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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정유년(1597, 선조30) 가을 좌의정 김공(金公)이 송도(松都)에서 양 경리(楊經理)를 맞아 위로하고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병이 났으나 막막한 국사를 염려한 나머지 감히 고병(告病)하지 못하였다. 또 영남(嶺南)을 안무(按撫)하려 할 적에 풍기(豐基)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져 수레에 실려 돌아와 1년이 넘도록 직무를 돌보지 못하였다. 상은 비록 공을 의지하고 중히 여겼으나 정무로 성가시게 할 수 없었기에 체차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부직(付職)하였다. 어약(御藥)을 지닌 태의(太醫)가 길에 줄을 이었으나, 무술년(1598) 11월 24일 끝내 졸하였다. 부음이 전해졌을 때 상은 한창 천사(天使)를 응접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릇 안의 고기를 치우고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는 한편 조문과 부의를 특별히 더 내리라고 명하였다. 장례할 때가 되어서는 제수(祭需)와 인력(人力)을 지급하도록 명하니, 난리(亂離 임진왜란) 이래로 일찍이 이런 적은 없었다.
아, 세상에서 나라를 중흥(中興)한 어진 상신들을 평가할 때 반드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말하는데, 그 네 공은 공보다 뒤에 별세한 까닭에 세상의 변고를 더 많이 겪었으므로 아녀자와 어린아이조차 모두 그분들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공으로 말하자면 공업(功業)과 명망(名望)이 네 공에 필적하지 못하지는 않으나 국사(國事)를 위해 진심 진력한 것이 임진년(1592)과 정유년(1597)의 난리에 그친 까닭에 사람이 혹 그것에 대해 다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허나 사적(史籍)과 이정(彝鼎)에 혁혁히 실려 있는 공적을 또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응남(應南), 자는 중숙(重叔), 자호(自號)는 두암(斗巖)이다. 명종(明宗) 1년인 병오년(1546)에 태어나 8세에 《시경》과 《서경》의 대의를 통달하고 22세에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그 이듬해 무진년(1568) 선조가 처음 즉위했을 때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니, 고관(考官)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경륜할 문장이다.”라고 하였다. 승문원에 선례(選隷)되었다.
신미년(1571)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고, 상복을 벗은 뒤에 한원(翰苑)에 추천되었다.
갑오년(1594)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제수되니, 매우 엄선된 선발이었다. 박사(博士)와 수찬(修撰)에 오른 뒤로부터 간원(諫院)에선 정언(正言)과 헌납(獻納)을 역임하고, 헌부(憲府)에선 지평(持平)과 장령(掌令)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옥서(玉署)에선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거친 뒤 승진하여 응교(應敎),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고, 이조와 병조에서는 좌랑(佐郞)과 정랑(正郎)이 되었다.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사이 또 명을 받들어 해서(海西) 지방을 염찰(廉察)하였는데, 장오죄(贓汚罪)를 다스릴 때 비록 인친(姻親)이라 해도 용서치 않았다. 사옹원 정(司饔院正)을 거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때 북쪽 변경 지역에 위급한 일이 발생하자 상이 대사마(大司馬) 이 문성공 이(李文成公珥)를 믿고 의지하였는데, 삼사(三司)가 모종의 일로 혹 재차 탄핵을 가하였다. 이에 상이 노하여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전한(典翰) 허봉(許篈), 도승지 박근원(朴謹元)을 유배 보낼 것을 명하고, 그 밖에 유배 간 자도 수십 명이었는지라 공 또한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보임(補任)되었다. 이보다 앞서 진신(搢紳)들 사이에는 저마다 표방(標榜)하는 것을 두어 동(東)이니 서(西)니라고들 하였는데, 공은 어느 한쪽에 기대지 않고 홀로 우뚝 서서 오로지 화합을 이루는 데에만 힘썼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죄 아닌 죄로써 견책을 받아 쫓겨나게 되자 연신(筵臣)이 상에게 그 이유를 여쭈었는데 상은 이르기를 “송응개 등은 늘 김응남(金應南)의 문학과 재망(才望)이 당세의 제일이라고 칭찬하였다. 당인(黨人)에게 칭찬받는 자 역시 당인이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제주(濟州)에 심한 기근이 들었으므로, 나는 이 사람에게 의지하여 백성들의 목숨을 온전히 살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하직 인사를 할 적에 상이 초모(貂帽)와 호피(虎皮)와 명약(名藥)을 하사하고 유시하기를 “섬 전체의 수많은 목숨을 부탁한다.”라고 하였다.
