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르게 먹는다는 것은 이것저것 여러 종류를 먹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영양분을 많이 섭취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심신의 건강을 위해서, 먼저 몸에 독소를 쌓게 하는 음식들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합니다.
화학성분이 들어간 음식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음식들은 인체의 면역 계통을 서서히 약화시킵니다. 신경계통과 내분비 계통의 작용도 둔화시킵니다. 그러니 사고와 감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외적 자아인 에고와 내적 자아인 영혼과의 원만한 교류도 방해합니다.
다음으로, 내 입맛에 맞는 것을 잘 섭취해야 합니다. 하루 세 번 끼니마다 많이 먹는 것보다는 하루에 네, 다섯 번 정도로 나누어 조금씩 자주 먹는 것이 더 낫습니다.
많은 종류의 반찬을 먹는 것보다는 몇 가지 종류의 반찬을 단순하게 먹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합니다.
온갖 잡다한 것을 먹으면 몸은 혼란스러워합니다. 혼란스러운 몸이 건강에 좋을 까닭이 없겠지요.
이는 마치 생각에 몰두하고 나면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지만, 온갖 잡다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오히려 혼란스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에 맞는 음식에 대한 성찰은 무척 중요합니다.
원래 내 몸이 필요한 것은 내 입이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입(입맛)이 직감적으로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알게 모르게 주입된 음식에 대한 상식들이 필요한 음식을 거부하게 만들곤 합니다. 짜고 맵게 먹으면 안 된다, 물을 많이 마셔라, 채식이 좋다, 육식을 피해라, 기름진 음식을 피해라, 달게 먹지 마라, 등등.
음식을 섭취하는 기준은 일반적으로 보기에 맵다, 짜다, 달다, 기름지다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을 먹고 난 후, ‘자기 자신의 전체적인 컨디션’입니다.
맞지 않는 음식을 먹었을 때는 몸에 힘이 빠집니다. 기분이 불쾌해지거나 하면서 심신의 컨디션이 나빠지는 것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음식이든 먹고 난 후 몸에 활력이 돌고 마음이 가뿐해진다면 자신에게 아주 적당한 음식을 잘 섭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음식은 바로 자신의 ‘입’이 제일 잘 압니다. 누군가 “어휴 그렇게 짠 걸 어떻게 먹어?”라고 하더라도 별로 짜지 않게 느껴지고, 목으로 잘 넘어갑니다. 더군다나 먹고 난 후에 몸이 개운합니다. 그러면 내 몸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아주 바람직하게 잘 먹은 것입니다. 맵거나 달거나 기름지거나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맞는 음식은 남들이 판단하는 것도, 전문가가 판단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각자 몸의 상태에 따른 입맛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똑같은 음식이라도 어떤 사람은 짜거나 맵게 느낍니다. 달거나 기름지게 느낍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게 느낍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음식이 짜거나 맵거나 달거나 기름진 음식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이 짜다’ 또는 ‘어휴 맵다, 느끼하다’라고 느끼는 음식을 계속 먹는다면 문제를 일으킬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음식이든 그저 술술 잘 넘어가고 먹고 난 후 가뿐함을 느끼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만일 짜거나 맵다고 여겨지는 음식들이 병증들을 유발했다면 틀림없이 자기 기준의 입맛보다 과하게 먹었기 때문입니다. 또는 화학적 감미료로 맛을 낸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기름진 음식이 병증을 유발했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힘의 씀씀이에는 개인차가 큽니다. 마찬가지로 입맛에도 커다란 개인차가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하는 음식에 입맛이 돋고 침을 꼴깍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만일 감각이 무뎌져 있는 경우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기 몸을 성찰하는 기회 없이 방치하거나, 약물에 의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감각이 무뎌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해로운 음식을 의식 없이 계속 먹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입맛’은 그때그때 몸 상태에 따라서 조금씩 변합니다. 그러니 평상시에 자신의 입맛에 대해서 가만히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가 같은, 몸을 성찰하며 하는 운동은 입맛을 생생하게 합니다. 몸을 성찰할 수 있는 운동을 잠시라도 하길 권합니다.
『삶의 노래 죽음의 노래』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