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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적 비곗덩어리 제거하는 화목제>의 줄거리 :
몸이 날씬하십니까?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몸이 비만하십니까? 부끄러울 일도 아닙니다. 문제는 외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영혼의 상태가 문제입니다. 영은 정말 군살이 없이 날씬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대부분 영의 상태가 뒤룩뒤룩 비곗덩어리 돼지들입니다. 화목제는 이 비곗덩어리를 내 영에서 제거하는 제사입니다. 비곗덩어리로 뒤룩뒤룩한 영적으로 돼지 같은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자리 잡은 비곗덩어리를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예수님 십자가에서 화목제로 드려야 합니다.
영적 비곗덩어리 제거하는 화목제
(레위기 3:1~17)
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2.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5.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5대 제사 중 세 번째로 화목제(和睦祭)에 대한 말씀입니다. 1~5절에서 소로 드리는 화목제에 대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6절부터는 양이나 염소로 드리는 화목제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화목제에 대한 말씀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내용이 있는데 모든 기름을 떼어내서 콩팥과 함께 불사르라는 말씀입니다. 양에 대해서는 특별히 꼬리로 이어지는 미골 부분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양의 특성상 미골 부위에 기름이 많기에 추가적인 언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중심으로 ‘영적 비곗덩어리 제거하는 화목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화목제는 영적으로 뒤룩뒤룩 비곗덩어리로 살이 찐 상태를 제거하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몸이 날씬해도 자랑할 일은 아니고 뚱뚱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생긴 모습을 확신할 수 있으면 됩니다. 문제는 영의 상태입니다. 영만큼은 절대적으로 날씬해야만 합니다. 영의 모습이 비곗덩어리 상태라면 절대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몸은 날씬하든 뚱뚱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백의 마음이 곧 영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에는 절대로 비곗덩어리가 끼어서는 안 됩니다. 비곗덩어리가 낀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함이 구원을 누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화목함이 없다면 구원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날마다 죽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싸움이 없이는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처럼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붙잡고 날마다 빗나감의 죄가 확인되는 나를 죽이는데도 기쁨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확인 사살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비곗덩어리를 제거하는 확인 사살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기쁨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이유는 내 마음에 비곗덩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번제는 소나 양으로 희생제물의 각을 떠서 번제단에 올려놓고 전부 태워 재로 만드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희생제물에서 모든 기름을 떼어내고 콩팥과 함께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살 부분은 제사장과 헌제자가 함께 먹습니다. 이러한 화목제에 대해서는 번제와 소제처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한편 번제와 소제와는 다르게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여기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름기 부분이 맛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온전히 바친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쳤을 때 아간이 멸절하라는 말씀을 어기고 노략한 물건 중에 모피나 귀중품을 감추었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유로 아이 성과의 전쟁에서 지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온전히 바침이란 멸절과 연관됩니다. 본문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는 말씀에는 모든 기름을 멸절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의도는 구약 제사의 특징에서 잘 드러납니다. 제사를 드리는 주체인 헌제자는 희생제물과 동일시되어야 했습니다. 번제는 근본적인 빗나감의 죄악이 나타날 때마다 죽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시의 믿음이 작동하고 있음에도 기쁨이 없다면 아직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 속에 멸절해야 하는 비곗덩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염두에 두고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러한 화목제에 비곗덩어리를 제거하고 콩팥을 더하라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를 염두에 둠으로써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콩팥을 더하게 하신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콩팥은 심장이나 폐와 마찬가지로 내장의 일부로서 인격의 중심인 마음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본문에서는 콩팥이라고 번역되지만 같은 단어가 심장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콩팥이 가리키는 마음은 욕구가 발생하는 근원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욕구는 언제나 기쁨을 향합니다. 이로부터 불태워야 할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추구하는 기쁨거리야말로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멸절해야 할 기름인 것입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목이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기쁨의 동산인 에덴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고, 인격적으로 죽은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피가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이고, 기름을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기름이 기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추구함은 사람의 근본적 욕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기쁨의 동산인 에덴에 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기쁨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기쁨이 아닌 다른 기쁨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두 대상이 있는데 관계가 평화롭지 못하고 화목이 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주체성에 있습니다. 둘 다 주체적인 인격입니다. 그리고 주체와 주체의 충돌이 발생할 때 화목은 깨어집니다. 한편 주체의 특징이란 무엇인가를 자발적으로 욕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욕구가 있으시고, 인간도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가 서로 충돌할 때 평화는 깨지고 불화와 갈등이 발생합니다.
