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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일강에 버려진 모세는 버들잎>의 줄거리 :
모세 이름의 본래의 의미는 '건져내는 자'가 아니라 '건져냄을 받은 자'입니다. 나일의 강물에 떠내려가던 자라는 전제가 들어 있습니다. 이 의미가 참 심오합니다. 모세처럼 강물에 떠내려가는 자가 교회의 참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도자를 따라 함께 나란히 누워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이 바로 약속 명단에 있다가 태어난 교인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나일강에 버려진 모세는 버들잎
(출애굽기 2:1~10)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상식을 기준으로 보자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 못지않게 억지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히브리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왕명이 떨어진 상태에서 마치 왕명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모세는 갈대 상자에 담겨서 나일강에 띄워집니다. 갈대가 무성한 강가에 띄웠기에 많이 이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흐르는 강물이었으니 사실상 버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공주가 갈대 상자에 담긴 아기를 발견해서 건져냅니다. 그리고 모세의 생모인 요게벳을 유모로 삼아 양육하게 함으로써 모세는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 왕자가 됩니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찬란한 기적 이야기를 보면 왜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아쉬움과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모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런 지독한 행운을 타고났을까요?
오늘 이 이야기는 상당히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비유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출애굽기의 주인공은 모세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명단에 있던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번성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출애굽기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관심에 종속되어 나타난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를 등장시키셨습니다. 모세를 위하여 이스라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세와 같은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기를 열망하고 있기에 주로 모세에 초점을 맞추어 출애굽기를 이해하고자 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의 주인공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리키는 교회와 교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본래 애굽식 표기로 물을 뜻하는 ‘모’에 건져냄을 뜻하는 ‘우세스’를 붙인 형태로써 모우세스인데 ‘물에서 건짐을 당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식 표기로는 모세가 되면서 ‘물에서 건져내는 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건짐을 당한 자’가 ‘건져내는 자’가 되었음은 심오한 의미의 변화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건져내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건짐을 당한 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건짐을 당한다는 것은 물에 떠내려감을 전제로 합니다. 다시 말해 물에 떠내려가는 자만이 건져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기가 갈대 상자에 담겨서 나일강에 버려졌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기록을 통해 모세가 어떤 지도자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모세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자입니다. 석 달밖에 안 된 아기가 갈대 상자에 담겨서 강물에 떠내려갈 때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오직 강물의 흐름에 이끌림을 받을 뿐 흐름에 저항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타임지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모세를 뽑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모세는 지도력이 제로인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끈 모세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교회를 이끈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자였습니다. 여기서 강물은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약속의 명단에 있는 자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 창조주요 주권자 하나님의 계획이 강물인 셈입니다. 모세는 자기의 지도력을 발휘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판단과 생각을 따라 교인인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것이 아닙니다. 아기가 나일강에 던져져서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흐름을 따라 흘러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출애굽기 전체의 내용을 이 사건 하나로 축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는 주체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석 달짜리 갓난아기 상태를 유지하면서 지도자가 됩니다. 요즘 식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아니고,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여 올바르게 대처하는 지도자가 아니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하나 되게 하는 지도자도 아닙니다. 모세는 석 달짜리 아기의 상태에서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는 곧 모세가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서 자기 주체성을 표현할 길이 없는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석 달짜리 아기 같은 지도자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요? 말씀드렸듯이 모세는 석 달짜리 아기처럼 자기 주체성을 발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지도자의 자리에 섭니다. 이러한 모세와 이스라엘이라는 교회와의 관계에서는 특별한 양상이 빚어집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주권의 강물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예를 들어 한강 다리에서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지 않으면 물결의 흐름이 어느 쪽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럴 때 흐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나뭇잎 하나를 띄워보는 것입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강물의 흐름을 나뭇잎의 움직임을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실시간으로 폭우처럼 이 땅에 쏟아져서 강물을 이루어 흘러가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석 달 만에 강물에 버려진 모세의 이야기가 제시되었습니다. 앞서 모세의 이야기는 출애굽기 전체의 내용을 축약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주권의 흐름은 사람의 의식의 시야로는 확인할 수 없을지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입니다. 한강에 흐름이 있는 것이 사실이듯 하나님의 주권은 분명한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이스라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주권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모세라는 버들잎 하나를 강물에 떨어뜨리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어떤 상태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강물에 던져졌느냐는 것입니다. 모세는 석 달짜리 아기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이 분명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모세를 보면 하나님의 주권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모세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따라서 가고, 서고, 말을 합니다. 