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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능력과 지혜의 물꼬를 트자>의 줄거리:
개천과 논이 야트막한 긴 둔덕으로 막혀 있는 상태를 그대로 놔두면 일 년이 지나도 개천에 흐르는 물은 논으로 흘러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이든 개천과 논 사이를 막고 있는 얕은 둔덕 한 군데를 터놓으면 개천의 물이 논으로 흘러들어와 넓은 논이 물로 찰랑찰랑 덮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개천처럼 나의 주변을 흐르고 있습니다. 물꼬만 트면 됩니다.
하나님 능력과 지혜의 물꼬를 트자
(고린도전서 1:21~31)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능력과 지혜의 물꼬를 트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능력과 지혜의 물꼬를 트자”
제가 사는 강릉은 아무래도 대도시들보다는 시골입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조금만 걸으면 논과 밭을 볼 수 있습니다. 개천이 흐르고 있고 그 옆으로 논이 있습니다. 개천과 논 사이에는 야트막한 긴 둔덕으로 막혀있습니다. 그대로 놔두면 몇 년이 지나도 개천에 흐르는 물은 논으로 흘러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둔덕 중에서 어느 한 곳을 터놓게 되면 개천의 물이 논으로 흘러 들어가서 넓은 논이 물로 찰랑찰랑 덮이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물꼬가 트인 것입니다. 이렇게 물꼬가 트인 상태를 인위적으로 막지 않는 한 개천의 물은 계속해서 논으로 들어가 찰랑거림을 이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발견됩니다.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능력과 지혜는 개천이 흐르듯이 내 몸이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나의 주변을 24시간 맴돌며 흐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능력과 지혜가 들어오기 위해서는 물꼬만 트면 됩니다. 조물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별의별 수단을 다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물꼬만 트면 논에 찰랑거리는 물처럼 인격과 삶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이 물꼬만 막지 않는다면 당신의 능력과 지혜가 나의 삶으로 들어오는 일에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하게 흘려보내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물꼬를 틀 수 있을지에 대해 본문을 통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2~23절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조물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흘려보내는 물꼬이십니다. 이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말로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인 것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실제로 같이 죽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물꼬 트기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의도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2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1절의 내용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대충 짐작은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이루고 있는 논리적 구조가 특이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란 스스로 판단을 근거로 생각하고 파악해서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의식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압니다. 의식으로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시구나. 그 외에는 모두 있게 된 것들이다.”라고 아는 것이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또 마음으로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좋음을 구해야 하는데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시다. 하나님만을 구해야겠다.”라고 아는 것이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아무리 자기 지혜를 동원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해도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동원하셨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알게 되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지혜가 너무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려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뭐 이렇게 미련한 일이 다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제시된 십자가 사건을 미련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생각이 죽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은 지혜로움이 제로가 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인간의 지혜가 개입될 수도 없고 적용될 수도 없기에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에게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 사건 안으로 뛰어들 것을 요청하십니다. 미련한 일로 보이는 십자가 사건 바깥에서 아무리 십자가를 묘사하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십자가에 대한 의견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 자체를 멈추고 십자가 사건 안으로 뛰어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믿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됩니다. 십자가 안으로 뛰어들기가 바로 의식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십자가로 뛰어들지 않는다면 아무리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이런저런 사건이라 말하고 십자가를 이해하려 하고 십자가에 대한 의견을 말할지라도 십자가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묘사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십자가에 대한 개인적인 묘사와 견해만 남을 뿐이지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생각할 것이 아니라 뛰어들어야 합니다. 기억하고 들리면 십자가 사건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는 말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말에 의해서 십자가가 들릴 때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십자가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기억할 때마다 십자가 사건은 재현됩니다. 재현된 십자가 사건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있는 분으로 느끼고 다른 모든 것들은 있게 된 것들임을 믿게 됩니다. 