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오는 날에/김낙희
“이번에는 꼭 갈 거야!”
나의 절친은 매번 오겠다고 날 잡아 놓고도
“코로나 우리 지방에도 많이 생겼어” 이 핑계 저 핑계로 혹독한 겨울 추위에도 코로나19를 물리치질 못했고 오미크론이란 신종 코로나 확진자는 날마다 눈구름 밀려오듯 부풀어만 갔다.
30대부터 알게 됐던 나의 친구는 나이를 먹어 갈수록 서로의 소중함을 알게 했다. 그렇게 소중한 그는 지금도 안부 등을 자주 물으면서, 그렇게도 내가 보고 싶다고 이 어려운 코로나 시기에 1박2일 예정으로 남편과 함께 고창으로 나들이를 온단다.
아침 7시 40분에 진천에서 출발하여 11시에 도착 한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12시 까지 맡은 일이 있어 12시에 약속을 했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12시에 선약이 있으니까, 고창읍내에 도착하면 가까운 찻집에서 차 마시고 있어”라고 말하고 일을 마쳤다.
“어디에 있어?”
“고창 읍내 들러보고 있는 중이야.”라고 한다. 조금 있다가
“그런데, 조양관이 문을 닫았어.”라고 한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난 아는데도 별로 없고 참 난감했다 지인한테 물어 갈비 집으로 찾아갔다. 갈비집은 그렇게 손님이 북적 대는지 앉을 자리도 없는가 같었다. 그래도 겨우 갈비 주문하고, 또 육회 까지, 친구는 술을 한잔 하고 싶다 하더니, 술 못 마시는 나를 생각해서인지 안 먹겠단다.
“한잔 함께하게”
“ 안 돼 운전해야하니까” 친구는 한사코 사양을 했다. 나를 그만큼 배려해주었다. 그렇게 친구와 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친구 “남편은 내일 일도 모르니 그냥 왔어요. 또 언제 올지 못 올지도 모르지 않아요,” 라고 하신다.
>나이 70이 넘으면서 네가 이리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몇 년 전에 위암 수술했고, 눈에 이상이 생겨 즐겨 하시던 테니스공 이 안 보여 지금은 그냥 나가서 밥 먹고 차 마시고 밤 운전은 서툴러요,“라고 말씀을 이어가셨다.
어찌나 말랐는지 몸은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 바람 불면 날아갈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두터운 다운코트로 몸을 휘 감았으나 그래도 바짝 마른 모습은 가려지질 않았다. 가슴 한켯 짠하고 쓰라렸다.
고창읍성 잔디로 드리워진 그 넓은 마당을 거닐었다. 봄비 맞은 잔디가 친구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봄비 촉촉이 내리는 친구와의 데이트, 둘이는 노란 우산을 받쳐 들고 소근 소근 정담을 나누면서 하염없이 걸었다. 이야기는 끝도 없이 주고 받으며 이어졌다.
그것은 친구와의 달콤한 사랑 이야기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내 친구는 천사요 영원한 애인이다. 친구 남편은 저쪽에서 혼자 쓸쓸히 돌아다닌다. 우리 둘이는 어찌 그리 즐거운지 10년은 젊어지는 느낌이었다. 가는 시간이 봄비 속에 촉촉이 젖어들어 떨어질 줄 모르는 우정이 아쉽기만 했다.
“ 차 한잔 마시게”
“그래 좋아”하며 함박 웃음 짖는 친구의 모습은 더 이뻐 보였다, 친구 남편 앞이여서 끝도 없던 정담은 뒤로 한 채 차를 마시고 일어났다. 친구는 고창에서 1박하기로 정했고, 나는 남편 저녁 해주라고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친구는 아쉬운 눈동자 역력히 차에 오르는 내 손을 잡으며
“손 한 번 더 잡아보게.” 한다,
가슴이 뭉클 해진다. 눈물인지 봄비에 젖었는지, 운전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네네 차창 윈도우브러쉬 움직일 때마다 앞을 가렸다.
무심한 봄비는 하염없이 오는데..
한 여름 밤의 추억/김 낙 희
청포도 알알이 푸른 잎 사이로 희망의 해님이 생긋 윙크하며 아침을 열어간다. 한 낮에 갑자기 소나기구름 뒤덮이더니, 한 바탕 장대비를 쏟아 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 쨍하다. 저 멀리 들판에는 쌍무지개 떠 산허리 휘어 감는다. 프르른 초원은 들판 가운데 시원스레 펼쳐져 여름을 장식하고 있다.
“어 쌍무지개 떴네!”
너무 가까이 드리워진 무지개, 잡을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들판으로 한 바탕 달려보았던 어린 시절, 내 마음에 지금도 일곱 색깔로 아련히 남아있다.
더위는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 따라 잠자려 가고, 잠자리 때 너른 마당 맴돌며 나를 푸른 꿈의 세계로 데려가곤 했었다.
마당 모퉁이에 드높이 드리워진 살구나무에서 매미는 메엠 메엠 징단 맞춰 노래 부르고, 그 매미소리 내 마음을 시원하고 차분하게 정화시켜주었다. 지금의 아이스 크림 보다 더욱 시원했고 달콤한 자연의 노래였다.
해질녘 아버지 께서는 볼그스레 통통한 토마토 한 소쿠리 따들고 오셔서
“이따가 저녁에 먹자.” 하셨다.
어머니 삼베적삼은 땀인지 빗물인지 흠뻑 젖은 채 커다란 광주리에 한가득 옥수수 이고 오셔서 집 모퉁이에 부려 놓으셨다.
지금도 생각나는 어머니에 옥수수는 어찌 그리 크고 실했는지, 수염 떼어내기가 무섭게 먹어치우던 어린 시절이었다. 얼마나 허둥대며 먹었으면
“괜찮다” 띰서(떼어내면서) 천천히 먹자고 하셨을까.
큰 가마솥에 보리때 불을 떼어 한솥 가득 쪄낸 옥수수 몰곳몰곳 하고 좋은 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차례로 돌아가고, 우리들은 반 토막, 벌레가 먼저 맛본 것, 작고 숫자만 여러 게인 것을 줬다. 그래도 달짝지근하고 오묘한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철도 없이 옥수수가 지천이고 소금, 달고나, 첨가하여 푹푹 삶지만 그땐 큰 가마솥에 첨가물 없이 쪄먹었는데도 자연의 맛 그대로 달았다.
그 시절 간식은 초저녁부터 밤이 이슥할 때까지 야식으로 옥수수, 감자, 참외 등이 나왔는데, 특히 개구리 닮은 개구리참외는 더없이 달고 맛있었다.
해질녘 작은 머슴이 풋 쑥이며 갈대 잎으로 모깃불 피워놓으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향기, 지금 어디에서 찾아 다시 맡아볼 수 있을까. 자연 바람에 실려 그넓은 마당을 맴돌았던 모깃불.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가 어디 있었던가. 부채바람으로 더위를 날려 보내곤 했었다.
밤하늘의 별꽃들은 그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던 별자리, 지금도 그 자리에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은하수, 밤하늘을 수놓고 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 다 잊은 채 모기떼 달려든다고 나갈 생각조차 않고 그 넓은 창문 꼭 닫고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긴다.
어디 그 뿐인가 야식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지금도 아련한 옛일들을 떠올려 보며, 어린 시절 한여름 밤의 추억들을 새록새록 꿈길에서나마 펼쳐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