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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문학의 창을 비추는 등대 고정애 시인
고정애 시인(1934 ~ )
시와 삶과 나의 인생
연필 깎기
가만 있어 봐
심지 돋우어 불부터 밝히자
숲속 어두운 동굴에 갇힌 화살촉이지
잠 깨워 바늘처럼 끝 날을 세워야 해
숨을 가다듬고
우주의 기를 단전에 모으듯
시위에 오늬 메워 가슴으로 당길까
외줄기 막대 따라 화살촉 끝 겨냥을 볼까
비낀 구름 저 너머 과녁은 아득하지
시이 윗!
바람결 일으키는 활 시윗 소리
매처럼 수리처럼 날아오르고 있어
1992년에 출판된 첫 시집에 실렸던 시다. 첫머리에 ‘궁금합니다, 용기를 내어 하늘 높이 우주로 떠나봅니다. 짙푸른 코발트 빛 바다에 갖가지 보석들로 세공된 육지, 한 점 티끌로 머물러 어떤 느낌으로 살고 있는지 여러 각도에서 나를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독자를 위하여’ 적어 놓았다. 그림동화를 비롯, 책 읽기가 몸에 밴 나는 먼 훗날 시간이 여유로워지면 자유롭게 책을 물리도록 읽으며 살아야지 다짐했었다. 그러나 50대에 이르러 읽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내 마음속 오가는 파장을 드러내 묘사하고 싶어졌다. 여러 서적을 가리지 않고 읽어오면서도 내내 시 부문은 관심 밖이었다. 모르면 용감하다. 겁 없이 예술, 그중에서도 ‘시’라는 어려운 분야를 택하여 문을 두드린지 어언 40년이 되었다. 등잔 밑은 어둡기 마련, 글을 쓴다는 건 등잔 밑처럼 깜깜한 자신을 찾아 알아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미로에서 헤매다가 방산 시인을 스승으로 지도를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한번은 “이제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묻던 질문에 헤르만 헷세의 『황야의 리』 『유리알 유희』와 『20세기 지적 모험』부터 권해 주셨다. 그렇게 비빌 언덕을 얻게 된 나는 새로이 문학의 세계에 입문, 환골탈태換骨奪胎하려는 각오를 연필 깎기라는 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 어떤 천재라도 각고의 노력이 쌓여 비로소 목적을 이루게 된다. 비록 늦깎이로 시작은 어설프나 긍정 마인드로 재능 있고 정다운 스승과 글 벗의 편달과 배려에 힘입어 ‘숨을 가다듬고 우주의 기를 단전에 모으듯’ 시작했던 초심을 지키려 한다.
딱새
한 뼘쯤 되는
하얗고 보드라운 가슴털로
내장內裝된 오목한 둥지 속에
오종종히 모여 앉아
눈을 감은 채
벌린 부리 찢어지게
먹이를 기다리는 딱새 아기들
먹이 잡아 배 채워 주랴
싸 제치는 똥 치워 주랴
한숨 돌릴 겨를 없이
조심 또 조심
주변 두루 살펴 가며
온종일 분주히 들락날락
동분서주 부지런한 어버이 딱새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몸짓으로 지극 정성 다하는
작은 새 한 쌍에서
내 아버지 어머니 모습을 보네
지난해 봄이었다. 공구들을 얹어놓은 층층 선반 한 칸에 틀어놓은 둥지를 보았다. 갖가지 소리로 지저귀며 자유로이 지나다니는 새들은 보아왔지만, 가족이 늘 드나드는 코앞에 둥지를 틀어놓고 새끼들을 기르다니! 쟤네 느낌으로 우리 가족이 믿음직하고 이런 곳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렸나 보았다. 덕분에 나는 이소離巢할 때까지 신기한 그들 딱새 가족 행적을 흥미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득한 옛날 내 부모님의 모습이 저절로 겹쳐 보이는 것이다. 나의 부모는 1909년 농촌에서 태어나, 이웃 마을에서 열여덟에 맺어진 동갑내기 커플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강압에 한일 약정 각서가 강제 체결되었던 그 시절이니, 형편이 극도로 어려웠으리라 짐작하고 남는다. 취직은 안 되지, 농사일은 질색이지, 젊디젊던 아버지는 용감한 모험가였던지 결국 도일渡日하여, 사업하는 길을 택했다. ‘동분서주 부지런한 어버이 딱새’처럼 아낌없는 노력 끝에 다행히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었다. 5남 3녀 중 차남이면서도 아버지는 홀로 되신 할머님을 모시고 두 아우를 데려다 가르쳤었다.