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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정통 교인의 예수님 생각법 (下)>의 줄거리 :
이단과 사이비에 빠지지 않은 정통 교인의 예수님 생각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속함의 의미를 생각하는 겁니다. 둘째 예수님의 만물입니다. 예수님과 만물의 관계를 생각함이고, 셋째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 되심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활동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와 하나님, 나와 만물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하십니다.
정통 교인의 예수님 생각법 (下)
(골로새서 1:16~23)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올바른 계통에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다면 이단과 사이비가 되고 맙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안방에 있어도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그릇되면 이단이고 사이비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점을 겨냥하고 있는 골로새서는 우리로 하여금 정통 교인으로서 예수님을 바르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예수님 생각 법 전체를 요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기는 생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복잡하고 어려우면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쉽게 출발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구원과 생명과 은총을 위하여 내가 믿어야 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나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함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 모든 대상에 대해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자 하나님의 아들 됨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의 기본 틀입니다. 이 기본 틀에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법이 이어져 나갑니다. 생각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대상에 마음은 접촉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관한 믿음의 틀 안에 들어왔다면 생각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자꾸 퍼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생각은 곧 마음을 퍼트리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생각함으로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은총의 세계에 마음의 접촉면을 넓혀나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한 생각이 올바르지 못한 채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될 경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갓난아기와 엄마의 교제는 젖을 먹는 것으로 국한됩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면서 생각이 발달함에 따라 엄마를 이해하게 되고 풍부한 인격적 교제를 이루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통해서 예수님과의 교제를 이루고,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깊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을 하되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격성의 특징은 마음과 생각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음과 생각과 기분은 삼위일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올바르게 생각하는 법에 대하여 가르쳐줍니다. 그것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만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창조의 과정을 통해 만물이 예수님의 소유임을 드러냅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만물 가운데 특별히 선별된 자들이 예수님의 교회를 이룹니다. 넷째는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사람과 예수님의 만물과 예수님의 교회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내용을 따라 정통 교인이 예수님을 바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 안에 들어간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제공되는 은혜의 세계에서 점점 면적을 넓혀가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피조세계 전체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 피조세계에서 특별히 선택된 예수님의 교회란 어떠한 존재인가, 이러한 예수님의 사람과 예수님의 만물과 예수님의 교회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어떻게 화평의 관계를 이루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정통 교인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사람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상은 타락 이후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란 이러한 흑암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건져냄을 받은 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죄로부터 사함을 받은 속량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에 이어서 둘째에서 넷째 생각법에 대한 내용이 제시됩니다.
16~17절을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을 위해 만물이 창조되었고,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예수님 안에 함께 섰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창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기를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언급됩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하나님의 기쁨의 이유를 찾아보면 솔로몬의 경우 왕이 된 뒤에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무려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생각을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솔로몬에 대해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성령님과 함께 삼위일체이시며 엄연히 독립된 인격체이십니다. 얼마든지 스스로 모든 일에 대해 생각하실 수 있고, 모든 생각은 하나님다운 생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고 부인하십니다. 오직 아버지의 생각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만 재판하고자 했을 때 기뻐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피조물과 관련된 모든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이셨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바라보실 때 큰 기쁨을 느끼셨습니다.
피조물이 생기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란 곧 안에 있던 생각이 바깥으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생각을 빠짐없이 받아들이셨기에 예수님을 말씀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보시면서 사랑과 기쁨이 넘쳐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과 기쁨의 넘침이 바로 창조의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기쁨의 관계에 참여할 다른 인격적 존재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바라보시면서 사랑과 기쁨이 넘쳐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기쁨이 창조의 재료가 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대상에 빛이 비치면 그 뒤로는 그늘이 생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예수님을 향해 갈 때, 그 뒤쪽으로 그늘이 생기면서 세상 만물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도 존재할 수 없고 그늘이 없기에 피조세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은 물론이고 태양이나 달을 포함하는 무한한 우주조차도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이 예수님을 향하면서 예수님 뒤에 만들어지는 그늘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교통하심을 통해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창조는 어느 날 우연히 제3의 장소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중에 그 사랑과 기쁨이 빛처럼 비추고 있었고, 예수님 뒤에 생겨난 그늘 속에서 창조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피조세계는 애초에 존재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창조는 마치 결혼식의 잔치와도 같습니다. 결혼식에는 신랑과 신부가 있어야 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없다면 결혼식이 열릴 이유도 없고 잔치도 열리지 않습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식의 전제조건이듯이 예수님은 창조의 전제조건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주 만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람에 이어서 생각하게 되는 예수님의 만물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살펴볼 것은 셋째로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만물 가운데 사람이 있고 그 가운데 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교인 전체를 가리킵니다. 교회를 교인과 구분되는 대상으로 여긴다면 교회는 추상화되고 실제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이론 속의 교회가 됩니다. 교회는 곧 교인 전체이며, 한 교인은 교회를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은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을 향합니다. 