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집 나간 지 오래인 영감을 찾아나선 할미가 가락오광대의 놀이판에 지팡이 짚고 들어와 영감을 찾는다. 큰머리를 하고 누른색 동저고리(남자가 입는 저고리)에 짧은 몽당치마를 입었는데 배와 등이 훤히 드러나 궁상스럽고 땟국물이 주르르 흐른다. 뒤이어 등장한 영감이 할멈 찾아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웬 할맘 하나 이리로 안 지나가던가? 얼굴은 물외(오이)같이 길쭉하고 좀 못생깃제." 드디어 만난 영감 할미는 "할맘아!" "영감아!" 얼싸안고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한바탕 춤을 추는데 할맘의 엉덩이 춤이 가위 일품이다.
강원도 황지천에서 발원하여 영남의 한가운데를 광활하게 적시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은 이렇듯 탈놀음을 배태시켰다. 그리고 물길따라 흐르면서 전파시켰다. 강을 중심으로 서쪽은 오광대라 부르고 동쪽은 들놀음[野遊]으로 불렀다. 탈 쓰고 춤을 추고 연희하는 탈놀음은 진면목일랑 탈 속에 감추고 양반을 빗대어 조롱하고 놀려대었다. 요즈음 풍월로 하자면 부패정치인이나 관리들의 허물을 탓하고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조롱한 셈이다.
낙동강변 가락 죽림마을
물길 따라 가락오광대 배태
탈 쓰고 춤 추며 양반 조롱
일제 강점기 버티고 복원
동네 투박한 가락·말 살려
매주 농민회관 모여 연희강서구 가락동에도 예부터 전승되어 오는 '가락오광대'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연희가 중단되었다가 1983년에야 김해문화원에 의해 발굴 복원된다. 1989년 김해군 관할이던 가락면이 부산 강서구에 편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김해문화원 중심으로 활동하는 가락오광대의 명칭을 '김해가락오광대'로 바꾼다. 2001년 가락사람이 '가락오광대보존회'를 새롭게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가락 사람을 중심으로 배역과 악사를 구성하고 매주 화요일 6시면 농민복지회관에 모여 지금껏 오광대를 다듬고 있다. 강서구도 발빠르게 이들을 지원하였다. '가락오광대 탈' 특허를 내고 '가락오광대 발상지' 표지석을 제작하여 가락오광대 기념공원의 상설공연장에 세웠다. 전화위복이랄까 마을사람들은 애써 예부터 마을에서 전승되는 투박한 가락을 으뜸가락으로 음악을 구성하였고 마을사람들이 쓰는 언어(탯말)를 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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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마을 오광대공원에서 가락오광대 회원들이 할미·영감과장을 연희하고 있다. |
강서구 가락동 죽림마을은 이곳 사람들이 죽림강이라 일컫는 서낙동강의 서쪽 오봉산 기슭 강안에 자리 잡는 죽림리의 본 마을이다.
옛날 오봉산이 하나의 섬이었을 때 대밭이 무성하여 큰 홍수라도 나면 이 섬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대섬[竹島]처럼 보였다고 죽림(竹林)이라 이름 붙여졌단다.
죽림포구는 1970~80년대 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포구였다. 1973년 강동교가 가설되기 이전 마을 앞(옛 장터) 해창나루에서 강 건너 강동동 덕포마을까지 나룻배가 오가면서 하중도의 통학생과 소채장수들을 태워 나르던 제법 붐볐던 곳이다. 장날이면 어김없이 가락오광대도 중[老長]놀음·노름꾼·양반·영노·할미영감·사자무과장 등 6과장을 걸쭉하게 한판 펼쳤다.
해창나루는 고려시대 외국의 선박이 왕래하던 항구였다. 개화기 범선과 발동선들이 부산항을 내왕하는 상업항구로서 번창하였고 김해평야 곡물의 집산지가 되어 정미업도 번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해와 부산의 물류가 반출·반입되는 김해지역의 관문 항구가 되어 음식점과 숙박업, 화물취급점 등 물상객주도 들어섰다.
나루 주변에는 노름꾼, 건달들이 생겨나고 청루도 들어서는 등 난장이 텄다. 이렇듯 번창하던 해창나루는 1934년 낙동강 제방공사를 하고 서낙동강에 방조해수문(녹산수문)이 설치되면서 한적한 어촌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해창나루터에는 넓은 공터와 더불어 주막거리와 객줏집들 흔적은 남아 한창 번성했을 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