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한 태도를 유지하는 모습만 보아 왔으며 병상에서 앓아누운 적이 없었는데 단 한 번 어머니께서 다리의 골절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후년에 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었을 때도 자녀 앞에서 금전金錢에 대한 대화는 듣지 못했다. 오로지 ‘튼튼하게만 살아다오’, 일변도一邊倒로 내가 50이 되어도 어린 아기 다루듯 자애롭게 대해 주던 나의 부모님! 당연히 그분들도 나처럼 한 때 아기였고 청소년이었고 청춘 남녀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인식하기는 커녕, 불사신으로 언제까지나 지켜줄 줄 믿었다. 그렇게 은혜를 받기만 해온 내가 이제 와 눈물로 용서를 구한들 허공에 메아리일 뿐인 것이다. 다만 건강하고 긍정적인 부모님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오래도록 탈 없이 살고 있는 그 점에 있어서는 부모님께 효녀라고 스스로 달래본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해는 뜨고 또 진다
애틋한 바이올린 선율을
아버지는 지붕 위에서 들려준다
라이안의 딸은
아름다운 머리를 모조리 깎인다
아름답고 야무진 천일千日의 앤이
머리를 곧추 세워 단두대로 향한다.
제 삼의 사나이가 하수도에서
이리저리 쫓긴다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애인은 가로수 길을 혼자 걷는다
결코 돌아오지 않는 강, 나이아가라에서
눈을 빛내며 몬로는
종을 향해 고혹적 특유의 걸음을 재촉한다
사랑이 인생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고
마가렛 밋첼은 말하였다.
최근 유튜브로 ‘더 뷰티 오브 시네마 티저’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았다. 고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작 상영된 영화 중 빼어나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을 가려 뽑아 역동적이고 유려하게 편집하여 보여주는 프로다. 물론 내가 보지 못한 영화가 거반이지만 매니어가 된지 그럭저럭 75년에 이르고 보니 줄곧 찾아다닌 상영관에서 가슴을 조리며 관람했던 영화의 조각들을 언뜻언뜻 보게 되었다. 왕년의 명배우들, 19세기 세인의 눈을 사로잡은 쟁쟁한 탑 스타들이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넓은 화면에서 스테레오 사운드로 듣는, 눈과 귀의 호강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입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이고 또 이해할 수 있는 법, 철모르던 옛 시절 웃고 울며 즐겼던 그 숱한 영화들을 인생의 희비 애환과 이치를 알게 된 이제 와 다시 감상해 본다면 그 감회는 몇 갑절 폭넓게 가슴을 울려줄 것이다. 젊어서는 ‘해바라기’ ‘아웃 오브 아프리카’ ‘화양연화’ 같은 달콤한 로맨스나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영화들을 선호했었다. 그 가운데서 잊지 못할 특별한 추억이 있다. 이청준 원작 임권택 감독 오정해 주연의 영화 서편제와, 그리고 금강산 관광에서 북조선 아가씨들 써커스 공연을 보았을 때 나도 몰래 주체할 수 없도록 눈물로 손수건을 적셨다. 한 핏줄로 잠재된 동포애일까 아니면 측은지심일까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한 그 감회를 잊지 못한다. 오늘날 바쁘게 쫓아다닐 필요 없이 집 안방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영화를 볼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씩씩하고 다이내믹한 미국 서부 개척 활극도 볼만해졌고 웅장한 주제곡에 맞춰 마치 내가 말을 타고 황량한 산야와 협곡을 누비며 기운차게 달려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인생은 짧아도 천재적인 장인들이 영혼을 송두리째 불사르며 창작한 예술의 결정結晶들은 인류의 값진 유산이 되어 갈수록 세인의 감성을 흔들고 찬탄을 이끌어 내게 마련이다. 첫 시집에 실린 이 시는 소박한 고정애 판 “더 뷰티 오브 시네마 티저” 가 될 수 있을까.
