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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왕고(王考) 운와(芸窩 홍중성(洪重聖)) 부군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만년에 조후계(趙后溪 조유수(趙裕壽)), 이사천(李槎川 이병연(李秉淵)) 등 여러 공과 함께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좋은 날 날씨가 화창할 때 날을 잡아 번갈아가며 모이니 그 문채와 풍류가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사람들은 이 모임을 향산(香山)과 동락(東洛)의 뛰어난 모임에 비겼다. 이때에 서주 조공이 문단의 후진(後進)으로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의 고사를 따라 고고하게 그 자리에 참석하여 잇따라 수창(酬唱)하였는데 왕왕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구를 지어내니 당세 사람들이 미담으로 전하였다. 양호(良浩)는 어릴 때 그 자리의 구석에 앉아 어른들의 지팡이와 안석(案席)을 받들었으니 지금까지도 그 광경이 눈에 또렷하다. 서주의 손자 시랑군(侍郞君 조윤대(曺允大))이 공의 유사(遺事)를 적어와 묘갈에 새길 글을 부탁하니, 지난날을 추억함에 서글픈 마음이 들어 삼가 행장을 살펴 서술한다.
공은 휘(諱)는 하망(夏望)이고 자(字)는 아중(雅仲)이다. 창녕(昌寧) 사람으로 신라 때의 부마(駙馬) 계룡(繼龍)의 후예이다. 고려조에 여덟 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했고, 아조(我朝 조선)에 이르러 절의와 공훈이 있는 이들이 대대로 이어졌다. 증조 휘 문수(文秀)는 문장과 서법으로 성대한 명성이 있었고 호를 설정(雪汀)이라 하였으며 공조 참판의 관직을 지내고 하령군(夏寧君)에 봉해졌다. 조부 휘 한영(漢英)은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절의를 지켜 청나라 오랑캐에게 항거하면서 화의(和議)를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심양(瀋陽)의 감옥에 붙잡혀가 구금되었는데 3년 동안 굴하지 않다가 방환되니 명성이 중화(中華)와 오랑캐들에게 알려졌다. 관직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고 부친의 작위를 물려받아 하흥군(夏興君)이 되고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부친 휘 헌주(憲周)는 금구 현령(金溝縣令)을 지냈다. 모친 증(贈) 정부인(貞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대제학 일상(一相)의 따님이자 월사(月沙)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의 증손이다. 현령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독약을 먹고 먼저 졸하여 열녀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숙묘(肅廟) 임술년(1682, 숙종8)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인물이 빼어나며 출중하고 눈썹과 눈이 그림과도 같았다. 일찍이 서당의 스승에게 글을 배울 때 증씨(曾氏 증선지(曾先之))의 《사략(史略)》을 수업하였는데 전국(戰國) 시대 이후로는 스승이 번거롭게 가르칠 필요가 없었으니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겨우 10세를 넘겼을 때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했는데 호곡하며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중에도 밤낮으로 글공부에 힘써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웠다. 조금 장성해서는 스스로 기개 있는 사람이라 자부하여 옛사람의 훌륭한 절조를 사모하고 세속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마침내 책을 짊어지고 산사(山寺)로 들어가 수년 동안 공부하다가 돌아왔다. 힘써 성균관에 나아가 시험 때마다 선두를 차지하여 20여 차례나 1등을 하니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신묘년(1711, 숙종37)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사에 1등하는 것을 드높은 선발로 여기는 풍습이 있어 문학과 지위와 명망이 당세 사람들을 복종시킬 만한 사람이 아니면 1등으로 올릴 수가 없었다. 합격자의 이름이 발표되었을 때 이공(李公) 종성(宗城)이 2등을 차지하니 사람들이 혹 애석하게 여겼는데, 주시관(主試官)이었던 김 상서(金尙書) 진규(鎭圭)가 웃으며 “저 사람이 불행하게도 이 사람을 만났으니 누가 감히 선두를 다투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선비들의 인망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임인년(1722, 경종2)에 장릉 참봉(章陵參奉)을 제수하였는데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계묘년(1723)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배수하니 부득이 명에 응하였고, 자리를 옮겨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가 어떤 일이 있어 체직되었다.
