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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여주로의 여행>
◈ 경기도 여주
여주는 고대선사에는 단현리, 연양리, 능서면 내양리에서 구석기유물이 수습되었으며 청동기 유적으로는 흔암리 선사주거지가 잘 알려져 있다. 마한·백제기에는 고구려·동예 등과 요충지대를 이루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이포, 술천성, 매룡리고분군 등의 유적이 형성되었다. 삼국통일이후 757년에 각각 황효현, 기천군으로 고쳤다.
고려 때는 황려현으로 고쳤으며 기천군을 천녕군으로 개칭하였다가 영의로 바꾸었으며 여흥으로 고치고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고 군에서 부로 승격되어 황려부라 하였다가 다시 여흥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다시 부로 승격되었고, 음죽현의 어서이촌이 여흥군에 병합되었다.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황려부는 여흥도호부로, 천녕군은 천녕현으로 정비되었다가 세종대왕릉이 북성산 기슭으로 옮겨짐에 따라 여주목으로 승격되었으며 근현대에는 고종 때 23부제의 시행에 따라 목에서 군으로 개편되어 충주부의 관할에 속하였으며 1896년 13도제의 시행으로 다시 경기도로 환원되어 3등군이 되었다. 1914년 읍·면통폐합 조치에 따라 15개면에서 9개면으로 정비 되었으며, 이때 주내면을 중심으로 근동면·수계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여주면이 성립되었다가 1941년 여주면이 여주읍으로 승격되었다.
◈ 세종 대왕릉--경기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907-2
♣ 영릉(英陵)은 제4대 세종대왕(第4代 世宗大王)과 동비 소헌왕후 심씨의 릉이다. 세종대왕은 태종의 제3자로서 태조 6년에 탄생하였으며 휘가 도이고 자는 원정이며 모후는 원경왕후 민씨이다. 태종 8년에 충녕군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이 해 8월 8일 태종의 선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으며 춘추 21세였다. 세종대왕은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 등 각 분야에 대한 통찰력과 판단력, 학문적 노력을 겸전하였고 천성이 관후 강건하고 자질이 총민, 독실하였으며 태종대의 안정된 왕정을 기반으로 황희, 맹사성 등의 명사와 이종무, 김종서 등 무신, 집현전학사 등 현재의 보필을 받아 조선문화 황금기를 이룩한 영주요 성군이었다.
세종은 54세에 환후로 승하하니 묘호를 세종으로 릉호를 영릉이라 하였으며 경기도 광주 대모산 아래 헌릉, 서쪽 산줄기 소혜왕후 심씨의 영릉 서실에 합장하니 이는 유명에 의한 것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의 동봉이실의 합장릉이며 세조의 유명으로 릉침에 병석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며 현궁의 석실제도는 회격으로 바꾼 뒤여서 이를 따랐던 것이다. 이후 영릉 불길론이 있어 천릉이 거론되었으나 실현을 보지 못하다가 예종 2년에 지금의 여주 신릉으로 천릉하였다. 구릉의 상석, 명등석, 망주석, 문, 무인석, 마석,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었는데 1973년도에 이화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어 그 일부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신도비는 두전을 영릉신도비라 하였고 비명(碑銘)과 음기(陰記)는 풍화와 마모가 심하여 수십여자를 판독할 수 있을 뿐이다. 릉 언덕 아래에 정자각이 있으며 정자각 동측엔 비각이 있다.
비각 남측 아래로 수직방(守直房)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서측엔 수자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 남측 삼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으며 홍살문 서남방에 방형(方形)의 연지(蓮池)가 있고 더 남측으로 내려와 영릉 참배로 東便에 재실(齋室)이 있으며 1972년에 복원된 것이다.
◈ 효종대왕릉 ---경기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
♣ 회양목이 위치한 영릉(寧陵)은 조선조 제17대 효종대왕(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쌍릉으로 원래 양주의 건원릉 서쪽에 있었으나, 1673년(현종 14년)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였으며, 특히 영릉 재실은 현존하는 조선조 왕릉 재실 중에서 건물의 공간구성과 배치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와 같은 재실 공간 내에 회양목과 향나무 그리고 재실 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이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경북 북부, 충북, 강원도, 황해도 지방의 석회암 지대에 주로 자생한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로 이와 같이 재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노거수 일 뿐만 아니라 1673년에 조성한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여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서 그 유래 및 역사성이 매우 깊다.
