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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람 대할 때 선한 싸움 이어가는 법>의 줄거리 :
앞에서 선한 양심을 버림으로써 선한 싸움을 포기하여 믿음에 파선을 당한 알렉산더와 후메내오의 예를 들었습니다. 이제 사람을 대할 때 믿음의 파선을 하지 않고 선한 싸움을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즉 사람을 대하면서 십자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놓지 않는 법입니다. 만나거나 관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의논하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 대할 때 선한 싸움 이어가는 법
(디모데전서 2:1~15)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본문에는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고, 읽지 않은 8절에서는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기도가 강조되고 있기에 본문의 내용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해인 이유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라기에는 기도에 대한 내용이 빈약합니다.
사도 바울은 1장 마지막에서 알렉산더와 후메내오가 선한 양심을 버리고 선한 싸움을 중단한 예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 선한 싸움을 중단한 결과가 믿음의 파선이라고 하였습니다. 배가 파도에 파선되는 것처럼 선한 양심을 버릴 때 마음은 선한 싸움에 져서 파선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절의 ‘그러므로’는 바로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이어집니다. ‘사람의 생활 중의 대부분은 만남이다. 그러므로 알렉산더나 후메내오처럼 믿음의 파선을 하지 않으려면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할 때 선한 싸움을 계속할 수 있으려면 기도해야 한다.’라고 선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이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서 좋다고 여겨서 욕구하려는 세상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욕구는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인내로 지켜나감이 선한 싸움의 내용입니다. 인내가 요청되는 이유는 여차하면 세상의 좋음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마음의 청결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더러워지면 하나님과의 만남 또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한 싸움을 해나가기 위해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인내로 지켜나가며 마음의 청결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마음의 채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선한 싸움의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내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며, 또한 인내로써 그 죽음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죽음을 지켜낸다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 나의 주체성이 살아나고,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이 세상을 향하고, 채움을 위한 욕구가 세상을 향하는 것을 십자가로 막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를 통해 이루어지는 선한 싸움입니다.
이러한 선한 싸움이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전쟁터가 있다면 인간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관계에서 선한 싸움을 해나가며 마음이 하나님과 직면하는 구원의 상태를 지켜내고 유지해가는 방법으로 기도를 제시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기도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자로서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대할 때 그 사람과 나의 일대일의 관계가 아닌 그 사람과 나와 하나님의 관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1절은 선한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내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람을 공통적인 상대자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은 단순히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이어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선한 싸움을 놓치고 중단한다면 믿음은 파선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결국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따라서 인간관계에서 기도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일대일로 상대하고 관계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붙잡은 상태가 유지될 수 없고 선한 싸움도 이어갈 수 없습니다. 언제나 사람을 대할 때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공통의 상대자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상대할 것인가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한 선한 싸움은 승리로 이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소 특이합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 이외에도 오해할 수 있는 소지의 내용이 다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를 비롯하여 위정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의 목적을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쉽게 오해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면 하나님에 의해 위정자들이 마음을 곱게 써서 정치를 잘하게 되고, 그 결과 우리가 속한 사회가 안정되고 질서가 유지되면서 믿음 생활도 순조롭게 잘할 수 있게 된다.’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았기에 실제로 예배당 생활을 할 때 위정자들을 위한 기도를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디모데전서는 63~66년 사이에 기록된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를 염두에 두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위정자들을 위한 기도의 의미는 무색해집니다. 이 편지가 쓰인 직후인 67년에 네로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면서 사도 바울은 순교하였고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고난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위정자들을 위한 기도를 했는데도 하나님이 위정자들을 난폭하게 만드신 셈입니다.
본문은 결코 고요하고 평안한 신앙생활을 목적으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를 보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고난에 대한 예고가 반복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데살로니가후서 1장 5절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를 언급하며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1을 가진 자로서 인내와 믿음2를 지켜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보시는 요점임을 언급하며 고난을 기정사실화 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 또한 고난을 회피하고 고요하고 평안한 신앙생활을 목적으로 기도하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네로의 박해는 그리스도인에게서 경건함과 단정함이 사라져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박해를 받았다고 해서 이들의 마음에서 고요함과 평안함이 사라졌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적인 안정이나 외부 환경의 평안함을 추구하지 않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위정자들을 기도로 움직임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사회의 안정을 꾀하겠다는 의도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안이란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내일 아침 참수가 정해진 상태에서도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발로 차야 깨어날 정도로 깊은 잠을 자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처럼 광풍노도 속 일엽편주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는 평안입니다. 위정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쳐서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질서와 안정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고요함과 평안의 근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문자적으로는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앞선 말씀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아무래도 마주하는 사람에게 신경과 마음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빼앗기고 놓치게 되고 선한 싸움은 중단됩니다. 선한 싸움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의 대상들 앞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에서 놓치지 않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대할 때 이러한 선한 싸움이 중단되기 십상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되 그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우선시하는 선한 싸움을 해나가라는 뜻입니다. 위정자들에 대한 기도 또한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위정자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활동이 나의 삶에 영향을 주고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관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선한 싸움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뉴스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이 나올 때 거부감이 생깁니다. 그럴 때 그 정치인과 일대일로 상대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정치인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든 마음에 안 들어서 거부하든 하나님을 놓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상대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직접 상대하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관계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소문이나 뉴스를 들으며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일대일 관계가 된다면 호불호가 나타나고 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잃게 되고 선한 싸움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특별히 위정자들에 대한 기도를 언급한 이유는 당시의 분위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하층민이었고 노예도 많았습니다. 위정자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감을 그대로 마음에 둔 상태에서 예수님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선한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이미 진 상태입니다. 마음에 하나님보다 위정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먼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것은 좋아함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싫어함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사랑하는 가족이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워하는 원수도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마음에서 내쫓으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36절에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들어온 가족을 원수처럼 여겨 내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위정자들에 대한 거부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위정자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는 않더라도 거부감을 갖고 있는 동안에 위정자들을 마음에 품게 되기에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마음에서 내쫓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단순히 중보기도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이어가는 방식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지녀야 할 기본적인 태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선한 양심을 버림으로써 선한 싸움을 중단하여 믿음이 파선된 예로 알렉산더와 후메내오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사람을 대할 때 선한 싸움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기도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대할 때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공통된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흔히 만인구원론의 근거로 여겨지는 말씀입니다. 