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군의 휘(諱)는 도응(道應), 자는 봉휘(鳳輝), 성은 정씨(鄭氏), 본관은 진주(晉州)이니, 문장공(文莊公) 우복(愚伏) 선생 휘(諱) 경세(經世)의 손자이고, 검열공(檢閱公) 휘 심(杺)의 아들이며,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 선생 휘 언적(彥迪)의 외현손(外玄孫)이다. 부군은 만력(萬曆) 무오년(1618, 광해군10) 12월 6일에 태어났다.
부군의 자태와 용모는 옥처럼 깨끗하고 순수하였고, 어릴 적부터 단정하고 진중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5, 6세에 여러 아이들과 놀 때, 한 아이가 매우 오만하게 말을 하였지만, 부군은 웃기만 할 뿐 서로 따지지 않고 교제를 끊었다.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묻자 부군이 말하기를, “서로 따진다면 저 아이와 같아질 뿐입니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남다르다고 여겼다. 부친 검열공이 일찍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문장공이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었다. 부군이 학업을 놓칠까 모부인이 근심하니 문장공이 부군을 가리키며, “이 아이는 마땅히 성취할 것이니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2세에 비로소 학문하여 총명하게 이해하고 밝게 분변하여 학업이 나날이 진보하였다. 16세에 문장공의 상(喪)을 당하자 거상(居喪)의 의절(儀節)은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고, 장례를 치를 때 임금으로부터 사제(賜祭)를 받았다. 부군은 타인을 응대하고 일을 주선하는 데에 분명하고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예관(禮官)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노선생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사손(嗣孫)이 그 가업을 이을 수 있으니 사문(斯文)의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장공이 부군을 위해 수암(修巖) 유진(柳袗)의 집안과 혼사(婚事)를 의논하였는데, 삼년상을 마친 뒤 수암 또한 돌아가시자 조모(祖母)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가 혼사가 늦춰지는 것을 답답하게 여겨 다른 집안과 혼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려 하였다. 부군이 불가함을 주장하면서 “비록 10년이 지체되더라도 어찌 조부의 명을 어긴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조모가 의롭게 여겨 다른 집안과의 혼사를 그만두었다. 이해에 또 조모의 상을 당하여 부군은 21세가 되어서야 유씨 집안에 장가들었다.
무자년(1648, 인조26)에 유일(遺逸)로 선발되어 내시부 교관(內侍府敎官)에 제수되었다. 기축년(1649) 4월에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되었으며, 5월에 발탁되어 세자시강원 자의(世子侍講院咨議)에 배수되었다. 당시 동궁(東宮)을 보양(輔養)하기 위해 특별히 이 관청을 세워 당대 최고 인재를 선발하였을 때 부군이 가장 먼저 그 선발에 들었다. 공을 부르는 명이 또 내려오자, 다만 세신(世臣)의 의리 때문에 부득이 사은숙배(謝恩肅拜)한 뒤에 소장(疏章)을 진달하여 사양하니, 주상이 후한 비답(批答)을 내려, “그대가 동궁을 개도(開導)하고 권강(勸講)한다면 나날이 성취되는 공효가 있을 것이니 나라가 인재를 얻었을 뿐만이 아니다. 어찌 그대의 집안 대대로 영광이 있지 않겠는가. 사양치 말고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그해 10월에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병신년(1656, 효종7)에 황산 찰방(黃山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정유년(1657, 효종8) 4월에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에 제수되었고, 8월에 다시 자의(咨議)에 배수되자 두 차례 소장을 올려서 체직을 요청하였지만 윤허받지 못했다. 주상의 비지(批旨)에 “예를 갖추어 기다렸지만 이르지 않았다.” 등의 언급이 있어서 결국 성외(城外)로 나아갔지만 천연두를 피한다는 이유로 사직하니, 주상이 특별히 내직으로 들어와 춘방(春坊)에 거처할 것을 명하였다. 춘방 지역은 궁궐 경내로서 천연두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부군은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무술년(1658) 1월에 다시 소장을 진달하여 체직되자, 주상이 부군에게 말을 지급하여 호송할 것을 명하였다. 부군이 환수를 요청하자, 주상의 후한 비답(批答)에 “한결같이 돌아보지 않으니 더욱 나를 부끄럽게 하는구나.” 등의 말이 있었다. 그해 11월에 다시 자의(咨議)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제수하는 명이 내려지자 부군은 어머니 봉양에 편하다고 여겨 기해년(1659) 1월에 부임하였다가, 11월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인년(1662, 현종3)에 지평(持平) 부망(副望)에 의망(擬望)되었고,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다. 계묘년(1663, 현종4)에 또 공조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었다. 병오년(1666, 현종7)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미년(1667) 4월 22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50세이다. 그해 8월에 고을 북쪽 가도(佳道) 묘향(卯向)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모인 선비들이 수백 인이었다. 이후 우북당(于北堂) 신좌(辛坐)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부군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기량과 국량이 바르고 엄정하였다. 어릴 적부터 집안 교육에 훈도되어 성리학을 익혔으며, 책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읊조리고 완미하여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고, 경전 외에 역사서와 제자백가서를 꿰뚫어 이해하였다. 약관의 나이가 되었을 때, 관찰사가 선비들을 모아 통독(通讀)함에 정해진 조항이 매우 엄정하였지만, 부군이 강해(講解)한 것이 매우 정밀하고 행동거지가 법도에 맞으니 관찰사가 부군을 대유(大儒)로서 칭송하였다.