또한 마음에서는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스스로 지혜를 발동하는 인간들이 보기에는 십자가 사건이 천하에 미련한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생각과 분석과 이해와 판단을 비롯한 모든 것을 죽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적용될 수 없는 사건이기에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21절의 내용입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좀 더 입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2~23절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표적이란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그 일이 조물주 하나님에 의해서 벌어졌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표적을 구하는 것이 체질이 되어버린 대표적인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유대인은 출애굽 때 열 가지 재앙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장 대표적인 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의 삶 안으로 깊숙하게 개입해 들어오셨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적이 바로 표적입니다. 이러한 표적은 본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제발 좀 기적을 행해 주세요!”라고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유대인의 믿음의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는데 그 믿음의 내용이 기적을 요구합니다. 출애굽의 기적은 유대인이 소원한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실 일을 위해 일으킨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출애굽 사건을 보고 배웠다는 유대인은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소원하는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바란 결과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유대인은 세상을 향해 갖게 되는 소원에 대해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되었고 이 기적을 구하는 것이 체질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이 세상을 향해 갖게 되는 소원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빗나감의 죄를 의미하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입니다. 이 세상 것을 소원하며 하나님의 기적을 찾고 구하는 것은 빗나감의 죄가 적용되고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마음의 소원이라는 과녁에서 하나님을 제외시킨 것입니다. 좋음의 대상에서 하나님을 제외시킬 때 반드시 나타나는 일은 이 세상 것을 좋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기적을 바라게 됩니다. 내가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한편,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지혜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일입니다. 그 대표적인 질문이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그 대답으로 물, 공기, 불 등의 요소들을 생각하며 이론을 만들면서 답을 추구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러한 철학자들을 지혜롭게 여겼고 그리스는 지혜의 본산으로 여겨졌습니다.
다만 이러한 질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지혜의 활동입니다. 조금 바꾸어 말하자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인가? 어떻게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직면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답을 얻고 해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지혜 찾기입니다.
다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지혜 찾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조물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모든 것이 있게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있게 된 것들에 대해서 있게 하신 조물주 하나님을 전혀 모른 채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구합니다. 영원히 절대적으로 정답이 가려져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있게 된 모든 것들에 대해 질문하며 답을 구했지만 정작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조물주를 제외하였기 때문에 가장 멍청하고도 가장 정답에서 거리가 먼 오답들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답 아닌 답을 내놓는 것이 헬라인의 지혜이고 철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헬라 철학은 중요시됩니다. 심지어 신학자들조차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의 지혜의 놀음에 존경을 표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의 지혜를 빌려서 합니다. 그리고 신학계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대 신학자라고 이야기하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 세상에서 헬라인의 지혜의 놀음은 가장 멍청하고 가장 까불어대는 주체성의 놀음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과 지혜를 찾는 헬라인을 비교해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향해서 생기는 마음의 소원을 그대로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가 마음에서 갖고 싶어 하는 대상들 중에서 하나님을 제외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은 이 세상을 향하여 생기는 자기 주체성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유일한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은 세상 것 소원하기를 통해서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헬라인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통해서 유일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이러한 특징으로부터 생겨난 결과가 23절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붙잡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소원이 생기는 마음을 따르는 유대인에게는 세상에 대한 죽음을 요청하는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건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믿고 선민을 자처하는 유대인이 세상에서 가장 거리끼는 일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일과 정반대의 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의 연합은 세상을 향한 모든 소원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선민임을 자처하는 유대인은 하나님의 독생자가 죽으신 십자가 사건을 제일 거리끼게 되었습니다.
