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규(䅅), 자는 대시(大時), 성은 박씨(朴氏), 관향은 무안(務安)이다. 시조는 진승(進昇)이니 고려조의 국학 전주(國學典酒 전주는 좨주(祭酒)의 별칭)이고, 그 아들 섬(暹)이 현종을 보좌하여 관직이 좌복야에 이르러 드디어 크게 현달하였다. 7대를 내려와 의룡(義龍)에 이르러서는 조선에 들어와 형조 판서를 지냈다. 고려와 조선의 양대 7백여 년에 걸쳐 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동한(東韓)의 명문으로 일컬어졌다. 증조는 의성 현령 증 호조 참의 휘 인호(仁豪)이고, 조부는 개성 도사 증 이조 판서 휘 인(璘)이다. 부친은 단양 군수 증 집의 휘 응선(應善)이니 호는 초정(草亭)인데, 인조 초에 유학(儒學)으로 선발되었다. 모친은 숙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니 호조 판서 파곡(坡谷) 성중(誠中)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갑진년(1604, 선조 37) 9월에 태어났는데, 다섯 형제 가운데 공은 셋째였다. 자라서는 가정의 가르침을 익혀서 형 현감 수(𥞼), 참봉 유(𥠷), 아우 진사 미(𥠦)와 함께 모두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 봄에는 부친상을 당하고 또 중형의 상을 당했다. 이윽고 오랑캐의 변고를 만나 남양(南陽)의 해도(海島)로 병화를 피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 15)에는 피난길이 무안(務安) 땅에 이르렀는데, 겨울에 둘째 아우가 죽었다. 무인년(1638, 인조 16)에는 백씨와 함께 다시 남양의 옛집에 모이고, 겨울에 또 막내 동생의 죽음을 당하였다. 몇 년 사이에 난리를 피해 다니는 가운데 참혹한 상화(喪禍)가 거듭되고 고달픔이 겹쳐 병이 되어 거의 몸을 보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정해년(1647, 인조 25)에 처음 벼슬길에 나가서 사산 감역(四山監役)이 되었다. 경인년(1650, 효종 1)에는 사재 주부(司宰主簿)에 승진되었다가 감찰로 옮기고 형조 좌랑으로 옮겼다. 신묘년(1651, 효종 2) 봄에 대간(臺諫)의 계청에서 ‘국가의 제도 가운데 음직(蔭職)을 내림에 있어서 사마시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삼조(三曹)의 낭관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이끌어서 체직하기를 논함에, 곧 목천 현감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652, 효종 3) 겨울에 재해로 인하여 민생에 손상이 있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무술년(1658, 효종 9)에 옹서 별제에 임명되고, 이윽고 사평으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평릉 찰방이 되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임인년(1662, 현종 2)에 상운 찰방에 임명되고, 계묘년(1663, 현종 4) 겨울에 관직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양재역으로 귀양갔다가 세밑이 다 되서야 풀려서 돌아와 집에서 지냈다.
계축년(1673, 현종 14) 6월 1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0세였다. 남양의 북쪽 천곡(泉谷) 축좌(丑坐) 언덕에 안장했다. 뒤에 장손 징(澄)이 귀하게 됨으로써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공은 성품이 충후하여 덕기(德器)가 있었으니 세상에서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만년에 벼슬길에 나가서 내외의 낮은 관직에 전전하다가 그쳤으니, 비록 지위는 그 덕에 상응하지 않았으나 수명을 누림이 넉넉하고 자손이 번성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경사가 중첩했으니, 사람들이 공이 선을 행한 보답이라고 하였다.
부인은 증 숙부인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니 응교 빈(贇)의 따님인데, 만력 병오년(1606, 선조 39)에 태어나고, 임술년(1622, 광해군 14)에 공에게 시집오고, 경인년(1650, 효종 1) 2월 8일에 돌아가시니 연세가 겨우 45세였다. 묘소는 공의 묘소 뒤 몇 걸음 떨어진 곳의 계좌(癸坐) 언덕에 있다.
자녀는 6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창하(昌夏)는 수직으로 가선대부 증 이조 참의이고, 다음 창도(昌道)는 양자로 나가서 백부의 뒤를 이었고, 다음은 창은(昌殷)이고, 다음은 창주(昌周)이고, 다음은 승지 창문(昌文)이고, 막내는 창동(昌東)이다. 사위는 전주 이양래(李陽來)이니 생원이다. 측실에서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창기(昌基)이고, 딸은 현감 신성원(愼聖源)과 첨사 허빈(許彬)의 첩이 되었다. 창하는 정실에서 네 아들을 두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우윤이 된 징(澄), 참봉 호(浩), 해(瀣), 정(淨)이고 측실에서 두 딸을 두었는데 심우하(沈友河)와 이진영(李震英)에게 출가하였다. 창도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침(沈),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된 정(涏), 혼(混), 잠(潛)이고 사위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이 된 광주(廣州) 이윤(李允)과 전주(全州) 이태운(李泰運)이다. 창은의 한 아들은 기(沂)이고 한 서녀는 황근(黃瑾)에게 출가하였다. 창주의 한 아들은 면(沔)이다. 창한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택(澤), 성(渻), 경(澋)이고 사위는 진사인 초계(草溪) 정규주(鄭規柱), 전주(全州) 이무년(李茂年), 진사인 초계 정희세(鄭熙世)이다. 창동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제(濟)이고, 사위는 한양(漢陽) 조태명(趙台明)과 현감인 도강(道康) 김도언(金道彦)이다. 이양래의 세 아들은 상린(祥麟), 성린(聖麟), 진사 서린(瑞麟)이고 두 사위는 순흥(順興) 안중원(安重元)과 진주(晋州) 유광수(柳光壽)이다. 창기의 한 아들은 현휘(賢暉)이다. 내외의 증손이 거의 90명이고, 지금 5,6대에 이르러 자손이 5백여 명이나 되니 아, 번성하기도 하다.
우윤공의 둘째 아들 이문(履文)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이 되었고 호가 고심재(古心齋)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유명하다. 그 아들 사정(思正)이 나와는 척의(戚誼)가 있다고 하여 나에게 행장을 주면서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하니,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명을 지어 붙인다.
시례로 가학을 전하고 / 詩禮傳家
효제로 인을 행하였네 / 孝悌行仁
선을 쌓아 경사가 넉넉하니 / 積善餘慶
자손이 번성함이 마땅하네 / 宜爾子孫振振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