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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장인 해평(海平) 윤공(尹公)의 휘(諱)는 휘(暉), 자(字)는 정춘(靜春), 자호(自號)는 장주(長洲)이다.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재직하다가 운명하였으니, 향년(享年) 74세였다. 처음에 원조(遠祖) 군정(君正)은 고려조에 벼슬이 사공(司空)에까지 올랐다. 그 뒤로 밀직사(密直事) 만비(萬庇), 우의정(右議政) 영의공(英毅公) 석(碩), 문하 평리(門下評理) 충간공(忠簡公) 지표(之彪), 찬성(贊成) 문평공(文平公) 진(珍)으로 전해 내려왔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4대를 지나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 휘 계정(繼丁)에 이르니,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이분이 휘 희림(希琳)을 낳으니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변(忭)을 낳으니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두수(斗壽)를 낳으니 지위가 영의정에 오르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문정공이 창원 황씨(昌原黃氏) 참봉(參奉) 대용(大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을 낳았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공은 그 셋째 아들이다.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탁월한 자질을 지녀 글 읽을 줄 알게 된 때부터 말을 하면 저절로 문장을 이루니, 선배들이 대성할 인재로 기대하였다. 기축년(1589)에 진사시(進士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일찍이 태학(太學)에 들어갔다. 사문(斯文) 원탁(元鐸)이 교의(交誼)를 맺자고 요청하였는데 “의도(儀度)를 일찍 성취하여 따라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임진년(1592)에 어머니 황 부인(黃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갑오년(1594)에 복제(服制)가 끝나고, 정시(庭試)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천거되고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겼다가, 형조와 병조의 낭관(郞官)으로 전보(轉補)되고, 직강(直講), 정랑(正郞), 헌납(獻納), 문학(文學), 장령(掌令), 사성(司成), 필선(弼善), 제사(諸司)의 정(正)에 임명되었으며, 어사가 되어 영남의 군사를 위로하였다. 이상이 조정에서 역임한 이력이고 전후로 출입한 청요직(淸要職)이 많지만 생략한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보덕(輔德)과 사간(司諫)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임명되고, 차례로 좌승지(左承旨)에 올랐으며 예조와 병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을사년(1605)에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나갔는데, 떠난 뒤에 그곳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공의 덕을 기렸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듬해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호남과 영남은 예로부터 일이 많기로 유명하여 장부와 문서가 구름처럼 쌓이는 곳이었는데, 공이 부임하여 막힘없이 처리하니 늙은 아전들도 혀를 내둘렀다. 계축년(1613)에 권신(權臣)이 큰 옥사를 일으켜 그 여파가 널리 미치니 공도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무오년(1618)에 다시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신유년(1621)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서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옮겼다. 공이 평소 교제하던 사람들은 모두 한 시대의 명사들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부분 법망에 걸려들었다. 공이 조정에 있으면서 떠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이르러 말하는 사람들이 사소한 일까지 들춰내어 트집을 잡는 한편, 혼조(昏朝 광해조(光海朝)) 때의 재상과 연계된 인물이라는 이유로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아산(牙山)으로 이배되었다. 정묘년(1627)에 서쪽 변방이 호란으로 다급해지자, 폐고된 신분에서 찬획사(贊畫使)로 기용되어 군정(軍政)을 다스리니, 광협(筐篋)에 새는 것이 없었다.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형조와 호조의 참판이 되었고, 부총관(副摠管)으로서 비국(備局 비변사)을 겸관(兼管)하였다.
병자년(1636)에 변란(變亂)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명을 받고 여러 번 적진에 들어가 화친에 대해 논의하였다. 임금께서 공을 돌아보며 “경은 지혜와 생각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 이제 왕자와 대신(大臣)이 성을 나간다면 이 환난(患難)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경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성을 나간 뒤에 다시 경을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당시 위급한 상황에서 임금께서는 일이 생길 때마다 공에게 의견을 물어서 마치 하루라도 공이 없으면 안 될 것처럼 하셨다. 공은 대답하기를 “이제 화친할 것인지 맞서 싸울 것인지 곧 결정될 것입니다. 또한 원컨대 임금께서는 의지를 확고하게 하셔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효과를 도모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윽고 환도(還都)하여 청(淸)나라 사신들이 연달아 오자 특별히 공을 도승지로 임명하였는데, 주선하고 대응하는 것이 모두 상황에 적절하였다.
