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 명종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이 되자 사화가 4, 5년 동안이나 이어졌으니, 그 당시의 일을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명종이 어렸을 때 적신(賊臣)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이 모함과 선동으로 죄를 꾸미자 그 그물과 덫에 걸리지 않은 단인(端人)과 정사(正士) 들이 거의 없었으니,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망하지 않은 것은 천운(天運)이었다. 국시(國是)가 정해진 뒤로 누군들 이에 대해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며 분노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가슴 아프고 애석하기로는 온계(溫溪) 이공(李公)의 경우가 한층 더 심한 점이 있다.
대개 공은 퇴도(退陶 이황(李滉)) 선생의 형으로 젊어서부터 뜻이 같고 도가 합치하여 당시에 금곤옥우(金昆玉友)라고 일컬어졌다. 공이 서울로 가서 벼슬할 적에 퇴도 선생은 “청산에서 함께 살자고 서로 약속하였네.”라는 시를 남겼고,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벼슬하면서 품계가 2품(品)에까지 이른 것은 포의로서의 영광이기는 하나, 나는 이에 대해 즐거운 마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이 품은 바를 가히 알 수 있다. 공이 만약 충절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고 다시 초야로 돌아가 주정(主靜)의 학업을 궁구하였다면 하남(河南)의 양정(兩程)이란 칭호가 필시 저 옛날 훌륭함을 독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흉악한 불길 속에 곤옥(崑玉)이 섞여 들어가 버렸으니, 후학들이 애통해하고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어찌 유독 나라가 끊기고 병들어서일 뿐이겠는가.
당초 인종(仁宗)이 새로 즉위하자 팔도의 백성들은 나라가 더할 나위 없이 잘 다스려지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우상(右相) 이기가 하는 일들이 흉포하고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아, 공이 대사헌으로서 그를 탄핵하였고 헌납(獻納) 이치(李致)도 이에 동참하였다. 그 뒤로 5년이 지나 공이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절도사(忠淸道節度使)가 되었을 적에, 이홍남(李洪男)이, 자기의 아우 이홍윤(李洪胤)이 역모(逆謀)를 하였다고 무고하여 충주(忠州) 사람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옥사를 많이 남발하였다. 이에 조정은 충주를 강호(降號)하여 유신현(維新縣)으로 만들고 이치를 그곳의 지현사(知縣事)로 삼았다. 이홍남이란 자는 일찍이 이조 낭관을 역임하다가 그의 아버지 이약빙(李若氷)이 화(禍)로 죽은 일에 연좌되어 유배형에 처해졌었는데, 이때가 되자 조정에서는 이홍남이 의리(義理)를 위하여 친속을 멸하였다고 하면서 그를 다시 등용할 것을 논의하였다. 한편 같은 고을 사람 최하손(崔賀孫)이란 자가 이홍남을 따라해 이익을 탐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유배되어 있던 곳에서 도망쳐 고을 사람들의 향회문(鄕會文)을 몰래 훔치고는 막 서울로 달려가 고변(告變)하려 하였는데 그때 일이 발각되어 버렸다. 이에 이치가 이 일을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신문(訊問)할 것을 청하자 공이 허락하고는 그 실정을 파악한 후에 조정에 알리려고 하였는데, 첫 신문에서 최하손이 죽어 버린 것은 공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한편 이홍남이 관아로 찾아와 그 아우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두고 따져 묻자 공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그에게 침을 뱉으며 꾸짖으니, 이에 이홍남은 끝없는 원한을 품게 되었다.
당시 사간(司諫) 이무강(李無疆)은 이기의 하수인이었고, 원호변(元虎變)이란 자는 이홍남의 손위 동서(同壻)로서 이무강과 매우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다. 이에 이홍남은 원호변과 원호변의 숙부인 대사간(大司諫) 원계검(元繼儉)을 부추겨 이무강에게 공을 무고(誣告)하도록 하였다. 이무강은 본래 공과 함께 사직(史職)을 맡고 있었으나 공이 그의 행실을 천박하게 여겨 한 번도 돌아봐 주지 않았던 탓에 공에게 단단히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원호변의 고변을 듣고는 이를 빙자해 이기의 환심을 사는 한편 자신의 원한도 풀려는 속셈으로 마침내 헐레벌떡 달려가 이기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이기가 이로 인해 더욱 깊이 모략을 꾸몄다.