인간의 욕구는 에덴이라는 기쁨의 동산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기쁨을 욕구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기쁨이 생기는 자리까지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고, 건강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모두 기쁨 때문입니다. 돈을 벌면 기쁘리라 믿기 때문에 돈을 벌고자 합니다. 건강해야 기쁘리라 믿기 때문에 건강하고 싶어 합니다. 마음에서 돈과 건강을 붙잡게 된 것입니다. 돈이나 건강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가 서울대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서울대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보자면 자녀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욕구와 인간의 욕구가 부딪힙니다. 욕구는 주체적 인격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욕구가 일치하지 않고 부딪히기에 평화는 깨집니다. 인간이 기쁨을 욕구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은 기쁨과 연관해서 무엇을 욕구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기쁨 자체를 욕구하시지 않습니다. 기쁨은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 안에서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샘솟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기쁨이 되시고, 아버지가 예수님의 기쁨이 되십니다. 이러한 기쁨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계십니다. 하나님의 욕구란 삼위일체 안에서 넘쳐나는 기쁨을 다른 인격체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의 욕구의 차이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인간을 만드실 때 기쁨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속에서 넘쳐나는 기쁨을 주실 대상에게 자발적으로 기쁨을 욕구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계에 기름을 넣듯 사람에게 기쁨을 넣어주시고자 했다면 인격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기쁨을 욕구하도록 인격을 주셨습니다. 기쁨을 주시려는 하나님과 기쁨을 욕구하는 사람은 본래 충돌할 여지가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사람에게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이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부터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과 사람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을 주시려는 욕구를 갖고 계셨는데,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로부터 기쁨을 욕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의 충돌로부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화목제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다양한 기쁨거리가 있습니다. 화목제에서 희생제물의 모든 기름을 불에 태움이란 모든 기쁨거리를 모아서 멸절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번제의 의미는 빗나감의 죄성에 장악되고 있는 존재 자체를 부인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번제의 의미를 충족할 수 있습니다. 한편 화목제의 목적은 확인 사살입니다. 이 또한 십자가 죽음을 활용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쉽게 말해 십자가를 권총처럼 들고 내 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나의 존재를 부인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특정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부터 기쁨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기쁨을 기대함의 증거는 불만으로 나타납니다. 무엇인가에 불만이 있다면 크든 작든 그 대상에게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불만을 안겨주는 요소를 살펴보면 내가 무엇으로부터 기쁨을 바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기쁨거리이자 떼어내야만 하는 마음의 비곗덩어리입니다.
몸의 지방이 장애를 일으킬 지경이 된다면 다이어트를 해서 비곗덩어리를 빼고 근육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기쁨거리가 비곗덩어리처럼 살이 찐다면 장애가 발생합니다. 배우자에 대해 사사건건 불만이 생긴다면 아직도 배우자를 기쁨거리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배우자라는 비곗덩어리가 붙은 상태입니다. 자녀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자녀가 기쁨거리가 되어서 마음의 비곗덩어리가 된 것이고, 승진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승진이 기쁨거리가 되어서 마음의 비곗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하나님과의 화목을 어떻게 이룰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되심 안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로봇이나 기계가 아닌 인격체이기에 자발적으로 기쁨을 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만을 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콩팥이 상징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욕구의 에너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만을 향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적인 마음 상태는 비곗덩어리가 하나도 없는 근육으로 가득 찬 날씬하고 가뿐한 모습이 될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될 때 욕구는 부딪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주고자 하시는 욕구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러나는 기쁨만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렇게 욕구가 맞물리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나라는 주체 사이에서 갈등과 부딪힘이 생기지 않기에 관계가 평화롭습니다. 이것이 화목제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기쁨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씩 제거해 나갑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는 기쁨거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고, 콩팥이 상징하는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만 기쁨을 향한 욕구를 쏟아붓습니다.
