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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민은 이방인과 절대 달라야 한다>의 줄거리: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추악함을 신랄하게 지적한 뒤 사도 바울은 곧바로 유대인에게로 화살을 돌립니다. 내용은 선민이라는 자아의식으로 충만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영적 상태를 보자면 그 추악함이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이처럼 선민이 이방인과 다르다는 생각이 착각일 뿐이게 하는 요인이 대체 무엇일까요?
선민은 이방인과 절대 달라야 한다
(로마서 2:1~16)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선민은 이방인과 절대 달라야 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선민은 이방인과 절대 달라야 한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재미가 하나도 없는 이유는 이방인과 다른 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믿지 않는 사람 전체,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고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방인과 차이가 없으면 믿는 기쁨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차이가 없으면 전도도 불가능합니다.
선민은 무조건 이방인과 달라야 합니다. 내 입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고 인정한다면 무조건 이방인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 이방인이 가족일 수도 있으며 직장동료일 수도 있으며 친구나 애인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애인이나 직장동료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면 무조건 그 사람하고는 달라야 합니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경계심을 풀게 합니다.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라는 개념 안에 같은 상태 같은 편으로 묶이기 쉽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직장동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동료들이 다 동쪽으로 간다고 해서 나도 동쪽으로 가서는 안 되고 달라야만 합니다.
본문에서는 참 이상할 정도로 “행함”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9절과 10절을 보면 각각 “악을 행하는 각 사람”과 “선을 행하는 각 사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관점이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입에 담지 않고 사는 이방인과 하나님을 전매특허 낸 것 같이 그 이름을 부르는 유대인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준수로부터 시작하여 문화와 전통 그리고 각종 절기와 행사를 통해 유대종교의 특색을 강하게 드러냄으로써 주변의 이방인들과 다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추악함이었습니다. 더럽고 악함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앞에서 이방인의 더럽고 악함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지적을 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이 비판과 지적이 유대인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는 호칭으로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바라볼 때 사도 바울이 앞서 고발했던 바와 같은 추악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추악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 생각에 이방인들은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사람들이었던 반면 자기들은 선민이기에 영광되고 축복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더러움과 악함에 대한 고발은 이방인을 향할 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을 향해서도 조금도 가차 없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로 하여금 이렇게 이방인과 유대인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여기게 한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추악함의 관점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4~5절을 보면 이방인과 유대인의 추악함이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와 유대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똑같은 추악함을 드러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른 태도로 바라보고 계시는 것일까요?
지난 시간에 악인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방인이 돈을 좋아해서 돈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이방인이 돈을 순조롭게 잘 벌면서 살도록 허락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돈을 좋아하는 더러움을 내버려 두심이야말로 하나님의 형벌이자 진노하심으로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돼지우리에 갇혀서 10년을 지내라고 한다면 그처럼 무서운 형벌은 없을 것입니다. 돼지우리는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더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식과 마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의식이 돈이라는 가치의 존재감에 사로 잡혀있고 마음으로도 돈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본래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의식과 하나님의 좋음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이 더러워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마치 깨끗하고 하얀 실크 블라우스로 포기김치를 껴안고 있는 상태와 똑같습니다. 그릇에 담긴 김치는 먹을 수 있는 깨끗한 음식입니다. 그러나 그릇에 담겨있지 않고 옷으로 김치를 껴안고 있다면 더러움의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형벌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더러움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일이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크 블라우스로 포기김치를 껴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과 마음으로 돈을 노래 부르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더러움의 상태임에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고 오히려 돈을 벌게 하신다면 그것은 형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선민이라면 어떨까요? 이방인과 똑같이 추악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좋아하는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우를 하나님이 버려두신 형벌로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민의 추악함을 역겨워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방인처럼 내버려 두심이 아니라 인내하심이라고 합니다. 즉 선민을 내버려 두심은 회개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인내의 표현인 것입니다. 선민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이고 진노가 표현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선민일 경우에 내버려 두심은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내를 철저하게 무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선민과 이방인을 다르게 취급하십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내를 유대인이라는 선민에게 적용된 것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이방인과 똑같이 살고 있는 숨겨져 있는 모든 선민을 향해 하나님의 인내는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민은 이방인과 무엇이 달라야 한다는 것일까요?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어서 7~8절을 보면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은 다시 말해 행함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얼핏 로마서 전체를 관통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라는 주제와 상반되는 내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행함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5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변함없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는 말이 왜 나오게 된 것일까요? 이 말을 그대로 풀어보자면 행함에 따라서 심판을 받고 지옥이나 천국에 가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과는 너무나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행함이란 몸으로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말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존재란 곧 인격의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7절을 보면 이 행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나타납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언급을 통해 6절의 행함이 육체로 하는 행동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썩지 아니함”이란 육체와의 연관성을 의미합니다. 육체가 죽어서 썩기 때문에 육체가 있음으로써 좋다고 여겨지거나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다 썩을 것으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좋아하면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좋은 것입니다. 다만 육체가 죽으면 썩을 것이기에 돈 또한 썩을 것으로 분류됩니다. 권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권력도 육체가 살아있을 동안에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은 다음에는 권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권력은 썩을 것으로 분류됩니다. 어떤 물건을 대를 이어 물려준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썩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죽으면 그것은 더는 내게서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마찬가지로 썩을 것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썩는 것으로 분류되는 것이 바로 육체와의 연관성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몸으로 하는 행위를 통해 그것들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몸이 있어야만 좋음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것이 권력이든 돈이든 무엇이든지 행위로 구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6절의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는 말씀과 7절의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구할 수 있는 것을 제외시킨다는 뜻입니다.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은 구하기는 구하는데 몸을 움직여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을 움직여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썩는 것으로 분류가 되기 때문입니다. 썩지 아니하는 것은 육체를 움직여서는 구할 수 없습니다.
