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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실례지만, 지금 어디서 오십니까?>의 줄거리 :
너무 기분이 좋아 보이는 당신 지금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기에 당신의 얼굴에 그토록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습니까? 어디서 오는 길이기에 그토록 원망과 불만이 가득한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즉 우리가 이 세상 삶의 현장에서 보이는 모든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은 두 가지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과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실례지만, 지금 어디서 오십니까?
(요한1서 2:12~17)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는 정말 기분이 좋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좋은 일 있어?’라고 묻게 됩니다. ‘좋은 일’로부터 생긴 그 사람의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이 나를 만나는 현장으로 오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항상 어딘가에서 옵니다. 집에서 직장으로 오고, 다시 직장에서 집으로 오고, 친구를 만나러 오고, 친구를 만난 후에는 가족에게로 옵니다. 몸은 항상 어딘가에서 지금 현장으로 오게 됩니다. 밖에서 벨이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엽니다. 나온 주부의 모습을 보니 앞치마에 밀가루가 묻어있습니다. 주방에서 수제비를 만들다 왔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몸이 놓여있는 현장에서 드러내는 표정, 몸짓, 말과 행동은 어딘가에서 오는 것입니다. 몸의 이동은 없더라도 표정이나 몸짓이나 말과 행동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신이 어딘가에서 왔는지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예일대학에 아이를 유학 보낸 부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법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부모는 기뻐서 친구들을 초대하여 한턱내고자 합니다. 얼굴에 만연한 기쁨이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이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은 미국에 있는 아이에게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 점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상식적인 인격 현상을 믿음에 관한 가르침과 연결하여 언급합니다. 이 땅에서 믿는 사람의 몸이 놓여있는 장소에서 보이는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에는 출처가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의 말대로 출신성분이 있습니다. 그 출신성분에 따라서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은 달라집니다.
흔히 멍하게 있는 사람을 향해서 ‘정신이 빠졌다, 정신이 나갔다.’라고 말합니다. 말과 행동이 몸이 놓여있는 현장에 적절히 반응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정신이 나갔다니 몸과 정신이 따로 있다는 것일까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몸이 놓여있는 현장과는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몸이 놓인 현장과는 적절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표정을 짓고, 몸짓을 하고, 말하고 행동을 하는 것은 인격 즉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이 정신은 항상 어딘가에서 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유명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15~16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정신의 출처를 ‘아버지로부터 온 것,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출처란 곧 내 정신의 위치입니다. 쉽게 말해 내 마음이 붙어있는 대상이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의 출처입니다. 마음이 붙어있는 대상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6절에서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있다면 표정과 몸짓은 육신의 정욕이 되고, 말과 행동도 안목의 정욕에서 나오는 것이 됩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이 세상 것들을 기쁨으로 삼는 영적인 간음입니다. 결국 마음이 세상에 있다면 표정도 몸짓도 말과 행동도 영적 간음인 이생의 자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는 표정이나 몸짓이나 말과 행동이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경찰은 용의자에게 알리바이, 즉 현장부재증명을 요구합니다. 이 사람이 범죄 현장에 없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세상에 없었음을 알리바이로 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육체가 머무는 현장에서 나타나는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이 다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이라서 결코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어긴 것도 아니고 표정 때문에, 몸짓 때문에, 말과 행동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말씀드렸듯이 내 마음이 육신이 있는 현장에서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을 했다면 ‘세상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머물렀다는 증거입니다.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을 드러낸 것입니다. 내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에 본래 담겨야 할 영원하신 하나님이 담기지 않았기에 영원한 삶도 누릴 수 없으며 지옥에 가서 영원토록 멸망을 겪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에 있다면 나를 통해 나타나는 모든 일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됩니다. 표정이 화사하지 못하고 인상을 쓰고 있다고 해서 세상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있느냐 혹은 세상을 떠나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상태인 태초로 올라갔느냐에 의해 판명됩니다. 내 마음이 이 세상에 없었다는 알리바이가 있어야 화사하지 못한 표정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아님이 증명될 수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만나서 ‘하시는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좋은 말을 해줬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 땅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웃에게 덕담을 했을지라도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온 것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 12~13절을 보면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고 언급한 뒤에 14절에서 다시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고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여기서 ‘자녀들’과 ‘아이들’은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 아비들이나 청년들을 모두 포함하는 호칭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자녀처럼 여겨지는 교인 중에 나이가 많은 아비들도 있는가 하면 청년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12~14절을 보면 같은 호칭과 유사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만 12~13절에서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고 했을 때는 ‘쓰는 것’이 강조되고, 14절에서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고 했을 때에는 ‘쓴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쓰는 것’이란 사도 요한이 편지를 기록한 시점을 기준으로 읽는 수신자들을 생각하며 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쓴 것’이란 수신자들이 편지를 읽을 때 자신을 사도 요한이 생각한 것처럼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자녀들’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을 보면 12절에서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라고 하였고, 14절에서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은 것과 아버지를 아는 것의 뜻이 상통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안다는 것은 곧 사귐을 갖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앎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정보를 알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실제로 사귐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란 마음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으로 세상 것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죄란 마음이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여전히 세상에 머무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머물면 표정도 몸짓도 말과 행동도 전부 세상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감옥에 들어갈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면 육신이 거하는 세상에서 드러나는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은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며, 영적 간음인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 이외의 세상 것들로 기뻐하는 영적 간음을 성공적으로 잘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키고, 백주대낮에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우리의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어! 