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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관심이 전부인 자들과 관계하기>의 줄거리 :
생활 현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 사람은 오로지 세상 관심이 전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일체이신 하나님의 삼위에 근거하는 바른 교훈을 생활 현장에서 기억하며 사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관계할까요? 우선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려듦이 없이 오로지 객관적으로 바라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제 하나님이 시키시는 선한 일을 합니다.
세상 관심이 전부인 자들과 관계하기
(디도서 3:1~3)
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관심이라고는 세상에 대한 관심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용어로 말하자면 십자가를 국경선으로 해서 세상 나라와 예수님 나라가 접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육체가 세상 나라에 거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십자가 국경선을 넘어가지 못한 사람은 오직 관심이 세상 나라에 머물게 됩니다. 반면 마음이 십자가 국경선을 넘어간 사람은 예수님 나라에 머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마음이 십자가 국경선을 넘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세상 나라에 머무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세상 관심이 전부인 자들과 관계하기’라는 제목을 풀어보자면 ‘생활 현장에서 바른 교훈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세상 관심이 전부인 사람과 관계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2장의 내용을 통해 생활 현장에서 바른 교훈을 따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를 향해 늙은 남녀, 젊은 남녀, 종들에 이르기까지 바른 교훈을 가르칠 것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중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살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한편 본문 1~3절에서는 그렇게 바른 교훈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일 경우에 권세 잡은 통치자들과 일반 불신앙인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내용적으로는 로마서 13장 1절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디모데전서 2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말씀 외에도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종들에게 상전에 대한 복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얼핏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활 현장을 염두에 두자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소위 기독교 종교인들 중에서 정치에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이전 정권을 지지하며 현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전 정권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며 현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문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치인이나 권세들에 대해 분명한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면 그만큼 세상 나라를 향해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의 특성상 정치적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에 대한 복종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그들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종과 순종은 우리의 마음을 겨냥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통치자나 권세들이 정한 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까지도 그들에게 친밀감이나 거부감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정치가를 좋아하고 추앙하거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가를 미워하고 거부하는 일은 얼핏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마음 자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법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방인인 다리오 왕이나 느부갓네살 왕을 섬겼습니다. 다만 이들은 왕이 우상숭배를 요구할 때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왕에게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지킨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으로부터도 발견됩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어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당시의 권세였던 산헤드린공회와 대제사장에게 반기를 드신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사도 바울이 디도서를 기록하던 시기는 66~67년 사이로 추측됩니다. 이 시기는 64년의 로마 대화재 이후에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방화의 누명을 씌우고 탄압을 가하던 시기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권세 잡은 통치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선한 일을 하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황제에게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담겨있는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특정한 정치인이나 권세에 대해 호감이나 거부감을 갖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호불호를 끊어낼 것을 요청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에 온전한 복종과 순종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복종하고 순종하라 함은 결코 정치인이나 권세를 마음으로 좋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생활 현장에서 신중하게 사는 방법으로 바른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생활 현장은 대한민국에 속해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통치자들이 어떤 법을 정하고 어떤 정치를 하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 나라의 통치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통치자들이 영향을 끼치는 생활 현장에서 살아갈 때 바른 교훈을 따르는 자라면 삶의 시작부터 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바른 교훈 붙잡기의 4대 강령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나는 누구인가? : 진리를 따르자면 나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나는 한 가정의 남편이나 아내 혹은 부모이기에 앞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내가 학교에 다닌다면 학생이기에 앞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내가 직장인이라면 회사에서 부장이기에 앞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한 준비된 마음가짐이고 자아의식입니다.
2. 나의 상대는 누구인가? : 내가 지금 삶의 현장에서 첫 번째 상대해야 될 유일한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뿐입니다. 내 몸이 회사에 있을 때 마음으로 마주할 유일한 상대는 사장님이나 업무가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내 몸이 가정에 있을 때 마음으로 마주할 유일한 상대는 배우자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몸이 회사에 있다고 해서 마음까지 사장님을 향해있거나 업무에 쏟아부어지고 있다면 진리를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3.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의 있음과 좋음을 관심하는 자라면 삶의 현장에서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을 성령이 장악하셔서 성령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바른 교훈을 신중하게 따름이 나타나게 됩니다.