제주에 도착하자 정성을 다해 곡식을 옮겨 도랑과 골짜기에서 유랑하던 자들을 편안한 이부자리에 들도록 하였고, 한가한 날에는 효제(孝悌)와 예의(禮儀)를 가르쳐서 무지한 풍속을 크게 바꾸어 놓았으며, 돌아갈 때는 바다에서 나는 물건을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았으니 이에 백성들이 공의 업적을 돌에 새겨 칭송하였다. 김청음(金淸陰)과 이태호(李太湖)가 훗날 다 탐라(耽羅)에 공무가 있었는데, 기록한 글에 공의 청간(淸簡)한 정사에 대한 사실을 퍽 자세히 실어놓았다.
을유년(1585)에 내직으로 옮겨 승지가 되고 특별히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 도승지,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이조와 형조의 참판으로 누차 천직되었다.
경인년(1590)에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공을 시기하던 자가 이길(李洁)을 끌어들이며 모함하므로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이길은 공의 사돈으로서 기축년(1589)의 화에서 억울하게 죽은 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는데 언관(言官)이 여전히 또 모해하므로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돌아왔다. 1년 뒤에 대관(臺官)들이 기축년의 위관(委官)을 논핵하여 사지로 몰아넣고자 하자, 공이 불가하다 고집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에게 대신(大臣)을 죽였다는 이름을 얻도록 할 수 없다.”라고 하니, 논의가 마침내 그쳤다.
만력(萬曆) 신묘년(1591)에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우리나라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라고 협박하였다. 수길은 임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한 자로, 우리나라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 일어나기 전에 조정에서 통신사를 보내어 그 동정(動靜)을 염탐하게 하였으나 이러한 사실을 미처 황제에게 알리지 못하였다. 공이 성절사(聖節使)로서 출발을 앞두고 상소하기를 “일본(日本)은 복건(福建)과 가까워 상선(商船)이 끊임없이 오가므로 우리나라가 통신함을 중조(中朝 명나라)가 모를 리 없습니다. 만약에 이를 물어 온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별도로 주문(奏文)을 만들어 아뢰도록 명하였다.
공이 중조에 도착하기 전에 중조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사통(私通)하였는가 의심하여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였는데, 각로(閣老) 허국(許國)이 홀로 말하기를 “조선은 예의(禮義)를 지키는 나라이니, 성절 사행(聖節使行)에게 물어보아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도착하여 주문을 올리고 예부(禮部)의 질문에 매우 상세히 대답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은사(恩賜)를 매우 후하게 내려 주었다. 훗날 천조(天朝)가 크게 병사를 내어 우리를 도와준 것은 실로 이 일이 기반이 되었다. 복명(復命)할 때에 상이 몹시 기뻐하여 직접 금대(金帶)를 하사하고 한성부 판윤에 제수하였다.
그 이듬해인 임진년(1592)에 수길이 우리나라의 방비가 허술함을 틈타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다. 상이 용만(龍灣)에 행차할 때 유 문충공 성룡(柳文忠公成龍)이 아뢰기를 “이 시점에서 병조의 장을 맡을 사람은 김모(金某)가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하니,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淳)을 체직하여 공을 그 후임으로 삼게 하고 또 체찰 부사(體察副使)를 겸관하게 하였다. 당시는 나라가 망하느냐 보전되느냐 하는 매우 위급한 때여서 급보가 빗발쳤는데 안배(安排)하는 것이 시의에 들어맞고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그대로 적중하니, 박공 동량(朴公東亮)이 낭료(郞僚)로서 감탄하기를 “참으로 나라를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할 만한 재주이다.”라고 하였다. 가을에 정주(定州)로 회진(回鎭)하여 성안의 병기를 수리하고, 겸하여 서남쪽의 뱃길을 정리하였다. 겨울에는 부제학으로서 행재소(行在所)에 소환되어 서경(西京)을 수복할 계책을 차자(箚子)로 진달하였다.