이듬해 경술년(1550)에 이기가 상소하여 구수담(具壽聃)을 뒤미처 논핵하자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대신이 성상(聖上)의 귀를 현혹하여 사림(士林)의 화를 가중하니, 시국이 위태롭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이기는 쌓여 있던 원한에다 새롭게 일어난 분노의 감정을 품고 대각(臺閣)에 눈짓을 하니, 이무강과 원계검이 이에 호응해 일어나 공이 이전 충청도 감영에 있을 때 역당들의 전답과 노비를 사사로이 누락시켰다고 무고하였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다시금 공이, 이치가 최하손을 장살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역적을 비호하려 입을 없앨 계략을 일삼았다고 무고하였는데, 이렇게 해도 옥사가 빨리 이루어지지 못할까 걱정하여 마침내 공이 구수담과 붕당(朋黨)을 지었다고 말하였다. 구수담은 일찍이 간관(諫官)으로서 이기를 쳐서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이기가 여러 불령(不逞)한 자를 부추겨 죄목을 주워 모아 그를 사형에 처하게 하고는 그가 좌죄(坐罪)될 때 상의 노기를 촉발했던 말을 가지고 마침내 공을 아무개의 당여라고 하여 상을 격분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에 공과 이치는 함께 조옥(詔獄)에 갇혀 매우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데, 이치는 죽고 공 역시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거짓으로 자백한다면 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자 공은 개연히 말하기를 “죄를 범하지도 않았는데 거짓으로 자백하여 목숨을 구하는 것은 내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윤원형(尹元衡)이 추관(推官)이 되어 억지로 공사(供辭)를 갖추어 상의 뜻에 맞추고는 공에게 서명(署名)을 강요하자, 공은 평소와 다름없는 낯빛으로 느긋하게 말하기를 “모두 모르는 일이라 감히 서명할 수 없다.”라고 하고 옥중소(獄中疏)를 초하여 올리고자 하였는데 윤원형이 이를 막아 올라가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상이 공의 억울함을 헤아리고는 갑산부(甲山府)에 유배할 것을 명하였는데, 공이 탄 가마가 양주(楊州)의 점사(店舍)에 이를 즈음 형독(刑毒)이 발하여 8월 14일에 졸하니, 향년 55세였다. 9월에 온계(溫溪)의 고향 마을로 널을 돌려보내어 12월 모일(某日)에 현 북쪽 연곡(燕谷) 좌경(坐庚)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휘(諱)는 해(瀣), 자는 경명(景明),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6세조 석(碩)은 현리(縣吏) 출신으로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는데, 은덕(隱德)이 있었다고 세상에서 일컬어졌다. 그 아들은 자수(子脩)이니 고려 말에 벼슬하여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고조(高祖)의 휘는 운후(云侯)이니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을 지냈다. 증조(曾祖)의 휘는 정(禎)이니 일찍이 영변(寧邊)의 약산성(藥山城)을 증축할 때 공로가 현저하였으며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생애를 마쳤다. 조부(祖父)의 휘는 계양(繼陽)이니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안동(安東)에서 이거하여 예안(禮安)의 온계에 거처를 정하였고 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식(埴)이니 진사로서 일찍 졸하였고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춘천 박씨(春川朴氏)이니 사정(司正) 박치(朴緇)의 따님이다.
공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퇴도(退陶) 선생과 함께 숙부(叔父) 송재공(松齋公)으로부터 수업(受業)하였는데, 문사(文辭)를 일찍 숙달(熟達)하여 아무도 앞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모재(慕齋) 김 선생(金先生)이 한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 송재공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특별한 그릇이니 잘 보살피십시오.”라고 하였다.
을유년(1525, 중종20)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다.
