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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약속된 아들
본문<롬1:1~2>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지난주에 로마서 첫 번째 시간을 통해 로마서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로마서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물론 모든 성경 전체(66권)가 한결같이 증거하기를 ‘구원은 율법 행함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성경이 이 핵심을 은유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은데 로마서만큼은 아주 직설적으로 ‘율법의 의가 아니라 믿음의 의’라고 선명하게 계속해서 증거 해 주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먼저 알고 나서 다른 성경을 본다면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쉽게 깨달을 수가 있지만, 로마서를 모르고 다른 성경을 본다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시행착오를 통해서라도 제대로 복음의 길을 찾아 나선다면 다행이겠으나 대다수는 오리무중 헤매다가 그저 종교인으로 살다가 멸망하고 맙니다.
이런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인데 마7장에서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그들이 외치기를 ‘우리가 주를 위하여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나이다.’ 말하는 그들에게 주님이 ‘나는 너희를 모른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단호하게 질타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힘쓰는 사람의 열심과 노력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로마서가 아주아주 중요하고 또한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커다란 산이 있다면 로마서는 그 산 전체를 볼 수 있는 넓은 시각을 제공하고 있고, 반면에 다른 성경들은 나무만을 보여주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통해 전체를 조망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율법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미리 알고 나면 다른 성경도 쉽게 풀려진다는 의미에서 중요성은 대단한 것입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로마서는 성경66권의 압축판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죄로 죽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왜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왜 무조건 구원하시는지, 언제부터 그 구원이 작정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구원하시는, 그런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폭 넓게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받을 영적인 이스라엘이 다 채워지면 세상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까지 밝히고 있는 성경입니다.
오늘부터는 로마서 본문으로 들어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장부터 11장까지는 교리를 다루고 있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성도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각론으로 들어가서 보면 1장의 앞에는 문안인사와 복음에 대해 맛보기로 설명합니다. 1장 후반부터~3장 20절까지는 인간의 죄의 실체에 대해 폭로하고, 그런 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율법의 의가 아닌 IX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믿음의 의’에 대해 피력합니다.
4장은 그렇게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의 대표가 바로 아브라함이라면서 그는 구원을 위해 아무 한 일이 없고 오히려 경건하지도 않은 자이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칭의의 의’라고 합니다. 즉 의로운 자로 존재가 바뀐 게 아니라 의롭다고 여겨주심으로 의인이 된다는 말로서 이를 줄여서 ‘칭의의 의’(혹은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5장은 칭의의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고 6장~8장은 율법과 죄에 대하여 증거 합니다.
이 부분(6~8장)이 아마도 로마서의 핵심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6장에서 말씀하는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에 대해 해석을 잘못해서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기서 영적인 의미를 모르면 다시 8장에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뭔지를 몰라서 또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거나 복음에다가 율법을 더한 혼잡한 구원관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가장 조심해야하는 중요한 용어들이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함정을 파 놓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턱대고 로마서에 접근하면 다시 미끄러지는 병목점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신학자와 설교자들이 이 관문에서 거의 다 실패를 해서 율법으로 회귀를 합니다. 결국은 개가 그 토하였던 것을 다시 삼키고 돼지가 씻어다가 다시 오물에 뒹구는 형국이 연출되도록 안배하신 것이니(벧후2:22), 지금 우리가 이런 함정들을 다 알고 로마서를 대한다는 것은 기적이며 하염없는 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롬9장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인 선택과 작정에 대해서, 10장은 왜 복음이 유대인을 떠나 이방인으로 가게 되었는지를, 11장은 이렇게 택함을 받은 자들이 왜 죄 가운데 갇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천기누설 차원의 비밀을 밝히는데,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히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2장부터 16까지는 성도의 삶(예배, 권세를 대하는 자세, 교회, 전도, 성도의 관계) 등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먼저 1~2절에 대해 나누겠습니다(먼저 1절만..)
<롬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자신을 IX(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네요. 그 당시 종이란 돈을 주고 사고파는 물건정도로 여기던 시절인지라 종의 인권은 없던 시절입니다. 조선시대 종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주인이 설사 죽여도 법적으로 하무 하자가 없는 그저 재산목록의 하나 일뿐인 무존재입니다. 단지 말하는 소나 말 정도로 취급받던 자들이 종(노예)였습니다.
예전 미국의 남부지역 목화밭에서 일하던 노예들의 생활상이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크리스천이던 링컨 대통령이 그들을 해방시키려고 하다가 남북전쟁이 터진 것이지요. 기껏 말하는 짐승취급 받던 종들의 신분인데 그나마도 명망 있는 고관대작 집의 종이면 일만하면 되었지만, 만일 반역자 집의 종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인에게 닥치는 핍박과 조롱까지 더해져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서 떨며 살겠지요.
