 날들. 암초지대를 간신히 벗어났지만 나아갈수록 잦은 바람이 불어왔다. 참을성 없는 나는 연거푸 밀려오는 파도에 무너졌다 일어나길 반복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것은 오랜 관계의 비결이었는지 모른다. 싫증날 때까지 머물지 않았고 소원해질 때쯤 다가왔다. 밀물과 썰물처럼 가면 오기를 바랐고 다시 만날 예감으로 손을 흔들었다. 만남, 이별, 재회, 다시 별리의 지루한 반복 끝에 결혼에 이르렀다.
만滿 - 비우고 채우다
결혼생활은 풍랑이 그치지 않는 바다 위 부표 같았다. 바람 따라 흔들리고 물결에 쓸렸다. 서로의 의견은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그나마 의기투합이 되어도 최종적인 순간에 아귀가 맞지 않아 잘못 쌓은 테트리스처럼 무너지기 일쑤였다. 그의 체면이, 나의 자존심이 한 치 양보 없이 살아서 펄떡거렸다.
망망대해 해무에 가려진 앞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함께 그물을 당겼지만 방향이 달랐고 힘 조절이 서툴렀다. 서로 상대방 탓만 했다. 현실을 중시하는 남자, 멀리 봐야 한다는 여자는 팽팽하게 맞섰지만 결국 현실이 이겼다. 반대의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기 싸움은 오래갔다. 두 걸음 물러나 주었지만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천명을 지났을 즈음 나도 그도 차츰 목소리를 낮췄다. 날카로운 모서리로 서로를 찔러대던 우리는 파도에 수천수만 번 쓸리며 천천히 몽돌이 되어갔다. 격랑의 몸짓들이 유순해지면서 채우는 것보단 비우는 게 마음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에 조금씩 상대방을 들였다. 만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바다는 쉴 새 없이 해변으로 달려온다. 하루 이틀엔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한 달, 일 년, 수십 년이 흐른 뒤에야 몰라보게 해안선이 바뀐 걸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그건 비움이 아니라 충만이었다. 미세한 변화와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함께 꿈꾸는 만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팽팽했던 그와 나의 얼굴엔 어느새 나이테 같은 주름이 자잘하게 새겨졌다. 예리했던 눈매의 힘은 빠졌고 한결 부드러워졌다. 검은 윤기가 흐르던 머리엔 서리가 내렸다. 듬성해진 머리카락을 보면 측은지심이 들기도 한다. 마치 오래된 풍경 앞에 서 있는 듯 고요해졌다. 그때부터였을것이다. 도보로 만을 여행하게 된 것이.
만晩 - 저물며 깊어지다
그와 함께 해파랑길을 걷는다. 길은 바다와 뭍이 헤살거리는 해변에서 깎아지른 절벽 위로 이어졌다가 좁다란 골목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몽돌을 밟으며 좁쌀 같은 모래밭을 걸었다. 이기대, 해운대, 감포, 영일만을 돌아 월포, 후포…. 크고 작은 물굽이를 돌 때마다 둥글고 고요한 해안선이 우리를 따라왔다.
걷기를 끝내고 만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잠시 앉는다. 하루를 뿌듯하게 채운 덕에 나른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해변에는 조깅하는 사람들, 팔짱 낀 여인, 공을 던지는 남자와 그걸 따라가는 개가 유리창 프레임 속에서 움직인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사이로 어선 한 척이 들어온다. 한 남자가 벼리에 배를 끌어맨다. 기다리던 아낙네가 생선 상자를 받아 수레에 싣는다.갈매기들이 낮게 날다 부두에 내려앉는다.
만이 저문다. 물굽이에 바닷물이 한껏 들어온다. 만조의 바다 위로 노을이 잠긴다. 가파르게 올라온 내 삶도 이제는 내려가야 할 때다. 모퉁이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여행자처럼 심호흡을 해본다. 자연은 페이드아웃 하려는데 생의 무대에 새로운 불이 밝아오는 것 같다.