무자년(152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혀 들어갔다가 곧 추천으로 한림(翰林)이 되었고 봉교(奉敎)를 거쳐 전적(典籍)에 올랐으며, 공조와 예조의 낭관(郎官)으로 전직하였다. 이때부터 명성이 더욱 커져 현반(顯班)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간원(諫院)에서는 정언(正言)ㆍ사간(司諫)ㆍ대사간(大司諫)이 되고, 헌부(憲府)에서는 집의(執義)ㆍ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춘방(春坊)에서는 사서(司書)가 되고,옥서(玉署)에서는 응교(應敎)ㆍ전한(典翰)ㆍ직제학(直提學)이 되고, 의정부(議政府)에서는 검상(檢詳)ㆍ사인(舍人)이 되고, 이조에서는 좌랑(佐郞)ㆍ정랑(正郎)이 되고, 제용감(濟用監)과 사복시(司僕寺)에서는 정(正)이 되고,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서 도승지(都承旨)까지 이르고, 예조에서는 참판이 되고, 경조(京兆)에서는 우윤(右尹)이 되고, 장례원(掌隷院)에서는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도총부(都摠府)에서는 부총관(副摠管)이 되었으니, 이상은 모두 내직이다. 외직으로는 황해도와 충청도의 관찰사가 되고, 명을 받들어 일본의 사신을 선위(宣慰)하고, 성절사(聖節使)에 충원되어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갔다. 또 일찍이 북관(北關)을 염찰(廉察)하고 영남(嶺南)을 감찰(監察)하였는데, 북관을 진휼(賑恤)할 때에는 가는 길이 멀고 험준한 곳도 많았으나 공은 고통 받는 백성을 찾아가 위문하기 위해 길이 멀든 궁벽하든 꺼리지 않았으니 백성들이 이에 매우 기뻐하였다. 또 진휼을 감찰할 적에는 계획하고 처리하는 것이 모두 시의(時宜)에 맞은 덕에 굶주리는 가호(家戶)들이 이에 힘입어 살 수 있게 되어 공을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모시니, 상이 글을 내려 그 노고를 위로하였다. 황해도와 충청도의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는 청간(淸簡)한 정사를 펼쳐 온 도(道)가 평온하였다. 이상의 일들은 공이 관직을 맡아 직분에 최선을 다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현자(賢者)의 소략한 일에 속하는 것이다.
공은 젊은 시절 김안로(金安老)와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김안로가 누차 발탁해 쓰려고 하였지만 공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또 이무강 등이 여기저기 거짓을 날조하여 화(禍)의 기미가 당장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일 때 도헌(都憲) 송세형(宋世珩)이 공을 만나 보고자 하였는데, 송세형은 이기에게 빌붙은 자였다. 어떤 이가 공더러 한번 가서 만나 화를 막아 보라고 타일렀으나 공은 말하기를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 하물며 죽고 사는 일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 집으로 찾아가 불쌍하게 봐주기를 구걸하는 것은 또한 비루하지 않은가.”라고 하니, 그 정도를 지키고 굽히지 않아 화복(禍福)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공이 졸하고 몇 년이 지나자 이기는 죄악이 극도에 이르러 끝내 근심으로 폐사(廢死)하였고 이무강 역시 귀양을 가 죽었다. 선조(宣祖)가 즉위한 첫 해에 명종의 뜻을 계승하여 공의 원한을 씻어 주고 작질(爵秩)을 환급하였으며, 숙종 17년(1691)에 또 대총재 태학사(大冢宰太學士)로 추증하니, 천도(天道)가 이로써 정해지게 되었다.
퇴도 선생이 공의 묘지명을 짓기를,
“공은 덕성이 관후(寬厚)하고 기량이 크고 넓었다. 형제에게는 우애하였고 집에 있을 적에는 온화하여 자제들과 하인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중형(仲兄) 의(漪)가 일찍 졸하자 그 아들을 양자로 삼아 성인이 되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보살피고 가르쳤다. 친구에게 급한 사정이 생기면 반드시 온 힘을 다해 도와주었고 평생토록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어 사람들이 바라만 보고서도 그가 길인(吉人)이자 군자(君子)임을 알았다.”
하였다. 아, 퇴도 선생이 공의 덕을 기술한 것은 넘치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아 눈금 있는 저울로 단 것처럼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그 사람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즉 후학이 어찌 감히 망녕되이 더 보태어 말하겠는가.