7절을 다시 보면 “참고 선을 행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결국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를 움직여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와 상관없이 영광과 존귀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움직이지 않고 구하는 상태를 “인격” 혹은 “인간의 존재”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마음으로 돈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의 인격의 상태입니다. 마음으로 돈을 구하기에 몸을 움직여 실제로 돈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썩을 것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6절에서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는 구절의 행함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것은 몸을 움직여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나타나는 행위 차원 이전의 인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 즉 인간의 존재는 의식과 마음이 핵심을 이룹니다. 그리고 의식과 마음은 비어있습니다. 의식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인 존재감으로 채워지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무엇인가 좋다고 확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채워지기를 구합니다. 이처럼 구함은 행위에 앞서 의식과 마음이라는 인격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참 선민은 의식과 마음이라는 인격이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이 어떠한 것인지 인격의 구조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이란 내 의식에서 하나님이 1등을 하시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즉 내 의식에서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있음의 대상으로 느껴서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고자 함입니다.
예를 들어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진눈깨비를 바라보는 동안에 의식으로 “진눈깨비가 내린다.”라고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식에서는 하나님보다 진눈깨비가 먼저 의식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의식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붙잡고 있으면 진눈깨비를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진눈깨비를 내리게 하신다.”라고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육체가 있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동안에 세상의 대상들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다른 예로 병이 난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의식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가 아니라면 병이 난 상태를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참 선민이라면 몸에 병이 났어도 의식에서 병이 난 육체의 존재감이 영광을 받고 1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1등이 되도록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의식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1등으로 구하는 것은 육체적 행위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것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육체로 구함이 아니라 의식으로 구함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으로 구함은 육체의 행위와는 다르게 의식과 마음이라는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의식과 마음은 그 자체가 인격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이 실제로 살아있는 상태는 의식과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처럼 구함은 인격의 절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인격은 곧 인간의 존재입니다. 길에 돌멩이 하나가 놓여있다고 해서 존재라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의식과 마음이 구하는 상태입니다. 의식이 존재감으로 채우기 위하여 구하는 상태이고, 마음이 좋음으로 채우기 위하여 구하는 상태입니다. 이렇듯 본문에서 행함이란 단순한 육체적 행위가 아닌 존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1등으로 구하고, 마음이 하나님의 좋음을 1등으로 구하는 상태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는 말씀이 참 어렵고도 절묘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격에서의 행함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영광은 나의 의식에서 하나님이 1등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고, 나의 마음에서 좋음이 1등 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존귀함입니다. 존귀함은 내가 존귀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의식과 마음에서 1등을 하시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상태가 내 인격이고 존재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가 인격의 어떠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은 내가 의식으로 어떤 대상의 존재감을 첫 번째로 붙잡고 있었는지, 마음으로 어떤 대상의 좋음을 첫 번째로 붙잡고 있었는지 그 상태로 심판이 가해지리라는 뜻입니다. 영광을 구하여 내 의식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을 하고,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음을 1등으로 구하는 중에 동시에 내 존재는 천국에서 존귀해집니다. 존귀하다는 말은 쉽게 말해 높고 귀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이름에 명예가 주어지고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좋음을 1등으로 붙잡으면 나의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천사들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나의 존재감을 느끼기 시작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처럼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천군천사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의 존재가 무게감을 가지고 느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천국에 나의 존재가 등장하게 됩니다.
출세(出世)는 세상에 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의식과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실 때는 천군천사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존재감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출세(出世)하는 대신에 출천국(出天國)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닌 천국에 나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라고 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이 세상에서 존귀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내가 천국에서 존귀해지는 일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을 1등으로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될 정도로 존귀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내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사위일체를 이루게 해주세요.”라고 간구하는 것은 감히 삼위일체 하나님과 대등하게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는 존귀한 자리로 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죽어서 썩어질 육체로 느낄 수 있는 세상적인 존귀함은 바랄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선민은 이방인과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는 의식과 마음의 구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바라는 것과 소원에서 차이가 나야만 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행위 이전에 마음이 구하고 있는 상태가 인간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함은 의식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상태입니다. 반면 악을 행함은 의식과 마음으로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 것을 구하는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 의식과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1등 되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것들을 1등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고 율법을 붙잡고 지킨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의 더럽고 악함과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격의 존재 상태입니다. 선민이라면 이방인과 인격의 존재 상태가 달라져야만 합니다. 몸의 행위는 인격의 열매일 뿐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의식이 존재감을 구하고 마음으로 좋음을 구하는 상태를 행함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행함은 인격의 상태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몸으로 움직이는 행위와 믿음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인격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행함입니다. 인격은 구하는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가 믿음과 연관이 됩니다. 믿음은 율법과 절기 등을 지키는 몸의 행함과 대비됩니다. 본문에서도 율법에 관한 언급이 나오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앞으로 계속해서 나옵니다. 차후의 말씀은 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해서 더욱 깊게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인격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은 의식과 마음이 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하고 있는 상태를 인격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함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참 선민이라면 인격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함의 내용이 이방인과 완전히 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구함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가 우리의 인격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인격 안에서 구함이 이방인들과 완연히 다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이방인과 똑같은 인격의 상태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