효종대왕은 인조의 제2자로서 광해군 11년에 탄생하였으며 휘가 호이고 자는 정연, 호가 죽오이며 모후는 인열왕후 한씨. 인조 4년에 봉림대군에 봉하여졌으며 병자호란 후 인조 15년에 왕세자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의 심양에 인질로 있다가 인조 23년에 환국하였으며 이 해 형이며 왕세자인 소현세자가 병서함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인조 27년에 인조가 승하함에 이 해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대군시 청의 심양에 8년간이나 볼모로 있으면서 고초를 겪었고 부왕 인조의 삼전도치욕을 설욕하고자 북벌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재정의 빈약과 청의 강성으로 북벌을 실행하지 못하였고 임진, 정유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폐한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근해지역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였으며 필생의 간원이던 북벌을 실행치 못한 채 효종 10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니 재위 10년이었고 춘추 41세였다. 현종 즉위년에 묘호를 효종이라 하고 릉호를 녕릉이라 하였으며 이 해 양주 건원릉 서측 산줄기에 예장하였다. 녕릉 석물에 틈이 생겨 릉침의 침수로로 인한 천릉론에 따라 현종 14년에 여주 영릉 동측 언덕 자좌오향에서 정남향에 천릉하였으며 천릉에 앞서 릉역내의 민가와 총묘를 옮기게 하였다.
◈ 명성왕후 생가와 탄강구리비--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45-3
♣ 조선 고종의 비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 일본 자객에 의해 시해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광무 1년에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선포할 때, 명성황후로 추봉되었다. 능은 청량리에 있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으로 함께 합장되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건립 당시에 있었던 이 집의 행랑채는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안채는 1975년과 1976년에 중수한 것이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
명성황후 탄강구리비는 명성황후의 생가에 남아 있는 비이다. 비가 서있는 자리는 명성황후의 어렸을 적 공부방이 있던 터라고 한다.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명성황후가 태어난 옛마을)’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고, 뒷면에는‘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음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飮敬書,광무 8년 갑진오월 어느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 새겨놓았다. 글씨를 쓴 이는 알 수 없으나 황태자 시절의 순종이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1904년에 세운 것으로 당시에는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많이 퇴색되고 낡아서 1970년도에 새로이 보수하였다.
◈ 영월 루--경기 여주군 여주읍 상리 136
♣ 여주 읍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영월공원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이다. 원래 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신헌수 군수가 현 위치에 누각으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영월루 입구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그 윗쪽에는 1958년에 이건 된 창리 삼층석탑(보물 제91호)과 하리 삼층석탑(보물 제 92호)이 있다. 상층 누마루에 올라보면 한강 상류 쪽으로 강물 건너편에 신륵사가 보이며 하류 쪽으로는 멀리 흥천면 마을이 보여 전망이 매우 좋다. 누각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괴암이 절벽을 이루는데 바위 위에는 힘 있는 필치의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영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집으로, 2층 누각 형식인데 정면 길이에 비하여 측면 길이가 짧으므로 평면은 긴장방형이다. 장대석 기단에 놓인 높은 사각 초석 위에 짧은 하층 기둥이 세워져 누마루가 꾸며지고 그 위에 상층 기둥이 세워져 이익공과 결구되고 오량(五樑)의 지붕 가구가 짜 올려져 있다. 창방(기둥 머리에 기둥을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 부재)이 굵은 부재로 보강된 것은 문루의 가구법과 유사하다. 상층의 누마루 사방에는 계자각(鷄子脚)(누마루나 대청의 난간 중간중간에 풀무늬를 새겨 세운 가느다란 기둥)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익공의 형태나 가구 수법으로 미루어 18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된다. 영월루는 전망이 뛰어난 곳에 입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낮은 기단과 길다란 몸체, 치켜 들려진 팔작지붕의 비례가 적절히 조화되어 있다.
◈ 단종 어수정---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상구리 64
♣ 단종은 조선의 제6대왕으로 이름은 홍위(弘暐)이며 부왕은 문종, 모후는 현덕왕후 권씨, 비는 정순왕후 송씨이다. 세종 30년에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수양대군의 강압에 못이긴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을 때인 세조 2년에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등과 성승 · 유응부 등에 의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이른바 ‘단종복위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단종은 세조 3년에 6월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후 1457년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 되었다가 10월 죽임을 당하였다. 그후 숙종 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숙종 24에 복위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이 우물에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금사면 이포리에 당도하여 천서리 파사성을 거쳐 이 우물에서 목을 적시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예부터 이포리에는 정선과 영월에서 목재를 운반하던 뗏꾼들이 마지막으로 쉬어가던 이포나루가 있던 곳이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단종의 유배 길은 아마도 한강에서 배편으로 여주에 당도하여 영월까지 육로를 이용한 것 같다. 처음부터 육로를 이용하였다면 조선시대 일반적인 교통로였던 장호원-제천을 거쳐 영월로 가는 경로를 밟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 어수정이 이곳과 가까운 대신면에 있는데 현재 블루헤런 골프장 내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다고 한다.