공의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연안 김씨(延安金氏)이니 김복흥(金復興)의 따님이며 5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복(宓), 영(寗), 교(㝯), 치(寘), 혜(寭)이고, 딸은 현감 최덕수(崔德秀)에게 출가하였다.
복은 공을 따라 성절행(聖節行)을 가다가 통주(通州)를 지나는 길에 졸하였고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영은 현감을 지냈는데 아들이 없어 유도(有道)를 후사로 삼았고, 딸은, 장녀는 감찰(監察) 이언직(李彦直)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이예복(李禮福)에게 출가하였다. 교는 현감을 지냈는데 아들은 숭도(崇道), 정도(正道), 유도(有道)이고 딸은 도사(都事) 이경원(李敬元)에게 출가하였다. 치는 요절하여 순도(純道)를 후사로 삼았다. 혜는 공조 좌랑(工曹佐郎)을 지냈는데 아들은 능침랑(陵寢郞)을 지낸 주도(周道), 호군(護軍)을 지낸 미도(味道), 심도(深道), 사도(士道), 직도(直道)이다. 최덕수의 아들은 탐(琛)으로 봉사(奉事)를 지냈고, 사위는 군수를 지낸 이충가(李忠可)와 승지를 지낸 이경함(李慶涵)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이루 다 싣지 못한다.
금상(今上) 8년(1784, 정조8)에 공에게 정민(貞愍)이란 시호를 내리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제고(祭告)하게 하니, 퇴도 군자가 말하기를 “이러하구나. 한때에 굽혀졌으나 만세토록 펼쳐지는구나.”라고 하였다. 공의 7대손 전(前) 정언(正言) 급(級)이 눌은(訥隱) 이공(李公)이 지은 행장을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원컨대 그대에게 부탁하여 우리 선조의 비석을 빛내고자 한다.”라고 하니, 나는 이 일을 할 적임자가 아니나 오직 퇴옹(退翁)의 글에 따라 기록함으로써 분하고 통쾌한 뜻을 풀어냄과 동시에 경모(景慕)하는 마음을 부치는 바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 있는 맑은 기운이 / 天有淑氣
진성에 모이니 / 萃于眞城
금옥 같은 형제가 / 金昆玉友
그 생을 돈독하게 하였네 / 曰篤其生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엔 / 公在朝廷
봉황과 기린처럼 상서로웠네 / 鳳瑞麟祥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간인을 미워하여 / 忘躬嫉姦
탄핵 상소가 서리를 가르니 / 白簡橫霜
남귀가 피를 빨아 / 藍鬼吮血
배 속에 날카로운 칼날을 품었네 / 腹有利鋩
우리 명종께서는 / 惟我明廟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 / 時維在冲
태양이 하늘에 내걸렸으나 / 太陽懸空
저 무지개를 어찌하랴 / 柰彼陰虹
흉악한 주둥이를 은밀히 놀리매 / 凶吻密鼓
추악한 무리들이 찬동하니 / 衆醜攸同
소인들이 공을 무함하여 / 索性羅織
정확에 불이 지펴졌네 / 鼎鑊傍烘
저 깊숙한 감옥에서 / 幽幽犴狴
혈성으로 쓴 글 품 안에 두었는데 / 血字在抱
대궐에 올릴 길이 막혀 / 閶闔路阻
범이 으르렁거리고 승냥이가 울부짖으니 / 虎狺豺哮
죽어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았고 / 死吾不愧
죽지 않음도 하늘을 믿을 뿐이었네 / 不死恃天
천왕이 성명하사 / 天王聖明
은지가 서둘러 내려지니 / 恩旨亟宣
큰 덕을 생이라 하였는지라 / 大德曰生
북변을 어찌 멀다 하겠는가 / 有北奚逖
유양의 궁벽한 곳에서 / 維楊之曲
고복하게 됨을 어찌하겠는가 / 柰何皐復
사림들이 울부짖으며 통곡하니 / 士林呼咷
누군들 백번이라도 대신 죽고 싶지 않았으랴 / 疇不身百
울울한 원망의 기운이 / 鬱鬱冤氛
저 남복에 드높았는데 / 矗彼南服
천도는 곧잘 도는지라 / 天道好斡
십 년이 못 되어 회복되니 / 不十年復
큰 간신의 발톱이 제거되매 / 巨奸脫距
외로운 충정이 비로소 드러났네 / 孤忠始白
추증한 작질 밝게 빛나며 / 贈秩光光
아름다운 시호 환히 빛나니 / 美諡焯焯
공에게 그 무슨 한이 있으리 / 在公何憾
우리의 도가 슬플 뿐인 것을 / 吾道之慽
정자의 생각과 주자의 뜻을 / 程思朱情
훈지가 함께 울리지 못한 것 한스럽네 / 恨不塤箎
온계가 조용히 흐느끼니 / 溫溪幽咽
공의 무덤이 그곳에 있네 / 秋栢在玆
나의 명문 매우 분명하니 / 我銘孔昭
큰 비석에 새겨 / 刻于豐石
백세 뒤의 사람들로 하여금 / 俾百世人
선을 즐기고 악을 징계하게 하노라 / 樂善懲惡