번제가 내 존재 자체를 부인함을 목적으로 한다면, 화목제는 번제로 부인된 내 존재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기쁨에 대한 욕구의 확인 사살을 목적으로 합니다. 지금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동일시의 믿음을 발동하는 중에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기쁨이 없다면 아직 마음에 비곗덩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쁨거리를 붙잡는 욕구가 있기에 아직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여 기쁨의 동산인 에덴에서 쫓겨났고 하나님과의 화목 또한 깨졌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음이란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이유는 결국 기쁨을 얻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아닌 스스로 좋고 나쁨의 기준을 만들어 피조물 중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내게 기쁨이 없고 평강이 없다면 내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기쁨의 욕구가 뒤룩뒤룩 피둥피둥 비곗덩어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기쁨을 얻겠다는 욕구가 문제입니다. 사람은 기쁨을 욕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을 욕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참 기쁨과 평화와 평강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대한 욕구라는 비곗덩어리로 살쪄있기 때문입니다.
번제가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부인함이라면, 화목제는 세상을 향한 욕구의 확인 사살입니다. 사람마다 비곗덩어리의 모습은 다를 수 있습니다. 기쁨거리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집중적으로 죽여야 합니다. 본문에는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이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의 모든 기름을 다 떼어내고, 그런 기쁨거리들을 향하여 욕구하는 에너지를 뿜어내는 마음을 상징하는 콩팥을 함께 태워야 했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도 기쁨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면 마음에서 발생하는 욕구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세상의 기쁨거리를 욕구하는 마음의 비곗덩어리를 확인 사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만을 원하게 된다면 마음에 참 기쁨과 평강은 주어집니다. 반대로 마음에 비곗덩어리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증거로 불만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싫은 마음이 들면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는 증거가 타인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세상의 기쁨거리에 대한 욕구는 마음의 비곗덩어리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비곗덩어리가 다 제거되고 하나님만이 기쁨거리이신 상태가 될 때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세상의 기쁨에 대한 욕구는 생기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비곗덩어리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내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불만이 생기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마음에서 세상의 기쁨거리에 대한 욕구라는 비곗덩어리를 다 제거하고 온전히 근육만 남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기쁨만을 받아들이려는 욕구가 작동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 대해 어떤 사람도 불만스럽게 보이지 않고, 어떤 상황도 불만스럽게 보이지 않고, 어떤 일도 불만스럽게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의 비곗덩어리가 제거되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만을 욕구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향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는 예스맨이 되고 아멘의 사람이 됩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임을 알 때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화목한 상태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만을 욕구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지고 하나님의 좋음이 커지는 것이 결국 기쁨으로 귀결되는 것이기에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대해서는 기쁨을 요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불만도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사람이나 대상이나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좋고 나쁨을 판단할 이유가 없는 것은 내게 기쁨이 되는 대상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꾸 불만이 생긴다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어떤 대상에 대해, 주어진 상황에 대해, 무슨 이유에서든지 불만이 생긴다면 그것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여 세상 것들을 기쁨의 이유로 붙잡게 된 것이 불만이 생기는 근원적 이유입니다. 인간은 기쁨을 욕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함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만을 욕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쁨을 주시겠다는데, 다른 기쁨을 욕구하기에 불화가 생깁니다.