◈ 기천서원지---경기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산26-1
♣모재 김안국·회재 이언적·지재 홍인우·오리 이원익· 수몽 정엽·택당 이식·나재 홍명구·기천 홍명하 등 여덟 분의 위패를 모신 기천서원이 있던 터이다. 기천서원은 선조 13년에 처음 지었으며, 인조 3년 임금으로부터 ‘기천’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37년 모현사가 다시 지어지고 1978년에 사당을 복원하였으며, 최근에는 부속 건물들도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 서원터에는 사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서원 동쪽 언덕에 모현사가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짜 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모현사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최근에 복원한 기천서원은 강당이 없이 사당과 동재, 서재만 있는 특이한 배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김안국(모재선생)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자는 국경, 호는 모재, 본관은 의성으로 참판 정국의 형으로 김굉필의 문인이다. 1541년 병조판서로서 천문, 역법, 병법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와 닥나무를 화합하여 종이를 만들어서 왕에게 바치고 이 생산을 권장하였다. 조광조와 함께 자치주의를 주장했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하였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주역, 농사, 국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관직에서 물러나서 여주로 내려와 여생을 마쳤으며 인조의 묘정에 배향 되었고 여주의 기천서원, 이천의 설봉서원, 의성의 빙계서원 등에 제향 되고 있다. 조선 중종 때 태지를 만들어 보급하신 김안국 선생께서는 나라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이천의 이포나루에서 의성의 오토산까지 조각배를 타고 다니시며 경부운하 사업을 검토하셨다고 한다. 저서로는 <모재집>, <모재가훈>, <동몽선습>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경이다.
◈ 매산서원---경기 여주군 능서면 번도리 321-4
♣매산서원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조 때에 경상남도 거창과 산청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건립되었다. 그 후 목은 이색(1328~1396)과의 친분을 감안하여 추향하고 매산(梅山)이라는 이름으로 사액받았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때 후손인 문겸(文謙)이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여 춘추로 제향해 왔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 이후 삼우당의 후손으로 여주경찰서장에 취임한 문광규(文光圭)가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8년에 한차례 더 보수하였고 1987년에는 서원내의 사당을 헐고 다시 지었다. 번도리의 번머리마을 내에 있는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의 정문인 외삼문이 나타난다. 경내의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서재가 세워져 있고 정면에는 공부하던 강당이 자리 잡고 있다. 강당 내에는 「매산서원봉건기(梅山書院奉建記)」를 비롯하여 「충선공별묘사기문(忠宣公別廟祠記文」과 “매산서원(梅山書院)” 현판이 걸려있어서 서원의 연혁을 살펴볼 수 있다. 강당을 지나 뒤쪽의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있고 담장 시설 안에 사당이 위치한다. 처마에 “매산사(梅山祠)”란 현판이 걸린 사당은 맞배지붕에 방풍판(防風板)을 달고 한식골기와를 얹었다. 정면 3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내부에 문익점과 이색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사당의 마당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150년의 향나무가 드리워져 있어 서원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 강한사와 대로사비 ---여주읍 하리 200-1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명신인 우암(尤庵) 송시열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조 9년 왕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오셨다가 김양행 등 유신에게 명하여 건립하게 하고 대로사라 사액하였으나 고종 10년에 강한사라 개칭하였다. 사당의 방향은 서쪽에 위치한 효종대왕릉을 향하고 있다. 우암은 인조 1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경릉참봉을 거쳐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며 후일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효종 9년에 판서에 승진되어 북벌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우의정을 거쳐 현종 13년 좌의정이 되었다. 현종 15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일시 유배되었다가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며 숙종 9년 봉조하가 되었고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하였으며, 숙종 15년 왕세자 경종 책봉문제로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일생을 주자학연구에 몰두한 거유로 이이의 학통을 계승,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예론에 밝았으며 뛰어난 학식을 지녔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시호는 문정으로 문묘, 효종묘에 배향되었다.