바울이 주인으로 삼는 예수는 어떤 자였습니까? 유대인들이 민족의 반역자요 유대교의 이단으로 몰아 십자가로 처형한 사형수입니다.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고 그들의 신주단지였던 성전을 모독한 자였기에 십자가 처형까지 간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나무에 달려 피와 물을 다 쏟고 갈비뼈가 오장육보를 찌르는 고통속에서 죽기까지 며칠씩 걸리는 가장 악독한 처형법이라서 로마 시민권자는 아무리 악해도 제외된 사형법입니다.
주님이 왜 그런 지옥 형벌을 겪으며 비참하게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 값으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주께서 대신 그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알고 보면 유대인이나 우리나 똑 같이 예수를 죽인 장본인입니다. 구약의 성전 제사를 보면 사람이 죄를 범하면 우양을 끌고 와서 안수하여 그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면 제사장이 그 짐승을 잡아 피를 번제단에 뿌리고 짐승은 각을 떠서 화제로 불태웁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 연기를 흠향하시고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성전제사의 구도였습니다. 그 번제단에 뿌려지는 피가 땅으로 흘러내리지요? 그 땅은 범죄한 저와 여러분을 상징하는데, 한낱 흙의 먼지와 같은 죽은 자들이라는 고발이지요. 이것이 십자가 밑에 모여 있던 마리아들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보배피로 마리아들에게 덮여져서 모든 죄가 사함 받는다는 메세지입니다. 여기의 마리아들은 자신에게서는 죄 밖에 나올 게 없다고 자백하는 ‘마라(실패자들)’들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죄로 인해 성전 마당에 순한 양이 끌려가서 내 대신 죽게 만든 장본인들이 우리라면 우리가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 눈이 열려서 내가 주님을 죽였다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외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지목한 것입니다.
(요19:37)을 보면, 또 다른 성경에도 말하기를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그를 보리라.’고 하였느니라(kjv.).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이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인데 다시 본다는 것은, 성령을 받고 보니 자신들이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통곡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 통곡 속에는 주님이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 죄를 다 짋어지셔서 탕감해 주었다는 것을 알고 그 망극하신 은혜에 감격과 감사가 터져 나오는 형국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 뿌린 옷을 입혀 주셨기에 모든 죄의 부끄러움을 가리움 받고, 지옥불에서 구원받아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19장에서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했다는 말씀은 스가랴 12장 10절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준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여 성령을 보내셔서 마음의 성전을 세워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여 자신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임을 깨닫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애통하고 통곡하는 심령으로 잠기게 하는데 어느 정도의 슬픔일까요? 사람이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보다 큰 애절함이 또 있을까요? 자식을 앞서 보내면 가슴에 묻어둔다고 하는데 날마다 슬픔 속에서 산다는 의미겠지요. 더군다나 그 아들이 독자라면, 장자라면 그 슬픔은 인간의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애통이요 통곡 아닙니까? 날마다 비수로 가슴을 저미는 그야말로 애리고 쓰라려서 가누지를 못하는 그 심정일 테지요.
성령을 받고 보니 나 같은 미물을 살리기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를 죄값으로 넘겨주신 하나님의 그 아픈 마음이 전가되니 너무도 황송해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떨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외치실 때, 그 방법 아니면 우리를 구원할 다른 방도가 없기에 사랑하시는 그 독생자를 버리신 하나님도 아들 예수가 참혹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외면하시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성령이 임하시면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의 모습이 자신이었음을 알고 깨닫게 하시면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애통함이 터져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몰지각한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진 것처럼, 하나님의 원수인 우리에게 예수님의 옷을(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 나누어 가지게 하여 구원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스가랴12장 10절의 말씀을 사도행전 2장 35절 이하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행2:35~36>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오순절이 되어 성령이 임하고 베드로가 설교하는 모습인데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자들이 이어지는 3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행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던 자들이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어지는 3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행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여기서 회개하라는 것은, 다른복음(율법 행함)을 따르고 있던 것에서 돌이켜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은 다른복음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직 십자가 복음의 말씀만 듣고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으면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는 것이 깨닫게 되기에 바울도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여겨도 감지덕지한 처지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핍박자요 포행자요 훼방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일꾼 스데반을 죽인 하나님의 원수요 복음의 방해자였지요. 율법으로 심판을 받자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닙니까? 바울은 당장 죽어 지옥가야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찾아 오셔서 눈의 비늘을 벗겨 주시고, 과거의 모든 죄를 다 탕감하셨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셨으니 어찌 그 은혜를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IX의 종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 인생은 없고 오직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이라는 고백입니다.