병오년(1726, 영조2)에 사재감 봉사(司宰監奉事)를 배수하니 관직을 버리고 여강(廬江)의 별서(別墅)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였다. 연말에 다시 의금부의 직임을 배수하고 자리를 바꾸어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가 되고 승진하여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이 되었다. 영남의 적도들이 평정되자 회맹제(會盟祭) 때의 봉혈관(奉血官)을 맡아 승진하여 주부(主簿)가 되고 승진하여 공조 좌랑이 되었다.
기유년(1729, 영조5)에 외직으로 나가 의령 현감(宜寧縣監)이 되었다. 신해년(1731)과 임자년(1732)의 대기근을 만나 곡식 수천 곡(斛)을 마련하여 호구를 계산해 분배하여 구휼하니 온 경내에 여윈 자가 없었다. 계축년(1733)에 새로 부임한 관찰사와 사이가 좋지 못하자 수령의 인끈을 던져버리고 향리로 돌아가니 백성들이 비석을 새겨 덕을 칭송하였다.
병진년(1736)에 정시(庭試) 갑과(甲科)에 1등으로 뽑혔는데 음관(蔭官)으로 받는 자급(資級)은 끝까지 도달한 터라 곧바로 통정(通政)으로 승품되고 중추부(中樞府)에 부직(付職)되고 즉시 판결사를 배수하였다. 자리를 옮겨 병조 참지가 되고 승진하여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상이 주강(晝講)에 납시어 공에게 경서의 뜻을 아뢰라고 명하니 공이 견줄 만한 사물을 인용하여 비유해가면서 정밀하고 은미한 뜻을 분석해내고 글에 따라 뜻을 밝혀내면서 아울러 규계(規戒)를 올리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후일에 상이 강연에 임하였을 때 특별히 공을 불러 “그대의 문학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는데 지난번 주강에서 《주역》에도 조예가 깊음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겨울에 휴가를 청해 여호(驪湖)에서 성묘하였는데 상이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였다. 당시 상이 직접 납시어 죄수에 대한 처결을 논의하게 되어 문안(文案)이 번다하였는데 상이 돌아보며 공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할 수 없다.”라고 하고 특명으로 자리를 형방 승지(刑房承旨)로 바꾸니, 일처리가 상의 뜻에 맞았으므로 상이 몹시 칭찬하였다.
정사년(1737, 영조13)에 무주 부사(茂朱府使)에 제수되었다.
기미년(1739)에 체직되어 예조 참의를 배수하였는데,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귀환하기 전에 승지에 제수되고 얼마 뒤 체직되었다.
경신년(1740)에 상의 휘호(徽號)를 정청(庭請)하였는데 다섯 번 계문(啓文)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차 여섯 번째로 계문을 올리려 하였는데 관각의 여러 공이 더 쓸 말이 떨어져 붓을 잡지 못하다가 날이 벌써 저물었다. 공이 군직(軍職)의 직함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었는데 대신(大臣)이 공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고 부탁하니 즉석에서 붓을 잡고 종이를 펼쳐 쓱쓱 지어내어 잠깐 사이에 완성하였다. 자리에 가득한 이들이 둘러서서 보며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계문이 들어간 즉시 윤허를 받으니 모두 혀를 내두르며 “이 영감(令監)이 아직도 문임(文任)을 맡지 못한 것은 조정의 과실이다.”라고 하였다.
신유년(1741)에 대사간을 배수하고, 여름에 천거되어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되고 얼마 뒤 파직되어 관직을 떠났다.
임술년(1742)에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어 경포대(鏡浦臺)를 중건하고서 한가한 날에 가서 시를 읊조리니 공이 지은 상량문이 당시에 회자되었다. 갑자년(1744, 영조20)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을축년(1745)에 묘당에서 아뢰어 승문원 부제조로 차임되었는데 관직을 사양하는 소장을 올리는 차에 당시의 폐단을 극구 아뢰면서 과제(科制), 관방(官方), 양역(良役), 군정(軍政)에 걸쳐 구습을 혁신하고 제도를 고쳐 조목별로 나열한 것이 사리에 합당하였다.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칭찬하고서 병조 참의를 제수하였다.
