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양호의 대부(大父)인 운와부군(芸窩府君 홍중성(洪重聖))은 문장으로 세상에 명성이 있어서 함께 교유한 이들이 모두 한 시대의 홍장(鴻匠)이었다. 그중 후계(后溪) 조공(趙公)만이 장수(長壽)를 누려서 늙어서까지 서로 왕래하며 수창(唱酬)하였으니 당시 양호는 아직 어릴 때이지만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운와부군이 세상을 떠나자 조공은 시를 지어서 곡(哭)하며 애도하였다. 양호가 겨우 관(冠)을 쓸 나이가 되었을 때 냇가 동산의 정자에서 공을 배알(拜謁)하였는데 수려한 눈썹과 야윈 얼굴로 그림 속 신선인 양 탈속한 기운이 있으니 마음으로 경모(傾慕)했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의 증손(曾孫)인 중진(重鎭)이 공의 행적을 모아 강가의 언덕으로 찾아와서 비석에 새길 글을 부탁하였는데 소자가 어찌 공을 잘 알겠는가. 그러나 공손히 이 일을 맡아 이름을 의탁하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기에 삼가 행장을 살펴보고 서술한다.
공의 휘는 유수(裕壽)이고 자는 의중(毅仲)이며 씨(氏)는 풍양(豐壤)에서 나왔다. 예조 판서 휘(諱) 형(珩)의 손자이고 현감(縣監) 휘 상변(相抃)의 아들이다. 모친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부윤(府尹) 수홍(守弘)의 따님이다. 공은 계묘년(1663, 현종4) 12월 1일에 태어났다. 품에 안겨 있을 때 손으로 획을 그어 글자를 이루니 모부인이 기이하게 여겼다.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서는 이해가 빨라 왕왕 사람들을 놀래키는 말을 하였으며 성균관(成均館)에 다니게 되어 여러 차례 높은 등급을 차지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9) 예부(禮部)의 복시(覆試)에 응시하였다. 농암(農巖) 김공(金公) 창협(昌協)이 고관(考官)이 되었다가 마침 돌아가려고 할 때에 낙방한 시권(試券) 중에서 온통 빨갛게 칠해진 것을 보고서 급히 가져다가 붉은 칠을 지운 뒤 크게 읽고서 말하기를 “이 시는 우리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뽑아서 장원에 두었다.
기사년(1689) 곤궁(坤宮)이 사저(私邸)로 물러나자 공은 도읍에 염증을 느끼고 호남으로 내려가 자연 속에서 노닐었다. 갑술년(1694) 희릉 참봉(禧陵參奉)을 배수(拜受)하고 이어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로 옮겼는데, 공은 맑고 꼿꼿하며 강직하고 시원스러워 녹사(祿仕)는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며칠 뒤에 곧바로 파직되어 돌아왔다.
태학사(太學士 홍문관 대제학) 박공(朴公) 태상(泰尙)이 절일제(節日製)를 주관하였는데 시권을 탁명(拆名)한 뒤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모(趙某)의 글을 보았는데 근래에 보기 드문 것이었소. 이번에 나라를 위해서 한 사람의 문형(文衡)을 얻고자 정신을 집중하고 묵묵히 찾아보았지만 끝내 얻지 못하였으니 이상한 일이구려.”라고 하였다. 공이 이날 배앓이를 하여 시험을 치러 가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사람들이 그 말을 전해주자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얼마 후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문장과 사서(史書)로 스스로 즐겼으며 중간에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로 나아갔다.
