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諱)는 사철(師喆), 자(字)는 도명(道明), 성(姓)은 박씨(朴氏)이다. 고려 말기에 반남(潘南) 선생 상충(尙衷)이 도학(道學)과 충절(忠節)로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과 명성이 나란하였는데, 처음 벼슬하여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을 지내다가 본조(本朝)에서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니 드디어 반남의 큰 가문이 되었다. 아들 평도공(平度公) 은(訔)은 우리 태종(太宗)을 섬겨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었다.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이 되니 이로부터 높은 관직을 대대로 이어왔다. 문강공(文康公) 소(紹)에 이르러서는 학문과 절개로 기묘사류(己卯士流)들의 추앙을 받았다. 관직은 사간(司諫)에 그쳤지만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니 세상 사람들이 야천(冶川)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아들 정의공(靖懿公) 응순(應順)은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낳고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니 이분이 공의 6대조이다. 고조(高祖)는 휘 황(潢)으로 반성공(潘城公)의 동생 대사헌(大司憲) 응복(應福)의 손자이고 관찰사(觀察使) 동열(東說)의 아들인데 반성공의 아들인 사복시 정(司僕寺正) 동언(東彥)의 후사(後嗣)로 들어갔다. 관직은 대사헌에 이르렀고 인묘조(仁廟朝)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증조(曾祖) 휘 세상(世相)은 광흥창 수(廣興倉守)이고, 조부 휘 태진(泰辰)은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으로 양대(兩代)에 걸쳐 모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필의(弼義)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둘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부사(府使) 상삼(商三)의 따님으로 경오년(1690, 숙종16) 5월 28일에 공을 낳았다.
겨우 9세 때에 조부와 부친이 연이어 몰(歿)하였는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몸을 상할 정도로 슬퍼하니 성인(成人)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경진년(1700)에 또다시 증조모(曾祖母)의 상을 당하자 10세의 나이로 거듭 최마복(衰麻服)을 입었다. 윤부인(尹夫人)은 가르치고 독려하는 데 법도가 있었고 공은 모친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작은할아버지인 동계공(東溪公 박태순(朴泰淳))에게 학문을 배워 문예(文藝)가 날로 진보하였다.
과거공부를 하기에 이르러서는 글이 입에서 나오기만 하면 전아하고 아름다워서 번번이 높은 등수를 차지하였으나 매번 복시(覆試)에서 낙방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한번은 회위(會圍)에 응시하였는데 공의 인척(姻戚)되는 사람이 함께 앉아서 공이 지은 것을 많이 베끼고 공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나는 나이가 많고 또 연로한 부모님이 계시기에 어쩔 수 없이 자네가 지은 것을 베끼는 것일세. 자네는 내가 먼저 시권(試券)을 내도 용납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즉시 허락하고 원고를 버린 뒤 다시 지었다. 그 사람은 과연 높은 점수로 급제하였고 공은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태연히 여기고 염두에 두지 않았다. 계묘년(1723, 경종3) 비로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선부(選部 이조(吏曹))에서 그가 오랫동안 뜻을 펴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여러 번 천거하여 전주(銓注)하였으나 결국 일명(一命)의 관직도 받지 못하였다. 임술년(1742, 영조18)에 모친상을 당하고 갑자년(1744)에 또 조모(祖母)의 승중상(承重喪)을 당하니 이로부터 과거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요히 자신을 지켰다. 을해년(1755) 7월 6일 졸(卒)하여 10월에 양주(楊州)의 선영(先塋) 안에 장사 지냈고, 병신년(1776) 2월 장단(長湍) 분천리(芬川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은 풍채가 수려하고 성품과 도량이 너그러우며 지조(志操)가 꿋꿋하고 행실을 단속하여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 효성과 우애를 하늘로부터 타고나 조모(祖母)와 모친을 봉양함에 뜻을 먼저 헤아려 마음에 흡족하게 하면서 50년을 하루같이 하니 윤부인이 효자라고 자주 칭찬했다. 둘째 동생이 장성하여 자립할 때까지 가르쳐 길렀고, 계부(季父) 섬기기를 부친이나 다를 바 없이 하였으며 전답(田畓)과 재산을 구분하여 제위전(祭位田) 외에는 모두 봉양하는 데 썼다. 만년에는 가업이 쇠퇴하여 옷과 먹을 것조차 없었는데도 편안하게 거처하였고, 첫부인인 유씨 집안에서 큰 전장을 주었으나 고사(固辭)하고 받지 않았다.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투명하고 밝아서 어려운 일을 당해도 실오리를 칼로 베어내듯이 하였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도 한 번 눈으로 보면 잊지 않았다. 문사(文辭)는 정밀하고 간결하면서 유창하고 명확하며 붓을 쥐면 즉시 글을 이루었으니, 당시 벗들 모두가 공이 일찍 출세하여 조정에 올라가서 나라에 필요한 인재가 될 것이라고 여겼으나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어려움이 계속되어 하나도 재주를 펼치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이 몰한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공의 손자인 종정(宗正)이 묘령(妙齡)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급제하니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 사람들 모두가 공의 불식지보(不食之報)라고 하였다.