언니
유치원에서
간식 아꼈다가 갖다 주었지
비 오는 등굣길
물이 새는 내 장화와
바꿔 신겨 주었지
저기와 여기
인형 놀이 소꿉장난에 취하며 놀았다가
자라서는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지
모진 병에 시달리면서
―그래도 내가 아파 그나마 다행이야
맑고 고요한 눈매로
고통을 참아내던
두 살 터울 나의 언니
내가 태어나니 언제나 곁에 있었다. 나는 그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언니가 유치원에 가면 그 앞 개울에 걸쳐진 다리 건너에 서서 기다렸고 학교에 가면 함께 가겠다고 우기는 통에 유치원을 건너 남들보다 일찍이 초교에 입학했다. 초교 저학년 때 이웃 목욕탕에 비누랑 수건이랑 소지품을 몽땅 두고 돌아와 나란히 아빠께 벌세워진 적이 있었다. 항상 함께여서 언니가 좋아하는 동창 친구들과 만나러 가면 껌딱지처럼 따라가겠다 귀찮게 굴었던 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름은 고금심高金心, ‘우리 아빠는, 언니 이름 참 우습게도 지었다’ 고 생각했는데 객관화하고 보면 순금과 같이 변함없고 아이처럼 천진하여 누구를 미워할 줄도 원망할 줄도 모르는 순박한 심성의 소유자인 걸 깨달았다. 콩깍지 속에서 익고 나면 낱낱이 흩어지듯 성장한 우리 남매도 각기 가정을 이루었다. 나의 멘토인 형부께서는 청렴결백 그 자체인 군인이었다.
일본에서 교육받고 김종필씨와 동문인 사관학교 출신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 후로는 육군본부에서 경리經理를 맡아 임무 수행 후 회계사가 되었던 수재였다. 우리 세 남매가 살아오는 동안 제각기 어려운 조건에서도 대대代代로 화기애애 평화롭게 서로 도우며 지내왔다. 그러나 외출로 동행하면서 날더러 ‘걸음이 늦다’ 느니 핀잔을 주길래 ’언니는 다리에 발동기 달았어?‘ 응수한 만큼 부지런하고 민첩했던 그를 20여 년 전 암이라는 병마病魔에 빼앗기고 말았다. 수술도 마다하고 투병하다 말기에 이르러 모진 고통에도 문병 와준 손님이며 가족들에 오히려 배려를 잃지 않고 초연히 생을 마친 그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생각하면 2년 먼저 태어났을 뿐 쌍생아처럼 그만그만한 데도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짐을 부담하고 아차 하면 책임을 추궁받기도 했다. 가정마다 맏이는 특별하게 태어난다. 부모님의 사랑을 빼앗은 아우들에게 양보하며 끝내 넓은 아량으로 감싸고 돌봐주어 고맙기도 하거니와 몹시 측은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름 - 닭
꽃이 예쁠수록
나무는 제 몸을 돌볼 겨를이 없다
업고 안고 걸리고
시뻘건 얼굴에
땀 줄줄 흘리는 30代 아낙
병아리를 부르는
씨암탉으로 왔었다
나의 여름은.