병술년(1706, 숙종32) 형조와 공조의 낭관을 배수하고 연풍 현감(延豐縣監)이 되니 연풍은 새재〔烏嶺〕 아래의 거칠고 궁벽한 지역이다. 공이 우연히 끊어진 절벽의 덩굴 속에서 물이 흐르는 폭포를 발견하고 즉시 명을 내려서 근원을 트고 물줄기를 인도하자, 구슬을 뿌리는 것처럼 쏟아지는 물줄기가 아래로 떨어져 맑은 소를 이루었다. 드디어 그 위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수옥(漱玉)이라고 하였다. 대나무 가마를 타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가서 폭포 소리와 덩굴의 그림자 속에서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니 백성들이 모두 에워싸고 바라보며 놀라서 말하기를 “우리는 이 산에서 태어나고 늙었거늘 이렇게 기이한 경치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라고 하니 연풍이 이로부터 산수굴(山水窟)이라고 일컬어졌다. 임기를 채우고 돌아오니 백성들이 절벽에 사실을 새겨서 기렸다.
계사년(1713)에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로 있다가 흡곡 현령(歙谷縣令)에 제수되었다. 흡곡현에는 시중호(侍中湖)가 있었는데 물이 맑아 노닐 만하였으므로 아름다운 놀잇배를 만들어서 물길을 따라 오르내렸다. 백성 중에 첩(牒)을 가지고 물가의 언덕에 서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소동(小童)에게 명하여 밧줄을 던져 첩을 묶어서 당겨오게 하고 제사(題辭)를 다 쓴 뒤에는 다시 밧줄에 묶어서 돌려주게 하였다. 직접 대면(對面)하여 호소하고자 하는 이가 있으면 불러서 배로 올라오게 하였는데 어떤 이는 판결이 끝나도 떠나려 하지 않으면서 “저 또한 공께서 노니는 것을 따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경내의 사람 모두가 부모처럼 떠받들었고 임기가 차서 귀환하자 철비(鐵碑)를 세워 사모하는 마음을 붙였다.
임인년(1722, 경종2) 익찬(翊贊)에서 호조(戶曹)의 낭관(郎官)으로 옮기고 옥천 군수(沃川郡守)로 나가니 옥천 역시 풍경이 좋은 고을이었다. 당시 큰 흉년을 당하자 공이 곳간을 열어서 구휼(救恤)해 주니 백성들 중에 굶어 죽은 이가 없었고,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상으로 표리(表裏 옷의 안감과 겉감)를 내려 포상하였다. 계묘년(1723, 경종3)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갑진년(1724)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배수하고,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으로 옮겼으며 얼마 후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풍악(楓嶽 금강산(金剛山))은 예전에 노닐던 곳인데 부임한 이튿날 산승(山僧)이 상신(霜信)을 알려오자 해낭(奚囊)과 술을 담은 호리병을 들고 표연히 떠나서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를 심혈을 기울여 표현하고 작은 돌과 물줄기까지도 모두 시로 읊었다. 이는 이름난 산과 기이하게 만난 것이자 시인들의 능사(能事)이다. 이듬해에 물러나 돌아왔다.
정미년(1727, 영조3)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에 조용(調用)되고 전부(銓部)의 천거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배수하니 음사(蔭仕)로서 청선(淸選)이었다. 얼마 후 무주 부사(茂朱府使)에 제수되자 적상산(赤裳山)과 구천동(九天洞)을 두루 찾아다녔고, 한풍루(寒風樓)와 환수정(喚睡亭)을 중수하여 면모를 일신(一新)하고 앉아서 휘파람을 불며 다스리다가 무신년(1728)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공은 풍모가 높고 운치가 우아하여 관직에 얽매이고자 하지 않았는데, 외직(外職)으로 나갈 때에는 번번이 풍경이 아름다운 고을로 가게 되어 땅은 사람으로 드러나고 시는 경치와 만나 가려지고 숨겨진 것을 찾아내고 기이한 변화를 드러내니 아마도 조물주가 그렇게 시킨 것이리라. 책을 흩어놓고 시를 읊어 술잔을 들고 푸른 산을 마주하면서 담담하게 자신이 관리인 것조차 잊은 듯하였지만 백성들은 편안하고 송사(訟事)는 투명하여 일처리가 모두 잘되었다. 식자(識者)들이 이르기를 공의 시와 문장을 보면 정사(政事)에도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무주의 골짜기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동교(東郊)의 신촌(新村) 한 구역에 바위와 나무에 기대어 집을 지었는데 세차게 흐르는 물이 폭포를 이루고 각진 못과 굽은 시내가 온갖 꽃과 기이한 바위로 뒤덮인 그윽하고 조용한 곳에 자리하였다. 그 앞에 작은 당(堂)을 세워 유주(柳州)의 광오(曠奧)라는 말을 편액으로 쓰고, 각건(角巾)에 단려장(丹藜杖)으로 그 안에서 노래하고 시를 읊었다.