[주-D001] 명종 …… 이어졌으니 : 1545년 인종(仁宗)이 훙어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 소윤(小尹)이 인종의 외척인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반역 음모죄로 무고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도록 한 일을 말한다.[주-D002] 금곤옥우(金昆玉友) : 형제의 미칭으로 옥곤금우(玉昆金友)라고도 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 왕전(王銓)ㆍ왕석(王錫) 형제가 나란히 효행으로써 명성을 드날려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옥곤금우라 칭하였다고 한다. 《南史 王彧列傳》[주-D003] 청산에서 …… 시 : 《퇴계집(退溪集)》 별집(別集) 권1에 〈병신칠월회일여형동숙서재시여장왕의령감념이합지고용소자유소요당시운(丙申七月晦日與兄同宿西齋時余將往宜寧感念離合之故用蘇子由逍遙堂詩韻)〉으로 실려 있는 두 수의 칠언 절구 가운데 두 번째 시이다.[주-D004] 주정(主靜)의 학업 : 마음을 고요히 가져 외물에 휩쓸리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공부를 말하는 것으로, 송(宋)나라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성인께서 중정인의로 이를 정하되 정을 주로 하여 사람의 표준을 세운 것이다.[聖人定之以中正仁義, 而主靜, 立人極焉.]”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05] 하남(河南)의 양정(兩程) : 송나라의 학자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하남은 그들의 출생지이다.[주-D006] 흉악한 …… 버렸으니 : 끔찍한 화란에 선인(善人)들까지 함께 해를 당한 것을 말한 것으로, 사화(士禍)의 여파로 이해(李瀣)가 죽음을 맞이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서경》 〈윤정(胤征)〉에 “곤강에 불이 나면 옥이나 돌이 다 타 버린다.[火炎崑岡, 玉石俱焚.]”라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주-D007] 이치(李致) : 1504~1550.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가원(可遠)이다. 1540년(중종3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와 사간원 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인종 초에 이기를 탄핵하여 파직하자 이를 원망한 이기와 윤원형의 음모와 모해로 1547년 대역죄를 받아 장살(杖殺)되었다.[주-D008] 이홍남(李洪男)이 …… 남발하였다 : 1549년(명종4)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사위 이홍윤은 자신의 아버지 이약빙이 양재역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시정(時政)에 대해 불평하는 말을 자주 하였는데, 이에 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던 형 이홍남이 그를 역모죄로 고변하였다. 이에 윤임의 사위였던 이홍윤은 반대 세력인 윤원형 일파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당하여 결국 처형되고, 그가 살던 충주는 유신현으로 강등되었다. 《燃藜室記述 卷10 明宗朝故事本末 乙巳士禍 》 《明宗實錄 4年 4月 18日》[주-D009] 유배되어 …… 도망쳐 : 이에 앞서 1549년 최하손은 친형을 구타한 죄로 의주(義州)로 입거(入居)되었는데, 이듬해 처자들을 이끌고 그곳에서 도망쳤다. 《明宗實錄 5年 8月 6日》[주-D010] 이홍남이 …… 묻자 : 이홍남이 관아에 나와 몰수된 동생 이홍윤의 가산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정당하게 몰수되었는지를 따진 것을 말한다. 《명종실록》 5년 8월 10일 기사에 따르면 이홍남은 이홍윤의 가산이 몰수되자 어머니의 상중(喪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관아로 나와 몰수된 가산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어떤 물건은 내 것이니 돌려 달라.”라고 따져 물었다고 한다.[주-D011] 이듬해 …… 논핵하자 : 1550년 이기가, 구수담이 송순(宋純), 허자(許磁) 등과 결탁하여 을사년(1545)에 치죄되었던 역적을 비호하고 사의(邪議)를 자행하였다고 무고하여 탄핵한 일을 말한다. 《明宗實錄 5年 5月 15日, 18日》 구수담의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천로(天老)로, 1528년 문과에 급제하고 1534년 대사간에 올랐다. 1548년에는 대사헌으로서 권신 이기를 탄핵하다가 삭직되고,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1550년 을사사화에서 화를 입은 자들을 비호하였다는 죄목으로 사사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 신원되었다.