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의 아이 외 3편
우리 집엔 자동차도 자전거도 없어요
우리 아빤 어부거든요
아빠가 잡아 온 가장 큰 물고기
그 물고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꿈을 꾸어요
하늘 위든 깊은 바닷속이든 상관없이, 훨훨
빛과 어둠
들어와, 빛!
내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겁나지?
겁나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또 얼마나 헤집고 변화시킬지!
세기의 연인
서로 바짝 붙어 있는 두 개의 심장
저렇게 꽉 껴안고도
아직도 서로를 탐하는 배고픈 사랑!
박경리 작가의 원고
- 통영, 박경리기념관에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청마 유치환 시인의 ‘깃발’에서 부분 차용.
김상미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외. 매계문학상 외 수상.
사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의 힘
김상미의 디카시
오홍진(문학평론가)
김상미의 디카시는 사물과 사물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상상의 장소에 주목하고 있다. 경계는 안과 밖을 나누면서 동시에 안과 밖을 하나로 묶는 힘을 지닌 장소다. 안과 밖을 나누기만 하면 타자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안과 밖을 하나로 묶어도 역시 타자는 설 자리를 잃는다. 타자의 자리는 상상이 밀려 나오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타자는 메울 수 없는 흔적이나 틈과 같다. 김상미는 사물이 내보이는 흔적과 틈을 표현하기 위해 강력한 상상의 힘을 펼친다. 상상은 이곳에 발을 붙인 채 저곳을 들여다보고, 저곳을 경유하여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맥락을 지니고 있다. 경계에 다다르지 않은 존재가 어떻게 사물 너머로 나아가는 길을 상상할 수 있을까? 김상미의 디카시는 무엇보다 이런 상상의 힘에 깊이 물들어 있다.
우리 집엔 자동차도 자전거도 없어요
우리 아빤 어부거든요
아빠가 잡아 온 가장 큰 물고기
그 물고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꿈을 꾸어요
하늘 위든 깊은 바닷속이든 상관없이, 훨훨
- 「어부의 아이」 전문
디카시는 사진기호와 언어기호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기호가 시각적인 이미지로 시인이 들여다본 일상 세계를 보여준다면, 언어기호는 사진기호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시적 상상력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상미는 위 디카시에서 물고기 등에 아이가 올라탄 조형물을 사진기호로 제시하고 있다. 물고기 등에 탄 아이를 통해 시인은 지금 이곳을 넘어서는 장소를 향한 상상의 힘을 발현한다. ‘어부의 아이’로 명명된 이 아이의 집에는 자동차도 자전거도 없다. 아이는 어부 “아빠가 잡아 온 가장 큰 물고기”를 타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꿈은 무의식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무의식의 자리에서 아이는 “하늘 위든 깊은 바닷속이든 상관없이, 훨훨” 날아다닌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어부의 아이는 지금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어부 아빠가 잡아 온, 사진기호 속 저 파란 물고기는 아이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물고기를 잡은 어부 아빠가 있고, 아이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파란 물고기가 있다. 시인은 어부 아빠와 파란 물고기의 시선이 아니라 그 둘의 등에 얹혀 하늘과 바다를 훨훨 나는 아이의 시선에 초점을 맞춘다. 어부 아빠는 물고기를 잡을 수는 있지만, 아이처럼 물고기를 타고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 물고기 또한 아이를 통해서만 아이가 꾸는 꿈속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어부 아빠와 물고기는 꿈을 꾸는 아이를 따라 이런저런 상상의 세계를 경험한다. 시인도 다르지 않다. 어부의 아이가 들여다보는 세계의 어딘가에서 김상미의 디카시가 뻗어 나온다.
들어와, 빛!
내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겁나지?
겁나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또 얼마나 헤집고 변화시킬지!
- 「빛과 어둠」 전문
서로 바짝 붙어 있는 두 개의 심장
저렇게 꽉 껴안고도
아직도 서로를 탐하는 배고픈 사랑!
- 「세기의 연인」 전문
아이의 시선을 품은 시인은 빛과 어둠을 대립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은 둘이면서 하나다. 둘이라는 점에서 빛은 빛으로 남고 어둠은 어둠으로 남지만, 하나라는 점에서 빛과 어둠은 늘 서로를 품고 있다. 「빛과 어둠」에서 시인은 밝은 세상에서 어둠을 찍은 사진기호를 제시하고 있다. 빛에 치우쳐 생각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어둠은 공포의 장소이다. 어둠에 묻혀 있다고 그 안에 사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둠에 적응한 사람은 어둠에 묻힌 사물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문제는 어둠에 적응하는 일이다. 어둠에 적응하려면 무엇보다 어둠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어둠은 빛과 대립하는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빛이라고 다르지 않다. 어둠이 짙게 드리워지는 순간 빛은 이내 스러진다. 어둠이나 빛이나 자기를 고집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어둠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빛과 어둠」에는 사실 그 밑바탕에 빛의 목소리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어둠이 빛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대로 빛이 어둠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안과 밖을 구분하면 빛이든 어둠이든 상대/타자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자기 안에 갇힌 존재는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를 늘 무서워한다. 시인은 “네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또 얼마나 헤집고 변화시킬지”라는 시구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빛이 어둠으로 들어가면 어둠이 변화를 겪고, 어둠이 빛으로 들어가면 빛이 변화를 겪는다. 빛과 어둠은 시간을 따른다. 시간 속에서 모든 사물은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시인은 시간을 사는 사물의 운동성을 빛과 어둠의 관계로 드러낸다. 자기와 다른 사물의 개입을 모든 사물은 두려워하지만, 그것을 견디지 못하면 빛은 더 이상 빛으로 남을 수 없고, 어둠은 더 이상 어둠으로 남을 수 없다.