송석헌(松石軒) 송공(宋公) 성명(成明)이 물러나 동호(東湖)에 거처하자 가벼운 배와 작은 나귀로 연이어 왕래하였다. 그리고 운와공(芸窩公),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해서(溪西) 최주악(崔柱岳), 교서(橋西) 조하기(曺夏奇),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는데 겸재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고운 얼굴과 흰머리에 지팡이와 나막신이 뒤섞여 있고 악기 줄을 퉁기고 바둑돌을 희롱하면서 술잔을 돌리고 운(韻)을 맞추어 초연히 속세를 벗어난 풍모가 있으니, 당시 사람들이 향산구로(香山九老)에 비유하였고 심지어 그림으로 그려서 전하는 이도 있었다.
임자년(1732, 영조8) 70세가 되자 아들이 참판으로 시종(侍從)의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추은(推恩)하여 통정(通政)으로 직질(職秩)이 오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배수하였다가 돈녕부도정 조사오위장(敦寧府都正曹司五衛將)으로 옮겼다.
계축년(1733, 영조9)에는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决事)를 배수하였다. 이 상국(李相國) 태좌(台佐), 김 판서(金判書) 시환(始煥), 정 판돈(鄭判敦) 수기(壽期)는 기사(耆社)의 원로들이었는데 또 기로소에 사사(私社)라 이름하고 공과 교서(橋西) 조공(曺公 조하기)을 맞이하여 끼워주었다. 이때 여러 공의 자제들은 귀현(貴顯)의 관직에 이른 이들이 많았으므로 날을 정하여 번갈아가며 잔치를 베풀고 술잔을 바치며 헌수(獻壽)하여 금옥(金玉)이 휘황하니 사람들이 태평한 시대의 성대한 일이라고 일컬었다.
을묘년(1735)에 참판공(조적명(趙迪命))이 부모 봉양을 위해 장단 부사(長湍府使)가 되니 공이 잠시 가서 박연폭포(朴淵瀑布)와 적벽(赤壁)을 유람하였다. 무오년(1738) 또 참판공이 공을 모시고 춘천부(春川府)로 가자, 송석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청평(淸平)과 곡운(谷雲)의 승경지를 유람하였다. 공의 나이가 이미 여든에 가까웠지만 높은 곳에 오르고 험한 곳을 지나면서도 발걸음이 나는 듯하였다. 신유년(1741) 8월 17일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니 장단(長湍) 만종음(萬宗音)의 해좌(亥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 어려서부터 성대한 명성이 있었고 집안에서 배움에 연원이 있어 신중하게 법도를 지키면서도 문인들의 꼬장꼬장한 태도는 전혀 없었다. 오직 시에 대해서는 묘리(妙理)를 깨달아 심오한 경지에 이르러서 구절을 엮고 글자를 놓음에 살갗을 파헤치고 골수를 더듬는 듯하여 심오한 뜻과 기이한 문사를 내놓아 항상 다른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토해내듯이 하였다. 비유하자면 누에고치 하나로 옷감을 짜는 듯, 위태로운 가락을 외로이 연주하는 듯하여 눈으로 보는 이는 얼굴빛이 변하고 귀로 듣는 자는 정신을 빼앗기니 사림(詞林)의 초절(超絶)한 기예(技藝)라고 할 만하였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말하기를 “전에 모(某)는 1년에 시 한 수를 짓는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의 시를 보니 참으로 기이한 재주이다. 반드시 후세에 전해지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라고 하였고,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는 말하기를 “이와 같은 재주와 풍격(風格)으로도 진사도(陳師道)와 황정견(黃庭堅)의 문로(門路)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실로 시대와 풍기(風氣)에 제한을 받은 것이로다.”라고 하였으며,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는 말하기를 “모는 비록 시로써 세상에 이름이 났지만 문장 또한 매우 좋다. 짧은 서문과 발문은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문장과 매우 흡사하다.”라고 하였으니 선배들의 논의가 이미 지극하다.