계사년(1593)에 우참찬과 예조 판서로 천전(遷轉)되었다. 명을 받들고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개수(改修)하였는데, 돌아와서는 상소하여 급하지 않은 관직을 없애고 정기적으로 바치는 물품을 반으로 줄여서 백성들의 힘을 덜어 주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겨울에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공이 이 당시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큰 난리를 겪은 후로 조정의 붕당을 더욱 근심하여 사류(士類)를 수습하는 한편 세도를 안정시키는 데에 힘썼다.
갑오년(1594)에 좌찬성에 오르고 이조 판서를 겸관하였으며, 겨울에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에 오르고 세자부(世子傅)를 겸관하고 또 도체찰사를 겸관하였다.
공은 신장이 9자이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덕량(德量)이 넉넉하고 신채(神彩)가 진중하여 조야(朝野)가 매우 우러러보았다. 유 문충(柳文忠)이 수상(首相)으로 있을 적에 왜적에게 복수하고 설욕하는 데에 확고한 뜻이 있어 시책(施策)을 건의하는 일이 많았는데, 공이, 혹여나 백성들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차자로 의견을 개진하고 경연에서 생각을 아뢰어 진정하고 안정시키는 데에 힘썼다. 이때 또 둔전국(屯田局)을 설치하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옛날의 둔전(屯田)과는 다릅니다. 마땅히 각 읍의 황폐한 땅에 백성들을 모으고 농사를 권면하여 방백과 수령에게 그 성공을 책임 지워야 하고, 별도로 하나의 국(局)을 설치해 주군(州郡)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은 문충(文忠)과 공경하는 자세로 서로 협력하였으나 일의 가부(可否)를 결정할 때는 구차히 영합(迎合)하지 않았던 것이 이와 같았다.
여진(女眞)이 점점 강성해지자 경중(京中)의 포수(砲手)와 해서(海西)의 무사를 별도로 보내어 방비에 보태기를 청하고, 호서(湖西)의 역적 송유진(宋儒眞)과 이몽학(李夢鶴)이 잇달아 반역(叛逆)으로 주살되자 그동안 체포된 수백 인을 풀어 주어 양호(兩湖)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마음을 비우고 그 청을 들어주었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다시 야욕을 부려 왕자(王子)와 대신(大臣)을 인질로 보내라고 협박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우물쭈물하며 논의를 결정짓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개연(慨然)히 상에게 아뢰기를 “정기원(鄭期遠) 등을 보내어 천조(天朝)에 군사를 요청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왜적이 깊숙이 쳐들어오자 안찰사(按察使) 소응궁(蕭應宮)이, 심유경(沈惟敬)을 적에게 보내어 전쟁을 늦추도록 요구하고자 했는데, 당시에 의논하는 자가 사태가 급박하므로 또한 만일의 요행이 없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만약 소응궁의 계책을 따른다면 천하의 공의(公議)에 죄를 얻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물러났다.
공은 늘 말하기를 “나라를 회복하는 요체는 군졸을 연마하고 성을 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심을 수습하는 데 있으며, 인심을 수습하는 것은 억울한 원한을 풀어 주는 데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상에게 이발(李潑)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이발 등은 비록 정여립(鄭汝立)과 친하였으나 결코 윗사람을 배반할 자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이한음 덕형(李漢陰德馨)이 무고를 당한 실상을 아뢰었는데, 이아계 산해(李鵝溪山海)가 한음을 위하여 사례하자 공이 말하기를 “동료가 그물과 덫에 걸리는 것을 보고서 어찌 차마 세속을 따라 칭하는 ‘성상의 하교가 실로 지당하십니다.’라는 말만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유 문충이 모함을 받아 장차 도성을 떠나려 할 적에 사람들은 공이 문충과 의론을 달리했다 하여 공의 말을 증거로 삼기도 하였다. 그런데 공은 병이 위독해진 뒤에 그 소식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국사를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고서 입으로 불러 가며 차자(箚子)를 만들어 문충을 변호해 주었다. 그러나 그 차자가 올라가기 전에 공이 졸하니, 향년 53세였다. 