1절에서 IX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노라고 사도의 직무에 대해 짧게 어필합니다. 사도란 무슨 일을 하는 자냐? 주님의 교회를 복음의 터 위에 세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선포되는 복음이 사도가 전한 복음과 일치되는지를 분별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게 아니면 다른 복음일 뿐입니다.
엡2:20절을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반석을 삼고 그 위에 은혜의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요 성도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위에 사람의 행함과 업적을 가치로 삼는다면 거기는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이 사도로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다메섹 사건 때에 주님의 종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합니다.
<행9:15~16>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바울은 이방인과 뭇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한 주님의 그릇으로 그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주님이 부활하신 후 율법으로 굳어진 유대종교 안에 핵폭탄을 던지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파장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소동이 끊이질 않았고 더불어 바울은 극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직면한 고난과 박해로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토로 합니다(고후1:8). 율법에 굳어진 유대인들의 핍박에 수차례 생명의 위협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또한 여러 차례 옥에 갇히고 매를 맞으며 파선과 강도,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을 겪었다고 증거 합니다(고후11장). 그러다가 마침내는 로마 감옥에까지 이송되어 몇 년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하게 되지요.
다른 사도들도 물론 순교를 하였지만 바울은 아주 극심한 핍박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이 하나님께 입은 은혜가 컸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그렇게 쓰시기 위해 일부러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하는 길을 먼저 걷게 하락하시고 그런 자를 그 어둠에서 건져 내심으로 은혜 입은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은혜의 감사함에 사로잡혀서 뛰어다닌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에 사람의 의가 털끝만큼도 개입되지 못하게 철통방어를 한 것은 인간의 의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순전한 복음을 전하고 지키는 데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상식으로는,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할례를 하자고 하면 그까짓 것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허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할례라는 끈으로 신자들을 더 단단히 묶어두는 수단도 될 테니까 살짝 허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바울은 할례를 허용한다는 것에 극대노를 하면서 저주까지 퍼부어 댑니다. 할례를 주장한다면 다른 모든 율법을 행할 위무를 지는 것이고 그렇게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짓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질타를 합니다(갈5:3~). 왜 그래요? 말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성도의 구원을 완전하고 영원하게 다 이루어 내셨는데, 율법이 더해진다면 십자가를 짓밟는 죄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목숨처럼 여기듯이 오늘날 교회는 십일조를 그처럼 여깁니다. 구약의 십일조가 바로 IX에 대한 예표였다는 것과 십자가로 율법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알까요? 대다수 목사들이 이를 모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강조하니까 신자들이 무서운 마음으로 십일조를 대합니다. 십일조를 안 하면 구원을 못 받거나 구원에서 취소된다고 여기겠지요.
설사 십일조는 율법이고 율법은 주님의 십자가로 끝내셨다는 것을 알지라도 교회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 십일조를 굳이 하지 말자는 목사가 있을까요? 꿩 먹고 알 먹자는 식이지요. 신자들의 신앙을 공고히 하면서 교회 재정에도 큰 힘이 되는 것이기에 십일조는 굳건합니다. 그리고 목사들이 십일조를 고집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마23:23절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 봐라, 율법의 의와 인과 신도 챙기고 십일조도 챙기라고 했잖아..하면서 십일조를 강조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려면 십일조가 첫 번째 조건 항목입니다. 십일조 없으면 자격이 없다는 말이고 믿음이 없다는 말이겠지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증거인데 거꾸로 가르칩니다. 주님이 홀로 ‘다 이루었다’는 믿음이 없으니까 유대인의 할례처럼 십일조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 다음 구절 24절을 보면 십일조가 얼마나 큰 악인지 드러나는데 이를 모른다니까요.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네가 소경이라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를 삼키는 우매한 일이 벌어진다는 말입니다.
무슨 의미이지요? 하루살이도 부정한 것이고 약대도 부정하지만 비교할 바가 못 되지요? 아주 사소한 죄와 어마무시한 죄를 대비 시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챙겨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는 뭡니까? 율법을 철저히 작은 것까지 지켜냄으로 죄를 안 짓겠다는 심산이지요. 그것을 빗대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라고 표현한 거지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고 걸러내듯이 아주 사소한 것까지 계산해서 십일조를 챙김으로 죄 없는 자로 인정받겠다는 행태를 비꼬아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문제를 야기 시키느냐면, 약대라는 커다란 부정한 것을 삼키는 꼴이라는 풍자이지요. 즉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까지 나는 철저히 한다는 자긍심이 마음에 가득하게 되면 자기 자랑과 우월의식으로 채워지게 되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고개를 뻣뻣이 들고 ‘하나님 제가 이만큼 잘했으니까 내 소원 들어 달라’고 으스댈 게 아니겠어요? 한마디로 십일조 속에 자기과시라는 무서운 탐심의 독이 숨어있다는 말입니다.