무인년(1638, 인조16)에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초배(超拜)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었다. 거듭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갔는데, 본래 청나라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므로, 전후로 요청한 것들이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갑신년(1644)에 역모(逆謀)를 다스린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같은 해 8월에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운명하였다. 장단(長湍) 북쪽 모좌(某坐)의 언덕에 안장하고, 정부인(貞夫人) 이씨를 부장(祔葬)하였다. 뒤에 맏아들 면지(勉之)의 종훈(從勳)으로 인해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겸직(兼職)은 실직과 같게 하였다.
공은 도량이 넓고 의젓하였으며 재능과 국량이 두루 넉넉하였다. 말은 차분하고 낯빛은 온화하였으며 화려한 꾸밈을 일삼지 않았다. “생사와 화복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밖에서 이르는 것으로 내 안을 어지럽히고 내 본성을 훼손하겠는가.”라고 생각하여 비록 여러 번 참소와 비방을 만났지만 일찍이 난처해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묘당(廟堂)에 있을 때 제기한 모든 일들은 반드시 원대한 계책에 의거하였는데, 그 일들이 끝내 행해지지 않았으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집에 있을 때 일찍이 독서를 그만두는 일이 없었으니, 책상 위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펼쳐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록 미천한 노복들에게도 모진 말로 꾸짖지 않았다. 영남의 아전이 작은 일로 공을 떠보았는데, 공이 모른 척 받아주었다. 그 아전이 또 허위 문서를 바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자꾸 속이려 하는가?”라고 하니, 아전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복종하였다. 다른 아전들도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아첨하지 못하였으니, 옛사람의 이른바 계획도 있고 함도 있다는 말에 거의 부족함이 없었다.
공이 어렸을 때 교관(敎官) 정고옥(鄭古玉)은 깨달음이 깊어 사람을 잘 알아보았는데, 공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경재(卿宰)의 지위에 오르겠지만, 아마도 그때는 나라가 어지러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떤 방법으로 이처럼 정확하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부인 정부인(貞夫人)은 세종(世宗)의 아들 영해군(寧海君) 당(塘)의 후손으로, 사평(司評) 기명(耆命)의 딸이다. 어려서 할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에게서 자랐는데, 유순하고 아름다우며 법도가 있어 규문(閨門) 안에 종일토록 큰소리가 나지 않았다. 13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처음 폐백을 받들고 시부모님을 뵙자 시부모님이 가상하게 여겼다. 동서간에 왕래하기를 일삼지 않았고, 종에게 지시하는 일은 많았으나 꾸짖는 일이 없어도 일이 모두 잘 되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첨정(僉正) 면지(勉之)는 아들 승문원 정자(正字) 계(堦)를 낳았고, 두 딸은 정언(正言) 최후윤(崔後胤), 정자 신의화(申儀華)에게 출가하였다. 차남 현감(縣監) 건지(建之)는 아들 제(堤), 원(垣), 담(墰)을 두었다. 셋째 아들 현감 경지(敬之)는 아들 기(圻), 그리고 이창진(李昌鎭), 참의(參議) 김진표(金震標), 참판(參判) 유심(柳淰)에게 출가한 세 딸을 두었다. 공의 장녀는 나 이민구(李敏求)에게 시집와서, 아들 원규(元揆)와 진사 중규(重揆), 그리고 세마(洗馬) 신변(申昪)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차녀는 감찰(監察) 박수소(朴守素)에게 출가하여 아들 위(緭), 소(紹), 증(繒), 그리고 문과에 급제한 이주(李周), 수찬 정석(鄭晳), 진사 정수준(鄭守俊), 조두진(趙斗震)에게 출가한 네 딸을 두었다. 셋째 딸은 박동도(朴仝度)에게 출가하였는데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그 나머지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매우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윤씨는 해평에서 발흥하여 / 尹發海平
현저하게 빼어났으니 / 顯顯競爽
아름다운 덕망 지닌 / 載其懿德
문정공 나셨네 / 乃有文靖
공이 그 아름다움 이어 / 公承其媺
또한 명성 크게 드날렸으니 / 亦大厥聞
형조와 의금부에서 / 司寇金吾
아 밝게 드러나 실추되지 않았지 / 於赫不隕
중도에 역경 겪고 / 中更夷險
만년에 알아주는 임금 만났는데 / 晩乃遭際
남한산성 외로운 성벽에서 / 南漢孤墉
국운이 위태로웠네 / 國步將殆
계책을 내고 힘을 다하니 / 訏謨宣力
임금께서 의지하셨네 / 聖主所毗
벼슬길 형통하게 되었으나 / 鼎路嘗亨