한편 헬라인은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질문과 답을 스스로 구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때 미련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거리낀 이유가 세상에 대한 소원이 죽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라면 헬라인이 십자가를 미련하게 본 이유는 세상에 대한 생각이 죽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인은 세상을 판단하려 하고 파악하고 세상에서 주어지는 문제를 이해하여 답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니 미련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소원과 생각 일체가 죽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세상 것을 소원하여 이루고 싶은 유대인에게는 제일 거리끼는 사건이 되었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파악하고 이해하여 답을 얻으려 했던 헬라인에게는 제일 멍청한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에 뛰어들 때 생각이 제로 상태가 됩니다. 판단이 제로 상태가 됩니다. 분석과 이해와 파악이 제로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가장 미련하고 멍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자기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뉴스를 보면서 나랏일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자기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자기 인생의 상황을 파악하려 하고 이해하려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소원을 갖는 사람, 그 소원을 유지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 세상을 스스로 파악하고 이해하고 답을 얻으려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 사건 안으로 뛰어들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향한 소원을 가진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거리끼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자기의 주체성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 대응하는 표현입니다. 가장 무력해 보이는 십자가가 실제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유대인은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기적을 배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는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출애굽 하게 하신 것처럼 십자가는 우리를 출세상 하게 합니다.
세상 것을 소원한다는 것은 세상에 종속된 노예의 상태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돈을 섬기는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로부터 출애굽을 하듯이 출세상을 시킵니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갈라지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내 마음을 사슬로 묶고 끌어당겨서 노예로 삼고 있는 세상의 좋음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출세상을 시키는 별세(엑소도스, ἔξοδος)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기적의 사건입니다.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홍해가 갈라져서 출애굽을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 사건은 좋은 것을 찾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하늘에 계신 조물주이신 아버지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는 상태가 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는 지혜를 찾는 헬라인에게 대응하는 표현입니다. 헬라인의 지혜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시도였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지혜란 인생의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상황에서 문제가 무엇이든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조물주 하나님이 내리신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건강 문제, 돈 문제, 인간관계 문제,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 문화적인 문제 등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게 뛰어들 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 소원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고 십자가를 보고 뛰어들 때 이 세상에서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이 됩니다. 표적이란 어떤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표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으로 뛰어들면 이제 세상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 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를 움직여 가십니다. 밥 먹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하시는 기적이 되고 표적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의 물꼬가 트이는 삶입니다.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생각대로 일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조물주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게 됩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지혜의 물꼬가 트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뛰어들지 못한 채 바깥에서 십자가를 묘사하며 이해하고 의견을 갖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십자가에 뛰어들어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실제로 일어나면 소원이 죽고 생각이 죽습니다. 그렇게 되면 삶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출애굽 때 강력하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꺼내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갖게 만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모든 일에 임할 것이며 모든 일에 대한 정답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개천의 물이 물꼬를 통해 논으로 들어와서 찰랑거리듯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26~27절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당부가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뛰어들면 나타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많이 배웠든 많이 가졌든 가문이 좋든 이 세상의 조건 자체가 죽어버리게 됩니다. 죽어버린다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만 세상적인 것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십자가로 뛰어들기는 힘이 듭니다. 그것들이 아깝고 그것들이 좋고 그것들을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적인 것이 없으면 없을수록 십자가에 뛰어드는 일은 쉽습니다. 마라톤 선수의 복장은 가볍습니다. 코트를 걸치고는 무거워서 쉽게 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을 얼마나 가졌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뛰어들면 가져도 안 가진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지지 못했다면 십자가에 뛰어들기에 더 좋은 조건을 가진 것입니다.
개천의 물이 물꼬를 따라 논으로 들어가듯이 하나님께서 능력과 지혜를 주시면 혹시 이 세상 것들이 잘 이루어지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세상 것들이 닿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십자가에 뛰어들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막힘없이 계속해서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따라 마음은 하늘에서 영생을 살고, 몸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답을 따라서만 움직이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물꼬입니다. 이 물꼬를 틀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 안으로 뛰어들어야만 합니다. 31절을 보면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자랑하며 누리며 즐기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찰랑거림을 향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으로 뛰어들어서 물꼬를 트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유대인이 그렇게 원했던 하나님의 능력과 헬라인이 그렇게 찾았던 하나님의 지혜를 오리지널로 누리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