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탈해왕 탄강유허비(昔脫解王 誕降遺墟碑)
요,순,우(堯,舜,禹)천하의 임금자리를 물여주었으며 박,석,김, 삼성은 한 나라의
임금자리를 불려주니 그 크고 작은 것은 비록 다르지만 주고 받는 것은 한 가지다.
요는 순에게 주고 순은 우에게 주어 위로 받고 아래로 준 것은 순이다. 그렇다면
석왕은 우리동방에 있어서 순과같은 분이 아닌 겠는가.
왕의 휘는 탈해 이니 옛날에는 시호가 없었기에 사기에 탈해라 칭하였다. 처음진한
육부에는 군장이 없다가 혁거세가 비로소 나라를 세위 서라(徐羅)라 하였다.
남해왕에 이르러 탈해의 영덕함을 알고 사위로 삼았으며 죽음에 앞서 자기 아들
유리를 버리고 탈해에게 왕이를 전이 했으나 탈해는 사양하고 유리를 왕으로 세우고
보좌하니 그때 백성들은 화평을 누리었다.
유리왕의 죽음에 백성들은 전(남해왕)의 명이라 하여 탈해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우니 왕은 호공(瓠工)을 재상으로 삼았으며 또한 시림(施林)에서 알지을 얻으니
알지는 계림 김씨 의 시조이다. 왕이 또한 유리왕의 아들 파사(婆娑)에게 전하여
4대를 지난후 다시 탈해의 손자 벌휴(伐休)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3대 왕부터 - 18대까지 왕을 이사금으로 불여오게 되었다 합니다.
그후 박씨와석씨,김씨와함께 서로 왕위를 주고 받으니 석씨는 모두 팔왕이요
박씨는열왕 김씨는 38왕으로 신라 천년(992년)의 56왕에 누리는 역사이다.
패기(牌記)나 전해내려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탈해이사금은 다파나국 왕이
여국의 왕녀를 안내로 맞이 하였으나 왕비가 잉태를 못 하여 정성과 공득로
7년만에 큰 알을 낳으니 성스롭지 못 하다여겨 버리게 하였다. 왕비는 차마
그냥 버리지 못 하고 비단과 보석을 함께 배에 싫어 바다에 띄우게 되어 파도에
밀여 금관국에 닿았으나 금관국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다시 바다에 띄우
게 되어 신라국의 진한지역인 아진포(阿珍浦)땅에 닿았다.
아진포주의에 속칭 홈바위라는 냇물이 흐르는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주의로 아낙네
들이 모여 빨래를 많이 하던 곳이며, 빨래를 하던 아진의선노파가 바다 위 배 주의
에 까치떼가 우으짖고 있어 이상이 여긴 아진의선(阿珍義先)노파가 발견하게 되어
어업에 의존 해 살던 노파의 할아버지게 알리어 배위에 오르니 궤짝안에는 귀여운
옥동자가 웃고 있었다 한다. 옥동자를 대리고 나오는데 까치가 우으짖어면서 따라
왔다하여 까치작(鵲)자에 까치를 떼어냈다하여 새조(鳥)자를 떼어내어 옛석자인 석
(昔)을 성씨로 삼았고 궤짝에서 벗어났다하여 벗을탈(脫)자에 풀해(解)로 석 탈해
라 불이어 오게되었다 전하며 석탈해이사금은 9척의 거풍과 지혜가 많으신분이며
풍수 지리학에도 능하셨다 전해옵니다.
전설의 신화 설로 알에서 또는 석관에 태어났다는 주몽,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의
신화설은 출생지나 사실에 대해서 삼국유사. 삼국사기기록과 학계논문,인테넷 몰이
꾼의 의하면 허구와 과장이다는 이야기이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설은 지금의 시대 사람으로써는 설득력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
되며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햐여 검정도 되지 않고 PC상에 흘여 나오는 책임 없는 허구
나 과장이있다고 봅니다. 저도 김알지의 후대 손으로 선조의 신화설에 항시 궁금증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당파싸음이나 왕권을 이어가기 위에 진실을 역사속으로 묻어 버리는
일들이 한두가지겠습니까만은 더 중요한 것은 일본으로 인해 우리나라역사가 왜곡 기록
되어 후대에 까지 이어져 교육이 되어간다면 혼란을 가져오게된다는 것이 기정 사실이다.
육당 최남선 선생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우리나라의 역사조작을 위해 16년 2개월 동안
조선사 편찬업무에 관여 해온 일본 학자 금서룡은 단군고 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국사
왜곡에 앞장 섰다. 우리 민족의 정통성 말살 하려 했던 일본이 우리의 역사를 어디까지
조작 했는지 빠른시일 내에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홈 바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앞 바다에 있는 홈바위는 나산천에서 흐르는 물이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홈바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원전의 울타리가 있어 안으로 왕래가 제한 되며,
이 홈 바위는 저가 어린시절 추석 날 많은 비와 강력한 바람의 태풍이였는데 싸나우
태풍인가 태풍이름은 확실하지 않은나 태풍으로 인해 지형 변화로 보이지 않으며
이홈 바위가 들어나 보이게 되면 나라에 큰 우안이 자주 따른다는 옛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어린시절 추억으로는 홈바위를 경계로 장아,송아, 봉길리 쪽은 바다가 얕고 바위가
많아 바다의 해초류나 고기가 많았으며, 홈바위에서 나아,죽전방향은 바다가
급경사로 바다수심이 아주 깊어 사람들은 잘 가지 않는 해변이다. 또한 홈바위
주의에 만 사모래로 이루어져 있고 죽전쪽이나 장아쪽은 완드콩크기의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이다.
나아 해수욕장은 바다의수심이 급 경사로 해수장으로는 부적합 하고 매우위헙하다.
우리국군과 미군의 합동군사 훈련시 군 함대가 해변가까이 닫아 어린시절 군 함대
구경을 여러번 갔던 기억들이 납니다. 130m가 넘는 군 함대가 자연의 수심으로
해변가까이 올수 있다는 것 만을 봐도 바다속의 깊은 수심과 해변에서 급 경사
임을 말해준다. 어린시절 장아리. 송아리. 봉길리 앞 다바의 해초인 우무까시리.
도박.을 뜯어 엿과 아이스깨끼를 바꿔어 먹었던 일들, 대나무 낚시대에 넣으면
노레미가 물어주던 바다 추억은 원전의 울타리 안에 있기에 아련한 추억으로 만
간직하고 후대에 참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라 석탈해왕 탄강 유허비
(新羅 昔脫解王 誕降 遺墟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