대로사비는 선생의 제사를 모시는 대로사(大老獅)의 내력을 적은 비로, ‘대로’선생에 대한 존칭이다. 송시열 선생은 인조 11년(1633) 사마시에 합격하여 경릉참봉을 지냈으며,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선생은 이곳 여주에 머무를 때마다 효종의 능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후배들에게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었다 한다. 정조가 영릉을 행차하다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김양행에게 대로사를 짓도록 명하였다. 이는 노론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정조가 노론이 받드는 송시열을 높여줌으로써 노론의 불만을 달래려 한 정치적 의도를 말해준다. 대로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강한사(江漢祠)로 이름만 바뀐 채 화를 면하였다. 비는 네모난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앞면에 비의 명칭을 새기고, 나머지 면에는 비문을 새겼다. 정조 11년에 정조가 친히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 시간이 되면 이색, 서희, 이완, 최시형 등의 유적도 찾아갑니다.
◈ 이색---대신면 천서리
이색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고려삼은 중의 한 명이다. 성균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원(元)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으며 충정왕 3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귀국하였다. 공민왕 2년에는 고려문과에 1인으로 장원급제하여 숙옹부승이 되고 원 제과의 회시에 1등, 전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승사랑·한림원경력 등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면서 벼슬을 했던 이색은 공민왕의 배원정책에 호응하여 부원파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민족적 주견을 확립함으로써 왕의 총애를 독차지 하였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에 반대하던 이색은 역모로 몰려 귀양을 갔다. 조선 개국 후 유배에서 풀려나 부인과 함께 한산으로 내려갔던 이색은 두 아들을 잃은 시름에 오대산, 여주 등지로 방랑길에 오르게 된다. 이 무렵에 태조 이성계는 옛 친구의 예로 이색을 한산백에 봉하고 토지 등을 내려주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색을 대하는 이성계의 태도에는 각별한 바가 있었는데 종종 왕궁으로 초빙하여 융숭하게 대접하고 헤어질 때는 중문까지 나가 읍하며 배웅하였다 한다. 태조 5년에 이색이 다시 여강에 도착하였는데 임금이 보내온 술이라며 경기감사가 전해 준 술을 마시고 배 안에서 죽었다. 저서로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가 있고 능서면의 매산서원(梅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목은 이색처럼 여주를 사랑했던 사람도 드물다. 여주는 이색의 유배지이자 부친 이곡의 유배지였으며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장원이 있던 곳이며 생을 마감한 곳이다. 이런 인연으로 이색은 평소에 여주로의 ‘귀거래’를 입에 달고 살았다.
묘는 천서리 등산 넘어골의 동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는 첨지중추부사 이욱, 군자감참봉 이찬원 등의 예안이씨 묘들이 산재해 있다.
◈ 서희 장군묘---산북면 후리 산53-1
♣고려 초기의 외교가이며 문신인 장위공 서희(942∼998)의 묘소이다. 광종 11년(960)에 과거에 급제하여 광평원외랑을 거쳐 내의시랑에 올랐으며, 정치적 활동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성종 12년에 거란이 침입하여 압록강을 건너오자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거란군을 물러가게 하였다. 그후 청천강 이북에 있던 여진족을 토벌하고 강동 6주를 설치하여 평안북도 일대의 땅을 확보하였다. 그의 묘는 부인의 묘와 같이 있는 합장묘이고, 봉분 아래에 2단의 둘레석을 두른 형태이다. 쌍분의 가운데에 묘비가 서 있고,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있는 돌로 만든 등)이 1기씩 놓여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 1쌍씩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이완 장군묘---여주읍 상거리 산19-18
♣조선 중기의 무신인 매죽헌(梅竹軒) 이완장군의 묘소이다. 인조(仁祖) 2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평안도 병마절도사·함경도 병마절도사·경기도 수군절도사 등의 자리를 역임하였다. 1649년 효종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 정책을 계획할 때 어영대장, 훈련대장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훈련대장과 병조판서의 임무를 맡았다. 당시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성곽의 개조와 신축등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자 북벌 계획이 중지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종 때에는 수어사로 임명되었고,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묘역은 봉분을 중심으로 둘레에 돌담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앞에는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기 위한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다. 묘역의 좌우에는 문인석·망주석·동자석이 각각 1쌍씩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 최시형 선생 묘소---금사면 주록리 산138