공은 소싯적에 야밤에 독서한 탓에 눈에 백태가 끼는 질환을 앓았는데 만년에 더욱 심해져서 청량한 지역의 벼슬을 구하였다. 병인년(1746)에 영월 부사(寧越府使)가 되어 고적을 보고 감흥이 일어 시로 나타내었다. 그중 한 연(聯)에 “예부터 월중은 세 번 사양한 곳이요, 지금 강가는 구의산이로다.〔從古越中三讓地, 秖今江上九疑山.〕”라고 하니 당세 사람들이 전하여 외우면서 영월 땅에 이전에는 이런 작품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 금강정(錦江亭)에 걸린 시운에 차운하였는데 그중 두 연에 “금강의 정자 텅 빈 채 밝은 달 와 있고, 푸른 복사꽃 떨어짐에 오랜 친구 오누나. 사롱 걸린 옛 벽엔 거미줄 오래되었고, 신선 패옥 차고 하늘 조회 가느라 학 날개 재촉하네.〔錦水亭空明月在, 碧桃花落故人來, 紗籠古壁蛛絲老, 霞珮朝元鶴羽催.〕”라고 하였다. 이 시가 도성에까지 전해지니 유 시랑(兪侍郞) 건기(健基)가 무릎을 치며 낭랑히 외고 말하기를 “시어가 모두 신선의 말이니 이 노인이 참으로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한 해 남짓 지나 벼슬을 버리고 양호(楊湖)의 전장(田莊)으로 돌아갔는데 병에 걸려 도성으로 와서 치료를 받다가 마침내 7월 초나흘에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니 향년 66세였다. 9월에 양근(楊根) 수남(水南)에 장사 지냈고 10년 뒤에 여주(驪州) 가산리(檟山里) 오좌(午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인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현감 태진(泰鎭)의 따님이자 이조 판서 대제학 택당(澤堂) 휘 식(植)의 현손이다. 총명하며 지혜로우며 통달하며 명민하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며 내외의 친족들과 화목하여 여사(女士)의 법도가 있었다. 계해년(1683, 숙종9)에 태어나 신해년(1731, 영조7)에 졸하였다. 처음에는 가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가 공이 별세했을 때 옮겨서 합장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은 우뚝하고 고고하여 진세(塵世)를 벗어난 의표(儀表)가 있었다. 성품이 도도하고 호쾌하여 자신만만히 홀로 걸어 나가면서 남들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적었다. 기억력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고 고금의 일에 대해 박식하게 꿰뚫고 있어 글 짓는 모임과 술자리에서 담론이 불꽃처럼 나와 항상 좌중이 경도되었다. 문장이 호한(浩瀚)하여 각 문체를 두루 잘 짓는 중에 시를 더욱 잘하여서 비록 하나의 운으로 일백 편을 짓더라도 거침없이 미리 얽어놓은 듯 지어냈는데 전아하며 아름답고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 문단의 노장들이 모두 옷깃을 여미고 공을 높이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또한 스스로 귀중하게 여기지 않아서 항상 말하기를 “글은 그 의기(意氣)에 걸맞게 하는 데 불과할 따름이다. 이리저리 각고의 힘을 들여 다듬고 꾸며서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자는 또한 속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붓에 먹을 듬뿍 적셔 한껏 휘두르고 종이와 먹이 이리저리 엇갈릴 정도로 글을 지어놓고도 번번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작품들이 대부분 산실(散失)되었고 약간 권만 남아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당초 공이 포의(布衣) 신분일 때부터 중한 명망이 있어 나라의 큰 문장을 윤색하면서 관각을 활보할 것으로 당세 사람들이 기대하였다. 그런데 뒤늦게 벼슬길에 올랐을 때는 공보다 후배이고 어린 사람들이 공경의 지위에 포진하고 있었다. 공은 하급 관료의 자리에서 머물러 있고자 하지 않아 매번 외직을 구하여 스스로 산수(山水) 속에서 자유롭게 지냈다. 국정을 맡은 자가 공이 침체되어 있는 것을 혹 애석하게 여기면 공은 웃으며 응대하기를 “이는 그대들의 일이다. 이 늙은이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들 오만하다고 지목하여 마침내 관직이 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음에서 작록을 가벼이 여겨 시속에 합치되기를 구하지 않으니 식자들이 이 때문에 더욱 공을 높게 여겼다. 뒤에 임금이 내린 제문에 “진동보(陳同甫)처럼 기운을 토하니 흰머리가 이리저리 났고, 물러남에 비방을 얻었으나 명성도 따라왔네.〔陳同吐氣, 蒼髮差池, 退之得謗, 名亦相隨.〕”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본말을 알 수 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공의(公議)를 막기 어려워 조정에서 장차 청요직을 주려 하였다. 승문원 부제조의 직임은 매우 정밀히 잘 골라 뽑은 것이자 문형(文衡)으로 가는 계제(階梯)가 되는 것이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공이 갑자기 세상을 뜨니 탄식하며 안타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녹봉으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고을을 다스릴 때에도 반드시 신주를 임시로 받들어 모시고 기제사 한 달 전마다 바깥에 마련한 장소에 머무르며 재계하고 목욕하고 제사를 봉행하면서 직접 제수를 검수하였는데 정성스럽고 공경하고 슬퍼하고 사모하는 것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동기(同氣) 사이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중형(仲兄) 섬기기를 엄부(嚴父) 모시듯 하였으며 누이와 동생들 보호하기를 갓난아이 보호하듯 하였으며 고아가 된 조카들을 돌보기를 자기 소생을 돌보듯 하였다. 이것이 집안에서 있을 때의 아름다운 행실이다.