부인 유씨(柳氏)는 양한처사(養閒處士) 진(軫)의 따님으로 자식이 없으므로 중씨(仲氏)의 아들 적명(迪命)을 후사로 삼았으니 바로 참판공이다. 참판은 아들이 둘로 시민(時敏)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수질(壽秩)로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시완(時完)은 현감(縣監)이다. 딸은 판서 이중호(李重祜)에게 시집갔다. 서자(庶子)로 시근(時謹)과 시학(時學)이 있다. 지중추부사는 아들이 둘이니 중진(重鎭)은 군수이고 공진(公鎭)은 정언(正言)이다. 현감의 아들인 황진(璜鎭)은 지금 주서(注書)이다.
아아, 나 양호는 공의 만년에야 보게 되어 지금 이미 세 번이나 대수(代數)가 바뀌었다. 그 당시의 문채(文彩)와 풍류(風流)의 성대함은 상고 시대만큼이나 아득하여 후생(後生)들 중에 들어서 아는 자가 드무니, 지금 공의 묘갈을 서술함에 나도 모르게 개연히 탄식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文)은 자득을 귀하게 여기고 / 文貴自得
시에는 신명(神明)이 있어야 하니 / 詩則有神
그 기틀은 하늘에 있고 / 其機在天
그 깨달음은 사람에 있네 / 其悟在人
물은 고이면 썩어가고 / 水積則腐
사물은 오래되면 진부해지지 / 物老則陳
이하(李賀)처럼 심간을 토해내고 / 嘔賀心肝
유신(庾信)처럼 청신함을 드러내었네 / 發庚淸新
사람들은 내가 기뻐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다가 / 人恠我喜
오래 지나자 보배라고 일컫네 / 久乃稱珍
우리나라에 공이 있어 / 東方有公
오묘한 깨달음에 홀로 이르니 / 妙契獨臻
입으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을 / 口所不形
글로 참모습 꿰뚫었네 / 筆乃透眞
박옥을 깎아서 무지개 드러내고 / 斲璞見虹
껍질을 깨뜨려 진주를 꺼내었지 / 破殼出蠙
영화로움 버리고 정기를 보전하여 / 遺榮葆精
조화옹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네 / 與化爲隣
산은 깊고 돌은 오래되어도 / 山深石古
빛나는 기운은 줄지 않네 / 光氣不磷
[주-D001] 기사년 …… 물러나자 : 이해 5월 2일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1667~1701)가 폐위되어 사가(私家)로 돌아간 사건을 말한다.[주-D002] 탁명(拆名) : 과거에 급제한 시권(試券)의 봉미(封彌)를 뜯는 것이다. 봉미는 시권의 우측 끝에 성명, 생년월일, 주소 등을 기록하고 봉(封)한 것을 말한다.[주-D003] 시중호(侍中湖) : 흡곡현은 강원도 통천군이다. 시중호는 통천군 동쪽 바닷가에 있는 호수로 예부터 절경으로 꼽혀왔다.[주-D004] 첩(牒) : 본래 관청에서 쓰던 간단한 서식의 문서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소지(所志)의 의미로 관청에 올리는 소장(訴狀)이나 청원서(請願書)를 의미하는 듯하다.[주-D005] 제사(題辭) : 백성이 제출한 소장(訴狀)이나 원서(願書)에 쓰는 판결이나 지령(指令)을 말하며 제지(題旨)라고도 한다.[주-D006] 상신(霜信) : 서리가 내렸다는 의미이다. 조유수가 회양 부사에 임명된 것은 1724년(경종4) 7월 16일로 회양에 부임한 것은 늦가을 무렵이었다.[주-D007] 해낭(奚囊) : 시(詩)를 넣어두는 비단 주머니를 말한다. 당(唐)나라 때 시인 이하(李賀)가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지은 시를 해노(奚奴 종)가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일에서 유래하였다. 《唐書 李賀傳》[주-D008] 앉아서 …… 다스리다가 : 고을이 잘 다스려져서 아전들에게 정사를 맡기고 시나 읊조리며 한가로이 지낸다는 의미이다. 