나는 닭 해에 태어났다. 그래선지 닭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된다. 덩치 큰 짐승을 만나도 기죽지 않고 끝까지 용감하게 덤비는 동영상을 보면 장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그런데 어머니 얘기로, 나의 태몽은 구렁이였다. 똬리 틀어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는 구렁이를 ‘만성아 만성아’ 머슴을 부르며 내치게 했더니 담 밖으로 떠넘길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펄쩍 뛰어 들어왔다고 들었다. 구렁이 태몽은 재물과 번영, 그리고 지혜로운 아이의 탄생을 암시 한다는데 나는 어수룩해서 미아도 되었다가 계단에서 또는 축대에서 불구경하려다 떨어지는 등 사고가 많았다. 그런데도 이날까지 큰 탈 없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게 그 태몽 덕분인가 한다. 세 살 터울 아이 셋을 데리고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있던 때였다. 어떤 할머님께서 멈춰 서더니, 지긋이 바라보며 ‘아이구, 씨암탉이네’라고 감탄하며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아이들이 말썽 일으킬 때 지치고 힘이 들어 원더우먼이 되어야 했다. 그 시절 내 얼굴은 싸움닭처럼 드새고 험한 느낌이 들어 외면하고 싶어진다. 새싹들이 어느새 폭풍 성장하여 각계에서 활약하는 모습과 오다가다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이나 어여쁜 아가씨를 보면 어떤 가정에서 어느 부모가 저리 잘 키웠을까 값진 예술품을 대하는 듯 대견해 보이는 것이다.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그 할머니께서는 우리를 만나 관심을 보이셨을 때는 그만한 무슨 사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나 또한 시뻘건 얼굴로 땀 줄줄 흘리며 세 남매의 양육을 마쳤으니 세상에 내보낼 수가 있었고 이제 와 대가족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미치면 뿌듯해진다. 평원에 사는 표범들은 까다로운 여러 원인으로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옛날 어려웠던 시국에는 어딜 가나 아이들이 바글거리며 골목길에서 치고 박고 싸워가며 장난들을 치고 놀았다. 뉘엿뉘엿 서산으로 해가 기울면 엄마들은 저녁을 차려놓고 목 터지게 소리쳐 불러야 했다. 세상이 바뀐 요즈음에는 아이들 보기가 흉년의 곡식이듯 어려워졌고 반대로 노인들이 넘쳐나니 스스로 출입을 삼가게 된다.
5월 보름에
동남쪽
군청 빛 밤하늘엔
희한하게 아름다운
황금빛 쟁반
초점을 맞추어
찍고 또 찍는다
유별나고
희한한 거 보일 때마다
“여보 여보, 빨리 와봐!”
으레 소리쳐 공유해왔던
그때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서
‘제 눈에 안경’이라고 했다. 내게는 근방에서 가장 핸섬 가이로 보였던 금녕 김씨, 나의 배필과는 회혼回婚을 넘기도록 해로偕老 하였다. 독자獨子는 군대에 안 간다고 들었는데 1955년 여름 약혼한 직후 깜짝 소집으로 입대하여 2년을 기다리다 결혼하였다. 별다른 야망이 없던 나는 막연히 평범한 현모양처를 지향했는데 신혼 초부터 어려운 가계에 시부모님 모시고 우여곡절 가시밭길이었다. 자유롭던 일상에서 급전하는 결혼생활은 꿈의 무덤이 틀림없었다. 세상모르는 20대 초반의 철부지 부부가 길들어 넉넉해진 신발처럼 편안해지기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아이 적 그대로의 공주병 환자가 되었을 것이다. ‘바다에 나갈 때는 일주일을 기도하라.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달을 기도하며 결혼에 대해서는 평생을 기도해야 한다.’ 란 말이 영국속담에 있다. 절이나 교회에 가지 않아도 가정 안에서 안달복달하다가 둥글게 모가 깎여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외 없이 우리가 어떻게 연을 맺게 되었는지 궁금해한다. 남편의 은사이신 고 장왕록 영문과 교수님을 찾아뵈었을 때 그분 역시 여러 화제 말미에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느냐’ 고 질문하셨다. ‘제 누님과 내자의 언니가 동창 사이였거든요’ 라고 답하자 고개를 크게 끄덕이신 적이 있다. 전문 지식 말고는 길치에다가 퓨즈가 뭔지도 모를 정도지만 흠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눈을 감으면 약혼 시절부터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함께 해온 추억들이 산더미인데 그 모두가 일장춘몽이 되어 주거니 받거니 회고담을 나눌 길이 없다. 흔한 비유로 세월은 쏘아진 화살 같아서 아끼던 가족을 남겨두고 자나 깨나 그리던 부모님 곁으로 떠나간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똑같은 사람인데 울고 싶을 때가 있는 게 당연하다. 가수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라는 가요를 듣노라면 남자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비교적 건강한 체질로 작고하기 전까지 유머를 잃지 않고 주위를 웃겨주었던 그이,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를 펴보다가 낱장마다 적혀있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글에 눈물로 무너졌던 기억이 있다.