양천(陽川) 두동(斗洞) 축좌(丑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추후에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고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상상(上相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영조 무진년(1748, 영조24)에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공은 집안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독실하고도 착실하였다. 일찍이 14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슬픔으로 몸이 상하도록 예제(禮制)를 넘치게 하였고, 후모(後母) 이 부인(李夫人)을 모실 때에는 성심을 다한다고 알려졌다. 전란 후에는 한집에서 생활하는 종족(宗族)이 60여 인에 이르렀다. 평생토록 집 하나 밭뙈기 하나 경영하지 않았고 일체의 완호(翫好)할 만한 물건에 무덤덤하여 늘 말하기를 “녹봉을 받아 밥 먹으며 집을 빌려 거처하니, 세상에서 애쓰지 않고 편안히 누리는 자는 오직 나뿐이다.”라고 하였다. 조정에 섰을 당시는 당의(黨議)가 횡행하던 즈음인지라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선을 좋아하기를 한층 더하고 악을 미워하기를 한층 낮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권세 피하기를 깊은 물이나 불구덩이 피하듯 하라.”라고 하였다. 평소에는 두문불출한 채 손님을 사절하였으나 한 인물이 훗날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논할 때에는 동방삭(東方朔)이 점을 치듯 신기하게 알아맞혔다. 정여립이 당대의 명성을 자부하자 이발 형제에게 경계하기를 “함께 있지 말라. 이 사람은 안으로는 음험한 마음을 품고 밖으로는 가식을 일삼으니 끝내 파멸할 것이다.”라고 하고, 허균(許筠)이 문장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자 한번 보고는 말하기를 “제 명에 죽으면 다행이겠다.”라고 하였다. 옥성군(玉城君) 장만(張晩)을 허여하여 “원수(元帥)가 될 것이다.”라고 하고, 평령군(平靈君) 신경원(申景瑗)을 대하여 “부원수의 자질이다.”라고 하였다. 여진이 변경을 침탈하자 늘 말하기를 “북쪽의 근심이 남쪽에 드러날 것이다.”라고 하여 한가하게 있을 때도 한숨을 내쉬면서 침식을 모두 잊었는데, 마침내 공의 말처럼 되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20년이 지나 광해(光海)가 모후(母后)를 폐하자 이 완평(李完平)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만약 두암이 살아 있었다면 죽음으로 간쟁하여 필시 나처럼 이렇게 변변치 않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선류(善流)로부터 무거운 신망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두암집(斗巖集)》 몇 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김씨(金氏)는 선대가 원주(原州) 사람으로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인데 족보는 일실되었다. 고려 이부 상서(吏部尙書) 문하성사(門下省事) 거공(巨公)이 시조이다. 명망과 덕행이 뒤섞이듯 대대로 이어졌는데,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이조 판서로서 시호가 원도공(元度公)인 해(晐)라는 분이 있으며, 4대를 내려와 팽수(彭壽)에 이르러서는 관직이 부사(府使)이고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말손(末孫)으로 충청 병사(忠淸兵使)이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는데, 박송당 영(朴松堂英)과 함께 도의(道義)로 교분을 맺었으며 기묘제현(己卯諸賢)들이 실로 추중하였다. 조부(祖父)는 안우(安祐)이니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선고(先考)는 형(珩)이니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와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지업(志業)과 행의(行誼)로 크게 알려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선산 김씨(善山金氏)이니, 직장(直長)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김덕유(金德裕)의 따님이다.
배위(配位)는 증 정경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니,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성암(省菴) 이지번(李之蕃)의 따님이다. 현숙하여 뛰어난 행실과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는데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공과 같은 무덤에 묻혔다. 1남을 두었는데 명룡(命龍)으로 군수를 지냈다. 측실에서 난 아들 명시(命時)는 진사로서 군수를 지냈는데, 사인(舍人)으로 부제학(副提學)에 증직된 이길(李洁)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어 공의 아우 부사(府使) 기남(起南)의 손자인 진문(震文)을 후사로 삼았다.