후한(後漢) 때 성진(成瑨)이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자 공사(公事)를 모두 잠질(岑晊)에게 맡겼다.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남양 태수는 잠공효이고, 홍농 성진은 앉아서 읊조리기만 하네.[南陽太守岑公孝, 弘農成瑨但坐嘯.]”라고 하였다.[주-D009] 유주(柳州)의 광오(曠奧) : 유주는 당(唐)나라 때의 문장가인 유종원(柳宗元)이다. 광오는 풍경이 광활하거나 그윽하고 으슥한 곳을 말한다. 유종원의 〈영주 용흥사의 동구에 대한 기문[永州龍興寺東丘記]〉에서 “유람하기 좋은 곳은 대체로 두 종류이다. 넓은 곳이나 으슥한 곳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라고 하면서 ‘광(曠)’과 ‘오(奧)’ 두 글자를 대비시켜 논한 데에서 유래하였다.[주-D010] 향산구로(香山九老) : 당(唐)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만든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말한다. 백거이가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致仕)한 뒤,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난 사람들과 낙양에서 모임을 하고 서로 왕래하며 즐겼다. 사람들이 이 모임을 향산구로회라고 불렀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주-D011] 추은(推恩) : 조선 시대에 시종(侍從)이나 병사(兵使)나 수사(水使) 등 관리의 아버지로 일흔이 넘는 사람에게 가자(加資)해 주는 것이다.[주-D012] 진사도(陳師道)와 황정견(黃庭堅)의 문로(門路) : 진사도(1053~1101)와 황정견(1045~1105)은 북송(北宋) 때의 시인으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대표적 문인들이다. 주로 사회 현실보다 작자의 감정이나 경험 등을 읊었고 환골탈태(換骨脫胎) 등을 주장하면서 기이하고 험벽(險僻)하며 난삽(難澁)한 풍격을 추구하였다. 조선 전기에 이들의 영향을 받은 시풍이 유행하였는데, 박은(朴誾), 이행(李荇), 노수신(盧守愼) 등이 대표적 문인이다.[주-D013] 이하(李賀)처럼 심간을 토해내고 : 시문(詩文)을 지을 때 구절을 다듬고 생각하느라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당(唐)나라 시인 이하는 밖에 나가 노닐 때 노비에게 비단 주머니를 들고 다니게 하여 시를 쓰면 그 주머니에 담았다가 저녁에 돌아와 정리한 뒤 다른 비단 주머니에 담았다고 한다. 어느날 모친이 그의 시를 보고 “이 아이는 자기 심장까지 토해 낼 정도가 되어야만 이 일을 그만둘 것이다.[是兒要當嘔出心始已耳.]”라고 탄식한 일이 있다. 《李義山文集箋註 卷10 李賀小傳》[주-D014] 유신(庾信)처럼 청신함을 드러내었네 : 두보(杜甫)의 시 〈봄날에 이백을 추억하며[春日憶李白]〉에 “청신함으로는 유개부요, 준일하기로는 포참군일세.[淸新庾開府, 俊逸鮑參軍.]”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유신(513~581)은 북주(北周)의 관리이자 문인이다. 양(梁)나라에서 벼슬에 올랐고 훗날 북주(北周)에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 되었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문학을 집대성하고 당(唐)나라 율시(律詩)의 선구가 되었으며,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아름다워 서릉(徐陵)과 함께 서유체(徐庾體)라고 일컬어졌다. 고향을 그리며 지은 〈애강남부(哀江南賦)〉가 유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