보랏빛 노을이 수면 위를 드리운다. 바다는 은결을 반짝이며 고요해진다. 수평선 위로 천천히 만월이 뜬다. 저녁은 또 다른 시작의 시간, 깊어가는 만의 어깨에 슬쩍 마음을 기댄다.
유리로 만든 창/김현숙(천강문학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휴일 오후. 나는 버스 맨 뒤 칸 창가에 앉아 그 햇살을 삼키며, 털 고르는 고양이마냥 권태를 즐겼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국도변의 추루한 풍경은 재채기를 부를 만큼 건조했고, 그곳 사람들의 기름기 없는 일상은 부서질 듯 파삭했다.
버스가 신호에 잡혔고 [건너 다방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 주인의 말처럼 건너 순댓국집 유리창에 내가 비쳤다. 내 가슴팍에 안겨 이 사이에 낀 점심 찌꺼기를 후비적대고 있는 중년의 남자, 그 위엔 인력소개소의 낡은 창문이 있고 그 틈으로 참말 비듬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 나도 그 남자의 입 근처에 입술을 포개놓고 혀끝을 굴려가며 점심밥 찌꺼기를 훑었다.
잘강잘강 뭔가를 씹으며 연신 두리번대던 내 앞의 여자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그 짜증 섞인 얼굴이 창 안으로 쑥 들어오면서 건너 사진관 유리창에 여자의 옆얼굴이 비쳤다. 마치 물색없는 시어머니처럼, 궁색한 모양새로 가족사진 틈에 끼여 앉았다. 하지만 두 눈을 내려 깔고 한 곳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표정에는 걱정이 묻어있었다. 잘강대던 입을 꾹 다문 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만 가지 사연이 담긴 아주머니만의 흑백사진 한 장이 사진관진열장에 새로 하나 생겼다.
버스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세로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 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으로 눈을 돌려, 낯선 이들의 삶을 곁눈질 하고 있었다. 머리를 유리창 가까이에 대고 면밀히 살피는 모습으로, 아니면 눈길만 돌린 채 삐딱한 시선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버스 내부와 차창너머 세계가 겹쳐지는 ‘그 찰나’를 함께 나누었다. 편의점 창가에 서서 즉석복권을 긁고 있는 외국인과 이마를 맞대고 앉은 아저씨, 횟집 텅 빈 수족관 속에 한 쪽 어깨를 집어넣은 채 잠이 든 학생… 물때 낀 수족관 벽에 청춘의 고단함이 같이 들러붙어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투명한 유리면 안에 서로의 몸을 포개고 생각을 얹어놓고 있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겹쳐져 가는 것인가 보다. 건너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초상(肖像)과 그 상에 어른거리는 창밖의 수많은 사정들은 결코 내 삶과 별개일 수 없다는 듯, 서로에게 깃들면서 이어졌다.
지난겨울 나는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지금처럼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염습실의 안과 밖을 삶과 죽음으로 극명하게 가르고 있는 ‘유리로 만든 창’ 하나. 그 뚜렷한 차단만큼 그곳은 냉정하고 차가웠다.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듯 이생과 피안의 분리대가 되어 우리를 가로막았다.
어디가 차안(此岸)이며, 어디가 나락인지… 나와 아버지가 있는 두 세계가 바뀐 듯 보였다. 아버지는 눈부신 불빛아래 흰 명주로 몸을 감싼 채 하얀 강보가 깔린 침상에 누워있었다. 살아생전 무섭던 얼굴은 다 어디가고 한없이 평안한 모습이었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이지러졌던 당신 삶을 구김살 없이 펴놓고 계셨다. 그곳엔 근심도 눈물도 없었다.