석 달짜리 갓난아기와 같이 주체성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말하라면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 주체성이 없는 모세의 행동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의 주권의 흐름을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이제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이러한 모세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가 문제시됩니다. 모세에 대한 관계는 곧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강물에 띄워진 버들잎입니다. 본문의 사건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버들잎 모세는 하나님 주권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석 달 된 아기와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모세가 말을 하면 그것은 모세의 주체성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나온 말씀입니다. 모세가 가다가 섰다면 섰다는 형태로 하나님의 주권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다시 간다면 이번에는 간다는 형태로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밥을 먹는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밥을 먹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모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광야에서 잘 드러납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가나안을 향해야 합니다. 쉬엄쉬엄 가더라도 2주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바라보며 광야에서 사십 년을 배회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이들을 사십 년간 배회하게 한 것입니다. 모세에 대한 관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관계입니다. 이때 모세를 향해 수없이 많은 원망과 불평과 반역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주체적으로, 효율적으로, 경제적으로 생각하면 2주면 갈 거리를 사십 년을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나의 뜻이라면 너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확인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석 달짜리 아기처럼 자기 주체성을 발휘하지 않는 자를 지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타임지는 모세를 인류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선정했지만 사실 모세는 그 반대입니다. 모세는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일을 했다는 지도자들 중에 지도력이 제로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이렇게 지도력이 제로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의 강에 떠내려가는 버들잎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버들잎을 따라가느냐 혹은 버들잎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느냐에 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야 할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버들잎과 같이 떠내려간다면 하나님의 주권에 자기의 삶을 던져버리는 것이고, 버들잎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주권과는 상관없이 삶을 개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에 이어질 끝없는 갈등과 싸움의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야곱의 생애에서 험악한 세월이라는 개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주권의 흐름은 강물처럼 이 세상을 휘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흐름에 아기 모세처럼 던져질 수 있어야 합니다. 버들잎처럼 흐름에 떠내려가지 못하고 스스로 삶에 대해 생각하는 주체가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 주권의 흐름과 부딪힘이 발생하는 험악한 인생, 씨름하는 인생, 갈등하는 인생, 평안이 깨져버린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백 년 동안 노예 프로젝트에 가두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13~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백 년 동안의 노예 생활을 예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를 운명이자 팔자로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노예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주체성이 꽁꽁 묶여버린 상태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주체성을 받아들여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수족을 움직이며 살아갈 뿐입니다.
사백 년은 노예의 삶을 개인의 운명이자 팔자로 받아들이고 민족의 특성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의 상태를 유지하며 주인을 애굽의 바로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주권자 하나님으로 바꾸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필요했던 이유는 선민도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인생에 주체가 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약속의 명단에 있는 교인을 위해 계획하신 일들을 주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이루어 나가실 수가 없습니다. 삶에 대해 주체가 되려는 성향은 하나님에 대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자가 되려는 성향으로 바뀔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을 향해 주체가 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은 이 주체성을 묶고자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이 방해받지 않고 삶을 이끌어 갈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원시적 단계의 교회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백 년간 바로에게 노예 생활을 하도록 묶어 두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노예의 체질을 갖되 주인을 하나님으로 바꾸기를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은 보이지 않기에 모세라는 버들잎을 띄워서 하나님의 뜻의 흐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사백 년 노예 프로젝트에서 얼마나 무르익은 노예가 되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사백 년 노예 프로젝트를 거쳤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주체성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의 강물에 떨어진 버들잎이었던 모세와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라는 버들잎을 통하여 분명한 주권의 흐름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가고, 서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버들잎 모세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저항은 자기 주체가 살아났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체성이 묶인 노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의 힘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무르익은 노예의 상태를 보이지 못합니다. 마음이 육체를 입을 때 죄와 저주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럴 때 육체를 통해 만나는 것들로부터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며 추구하는 주체가 됩니다. 죄와 저주가 없다면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으로 충만할 것이며 하나님의 좋음을 향해서만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 때문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있음과 좋음을 느끼면서 끊임없이 주체가 되고자 합니다.
세상을 향해서 생각하고, 감정이 움직이고, 의지가 발동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죄와 저주의 특징입니다. 죄와 저주가 없다면 인간의 주체성은 오직 하나님을 추구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가 너무나 질기기에 사백 년 노예 프로젝트로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백 년 동안 꽁꽁 묶어서 ‘우리는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라는 체념적인 팔자 의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출애굽 하여 바로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의식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버들잎을 통해서 주권의 흐름을 보여주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죄와 저주의 성향을 드러내며 하나님 주권의 인도하심에 대해 계속해서 저항합니다.