어찌됐든 십일조든 율법이든 사람의 행함에 가치를 두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필경 자기 가치가 높아지고 자긍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죄로 죽어있는 자가 오늘은 사는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데 알량한 뭔가를 했으니까 그 대가를 보상해 달라는 묵언의 요구가 율법 행함을 가치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있게 되니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새벽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이른 새벽에 예배당에 나가 새벽예배나 새벽기도를 드립니까? 유일하게 대한민국에만 성행하는 새벽예배가 과연 좋은 걸까요? 나쁜 걸가요? 새벽예배가 있는 대한민국 교회는 아직도 영성이 살아있는 증거라고 떠드는 인사가 있습니까? 그 역시 소경된 인도자이지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 얼마나 안 믿어지면 자기 의를 보태서 구원을 받거나 세상 복을 받으려고 독특한 열심을 냅니까? 하나님께 눈도장 찍혀서 더 많은 복을 받고 구원도 받으려는 속셈이잖아요. 지극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사상은 기독교가 아니라 샤머니즘입니다. 정한 수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우리 며느리 아들 낳게 해주세요’와 판박이 아닌가요?
십일조니 새벽예배니 모두가 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를 삼키는 형국을 조성하는 자들이지요. 화 있을진저,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소경된 자들이여! 무슨 말이지요? 너희들은 모두 심판을 받고 지옥 갈 놈들이야, 이놈들아! ~ 아주 심각한 저주의 선언입니다. 그런데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떠듭니까? 거기서 당장 나와야겠지요. 소경이 소경들을 인도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지면 자기만 손해지요.
바울은 복음에 그 어떠한 사람의 종교 행함을 가치로 여기지 못하게 만전을 기하는 복음주의 자였습니다. 정말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안다면 그리될 수밖에 없지요. 복음을 모르니까 복음도 취하고 중요한 율법도 한 두 개 정도는 행하자는 자들은 성경에 대해 무식하다는 증표입니다. 사도는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 주님의 종이요 일군입니다.
다시 본문 롬1:2절을 봅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복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복음은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신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복음이 구약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일이라고 복음의 기원에 대해 말씀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구약을 말하지요? 아직 신약은 기록전이니까요.
눅24:44절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말씀하시면서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사역에 대하여 증거하는 책이라고 하십니다.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다고요? 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그리고 있다고 증거하십니다. 지금 모든 일을 성취하신 후 부활하셔서 말씀하시는 장면이지요.
<45~48>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45절입니다. 주님이 구약 성경을 열어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까지 깨닫게 하셨다는 데 놀랍지요? 알고 보면 구약 성경 전체가 모두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이지만 성령이 깨닫게 하지 아니하면 닫혀진 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모세가 전한 성막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전제)가 다 IX의 십자가 대속을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준 가죽옷도 십자가 대속이지요. 그리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는 언약도 역시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 언약대로 주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사망 권세를 깨뜨렸으니까요.
이어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율법 행함을 나타내는 게 가인의 제사이고, 십자가 복음을 상징하는 게 아벨의 제사(어린양과 그 기름)입니다. 노아의 방주 역시 십자가 대속을 의미하고, 무지개 언약도 십자가 대속입니다. 아브라함의 횃불 언약과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린 제사 역시 아들 IX의 십자가 대속을 상징합니다.
모세의 시내산 언약에서 첫 번째 돌판은 깨뜨려지고 두 번째 돌판을 주신 것도 옛 언약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고 새 언약(십자가 복음)으로 구원하신다는 의중을 나타내신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한 언약을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삼하7:12절을 보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는데, 다윗 네가 죽을 때에 네 몸에서 날 자식을 세워 그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신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솔로몬을 말하지만 실은 IX를 계시하시는 말씀이지요. 다윗이 죽을 때에 영원한 나라를 세운다는 말씀은 영적인 의미가 내포된 말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역대상 22장 7절 이하를 보면 다윗이 생전에 피를 많이 흘려서 성전 건축을 못하고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하게 된다는 언약을 하십니다. 이때 피를 많이 흘린 다윗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성전을 짓는 솔로몬은 성령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 대속으로 성도의 죄사함이 이루어지면 성령이 임해서 사람 성전을 세우실 것을 계시하는 언약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모든 말씀들이 다 IX의 십자가 대속을 지목한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1: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운을 떼면서 드디어 신약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정황을 속속들이 깨닫고 나서 자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IX만 자랑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곧 복음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바울처럼 이 복음에 미쳐서 복음만 말하고 복음만 전하며 복음만 찬송하는 십자가 외길을 가시기를 소원합니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