다시 17절을 보면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기쁨 없이는 살 수 없는 기쁨 불가결의 존재입니다. 기쁨이 없다는 것은 인격의 죽음과도 같습니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피가 육체의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이고, 기름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기쁨이 인격의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기쁨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쁨거리를 먹는다면 인격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기쁠 것 같아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돈이라는 기쁨거리를 먹은 것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신 기름을 먹었으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이라는 세상적인 기쁨거리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기쁨거리는 마음의 비곗덩어리입니다. 욕구하는 대로 건강해졌어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진 것입니다. 돈이든 건강이든 하나님이 주시면 주시는 대로 쓸 뿐입니다. 승진이든 합격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세상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두시는 대로 예스와 아멘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이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화와 갈등과 충돌은 두 주체 간에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일에 불만이 있다면 하나님 주권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불화함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기쁨 불가결의 존재임을 알고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기쁨으로 삼고 욕구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대해서는 기쁨을 요구하지 않게 되기에 자연스럽게 예스맨과 아멘의 사람이 되고 감사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수용함으로써 하늘에서는 기쁨 불가결의 마음이 하나님의 기쁨만을 욕구하며 화목을 이루고, 땅에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육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수용함으로써 화목을 이룹니다. 하늘과 땅에서 평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내 마음의 빗나감이라는 현상을 보며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번제의 의미를 갖습니다. 다만 의식으로 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부인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죄의 체질 혹은 죄의 근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느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끈질기게 기쁨을 요구하는 체질이 살아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기쁨거리이자 비곗덩어리로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비곗덩어리가 내 마음에 있는 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샘솟는 기쁨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13절에서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고 하신 기쁨이란 아버지 때문에 생긴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기쁨을 얻었다면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면서 부족함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기쁨을 원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기쁨이 생기는 자리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하나님을 가질 때만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 불가결의 존재인 인간으로 오셨음에도 아버지를 가지셨기에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필요 없는 상태로 사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기쁨이 필요하셨으나 아버지로 기쁨이 충족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구원이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는 세상의 기쁨거리에 대한 욕구가 비곗덩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루어질 수 없고 기쁨이 없기에 마음의 평강도 있을 수 없습니다. 화목제의 의미는 이러한 마음의 비곗덩어리의 확인 사살에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 없는 상황이 될지라도 세상을 향해서는 일말의 욕구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으로 기쁨을 누리기를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욕구하는 마음의 모든 에너지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만 쏟아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화목제로서의 확인 사살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이 불만인지를 살펴보면 무엇을 기쁨으로 원하는지도 보입니다. 솔직하게 마음을 들여다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기쁨거리에 대한 욕구가 마음의 비곗덩어리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비곗덩어리가 있는 한 하나님은 들어오실 수 없고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번제가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통째로 부인함이라면, 화목제는 십자가 붙잡고 확인 사살하는 것입니다. 내가 집중하여 제거해야 할 확인 사살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확인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마다 마음의 비곗덩어리의 내용은 다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의식에서 나를 거부하더라도 내 마음에 비곗덩어리가 붙어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쁨거리를 욕구하는 마음이 비곗덩어리입니다. 아무리 번제에서 죽고 나를 부인해도 내 마음에 붙은 비곗덩어리를 제거할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희생제물에서 모든 기름에 콩팥을 더해 불태우듯, 내 마음에서 세상의 기쁨거리를 욕구하는 비곗덩어리를 확인 사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화제로 드려지는 화목제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 말씀하셨고,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기름을 바치듯 마음의 비곗덩어리를 온전히 바쳐야 합니다. 마음에서 기쁨거리가 될 수 있는 세상 것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기에 내가 손대서는 안 됩니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고 쉼을 드리고 안식을 드려서 하나님과 온전한 화목의 관계를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화목제는 십자가로 내 마음에 뒤룩뒤룩 붙어있는 비곗덩어리를 제거하는 확인 사살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부인한다는 의식은 있어도 세상의 기쁨거리에 대한 욕구가 실제로 비곗덩어리처럼 마음에 붙어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비곗덩어리를 잘라내는 할례의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기어코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을 이루게 하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샘솟는 기쁨의 맛을 생수의 강처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