우리 남편의 사업이 잘돼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나 더 사줬어! 내가 하는 일이 잘돼서 누구나 인정하고 있어!’라고 세상일로 인해서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백주대낮에 하나님을 등지고 이 세상 것과 간음하고 있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죄는 세상을 사랑해서 마음이 세상에 머무는 상태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어서 죄 사함을 받았다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면 육신이 거하는 현장에서 그에 부합하는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내 표정과 내 몸짓과 내 말과 행동을 보는 사람이 같은 현장에 있으면서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까? 어떻게 저런 몸짓을 할까? 어떻게 저런 말과 행동을 할까?’라고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를 보며 ‘실례지만 당신은 어디서 오신 것입니까? 마음이 어디에 머물고 있으면서 그런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이 나타나고 있습니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 대해서 모릅니다. 내 마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 하나님과 나만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이렇게 자기만 아는 것이니까 ‘실례지만’이라는 말을 붙이게 됩니다. 온갖 더러운 일을 생각하고 있다가도 부장님이 ‘김 과장!’하고 부르면 ‘예!’하고 나갑니다. 부장님 앞에서 표정 짓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부장님은 김 과장의 마음이 어디에 있고, 김 과장의 생각이 무엇을 붙잡고 있다가 나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실례지만’이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혼자 알고 있는 혹시 겉으로 드러내 말하기가 부끄러울 수도 있는데 ‘당신의 이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겁니까?’라고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현장에서 돈 걱정하다가 표정 짓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습니까? 혹은 건강 걱정하면서 말하고 행동합니까? 그렇다면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몸이 처한 현장에서 표정을 짓고, 몸짓을 하고, 말하고 행동을 하는 마음이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다면 모조리 다 죄입니다. 그 죄를 세분해서 말하자면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아비들’에 대한 언급도 이어집니다. 13절을 보면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하였고, 14절에서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쓰는 것’과 ‘쓴 것’만 다르고 나머지는 문자까지 똑같은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비들’이란 나이 많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이 수신자들을 태초부터 계신 이와 사귀는 자로 여기며 편지를 썼듯이, 편지를 읽는 자들도 자신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사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요한의 태도는 성경을 대하는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사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까지 해석하더라도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다 사사로이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도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에 포함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해석하고자 해도 마음이 태초에 계신 이와 사귐이 없는 상태라면 사사로이 푸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을 읽는 것조차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영적 간음인 이생의 자랑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으로 세상 것을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행동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화려한 예배당이나 예산이 풍성한 목회를 염두에 두면서 성경을 해석한다면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에 불과한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간음의 행위가 설교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언급합니다. 태초는 지금 우리가 몸으로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 상태인 영원의 차원을 말합니다. 이렇게 ‘태초부터 계신 이’라고 하신 하나님과 사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3차원 세계 바깥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가야만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전 영원의 차원에 계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과 생각이 시간과 공간 속에 머물러 있다면 육신이 있는 현장으로부터 드러나는 모든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은 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없음은 증명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없다면 우주 공간에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이 생기기 전 영원의 차원에 계시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어야 내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은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에 대한 언급도 이어집니다. 13절 하반절을 보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라고 하였고, 14절 하반절에서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통해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길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기 때문에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모든 사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사상이나 이론 혹은 교리나 가르침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사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실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으로 가신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갑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흉악한 자를 이김’이라고 표현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와서 싸움을 걸고 이기고자 합니다. 이것은 병들게 하거나, 사업을 망하게 하거나, 하는 일을 불통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업이 안 되면 마귀 때문에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고 집안에 암 환자가 생겼다면 마귀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한 섭리를 작용하고 계신다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세상에 붙이고 있기 때문에 질병을 주십니다. 건강한 몸으로 안정된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세상을 떠나야 됨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권적이고 섭리적으로 건강을 빼앗아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바람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건강은 축복이고 병은 저주라고 여기게 합니다. 이미 저주 속에 있기 때문에 저주 속에서 바라는 대로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은 저주를 고착화시키는 것이며 저주로 매듭을 짓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주 속에서 건강하기를 바라는데 자꾸 병이 생긴다면 저주를 빠져나오라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그렇다면 병은 저주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병든 것을 저주로 여기고 건강을 복으로 여기게 합니다. 마귀가 정말로 원하는 일은 병들고 사업이 안 되고 불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는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올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세상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마음의 위치에서 구분됩니다. 마음이 세상에 남아있다면 무조건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건한 몸짓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표정과 몸짓을 흉내 낼지라도 마음이 세상에 남아있다면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영적 간음인 이생의 자랑입니다. 백주대낮에 간음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원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이길 정도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예수님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러야 하는 예수님은 그냥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과해서 예수님과 연합해야만 하나님과 사귐은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 예수님, 부활 예수님을 놓치게 하고 마음을 세상에 머물게 합니다. 마귀에게 져서 이 세상에 마음이 머물게 되면 육신이 처한 모든 생활 현장에서 표정과 몸짓과 말과 행동은 다 범죄가 되어버립니다. 오늘 하루도 언제 어디서나 마음의 알리바이를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이 세상에 없음을 확실히 함으로써 모든 것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내 마음의 알리바이가 항상 증명되는 상태에서 표정 짓고, 몸짓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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