이로부터 우리 인생의 불행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행복에 겨워 살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주권은 흐르고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보이지 않는 주권의 흐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모세를 버들잎으로 띄워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당신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주권에 나를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석 달짜리 아기가 바구니에 담겨서 나일강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듯이 하나님 주권의 강물에 나를 띄우고 흘러가면 됩니다. 나의 주체성은 석 달짜리 아기의 상태로 묶어두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다면 어떤 구석으로라도 세상을 향한 나의 주체성이 삐져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어서 기억하고 있기에 노골적으로 세상에 대한 주체성을 발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들의 존재감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주체성의 흔적들이 은근슬쩍 삐져나옵니다. 그렇기에 마음에 평안과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성숙하여 더는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무르익은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한 주체적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문드러져 없어져야만 합니다. 나의 주체성이 아직도 싱싱한 생선처럼 펄떡거린다면 그만큼 노예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기 모세는 갈대 상자에 담긴 채로 나일강에 던져져서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스스로 어떤 주체적 행위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그러한 마음으로 살았기에 하나님의 주권의 방향을 표시하는 버들잎이 되었습니다. 출애굽기는 이 모세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세라는 버들잎 옆에 가지런히 눕는 버들잎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 버들잎이 흐름을 거슬린다면 모세라는 버들잎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과 갈등을 일으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주권의 흐름을 따르려면 모세처럼 강물을 따라 흐르는 버들잎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강물 위에 떨어진 버들잎들입니다. 강물의 흐름을 따라 흘러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자꾸 세상을 향해 내 생각과 바람과 소원이 떠오른다면 흐름을 거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 주권의 흐름과 갈등이 생기고 삶은 불안하고 불행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사백 년 노예 프로젝트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축약하여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석 달짜리 모세의 모습을 바라보듯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봄을 통해 주체성이 죽은 자의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주권의 강물을 따라 흘러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기만 하면 사백 년 노예 프로젝트도 발휘하지 못했던 효과가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백 년 노예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무르익은 노예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광야에서 20세 이상의 성인이 다 죽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모세라는 버들잎 옆에 가지런히 누울 수 있는 버들잎이 되지 못했고, 바로 앞에서 노예였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보일 수 없었기에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더 이상 끌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제시되었습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갈 것입니다. 설령 오늘 실패했더라도 내일 또 십자가를 붙잡을 것입니다. 사백 년을 되풀이할 수는 없지만 사백 년이 축약된 사건인 십자가를 날마다 붙잡을 수 있습니다. 어제 실패했다면 오늘 다시 붙잡고, 오늘 실패했다면 내일 다시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 죽어야만 했던 것을 떠올리자면 십자가 생활화가 정말로 굉장한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사백 년 프로젝트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무르익은 노예의 마음가짐을 이루어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하나님 주권의 강물에 떠내려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강물에 떨어진 버들잎이 되어야만 합니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버들잎이 되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 삶에 대한 나의 주체성은 흔적조차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다양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배우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의 미래에 대한 일들이 문제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주체성을 따라 생각하게 됩니다. 내 주체의 흔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노예의 상태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주체성을 더 진척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사백 년 노예 프로젝트를 축약시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주권의 강물에 띄워진 버들잎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주권의 강물에 던져진 버들잎이고 나무토막이고 종이배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 나의 주체성을 발휘함이 불가능합니다. 나의 주체성이 발휘되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의 주체성보다, 알렉산더가 세계를 정복할 때의 주체성보다, 더 강력한 주체성을 발휘해서 하나님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석 달짜리 아기 모세와 같은 주체성으로 묶여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사백 년 노예 프로젝트를 축약한 십자가를 심장에 꽂는 심정으로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주권의 강물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주권의 강물에 던져진 버들잎들입니다. 나일강에 띄워진 버들잎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비유적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라는 강물에 띄워진 버들잎을 보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모세를 목표로 삼고 우리도 버들잎이 되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사실로서 존재하는 하나님 주권의 흐름에 띄워진 버들잎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들잎이 되면 자기 주체성대로 살아가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볼 때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인생을 헤쳐 나가겠다고 하나님 주권의 흐름에 저항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주권에 흘러 떠내려가는 버들잎이 됨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건져내는 또 하나의 모세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주권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버들잎이 될 수 없다면 내 주변의 사람들을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전도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주권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버들잎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이 이 세상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약속의 명단에 있으면서도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되어야 합니다. 모세라는 버들잎 곁에서 나란히 누워 흘러가는 또 하나의 버들잎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내 삶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을 볼 수 있는 하나의 표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이를 악물고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을 향해 삐져나오려고 하는 나의 주체성에 끊임없이 철퇴를 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향해서는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무르익어 농익은 노예의 마음가짐을 가짐으로써 떠내려가는 모세에서 건져내는 모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세처럼 석 달 된 아기의 상태로 아버지 주권의 강물에 떠내려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이를 악물고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심장 옆에 꽂아 붙잡고 다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