자기와 다른 타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하다. 빛이 빛을 고집하면 어둠과 만날 수 없고, 어둠이 어둠을 고집하면 빛을 만날 수 없다. 시인의 길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데, 옥타비오 파스는 이를 ‘치명적 도약’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치명적 도약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절벽에서 한 발을 더 내딛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래야 빛은 어둠을 끌어안을 수 있고, 어둠은 빛을 끌어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세기의 연인」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인 듯 붙어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기호가 제시되어 있다.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갈라진 이 나무를 시인은 “서로 바짝 붙어 있는 두 개의 심장”으로 표현한다. 두 개의 심장으로 움직이는 이 나무(들)는 그러나 “저렇게 꽉 껴안고도/ 아직도 서로를 탐하는 배고픈 사랑!”을 하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배고픈 사랑으로 이끄는 것일까?
배고픈 사랑은 상대를 향한 지독한 욕망을 표현한다. 초록색 나무는 붉은색 나무를 초록색으로 물들이려 하고, 붉은색 나무는 초록색 나무를 붉은색으로 물들이려 한다. 두 개의 심장은 정확히 이 욕망을 실현하려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두 개의 심장은 하나의 심장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배고픈 사랑에 빠진 나무들은 어떻게든 하나의 심장이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꽉 껴안고 있으면서도 두 나무는 여전히 틈을 메우는 작업에 몰두한다. 서로를 탐할수록 틈은 사라진다. 틈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숨 쉴 길이 막혀버린다. 하나에 집착하는 ‘세기의 연인’은 이렇게 배고픈 사랑의 수렁이 깊이 빠져든다. 이들의 사랑에는 틈이 없다. 당연히 타자도 없다. 자기 욕망을 부풀릴수록 타자로 향하는 길은 더욱더 막혀버린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청마 유치환 시인의 ‘깃발’에서 부분 차용.
- 「박경리 작가의 원고 - 통영, 박경리기념관에서」 전문
‘박경리 작가의 원고’라는 시 제목에 드러나듯, 김상미는 위 시에서 공중에 매달린 박경리의 자필 원고를 사진기호로 제시하고 있다. 사진기호에 덧붙은 언어기호를 보면, 시인은 아마도 사진 속 원고를 보는 순간 유치환의 시 「깃발」을 떠올린 듯싶다. 시인은 「깃발」의 일부분을 그대로 빌려 쓴다. 패스티쉬pastiche 기법을 쓴 셈인데, 이를 통해 시인은 푸른 해원을 향한 깃발의 염원을 원고=텍스트의 미래와 연결 짓는 상상을 펼치고 있다. 공중에 나부끼는 깃발은 푸른 바다를 한없이 그리워한다. 사랑하는 존재가 이곳에 부재할 때 우리는 그리움의 감정에 빠져든다. 유치환은 푸른 해원을 영원히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깃발의 상황을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이라는 시구에 담아 표현한다. 물론 이 마음은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는 결구에 나타나는 바, 푸른 해원을 영원히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이기도 하다.
시인으로서 김상미가 박경리 작가의 자필 원고를 통해 유치환이 「깃발」에서 표현한 그리움을 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디카시의 맥락이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김상미는 박경리 작가의 원고를 텍스트로 하여 저 푸른 해원을 그리워하는 또 다른 존재를 시적으로 그려낸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는 박경리의 원고는 작가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푸른 바다를 향한 그리움에 물들어 있다. 작가의 생사와 상관없이 텍스트는 늘 누군가에게 읽히는 꿈을 꾼다. 누군가 읽어야 다양한 맥락을 지닌 텍스트가 끊임없이 탄생한다. 텍스트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텍스트는 독자를 통해 비로소 살아 숨 쉬는 힘을 얻는다. 김상미는 어쩌면 독자들을 향해 내지르는 저 원고들의 절절한 외침을 온몸으로 들었는지도 모른다.
김상미가 그리는 디카시의 세계는 타자를 향한 그리움으로 넘쳐난다. 타자는 쉬이 의미화할 수 없는 흔적/틈을 지닌 존재이다. 무의식 깊은 자리에 숨은 타자를 드러내려면 시인은 목숨을 걸고 무의식 세계로 도약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물고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아이가 그랬고, 두려움을 물리치고 타자의 깊은 자리로 들어가는 빛과 어둠 또한 그랬다. 두 개의 심장을 지닌 두 나무는 이런 용기가 없기에 “서로를 탐하는 배고픈 사랑”에 아직도 빠져 있다. 배고픈 사랑의 이면에는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헛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김상미의 디카시는 무엇보다 이런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사물들의 힘에 주목한다. 허공에 걸린 채 푸른 해원을 그리워하는 (박경리의) 원고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자기에 매이면 타자로 가는 길은 이내 닫혀버린다. 물고기를 타고 거침없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저 아이를 김상미는 그래서 늘 마음 깊이 품고 있다.
오홍진 대전 출생.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 『연인들, 사랑을 묻다』 외. 계간《디카시》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