다만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앞서 사도 바울의 예를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하기 전 자신에 대해 1장 13절에서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하였고 15절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울이었던 시절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론적 확신 아래에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모욕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폭행하고 잡아다 죽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누구도 사울이 그리스도인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께서 사울을 당신의 아들로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자신의 예를 통해서 그 사람의 모습이 어떤 지위와 계층에 속했든지, 어떤 성격이든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든지 마주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아들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모든 사람’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사도 바울 자신이 그러했듯이 그들 속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사울이었던 시절에 자신은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는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자기 확신으로 인해 무서운 오류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가장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랬던 자신조차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었기에 너희가 만나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예정에서 근본적으로 제외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배운 대로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적인 구분과 차별이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모든 종류의 사람 속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사람의 행동에 빨려 들어가지 않게 됩니다. 좋고 나쁨을 따지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과 의논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8절을 보면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또한 쉽게 오해되는 구절로 흔히 공중예배에서 기도할 때 취할 태도에 대한 내용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실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살펴보았던 모든 사람에 대해 기도하라는 말씀과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식의 공중예배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배는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방인이었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복음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식의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공중예배를 염두에 두고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각처에서 기도하라’라는 말씀은 다양한 계층과 신분과 처지와 성격과 속성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모든 장소에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공중예배를 염두에 둔 내용이었다면 분노와 다툼을 멈추라는 언급은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어느 때 분노와 다툼이 생기는지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위정자들을 볼 때 마음에 들지 않기에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또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분노와 다툼을 멈추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는 것은 실제로 손을 들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하늘로 향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일대일로 상대할 때 마음에 안 든다고 분내고 다투려 하지 말고 마음은 하늘로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육체적인 손을 들라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사고나 장애로 인해 손이 부자유한 분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관계하는 사람이 아닌 하늘로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기도는 곧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 사람을 마주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의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로 인해 마음에서 분노와 다툼이 생긴다면 선한 싸움은 중단되고 하늘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알렉산더와 후메내오처럼 믿음은 파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해야 할 일은 일대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공동전선을 펴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과 의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손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이 땅에 대해 끊어질 때 거룩할 수 있습니다. 상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끊어질 때 거룩해집니다. 그렇게 거룩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사람을 상대할 때 선한 싸움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9절을 보면 이번에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9~10절을 보면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워 마음의 경건함이 유지된다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는 상황 속에서 움직여 나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에 가려져 계시고 귀에 가려져 계십니다. 그렇기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직면하는 상태일 때 겉으로도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의 여성들은 자기 치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말씀에서 언급된 대로 머리를 땋고 금이나 진주로 단장하고 값진 옷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외양을 가꾸는데 쓰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께 마음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겉으로 반영되고 드러나야 선한 싸움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1절로 돌아가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하였습니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라는 비슷한 표현이 반복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방식입니다. 간구의 방식이 있고, 기도의 방식이 있고, 도고의 방식이 있고, 감사의 방식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주일에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입니다.
또 본문 마지막의 15절을 보면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해산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무척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 말씀은 문자대로 여자가 아기를 낳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로마서로부터 바울 서신 전체의 내용을 볼 때 그런 뜻일 수가 없습니다.
4절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는 말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처지와 신분과 계층과 인종과 문화권에 있고,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이든, 내 마음에 들던지 안 들던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자가 있음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과거의 사도 바울처럼 극한의 하나님의 적대자였던 사람조차 구원을 얻었던 것과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기에 누구를 대하든 하나님과 대화하며 상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세상적인 차별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고 15절의 여자의 해산에 대한 말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영지주의(Gnosticism)에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을 우월하게 생각하고 육체의 의미를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임하신 것까지 무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환상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을 가현설(Docetism)이라고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여성의 잉태와 출산조차 육체에 속한 일이기에 필요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문헌을 보면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상당히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언급은 바로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을 배경에 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자로 태어나고 잉태하며 출산하는 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결정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면서까지 신비한 지식을 통해 구원을 얻겠다는 영지주의자들의 태도는 결코 올바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던 교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여성 됨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구원이 임할 수 있는가?’라고 되묻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문자대로 받아들인다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이 이어지던 당시의 시대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요지는 사람을 대할 때 선한 싸움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내 마음속의 하나님을 대체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는 동안 계속해서 사람을 만납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잊고 놓친다면 알렉산더와 후메내오 같은 믿음의 파선이 내 일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는 일대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앞에 놓고 하나님과 공동전선을 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나는 그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아무 능력이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식은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입니다. 우리가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원칙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위정자에 대해 거부감을 갖듯이 어떤 사람에게 거부감을 가져서 분노와 다툼을 갖는다면 하나님을 놓치고 선한 싸움에서 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과 의논하고 대화해야만 합니다. 인간관계는 하나님과 나의 공통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은 직접 사람을 만나든 간접적으로 만나든 사람과의 관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아버지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를 놓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선한 싸움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의논하는 기도를 가르쳐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실제로 오늘도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을 하나님과 나와의 공통의 상대로서만 대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