4. 어디를 그리워할 것인가? :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계신 천국은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써 내가 가야 할 아버지의 집입니다. 바른 교훈을 신중하게 따르는 사람이라면 내 마음에서 몸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천국을 일상적으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바른 교훈 붙잡기의 4대 강령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통치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면서도 자기가 해야 될 선한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 세상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과의 관심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충돌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이 될 수 있습니다. 주관적으로 좋아함이나 싫어함이 발생하지 않기에 세상나라 통치자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든지 마음은 말려들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통해 몸이 어디에 있든지 마음은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만을 관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몸은 하나님의 뜻이신 성령님이 장악하십니다.
이렇게 관심이 다르기에 충돌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정치가나 권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 마음이 말려들지 않고 객관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나라의 정치가나 권세들 위에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권자로 군림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복종과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서 나타나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에서 유일한 이인칭의 상대로 관계하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내 몸이 속한 현장을 다스리고 있는 통치자 위에 군림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통치자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통치를 잘하든 못하든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통치자들을 바라볼 때 잘하고 못하고를 따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통치자들이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는 기준은 결국 돈입니다. 나를 더 잘살게 해주는 통치자면 좋은 통치자고, 나를 못살게 하는 통치자는 나쁜 통치자입니다. 이는 곧 마음이 여전히 세상에 묶여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묶여 있기 때문에 오직 세상 나라에 대한 관심밖에 없는 통치자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해서 호불호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자들이라면 세상 나라의 통치자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던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세상 나라의 통치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영역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 나라의 관심이 전부인 통치자들의 말과 행동이 반응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세상 나라를 빠져나가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세상 나라의 통치자들에 대해 호불호의 반응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종과 순종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들 위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해있음을 염두에 두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통치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10년, 20년, 100년, 1000년 앞을 내다보시며 그들의 영적인 악함까지도 주권적으로 섭리해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거하는 세상 나라에서 잘살게 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선민의 나라였던 북 왕국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여로보암 2세의 통치 때 번영의 절정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영적인 타락이 극한으로 치닫습니다. 그리고 북 왕국 이스라엘은 불과 30년 만에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러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예를 염두에 두자면 ‘잘살아 보세’의 정신이야말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잘 살지 못하게 방해하고 못살게 통치해야 좋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잘살게 통치하는 것을 좋아해서도 안 되지만 못살게 통치하는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잘살게 통치하는 자들을 볼 때 하나님의 주권을 봅니다. 저 사람이 잘나서 나라를 잘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렇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못살게 만드는 통치자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 위의 하나님의 주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친다면 신앙도 놓치게 됩니다.
통치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그들의 말과 행동이 대중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그들의 말과 행동이 모든 사람들을 자극하는 도전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통치자들에 대한 태도를 보면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바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인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십자가 관문을 통해 세상 나라를 빠져나가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미쳐버린 네로 황제에 의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통치자에 대한 복종과 순종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복종과 순종은 십자가를 국경선 삼아 세상 나라를 벗어나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 자들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하다 보면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마음이 이미 세상 나라에 침투되었다면 어떤 정치가에 대해 호불호를 드러낼 것입니다. 여당이나 야당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성경 말씀은 결코 제대로 전해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 나라를 빠져나가지 않으면 성경은 이해조차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은 네로 황제의 박해라는 상황에서 복종과 순종을 강조하며 선한 일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바로 세상 나라에 갇힌 상태에서 벗어나라는 요청이 담겨있습니다. 세상 나라에만 관심을 두는 통치자들이 어떤 통치를 하든지 마음을 예수님 나라로 들여보낸 자들은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보물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나라에서 우리가 그리워할 곳은 천국뿐입니다.