[주-D012] 모재(慕齋) 김 선생(金先生) : 김안국(金安國, 1478~1543)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503년(연산군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후 박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했다. 1517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장하였다.[주-D013] 김안로(金安老) : 1481~1537. 본관은 연안,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당(希樂堂)ㆍ용천(龍泉)ㆍ퇴재(退齋)이다. 1506년(중종1)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31년 당시 동궁이던 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과 결탁하여 반대파인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尹元衡) 등을 제거하는 등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사림들로부터 깊은 원성을 샀다. 1537년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저서로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가 있다.[주-D014] 눌은(訥隱) …… 행장 :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온계이선생행장(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溫溪李先生行狀)〉을 말한다.[주-D015] 분하고 통쾌한 뜻 : 이황이 이해의 묘갈명을 지었는데 그 명의 마지막에 “진정을 토로하여 만세에 고하니, 이 글을 보고 분함과 통쾌함이 함께 일어날 이가 반드시 있으리라.[刳肝血而告萬世兮, 其必有交憤快於斯文者矣.]”라고 한 것을 말한다. 《退溪集 卷46 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李公墓碣銘》[주-D016] 진성(眞城) : 경상도 진보현(眞寶縣)으로, 이황ㆍ이해 형제의 관향이다.[주-D017] 태양이 …… 어찌하랴 : 간신이 임금의 눈과 귀를 가려 권력을 농단하고 임금을 기만하는 상황을 탄식한 것으로, 태양은 명종을 비유하고 무지개는 이기(李芑)를 비롯한 당시의 간신들을 비유한다. 당(唐)나라 이백(李白)이 〈오월동로행답문상옹(五月東魯行答汶上翁)〉 시에서 현종(玄宗) 때 재상으로서 아첨을 일삼고 언로(言路)를 막았던 이임보(李林甫)를 비판하며 “서쪽으로 돌아가매 곧은길로 가는데, 지는 해가 무지개에 가려 어둡네.[西歸去直道, 落日昏陰虹.]”라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李太白文集 卷15》[주-D018] 큰 …… 하였는지라 :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 하고, 성인의 큰 보배를 위라 한다. 무엇으로 위를 지킬 것인가? 바로 인이다.[天地之大德曰生,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 曰仁.]”라고 하였다.[주-D019] 유양(維楊) : 이해가 별세한 곳인 경기 양주(楊州)를 말한다.[주-D020] 남복(南服) : 복(服)은 서울 밖 500리 되는 지역인데, 여기서는 이해가 생장한 영남(嶺南)을 뜻한다.[주-D021] 천도(天道)는 곧잘 도는지라 : 천도가 순환하여 어그러진 일을 곧장 다시 정상으로 회복함을 말한다. 《도덕경(道德經)》 제30장에 “도로써 임금을 보좌하는 자는 군사로써 천하를 강성하게 하지 않으니, 그 일이 곧잘 돌아오기 때문이다.[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22] 정자(程子)의 …… 한스럽네 : 이해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아우인 이황과 함께 나란히 도학(道學)에 명성을 드날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것이다. 정자의 생각과 주자의 뜻이란 정주학(程朱學)을 말하며, 훈지(壎篪)는 형제를 말하는데 《시경》 〈소아(小雅) 하인사(何人斯)〉에 “백씨는 훈을 불고, 중씨는 지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篪.]”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