너 아기였을 때
잼 잼 주먹 쥐고 손을 폈다
짝 짝 두 손바닥 마주 치게 하였지
손재주 있으라고
말랑말랑 통통한 다리
두 손으로 꼭 쥐어 쭉 쭉 펴주었지
바르게 뻗으라고
꼬불꼬불 두 귀 번갈아 문질러 펴주었지
예쁜 귀로 소리 잘 듣게
너는 방아 쿵쿵 찧는 방아
두 손 꼭 잡아
바닥이 꺼질 만큼 찧게 하였지
튼튼히 지구를 딛고 살라고
쿵쿵 땅 울리며 자지러진 웃음소리
온 방을 채우던 너와 나의 웃음소리
두 번째 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수많은 포유동물 중 인간처럼 오래 손을 많이 타는 종은 없을 것이다. 6 25 한국전쟁으로 혼란했던 1959년부터 아이들을 기르게 되었다. 온갖 상품이 넘쳐나는 요즈음과 달리 생활필수품이 귀했던 시기에 갓난이 용품을 마련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요했었다. 재봉 책에서 본을 떠 부드러운 거즈를 겹으로 배내옷을 꾸미고, 새하얀 융으로 길이가 넉넉한 베이비 옷을 지어 입혔다. 그 옷으로 세 살 터울 아이 셋을 차례대로 입혀 키웠다. 아기가 방긋방긋 웃으며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손을 잡고 함께 놀아주는 광경을 떠올려 보면 바로 그때가 비길 데 없을 만큼 즐겁고 행복했다고 생각된다. 백일이네 돌이네, 그 후로 이따금 찍어놓은 사진을 보노라면 겨울에는 뜨개질 여름에는 바느질로 온통 손수 지은 옷을 입혀놓았다. 차례로 학교에 들어가 제 맘대로 돌아다니게 되면 밖에 나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 집에서는 알 턱이 없다.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 생기면 해결사 노릇도 맡아야 했다. 경제에 둔감한 전업주부로 시시콜콜 가계부를 쓰면서 필수품 이외는 절제하며 살아야 했다. 실용적이고 자급자족하려는 습관이 몸에 배어 내 옷은 물론 가족의 의복 상당량을 손수 지어 마련했었다. 급기야 대학에 들어가 한참 모양내고 싶은 막내 딸내미의 외출복마저 동대문시장 포목점에 가서 옷감과 단추 레이스 등 부속품을 구해다가 정성껏 몸에 맞게 옷을 지어 입혔다. 그렇다 보니 재봉틀과 반짇고리는 살림 밑천이고 평생 함께하는 나의 분신이나 다름이 없다. 반짇고리에는 색색 가지 실과 바느질에 필요한 잡동사니가 잔뜩 들어있다. 내내 그렇게 살아왔던 만큼 손이 떨리는 오늘에도 아들의 바짓단을 줄이는데 검푸른색 바지 색에 맞는 실을 찾아 재봉틀로 깔끔하게 박아주었다. 그럭저럭 육아를 마치고 저마다 독립을 시키고 나서도 살아 있는 한 어버이의 애프터서비스는 이어지게 된다. 각종 포유동물 중 인간만큼 장시간 손을 많이 타는 종은 없다고 본다.