그 예수님의 그늘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 중에서 아담의 후손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흑암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A라는 사람에 대한 모든 생각을 다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됨으로써 예수님의 그늘에 있음에도 아버지의 생각이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까지는 A라는 사람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이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예수님 안에 들어온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곧 흐름입니다. 이 흐름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로 연결되고 예수님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교인이고 이들 전체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교인은 예수님의 그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인이 그렇지 못한 사람과 다른 점은 예수님이 받아들이고 계신 아버지의 생각에서 자기에게 해당되는 부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하늘로 가는 길을 내셨습니다. 교인은 예수님이 만드신 길을 마음이 흐르는 강줄기로 삼는 자들입니다. 우리나라의 한강이나 독일의 라인강은 예로부터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마음의 물길이 하나님까지 이어지는 수로입니다. 이 수로를 따라서 예수님께 들어온 하나님의 생각이 나에게까지 전달됩니다. 이 모습이 마치 머리로부터 생각이 나와서 지체가 움직이는 것과 같기에 예수님은 머리이시고 교회는 몸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각을 다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예수님을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에 의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인 예수님 뒤쪽으로 창조는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 사람도 있습니다. 소나무 한 그루나 나비 한 마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전해지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데 사람만은 예외입니다. 사람은 타락하여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생각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을 통해 타락의 세계로부터 하늘을 향해 길을 내셨습니다. 흑암에서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을 따라서 마음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끝없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로 마음을 드립니다. 그러한 자들이 바로 교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인들은 마음의 흐름을 따라서 예수님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의 생각이 각자에게 임하게 됩니다.
오늘도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예수님께서 다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오직 교인들만 자기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이시자 근본이라고 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각자 예수님과 연결될 때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서 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인이 전부 예수님께 연결된 상태에서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시자 근본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8절 하반부를 보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서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대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형편에 맞추어서 인간이 되셨기에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서열이 꼭 일등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승천하심으로 모든 것을 예수님의 발밑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서 승천하셨기에 만물 위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는 대상에 대해 생각할 때에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보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교인은 머리이신 예수님께 연결되고 하나님의 뜻이 막히지 않고 흘러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일이 넷째로 예수님의 사역으로 나타나는 만물의 화목입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압니다. 그런데 이 화목은 교리가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위해 먼저 화목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21~22절을 보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화목함이란 거리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상태를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악한 행실 때문에 원수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행실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음의 증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생겨서 화목하지 않으면 악한 행실을 하게 되고 마음으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이 거리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생기는 이유는 사탄에 의한 이간질이 먹혀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간(離間)질이라는 표현을 보면 떠날 이(離)에 사이 간(間)을 씁니다. 둘 사이에 끼어서 멀어지게 하는 행위가 이간질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고 원수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있음보다 배우자의 있음을 우선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는 밀착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배우자가 끼어들어서 하나님의 있음보다 배우자의 있음을 먼저 느끼게 되었다면 사탄의 이간질이 통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마음으로 화평하지 않고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삶에서 돈 문제, 건강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하나님의 있음보다 우선적인 존재감의 대상으로 느껴진다면 이간질을 당한 것입니다. 돈 문제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원수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돈 문제에 마음이 붙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된 상태를 죽이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몸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더 가까운 분이십니다. 지금도 모든 사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세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가까우신 하나님보다도 눈으로 보는 세상일들의 있음과 좋음을 먼저 느끼고자 합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에 신앙은 종교로 전락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한 이유는 사탄의 이간질을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대해서는 내 몸보다도 가깝습니다.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무엇인가 끼어있다면 그 상태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교인이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먼저 의식하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 상태를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죽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나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와 하나님이 화목해질 때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만물이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 아닙니다. 만물 중에서 내가 관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정원에 있는 소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다면 내 멋대로 하는 일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면 내가 관계하고 있는 만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내려올 수 없습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돈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그 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임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기에 돈을 쓰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됩니다. 나와 관련된 만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하나님의 뜻이 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화평함의 관계는 유지됩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는 상태가 됨으로써 나와 관련된 모든 만물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이 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와 하나님과 만물이 예수님 안에서 통일과 화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 예수님의 만물, 예수님의 교회,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네 가지를 늘 생각함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 머무는 내 마음의 면적을 계속해서 넓혀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에 대해서는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생각에 있어서 정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