모두 아들 다섯을 두었다. 장남 명구(命九)는 문학과 행실이 있었는데 관례를 올리자마자 요절하였다. 차남은 명오(命五)인데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윤세(允世), 윤후(允厚), 윤항(允恒)이고 딸은 문과에 급제하고 지금 참의로 있는 홍낙항(洪樂恒)에게 시집갔다. 윤세의 아들은 학진(學振)이고 손자는 석로(錫路)이니 실로 공의 제사를 주관한다. 그다음은 명백(命百)인데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윤미(允美)이고 딸들은 오완(吳琬), 성관주(成觀柱), 조경채(趙絅采)에게 시집갔다. 윤미의 아들은 현진(玄振)이다. 그다음은 명억(命億)인데 현감을 지냈고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윤우(允遇), 현감을 지낸 윤매(允邁), 지금 교리로 있는 윤수(允遂)이고 딸들은 지금 군수로 있는 윤광심(尹光心)과 윤형식(尹亨植)에게 시집갔다. 윤우의 아들은 시진(始振)과 호진(好振)이고 윤매의 아들은 진사인 홍진(鴻振)이다. 그다음은 명준(命峻)인데 군수를 지냈으며 출계하여 계부(季父)의 후사가 되었고, 외아들 윤대(允大)가 문과에 급제하고 지금 참판으로 있다. 윤대의 아들은 봉진(鳳振)이다. 나머지 자손은 모두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선비는 지조를 중하게 여기고 / 士以志操爲重
문장은 풍격을 으뜸으로 삼으니 / 文以氣韻爲宗
뜻 높으면 근심과 흔들림 없고 / 志高則無所充詘
기가 창성하면 드러냄에 장중해지네 / 氣昌則發之舂容
예부터 어려운 것들을 / 自古攸難
지금 공에게서 보도다 / 今見于公
스무 번이나 선비들 속에서 으뜸 되었으나 / 廿魁多士
스스로 잘했다 여기지 않았고 / 不自爲工
두 차례 궁궐 뜰에서 과시(科試)에 선두 되니 / 再冠大庭
기북이 마침내 텅 비었어라 / 冀北遂空
붉은 계수나무 홀로 뽑으니 / 丹桂孤挺
수풀 속에서 출중하게 빼어나고 / 秀出灌叢
질장구 어지럽게 울리는 중에 / 瓦缶亂鳴
홀로 옥경(玉磬)과 쇠북 연주하였도다 / 獨戛球鐘
벼슬자리는 흙과 지푸라기 같고 / 簪組土芥
산수는 벗처럼 따르니 / 山水朋從
여호는 맑고 빠르게 흐르고 / 驪湖淸駛
영월산은 높고 우뚝하여라 / 越峀巃嵸
호방하게 읊조리고 크게 노래함에 / 豪吟大唱
괴이한 빛이 무지개를 뚫으니 / 光恠干虹
신선 패옥 울리며 표연히 떠나신 자리 / 霞珮飄然
넉 자의 봉분이 남아 있어라 / 四尺遺封
[주-D001] 대사간 …… 묘갈명 : 이 묘갈명의 말미에 자손과 사위들을 언급하면서 현직(現職)을 말하는 것은 참의 홍낙항(洪樂恒), 참판 조윤대(曺允大), 교리 조윤수(趙胤秀), 군수 윤광심(尹光心)이다. 《승정원일기》에서 이들 네 사람의 직함이 인접한 때를 찾아보면, 홍낙항은 1799년(정조23) 3월부터 1801년(순조1) 2월까지 호조 참의로, 조윤대는 1800년 2월부터 1801년 6월까지 이조와 병조와 예조의 참판으로, 조윤수는 1799년 4월부터 7월까지 부교리와 교리로 호칭되고 있다. 윤광심은 기록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 묘갈명은 1799년에서 1800년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주-D002] 향산(香山)과 …… 모임 : 당(唐)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치사(致仕)한 뒤 향산에 기거하면서 향산거사(香山居士)라 자호하고 호고(胡杲), 길교(吉皎) 등 여덟 사람과 함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라는 모임을 결성한 일이 있다. 