진문은 2남을 두었으니 항(
)과 숙(塾)이고, 사위는 2명으로 판서 엄집(嚴緝)과 감사 목임유(睦林儒)이다. 내외의 후손들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5대손 숭제(嵩濟)가 공의 시호를 받은 뒤 또 나에게 명(銘)을 청하여 신도(神道)를 표창(表彰)하고자 하였는데, 글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홀연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 아들 동식(東植)이 부친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상복을 이끌고 와서 몹시도 간절하게 눈물을 흘리니, 내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인애하여 / 維天仁愛
나라를 보우하니 / 輔佑人國
어떻게 위기를 부축하는가 / 何以扶顚
이름난 석학을 내리니 / 厥有名碩
산처럼 우뚝한 김공은 / 嶷嶷金公
사직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네 / 生爲社稷
황제의 조정에서 의견을 아뢰어 / 敷奏帝庭
왜적의 간특함을 통렬히 분석하고는 / 痛剖倭慝
의주에서 말을 몰고 / 執靮灣徼
유악에서 부지런히 힘쓰니 / 密勿帷幄
눈물을 훔치며 창의하매 / 雪涕仗義
화친하자는 의론 움츠러들었네 / 和議瑟縮
적을 죽이고 돌아와서는 / 殺賊旋軫
정승의 지위에 올라 / 進都鼎軸
원보와 협심하여 / 協心元輔
그대는 기둥이고 나는 주춧돌이라 하였는데 / 爾柱我石
일을 처리함에 앞에서만 따르는 척하지 않았고 / 事無面從
수레를 미는 일엔 순종하였네 / 推車是若
기회를 틈타 공의 말을 빌려온 것은 / 乘機以藉
저 소인들의 속셈이었네 / 彼小人腹
죽음을 앞두고 차자를 초하니 / 臨絶草箚
귀신이 통촉한 바였네 / 鬼神攸燭
완로가 공을 알아주어 / 完老知公
스스로를 일러 변변치 않다고 하였네 / 自謂孱劣
빛나고 빛나는 이정에 / 煌煌彝鼎
만세토록 공훈이 전해지리라 / 萬世勳伐
파릉의 남쪽에 / 巴陵之南
무덤가 측백나무가 울창하네 / 有鬱墓栢
나의 명이 바위에 새겨지니 / 我銘鑱石
영겁의 세월 동안 민멸되지 않으리라 / 浩刦靡泐
[주-D001] 양 경리(楊經理) :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선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 ?~1629)를 말하며, 경리(經理)는 양호가 맡았던 직임인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의 준말이다. 자는 경보(京甫), 호는 풍균(風筠)이며 울산 도산성(島山城) 전투에서의 패배를 승리로 허위 보고하였다가 들통이 나 파면되었다. 후에 청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복주(伏誅)되었다. 《明史 楊鎬列傳》[주-D002] 이정(彝鼎) : 종묘(宗廟)의 제사에서 신주(神酒)를 따라 두는 제기로, 옛날에 공로가 있는 신하의 이름을 여기에 새겨서 오래도록 전하게 했다.[주-D003] 이때 …… 발생하자 : 1583년 2월 경원부(慶源府)의 번호(藩胡) 이탕개(尼湯介)가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와 안원보(安遠堡)를 함락한 사건을 말한다. 《宣祖實錄 16年 2月 7日》[주-D004] 삼사(三司)가 …… 가하였다 : 이 당시 삼사는 이이가 이탕개의 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임금을 업신여기고 군정(軍政)을 마음대로 하였다고 하면서 이이의 파직을 요청하였는데, 선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송응개, 허봉, 박근원 등이 주축이 되어 이이가 음흉한 계략을 품은 채 심의겸(沈義謙), 성혼(成渾) 등과 파벌을 이루어 공의를 배척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하며 더욱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宣祖實錄 16年 6月 11日ㆍ19日, 7月 16日ㆍ17日》[주-D005] 김청음(金淸陰)과 …… 있었는데 : 김청음은 김상헌(金尙憲)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이태호는 이원진(李元鎭)으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이다. 김상헌은 1601년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해 안무 어사(安撫御史)가 되어 제주도에 파견되었고, 이원진은 1651년(효종2) 제주 목사가 되었다.[주-D006] 기록한 글 :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과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를 말한다.[주-D007] 이길(李洁) : 1547~158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연(景淵), 호는 남계(南溪)이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1694년(숙종20) 신원되고 부제학에 추증되었다.[주-D008] 기축년의 화 : 1589년 10월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東人)이 화를 당한 기축옥사를 말한다. 동인인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서인(西人)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 이발(李潑), 이길, 최영경(崔永慶) 등이 처형되고, 정언신(鄭彦信), 정개청(鄭介淸), 김우옹(金宇顒), 이위(李緯) 등이 유배되었다.