비상구 표시등만 켜진 어두운 대기실은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지고 일그러져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이다. 시커먼 상복에 묻은 죄는 털어도 비벼도 떨어지지 않고 복인(服人)을 애끓게 했다. 유리벽을 두들기며 부셔버릴 듯 덤벼들어도 아버지는 아무 반응이 없다. 아버지의 주검을 쓸고 어루만지는 내 손길은 차가운 유리에 서러운 지문만 남길 뿐, 가닿지도 더는 만져 볼 수도 없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내 뜻대로 닿을 수 없는 세계, 그것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미 약수(弱水) 어디쯤을 건너 서천(逝川)으로 가고계실 테지. 나뭇잎도, 기러기 깃털도 그 약수 위에 떨어지면 이내 가라앉고 만다는데 아버지의 삭정이 같은 저 몸을 어쩌나. 제 아무리 오열과 통한으로 때려 봐도 내 눈물로는 그 유리벽을 깰 수 없다. 아버지를 건질 수 없다.
얇은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나는 아버지와 가슴을 포개고 있다. 당신 품속에서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아버지는 하얀 강보로 싸안고 달래셨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겹쳐져있었다.
오늘 버스 창밖으로 언뜻언뜻 보인 얼굴들은, 삶의 변곡점마다 걸음 폭을 줄이고 함께 걷는 법을 일깨워준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차창에 깃든 모습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삶은 겹쳐져 존재하는 ‘어떤 풍경’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삶과 죽음, 타인과 나, 시간과 시간 사이에 놓인 유리창은 ‘나’와 ‘나의 외부’가 만나는 공유점일지 모른다. 그것은 창 저쪽을 바라보는 나의 사적인 욕망과 공적인 의식이 같이 들어앉는 자리다. 그래서 내 존재만을 담아내고 되비추는 거울과는 사뭇 다르다. 지금 막 내 옆을 스쳐간 어린아이를 보면서 ‘귀엽다’라고 생각했다면, 그 순간 이미 그 아이와 나는 겹쳐진 것이다.
* 약수 ;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 속의 강. 한 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한다.
소사 가는 길, 잠시/신용묵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고 그 위로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신용목(1974~ )
여행에서 돌아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기억에 남는 것을 챙겨보면 이름난 공간들이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맞닥뜨렸던 순간들인 경우가 많다. 한 개인에게 죽기까지 지워지지 않는 기억 또한 예기치 않게 겪게 되는 삶의 순간들임을 환기해보면 찰나와 영원은 일맥(一脈)인 셈이다. 우연히 버스 유리창에 비친 어느 다방의 풍경 속에서 질문이 움튼다. 사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저 '앳된 여자'는 왜 저 풍경 속에서 손톱을 다듬고 있어야 하는가? 물론 그 '여자'의 평범할 수 없는 삶의 안팎이 직감으로 스쳤으리라. 그 답은 간단하지 않고 섣불리 결론 내릴 수도 없다. '나'의 삶이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중간에서 잠시 다방 창문에 비친 까닭을 설명할 수 없듯이. 마침 다방 위층은 기원(棋院)이다. 온갖 생의 은유가 펼쳐졌다가 지워지는 현장이다. 그 위로는 비행기가 지나간다. 다른 세계, 미지의 세계로 가는 행로다.(출처/조선일보)
육탁/김희자
침묵을 비집고 빛줄기가 거실 바닥으로 든다. 겨울 날씨가 봄 날씨 같다고 비웃었다가 된통 욕을 보고 있다. 세상천지가 꽁꽁 얼고 하늘과 땅의 길도 막혔다. 영하 20도. 맹추위는 가난한 사람의 체감온도를 한층 추락시킨다. 냉혹한 바닥을 치고 나갈 탈출구는 어디쯤 있는지. 여자는 지금 미래로 나아가지도,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바닥을 치는 여자의 육신처럼 거실 바닥에 뒹굴던 빛줄기가 파닥거린다. 새벽 어판장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 육탁(肉鐸)과 같다.