세상 나라에 사로잡힌 통치자가 통치를 잘하든 못하든 나의 관심의 대상인 하나님과 천국을 상하게 하거나 내게서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치자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통치자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편 가르기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세대별 지방별 여당과 야당에 대한 호불호가 극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편 가르기의 태도는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시인하지만 온몸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한편 이러한 태도는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발견됩니다. 2절을 보면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세상 관심에 사로잡힌 일반인들에게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비방하거나 다툴 필요가 없는 이유는 통치자들에게 호불호를 보일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세상 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천국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에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남아있는 내 몸을 성령이 장악하셔서 말하고 행동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방하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비방하거나 다툰다면 마음이 세상 나라에 말려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 나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말려들었다면 나도 세상 나라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라는 말씀은 나의 상태를 검진하는 청진기와 같습니다. 비방하지 않고 다투지 않기 위해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비방이 나올 수 없습니다. 다투려는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방하고 싶고 다투려는 마음이 생긴다면 나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생겼다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았고, 바른 교훈을 잊어버렸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는 나를 비방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와 이해관계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 현장에서 신중하게 바른 교훈을 기억한다면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생활 현장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승진이나 돈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관심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중하게 바른 교훈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비방하거나 다툴 일이 없습니다.
세상 나라에 묶여있는 세상 관심의 소유자들과 십자가에서 세상 나라에 대해 죽고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의 관심은 전혀 다릅니다. 세상 나라에 묶인 사람이 나를 아무리 비방하고 다툼을 유발해도 내 진정한 보물이고 재산이며 관심거리인 하나님과 천국을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싸움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비방과 다툼은 생기지 않습니다.
이어서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못된 짓을 하는 사람에게도 관용해야 한다면 그들의 악행을 묵인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관용은 앞서 언급된 복종과 순종의 태도와 일치합니다. 상대에게 말려들지 말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관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관용은 결코 그 사람을 내 마음에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관용은 용납이 아닌 객관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세상적인 손해를 끼치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허용하시기 때문에 나를 비방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만 관심을 둘 때 다른 사람에 대한 객관화가 가능합니다.
지금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이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내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 섭리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나에 대한 일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순교한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유대인들에 의해서 못 박히신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예수님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셨기에 그들의 행동과 비방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이 정치가들을 대하는 태도이며, 믿지 않는 자들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를 관심하는 자들에게 말려들어서 반응하며 호불호의 입장을 밝히게 된다면 그들을 지배하는 관심과 나의 관심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3절을 보면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도 전에는 세상 나라에 관심을 두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렇게 악한 일들로 나타나기에 다툼과 비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제일 인격파탄자라고 여겨지는 사람을 한 명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면 뉴스에서 본 사람이라도 좋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일수도 있고 정치가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십자가 예수님을 받아들여 마음이 몸에서 떨어져 나오면 어떨까요?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마음이 십자가 관문을 지나 예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관심의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을 마음으로 관심하는 동안에는 세상에서 기쁨을 얻으려 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에서 존재감을 느끼려 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럴 때 괴물이 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도 그랬던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세상 나라에 마음이 사로잡혀서 인격이 파탄 나고 왜곡되어 괴물 같은 사람일지라도 십자가를 보태서 생각해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보아도 이전과 이후의 차이를 찾을 수 없다면 내가 바른 교훈을 기억하지 못하고 신중하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신중하게 하지 못한다면 변화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내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알았다면 인격파탄자로 행동하는 어떤 자들에 대해서도 미워하는 마음은 생길 수 없습니다.
생활 현장에서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다.
2. 나의 상대는 누구인가? : 내가 지금 삶의 현장에서 첫 번째로 상대해야 될 유일한 당신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뿐이다.
3.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 예수님과 하나님과 연합하면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4. 어디를 그리워할 것인가? :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계신 천국은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써 내가 가야할 아버지의 집이다.
이 바른 교훈의 4대 강령을 기억함으로 사도 바울이 간절히 바랐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상 관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향하여 마땅히 취해야 될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관심에 사로잡힌 괴물 같은 모습이 바로 나였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십자가를 기억하여 바른 교훈을 따름으로써 이 괴물 같은 모습을 거부하고 부인하게 하시고, 이전의 나와 같이 세상 관심에 사로잡힌 자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만 드러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