철인은 늙고 병들었지 / 哲人之萎
임단의 언덕에 / 臨湍之丘
대대로 장사 지내니 / 曰惟世藏
백대 뒤까지 / 百代在後
길이 큰 경사 드리우리라 / 永垂鴻慶
[주-D001] 윤군정(尹君正) : 해평 윤씨의 시조(始祖)로,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257년 원주에서 일어난 안열(安悅)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크게 공을 세우고, 1273년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守司空尙書左僕射判工部事)에 올랐다.[주-D002] 윤만비(尹萬庇) :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1277년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1300년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가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올랐다.[주-D003] 윤석(尹碩) : ?~1348. 본관은 해평이다. 1326년 원(元)나라가 고려(高麗)를 없애고 성(省)으로 만들려는 책동을 저지한 공로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1328년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주-D004] 윤지표(尹之彪) : 본관은 해평,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이르렀다.[주-D005] 윤진(尹珍) : 본관은 해평이다. 1388년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주-D006] 윤두수(尹斗壽) : 1533~1601. 본관은 해평,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梧陰遺稿 附錄 神道碑銘》[주-D007] 계축년에 …… 삭직되었다 : 윤휘가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 중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파직된 사건을 말한다. 《광해군일기》 5년 5월 8일 기사에 “사헌부(司憲府)가 아뢰기를 ‘경상도 관찰사 윤휘가 역적의 괴수 서양갑을 접대한 사실이 이미 초사(招辭)에 나왔습니다. 이 적이 역모를 꾀하리라고는 인정상 물론 헤아리기 어려웠겠습니다만, 사행(私行)을 접대하지 말도록 나라에 금제(禁制)가 있는데도, 1도(道)의 풍헌(風憲)을 담당하고 있는 감사로서 자기가 먼저 법을 범했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방면(方面)의 중임을 그대로 그에게 맡겨 둘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라고 하였다.[주-D008] 정묘년에 …… 기용되어 : 윤휘는 1625년(인조3)에 해배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당시 부체찰사 김류(金瑬)의 요청으로 찬획사(贊畫使)에 기용되었다. 《인조실록》 5년 1월 21일 기사에 “김류가 아뢰기를 ‘윤휘가 비록 죄과는 있으나, 사람들이 모두 등용할 만하다 합니다. 지금 만일 하자를 버리고 녹용한다면 찬획사로 데려가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주-D009] 광협(筐篋)에 …… 없었다 : 윤휘가 업무를 매우 잘 처리하였다는 말이다. 광협은 서류를 모아두는 상자이다.[주-D010] 갑신년에 역모(逆謀) : 1644년(인조22)에 발생한 심기원(沈器遠, 1587~1644)의 역모사건을 가리킨다. 당시 좌의정 겸 남한산성수어사 심기원이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고변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으로 심기원과 그의 일족이 주살되고, 김자점(金自點)이 권력을 장악하였다.[주-D011] 옛사람의 …… 없었다 : 윤휘가 지모(智謀)도 있고 실질적인 시행을 통해 성과도 있었다는 말이다. 《서경》 〈홍범(洪範)〉에 “무릇 서민들이 꾀함이 있고 실행함이 있고 지킴이 있는 것을 네가 생각하라.[凡厥庶民, 有猷有爲有守, 汝則念之.]”라고 하였다.[주-D012] 정고옥(鄭古玉) : 정작(鄭碏, 1533~1603)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경(君敬), 호는 고옥이다. 학문이 넓고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南溪續集 卷22 內資主簿鄭公墓表》[주-D013] 이당(李塘)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옹지(顒之),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본래 이름은 장(璋)이었으나 당(瑭)으로 바꾸었다. 세종의 아홉째 아들로 신빈(愼嬪) 김씨(金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442년(세종24) 영해군(寧海君)으로 봉해졌다.[주-D014] 김진표(金震標) : 1614~1671.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건중(建中), 호는 오애(浯涯)이다. 《芝村集 卷22 參議贈參判順寧君金公墓誌銘 幷序》[주-D015] 유심(柳淰) : 1608~166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징보(澄甫), 호는 도계(道溪)이다. 《雪峯遺稿 卷27 贈資憲大夫……全平君柳公墓碣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