화려해 보이는 도시의 군중 속에 말 못 하는 가난이 여기에도 있다. 더는 칠 것이 없는 생의 바닥. 물질도 정신도 모두 바닥이다. 한파가 가슴 깊숙이 파고든 지 오래이니 심신이 꽁꽁 얼음장이다. 그런 여자에게도 봄날은 올까? 물질이 궁색해지니 호기심마저 착 가라앉았다. 표정 없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여자는 두문불출이다. 명자꽃처럼 홀로 붉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만사에 무심해져 동면에 든 동물처럼 이불 속에 파묻혀있거나 책과 연애를 하다가 출근 시간이 되면 꽃단장을 한다.
처지가 그러하니 여자는 베란다 식물에도 냉정했다. 얼어 죽든 말든 그들의 존재에 무심했다. 무관심만큼 잔인한 건 없다더니 애지중지하던 식물들이 동사했다. 잎이 얼어 시커먼 군자란을 얼른 안으로 들이고, 벤자민 화분을 실내로 들이려고 하니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죄 없는 식물까지 얼어붙게 하다니. 여자는 미안한 마음에 머플러를 가지고 나와 나무 위에 씌웠다.
겨울 하늘이 시리도록 파랗다. 바닥에 살아도 꿈꾸는 하늘을 본다. 차디찬 바람이 설익은 여자를 흔든다. 혹독하게 날을 세우고 선 계절 앞에서 바닥을 치고 올라설 기를 동냥한다. 한 번의 잘못은 실수라고 인정할 수 있다지만 두 번의 잘못은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실수라 용납하기는 정말이지 원통하다. 오늘도 늑골까지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며 파산 수업을 받으러 가야 한다. 회생을 위한 마지막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집을 나서야 한다. 침묵에서 침묵으로 시간은 이어지고 그 시간 위로 찬바람만 분다.
어젯밤에도 잠 못 들고 뒤척이는데 건넛방에서 휴대폰이 울었다. 저 홀로 울든 말든 외면해버렸다. 여자의 기분은 무시한 채 쇳소리는 무정하게 울어댔다. 내리 징징대는 휴대폰을 달래기라도 하듯 메시지를 열었다. 그였다. 여자의 기별 따윈 일언반구 대꾸도 없던 사람이 자기 할 말은 일방적으로 던져온다. 그는 사업을 시작한 지 이태도 되지 않아 파산선고를 했다. 개인회생이 마지막 길이라며 도움을 청했다. 변명을 잔뜩 늘어놓으며 구구절절 한 맺힌 사연을 보내왔다.
여자는 달포 전, 그에게 퍼부었던 언어가 떠올랐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 참다 참다가 퍼부은 비수였다. 그는 언제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더 괘씸하고 얄미웠다. 그러던 여자가 밤늦게 온 메시지를 보고 말을 잃었다. 슬픈 메시지는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흔들었다. 그는 날밤을 새워가며 애면글면 산다고 했다. 냉정해지고 싶지만 이도 저도 어찌할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서도 참고 견뎌야만 한다.
불멸의 밤이 생각났다. 육신 보다 지쳐 찬 바닥에 모로 누운 영혼이 떠올랐다. 힘껏 바닥을 치다 보니 여자의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저 홀로 생겨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 길을 몇 개나 그렸으며, 외로운 여자의 방으로 달빛이 숨죽이며 들어와 지친 다리를 주무르던 날이 얼마였던가? 에는 바람에도 마음 베이지 않으려고 무심했다. 쇠심 같은 인연의 끈도 끊고 싶었다. 때때로 먹물처럼 번지던 외로움…. 하나 여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용감하고 독해져야 했다. 울음을 삼키며 웃음으로 세상과 섞여야 했다. 샛별이 눈 비비며 종을 칠 때 꿈길인 듯 일어나 살아있는 자신을 확인했다.