또한 송(宋)나라 때 문언박(文彦博)이 이 향산구로회를 모방하여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등 명사들을 모아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결성하였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宋史 卷313 文彦博列傳》[주-D003] 사마공(司馬公)의 고사 : 낙양기영회의 인사들 중 다른 이들은 모두 70대였으나 사마광만이 64세의 나이로 참여했던 것을 가리킨다.[주-D004] 영남의 적도 : 영조가 등극한 후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과 소론의 과격파가 일으킨 무신란(戊申亂)의 적도를 가리킨다.[주-D005] 규계(規戒) : 원문에는 ‘戒’가 ‘戎’으로 되어 있으나, 《서주집(西州集)》 권11 〈부록(附錄) 묘갈명〉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주-D006] 예부터 …… 구의산이로다〔從古越中三讓地, 秖今江上九疑山.〕 : 월중은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영월 경내에 단종(端宗)이 유폐되었던 청령포(淸泠浦)를 뜻하기도 하는 한편 중국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맏아들 태백(泰伯)이 막내인 계력(季歷)에게 세 번이나 천하를 양보하고 달아나 은거한 오월(吳越) 지방을 뜻하기도 한다. 태백의 고사는 《논어》 〈태백〉에 보인다. 이는 곧 단종이 숙부인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을 말한 것이다. 구의산은 중국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에 있는 산으로 남쪽을 순수(巡狩)하다가 붕어한 순(舜) 임금을 장사 지낸 장소라고 전해진다. 이는 곧 단종의 장릉(莊陵)을 가리킨 것이다.[주-D007] 사롱(紗籠) : 벽사롱(碧紗籠)의 준말로, 먼지가 묻지 않도록 푸른 깁으로 감싸서 벽에 쓴 시문을 보호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시판(詩版)을 가리킨다.[주-D008] 진동보(陳同甫)처럼 기운을 토하니 : 진동보는 남송(南宋) 때의 진량(陳亮)이다. 기운을 토했다는 것은 훌륭한 대책(對策)을 잘 지어 올렸다는 말이다. 〈진동보에게 답한 편지[答陳同甫]〉에서 주희(朱熹)는 진량이 과거에 급제한 것을 말하면서 “오늘 비로소 후생 가운데에서 한번 구기(口氣)를 토했다.[今日始於後生叢中, 出一口氣.]”라고 하였는데, 이때 구기를 토한다는 것은 사설(辭說)을 토하여 문장으로 짓는다는 뜻이다. 《晦菴集 卷36》[주-D009] 기북(冀北)이 …… 비었어라 : 조하망이 뽑힌 것으로 인재가 다 갈무리되었다는 말이다. 기북은 중국에서 준마(駿馬)가 많이 나는 지역으로 인재의 보고로 비유되곤 한다. 한유(韓愈)의 〈송온조처사서(送溫造處士序)〉에 준마를 잘 알아보는 백락(伯樂)이 기북을 한 번 다녀가자 말 떼가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주-D010] 붉은 계수나무 : 문과에 급제한 것을 가리킨다. 진 무제(晉武帝) 때 극선(郤詵)이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1등으로 뽑히자 그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 꺾고,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을 손에 쥔 것과 같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주-D011] 수풀 …… 빼어나고 : 함께 시험을 본 수많은 선비 가운데 독보적이었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