[주-D009] 기축년의 위관(委官) : 정철(1536~1593)을 말한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역옥(逆獄)을 다스렸는데, 이때 동인 인사들을 가혹하게 치죄(治罪)한 탓에 훗날 동인들로부터 깊은 원한을 샀다.[주-D010] 송유진(宋儒眞) : ?~1594. 선조 때의 반란자로, 본관은 홍산(鴻山)이며, 서울 출신이다. 임진왜란 이후 흩어진 병사들과 떠도는 백성들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천안(天安)과 직산(稷山) 등지에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하였다. 도성의 경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는 의병대장이라 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려고 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직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주-D011] 이몽학(李夢鶴) : ?~1596.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서얼 출신 왕족으로 임진왜란 중에 장교(將校)가 되었다가, 1596년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 등과 함께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의병을 가장하여 반란을 꾀하였다. 홍산, 임천(林川), 청양(靑陽) 등을 함락해 세력을 떨쳤으나 홍주(洪州)에서 홍가신(洪可臣)에게 패한 뒤에 자신의 부하인 김경창(金慶昌) 등에게 살해되었다.[주-D012] 이발(李潑) : 1544~158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이다. 1573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와중에 동인의 영수로서 서인인 정철과 크게 대립하다가 1589년 정여립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주-D013] 세속을 …… 말 : 왕에게 직언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영합하기만 하는 신하를 당시 사람들이 비꼰 말이다. 이러한 말은 선조 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듯하다. 《선조실록》 16년 4월 7일 기사에 “어떤 사람이 승정원의 문에 ‘황공대죄 승정원(惶恐待罪承政院)’, ‘상교윤당 비변사(上敎允當備邊司)’라는 글을 써 붙이는 한편 또 하인들은 의정부(議政府)를 가리켜 ‘윤당각(允當閣)’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정원(政院)은 일을 제때에 살피지 않고 있다가 늘 대죄(待罪)하고, 비변사는 지난번 사변(事變)에 처하여 제대로 조치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상교(上敎)를 받들고 나서는 번번이 ‘윤당(允當)합니다.’라고 회계(回啓)를 해 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선조실록》 26년 8월 19일 기사에 “지금 위에는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임금이 있으나 아래에는 방책을 마련하는 신하가 없어, 나라의 위태로움은 날로 심해져 가는데 묘당의 계책은 여전히 무사안일만을 일삼고 있으니, 이렇게 하면서 회복을 바라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상교 윤당(上敎允當) 승정원이요, 황공 대죄(惶恐待罪) 비변사라.’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주-D014] 영조 …… 하였다 : 《영조실록》 29년 4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충정이란 시호는 계유년(1753)에 내려진 것으로 되어 있다.[주-D015] 동방삭(東方朔) :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청(曼淸)이다. 옛 서적과 경술에 밝고 해학(諧謔)과 직언으로 유명하였는데 점술에도 능하여 점서(占書)를 남기기도 하였다. 《漢書 東方朔傳》[주-D016] 유악(帷幄) : 유와 악은 모두 진영(陣營)에 쓰이는 장막으로, 군사상의 작전이나 계획을 짜는 곳을 말한다.[주-D017] 수레를 미는 일 : 신하가 서로 힘을 합쳐 임금을 보필하고 국난을 극복한다는 말이다. 기원전 589년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제나라 부근의 안(鞍) 땅에서 진을 치고 교전을 벌일 당시, 진나라의 어자(御者) 해장(解張)은 손과 팔꿈치에 화살이 박히는 부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고통을 참아 내며 수레를 몰았고, 그 수레의 오른쪽을 맡은 정구완(鄭丘緩)은 길이 험한 곳을 만나면 반드시 내려 수레를 손으로 미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 결국 제나라 군대를 물리쳤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주-D018] 기회를 …… 것 : 1598년 유성룡이 대각으로부터 잇따른 탄핵을 당할 때, 어떤 사람이 과거 김응남이 유성룡을 비판한 말을 증거 삼아 유성룡을 비판한 것을 말한다. 《歸鹿集 卷17 左議政金公謚狀》[주-D019] 완로(完老) :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을 말한다.[주-D020] 파릉(巴陵) : 경기 양천(陽川)의 별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