바닥을 친다는 것은 생의 나락으로 추락한 상황. 여자가 꿈꾸던 삶이 모조리 무너져 내려 바닥에 닿은 지경을 말하는 게 아닌가. 멀쩡하던 회사가 어느 순간 몰락하거나, 튼튼하던 가정이 일순간 무너지고 건강하던 사람이 시한부를 선고받는 것처럼. 믿었던 한 나라의 지도자가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한 집안의 가장이 추락했으니 배우자인 여자는 어쩔 수 없이 파산 수업을 받아야 한다. 더는 칠 것이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것이 생의 바닥이지만, 이 나라에 사는 것을 포기할 수 없듯이 여자는 무너진 가정을 지켜야만 한다.
신기한 것은 허기질수록 더 간절해지는 게 생긴다는 사실이다. 침묵 뒤에 오는 성찰과 영감은 혼자 있는 시간에만 찾아오는 선물이나 진배없었다. 여자의 눈엔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또 다른 것에 매달리며 파닥거렸다. 속없이 굵어 버린 가난의 무게는 별것 아니라고. 자신을 지켜야 가정도 지켜진다는 소신이 섰다. 여자는 아니타 무로 자니의 글처럼 ‘삶에 맞서 저항할 것이 아니라 삶과 함께 나아갈 때 가장 강한 존재가 된다.’며 스스로 토닥였다. 무너진, 바닥을 치는 자존감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대안을 찾으며 기다렸다.
바닥을 벗어날 회생 수업은 더디기만 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오로지 여자의 몫이었다.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바닥을 치고 깊은 허무에 빠져 있어도 아무 일 없는 듯이 일터로 나갔다. 매일 문(文)과 열애하며 존재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러자, 뿌리 깊은 상실감이 조금씩 채워져 갔다. 예기치 않은 시련이 닥쳐 바닥을 칠 때마다 진통제 역할을 해준 것이 문장(文章)이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여자를 흔들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라고 일깨웠다. 남들은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는 문학이 지킴이가 되었다. 글쓰기가 업인 사람도 있고 취미인 사람도 많다. 하지만 여자에게 있어 글쓰기는 살기 위한 도구이며 은둔하기 위한 즐거운 감옥이다.
내일모레면 이 한파도 물러나고 회생 판결이 날 것이다. 그날까지.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여자는 온몸으로 바닥을 쳐야 한다. 혹독하게 잃어버려 보았기에, 맨몸으로 바닥을 치면서 깨달았다.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는 것을…. 삶이란 살기 위해 온몸으로 바닥을 치는 생선만큼이나 고달픈 여정. 목탁을 치는 수행자들의 고행처럼 가시밭길이다. 하지만 여자는 다시 살아나리라. 육탁(肉鐸)을 치는 힘으로 바닥에서 벗어나면 그보다 더한 추락은 없으리라. 바닥은 희망. 바닥이 없다면 하늘 또한 없을 테니까.*
육탁/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면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 나민애 시 평론가
목탁을 보면서 물고기를 떠올리는 우리 앞에 배한봉 시인은 비슷하면서 전혀 다른 생각을 제시한다.
그는 물고기로부터 목탁이 아닌 '육탁'을 건져낸다.
새벽 어판장, 살아 있는 물고기들이 뭍에 나와 펄떡인다.
온몸으로 바닥을 두드리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 꼭 몸으로 치는 목탁 같다.
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은 가장 괴로운 순간이고, 가장 살고 싶은 순간이다.
그때에는 할 수 없는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물고기가 펄떡거리는 그 새벽을 활기찬 시장이라거나 용솟음치는 생명력이라고 표현하지 못한다.
바닥을 치는 온몸의 두드림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에서 물고기를 보았는데, 물고기만 보지 않았다.
시 안에는 비린내 나는 눈물 냄새, 사람 냄새, 진땀 냄새가 가득하다.
'육탁'이라는 말을 오늘 처음 들었는데, 그것을 이미 좀 알고 보고 겪은 느낌마저 든다.
남의 이야기인 듯하지만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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