♣최시형은 고종대의 종교인으로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이다. 초명은 경상(慶翔)이고 본관은 경주이며 호는 해월이다.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며 19세 때 밀양 손씨를 맞아 결혼한 뒤 경주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곳에서 집강으로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였다. 철종12년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고 이해 7월 북도중주인으로 임명되어 도통을 승계 받았다. 최제우의 순교이후 동학의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경전인『동경대전』『용담유사』를 간행하여 신도의 교화 및 조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동학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여 고종 29년부터는 교조의 신원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제1차 신원운동은 1892년 신도들을 전주 삼례역에 집결시키고 교조의 신원과 신도들에 대한 탄압중지를 청원하였으나 탄압이 계속되자 1893년 40여명의 대표가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 측의 회유로 일단 해산하였으나 오히려 탄압이 가중되자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 그해 3월 보은의 장내리에 수만 명의 신도를 집결시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을 파견, 탐관오리를 파면하자 자진 해산하였다. 당시 많은 신도들은 무력적인 혁신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시기상조임을 이유로 교세 확장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전라도 고부 관아를 습격한 것을 시발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신도들의 뜻에 따라 그해 충청도 청산에 신도들을 집결시켰고 전봉준이 다시 봉기하자 적극 호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운동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하다가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교수형을 당하였다가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 천덕봉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내려 형성한 주록리 소시랑골의 산 중턱에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사형집행 후 가매장된 시신을 이종훈 등이 몰래 수습하여 이곳에 매장하였다고 전한다. 봉분의 우측에는 1980년에 세운 묘비가 서 있다. 비신의 앞면에는 “천도(天道) 제이세(第二世) 교조(敎祖)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 묘”라 하고 뒷면에는 이선근이 지은 비문을 기록하였다.
◈ 이원익--여주 인물편에 등재 되어 있음
이원익은 조선 인조대의 명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명종 1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선조 2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이에게 인정받아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선조 37년에 호성공신에 녹훈되어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에 투철하였다. 선조, 광해군, 인조를 임금으로 모시면서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그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 광해군 7년에는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폐위하여 서궁에 유폐시키려 하자 이를 반대하던 이원익은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렬한 어구로 상소문을 초하여 홍천으로 귀양 갔다가 여주에 이배되었다. 마침내 인목대비가 쫓겨나자 여기서 반정의 명분을 찾은 이귀, 김류, 이괄 등이 당시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이원익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원두표를 여주로 보내 묵시적 동의를 얻었다. 반정이 성공해 인조가 등극하자 이원익은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저서로 『오리집(梧里集)』과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고 시호는 문충이다. 1760년에 편찬한『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여주 신륵사--- 여주읍 천송리 산113-1
♣ 신륵사는 낮고 부드러운 곡선의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절 앞으로는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유유한 자태로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이 사찰은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창건 시기를 뒷받침할만한 자료는 없는 상황이다.
신륵(神勒)이라는 사찰 이름에 대해서는 신기한 미륵(혹은 나옹선사, 혹은 인당대사)이 신기한 굴레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고 전한다. 흔히 용은 물속에 사는 것으로, 또 구름 속을 날며 비를 불러오기도 하는 물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전설의 동물로 이야기 된다. 용마가 출현하여 사납게 날뛰었다는 것은 곧 강물이 범람하여 휩쓸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용마가 출현했다는 마암(馬巖)의 역할이다. 이색은 “물을 막는 공은 마암석이 높다”고 하였고, 임원준(1423~1500)은 “마암은 강을 요긴한 곳에서 막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모두 사납게 흐르는 강물의 흐름을 막아주는 마암의 역할을 칭송하고 있다. 만약 용마의 출현이 강물의 범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물을 막아주는 마암에서 용마가 출현했다고 하는 것은 어색하다. 그러나 한때 물길을 막아주는 마암의 구실에도 불구하고 강의 심한 범람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문에 산천비보사상(山川裨補思想)에 의하여 지세가 약한 곳에 절을 세워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신륵사를 창건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용마의 출현은 강이 홍수에 의해 범람되는 것을 비유한 것이며, 따라서 용마를 제압했다는 것은 홍수로 인한 강물의 범람을 피하기 원하는 대중의 바람이 설화화했다는 견해이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 다층전탑,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대장각기비, 보제존자석등, 조사당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 팔각원당형석조부도 등이 있다.
◈ 이언적: 본관만 여주일 뿐 경주시 안강읍 안강마을에 옥산서원이 있고 신도비, 독락당(사랑채) 묘역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