부군은 평소에 늘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종일 단정히 앉아 있었으니, 비록 항상 곁에서 모시는 자제들이라 하더라도 부군의 게으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매일 아침이면 반드시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세수하고서 가묘(家廟)를 배알하였으며, 어버이의 잠자리 안부를 여쭙고 식사 상태를 살피면서 기쁜 낯빛으로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어버이에게 아뢰었고, 비록 가까운 곳이라 해도 그렇게 하였다. 숙모 강씨(姜氏)가 일찍 과부가 되어 아들이 없었기에 부군에게 의지하였는데, 부군은 어머니 섬기듯 숙모를 모셨고, 강씨 또한 부군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기에 양자(養子)를 원치 않으며, “죽어서도 또한 이 아이에게 제사를 받으면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부군은 늘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여기는 절개를 지녔다. 정초(旌招)의 명이 자주 내려왔는데 비록 부득이 소명에 응하긴 했지만 반년을 머문 적이 없었다. 외직으로 나가 여러 고을을 관장할 때, 청렴결백으로 자신을 단속하여 부임하는 곳마다 빙벽(氷蘗)의 명성이 있었다. 뇌물을 통렬하게 끊어 내어 사람들이 감히 사적으로 요구하지 못했으니, 단성 현감으로 있을 때 동향(同鄕) 친구가 과일을 보내와 부군이 처음엔 이를 받았다가, 친구가 개인적인 부탁을 하자 불가하다고 꾸짖으며 과일을 돌려보냈다.
부군은 평소 산수를 좋아하여 공무의 여가에는 밖으로 나가 경내의 승지(勝地)를 유람하면서 시를 읊으며 자득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엔 문설주에 발을 치고 종일토록 날을 보냈는데, 문에는 잡객들이 없었고, 오직 당시 명사들과 도의(道義)로 교제하면서 산수 사이에서 서로 따르며 강마할 뿐이었다. 문장은 간결하였고, 찬술한 《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 《소대수언(昭代粹言)》, 유집(遺集)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배위는 곧 수암(修巖)의 딸이자,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선생 휘 성룡(成龍)의 손녀이다. 공보다 뒤에 죽었으며, 율리(栗里)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2남 4녀가 있으니, 아들 석교(錫僑)는 학행(學行)으로 바로 육품(六品)을 부여받았고 현감(縣監)으로 생을 마쳤으며, 그다음은 석현(錫玄)이다. 딸은 참봉(參奉) 이윤해(李允諧), 참봉 이원지(李元祉), 사인(士人) 황종대(黃鍾大), 신강제(申康濟)에게 각각 시집갔다. 현감공은 대사헌(大司憲) 이원록(李元祿)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가 있으니, 딸은 황종수(黃鍾粹)에게 시집갔다. 현감공의 재취는 참판(參判)에 증직된 신형구(申衡耉)의 딸이니, 2남 4녀가 있다. 장남은 참봉 주원(胄源)이고, 그다음은 달원(達源)이다. 딸은 사인(士人) 황연(黃沇), 김양현(金良鉉), 홍수귀(洪守龜), 강진익(姜晉益)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봉공은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의 5대 손녀에게 장가들어 4남 2녀가 있다. 장남은 인모(仁模)이고, 그다음 의모(義模)는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고, 그다음은 예모(禮模)이며, 그다음 지모(智模)는 생원으로 현감을 지냈다. 딸은 유성헌(柳聖憲), 김제동(金濟東)에게 각각 시집갔다.
[주-D001] 수암(修巖) 유진(柳袗) : 1582~1635.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수암은 그의 호이다. 부친은 유성룡(柳成龍)이다. 1610년(광해군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23년(인조1)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 현감이 된 이후 형조 정랑, 청도 군수, 지평 등을 지냈다. 저서에 《수암집(修巖集)》이 있다.[주-D002] 보양(輔養) : 조선 시대 원자(元子)와 원손(元孫)을 보좌하고 교도하는 것을 의미한다.[주-D003] 통독(通讀) : 처음부터 끝까지 한 책의 전체를 읽어 내려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후에 과시(科試)의 하나가 되었다. 해마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통독을 통해 경향(京鄕)의 유생에게 제술(製述)ㆍ강서(講書)를 시험하여 성적이 좋은 10인에게 식년 문과(式年文科)의 복시(覆試)에 바로 나아가는 자격을 주었다.[주-D004] 양자(養子) : 원문 ‘명(螟)’의 풀이로, 명령(螟蛉)을 의미하는 말이다. 벌레의 유충 나나니벌은 이 명령을 데려가 새끼로 삼는다고 하여 양자(養子)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시경》 〈소완(小宛)〉에 “명령이 새끼를 낳으면 나나니벌이 업고 가네. 너의 자식 잘 가르쳐서 착한 이를 닮게 하라.[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하였다.[주-D005] 정초(旌招) : 정(旌)으로 초빙(招聘)한다는 의미로, 현사(賢士)를 조정으로 불러들이는 것을 뜻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서인(庶人)을 부를 적에는 전(旜)으로 하고, 사(士)를 부를 적에는 기(旂)로 하며, 대부(大夫)를 부를 적에는 정(旌)으로 한다.[庶人以旃, 士以旂, 大夫以旌.]”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下》[주-D006] 빙벽(氷蘗) :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쓴 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절조를 지키면서 청렴하게 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가 “3년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쓴 소태나무를 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蘗.]”라고 하였다. 《白樂天詩集 卷1 三年爲刺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