첫 부인은 증(贈) 정부인(貞夫人) 진주 유씨(晉州柳氏)로 석조(錫祚)의 따님이고 참판 지발(之發)의 손녀이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태어났고 현숙(賢淑)한 덕이 있었으나 단명(短命)하였다. 둘째 부인은 증 정부인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식(湜)의 따님이고 영의정 시백(時白)의 현손(玄孫)이다.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고 맑았으며 부덕(婦德)을 다 갖추었다. 기사년에 태어나 공보다 14년 앞서 졸하였다. 처음에는 두 부인을 각각 매장하였다가 뒤에 공의 묘에 합장(合葬)하였다. 둘째 부인이 아들 넷을 두니 장남 항원(恒源)은 음서(蔭序)로 첨정(僉正)이 되고 수질(壽秩)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다음은 정원(鼎源), 이원(履源), 승원(升源)이다. 손자로 상우(相宇), 상택(相宅), 도사(都事)인 상용(相容)과 이면항(李勉恒)의 처(妻)는 장남 소생이다. 종엄(宗儼), 종경(宗儆)과 조현채(趙絢采)의 처, 송희정(宋喜鼎)의 처, 이경익(李敬翼)의 처는 둘째 아들 소생이다. 전(前) 정언(正言)인 종정(宗正)과 종도(宗度), 종문(宗文)은 셋째 아들의 소생이고 종기(宗耆)는 넷째 아들의 소생이다. 증손과 현손들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공보다 뒷시대에 태어났으므로 향당에서 따를 수 없었으나 정언군(正言君 박종정(朴宗正))이 문학으로 후생들 중에 빼어나니 그 연원에 비롯된 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공의 언행을 기술하고 내게 와서 묘도문(墓道文)을 청하므로 삼가 차례대로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붙인다.
좋은 행실은 집안에 쌓였고 / 行積于家
뛰어난 재주는 세상에 뛰어났네 / 才優於世
어찌하여 넉넉하게 주고도 / 何賦之豐
운명은 어그러뜨렸나 / 乃命之盭
복록이 몸에 이르지 않으니 / 祿不逮身
그 넉넉함 후손에게 돌아왔네 / 歸羡于後
후손이 명성을 떨쳐서 / 有孫揚名
하늘이 내려준 복을 받았네 / 受天之祜
분천의 언덕이여 / 芬川之岡
현숙한 부인들 좌우에 있네 / 淑媛左右
나의 명에 꾸밈이 없으니 / 我銘非華
비석이여 오래가리라 / 惟石之壽
[주-D001] 좌명 공신(佐命功臣) :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공신들의 칭호이다. 제1차 왕자의 난(1398) 이후 방원(芳遠)이 실권을 장악하자 넷째 아들 방간(芳幹)과 박포(朴苞) 등이 난을 일으켰고, 난이 진압된 뒤 방원이 왕위에 올랐다. 박은은 1394년(태조3) 지영주사(知永州事)로 있을 때부터 이방원을 섬겼고, 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정사 공신(定社功臣)이 되었고, 2차 왕자의 난에도 공을 세워 익대좌명 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주-D002] 기묘사류(己卯士流) :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희생된 사림파 문인들을 가리킨다.[주-D003] 회위(會圍) : 회시(會試)이다.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서 2차로 보는 시험으로 복시(覆試)라고도 한다.[주-D004] 전주(銓注) : 관리들을 평가하여 적절한 관직에 배정하는 것이다.[주-D005] 일명(一命) : 처음으로 임명을 받아 가장 낮은 직급의 관리가 되는 것이다.[주-D006] 승중상(承重喪) : 승중은 종묘(宗廟)나 상제(喪祭)의 중한 책임을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아버지가 죽은 뒤 할머니의 상을 당하여 적손(嫡孫)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례를 주관하고 삼년복을 입었다는 의미이다.[주-D007] 불식지보(不食之報) : 선조가 누리지 못한 음덕(陰德)으로 자손이 복을 받아 잘 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