교감
구름이 언제 마음의 문을 함부로 열어놓던가 아니야 아니야
도리질 치며 봇짐을 지어 산 넘어 바다 건너 넓은 들판 모두
지나 바람 타고 이리저리 헤매며 떠돌다가 여기 이때다 안테
나가 재빠르게 감을 잡으면 일촉즉발 리모컨이 작동한다 좌우로
창을 열어 가슴 속 차곡차곡 지녔던 봇짐 매듭 풀어 아낌없이
쏟아붓고는 홀가분한 차림으로 가뭇없이 떠나고 마는 이의 귀한
선물이여 시의 은총이여.
오래전 별이 되신 성찬경 시인, 박희진 시인과 김동호 시인 등 그리운 여러 선생님께서 주관하시던 〈공간 시 낭독회〉에 초대되어 읽었던 시다. 해석은 독자의 몫이어서 이 시가 무척 에로틱하다는 평도 들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 일만 갖고도 분주하고 벅차다. 마음의 문을 함부로 열어놓지 못하고 가슴 속 차곡차곡 지녔던 봇짐 매듭 풀어 아낌없이 쏟아 붓는 문학이나 예술 등 교감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2005년경, 성황을 누리던 문학 아카데미 송년 모임에서 고 신경림 민중적 서정시인께서 “시인이 시를 써서 한 독자라도 공감을 느껴주면 고맙게 알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들어 기억하는데 글을 써서 공감 얻기가 그만큼 어려울 것이었다. 나의 세대는 일제의 지배와 6 25 한국전쟁 등 혼란기를 겪느라 제대로 된 국어교육을 받지 못했다. 독서라곤 일본어판 서적만을 읽어왔으니 이만저만 핸디캡의 소유자가 아니다. 중학 저학년 때 국어 시간에 청산별곡, 가시리, 쌍화점, 처용가 등 고전 향가 시를 배워, 지금껏 ‘위 증즐가 태평성대’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어이다’ 등 몇 구절씩 외울 수 있을 정도, 그렇게 고려가요 고전 향가나 시조, 옛 소설을 읽으면서 또는 최근에는 문학지 『문학나무』에 실린 박경리 소설가의 옛 기고문 「김동리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읽으면서 비록 만날 수는 없지만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깊은 정서적 교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2019년 7월에 네이버의 블로거가 되었다. 블로그란 열어놓고 막연히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와 같다. 애초에는 방산 스승의 분부대로 2000년부터 『문학과 창작』지에 실려 온 여러 시인의 일역시를 올려놓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시작하여 5년 동안 누구의 구애拘礙도 받지 않고 ‘내 맘대로’ 블로거로 지나고 보니 티끌 모아 태산으로 시는 물론 에세이, 영화, 따온 글 등등, 전체 보기 4480을 넘었다. 이를테면 ‘청마 유치환, 그리고 정예丁芸 이영도 시인’의 사연에 관한 글은 무려 3000을, 영화로는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신작 드라마 「빙점」은 2200, 곽정효 작가의 단편소설 「주먹이 운다」는 550 넘게 누군가에게 읽혀왔다. 비록 독수리 타법으로 자꾸만 잘못 찍는 블로거지만 미미하게나마 문학도로서 문학을 위한 도우미가 되었나 싶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이런 작업이 가능한 것도 CP 구사驅使의 선도자 방산 스승님과 SNS의 혜택을 받아 가능한 일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