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8일(월)에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밀양시 삼랑진에 있는 김범우(토마스) 묘소 참배 및 성지순례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일단 자가용 운전을 하지 않아서 몸이 편해서 좋았고, 기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았으며, 마지막으로는 성지에서 우리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보여지고 있는 김범우(토마스) 묘소 참배와 함께
천상에 있는 한국 순교 성인들께 전구하고 올 수 있어서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순교 선조들에 대하여 너무나 모르고 지내왔던 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이 많다는 핑계로 우리나라의 소중한 것을 너무나도 쉽게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성하며, 앞으로는 우리 나라 순교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그분들의 삶을 본받도록 하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김범우(토마스)에 대하여 자료를 올려드리고자 합니다.
이 자료는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홈페이지(검색창에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라고 치면 나옴.)www.paxkorea.kr에 있는 글을 퍼온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 김범우 묘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로 불리웠고 최근에는 순교자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김범우(金範禹, 1751~1787, 토마스)는 1785년 자신의 집 명례방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그 혼자만 먼 곳으로 도배(徒配)되었다. 그곳에서 형벌의 여독으로 약 1~2년 후 36~37세의 나이에 선종하여 이곳 밀양에 묻혀 있다.
김범우는 1785년 봄 명례방 집회로 집회의 중심인물이던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집주인이었던 중인(中人) 김범우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고 지방으로 도배되어 형벌의 여독으로 약 2년 뒤 3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김범우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해 가을 또는 겨울에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세례를 받은 뒤 김범우는 즉시 윤지충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 주었으며, 스스로 교리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 겨울부터는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소로 제공함으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785년 봄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도배형을 언도받고 단양(경상도 밀양의 단장, 충청도 丹場, 청주 등 세 가지 설이 있음)에서 도배 생활을 하면서도 공공연히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가 1786~1787년 가을 형조에서 받은 형벌의 여독으로 사망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희생자(순교자)가 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인고는 경상도 밀양군 삼랑진읍 굴암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 을사추조적발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
서울의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난 김범우 토마스(1751~1787)는 1784년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입교한 후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가족과 역관 친구들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1785년 봄 명례방(明禮坊, 현재의 明洞)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3형제 및 권일신 등과 함께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 관리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교우들은 모두 명문의 양반들이라 형조로부터 훈방되었으나 김범우만은 그대로 갇혀 온갖 형벌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끝에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공공연하게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가 1786년 가을 형조에서 받은 형벌과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이로써 김범우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와 함께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현 을지로 2가 명동성당 부근)은 한국 천주교회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의 장소가 되었다. 김범우가 체포된 사건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한다.
◆ 도배(徒配)
김범우는 유배(流配)를 간 것이 아니라 도배를 갔는데, 조선 왕조의 형벌은 태(笞)·장(杖)·도(徒)·유(流)·사(死)의 5등급이 있었고, 여기서 문제가 된 도배는 단순히 그냥 유배(귀양, 流)가는 것이 아니라 귀양 가서도 편히 있지 못하고 도형(徒刑 : 소금을 굽거나 쇠를 불리거나 수군에 종사케 하는 등 일종의 강제 노역이 1년부터 3년까지 5등급으로 부가됨)이 부가된 형태의 처벌이었다.
김범우의 사망 원인은 도배지로 떠나기 전에 관례적으로 부가되던 60~100대의 장형을 받고, 그 장독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처럼 가혹한 노역형이 최소한 1년 이상 부가되어 충분한 치료 기간을 갖지 못했기에 이것이 장독사(杖毒死)로 이어진 측면이 클 것으로 본다.
■ 김범우에 대한 재평가 작업
김범우(1751~1786?) 토마스는 현재 명동 성당이 들어선 자신의 집 명례방에서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 등과 신앙 집회를 열다 체포되어(을사추조적발사건, 1785년) 충청도 단양 또는 경상도 밀양에 도배된 뒤 형벌 여독으로 36~37세에 숨을 거뒀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천주교를 믿다 죽음을 당한 최초의 인물이다. 또 이벽, 이승훈과 마찬가지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의 활동가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 사망 연도, 유배지 문제, 순교 여부 등이 불명확해 그의 존재는 거의 잊혀져 있었다. 교회사학계는 그동안 그의 위상을 섣불리 논하기가 힘들었다. 역관(譯官) 가문 출신 중인이다 보니 남아 있는 관변 기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도배지에 대한 이견
교회 내 유일한 관련 사료인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그를 충청도 동쪽 끝에 있는 단양읍으로 유배 보냈다.”고 기록돼 있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에는 천주교를 믿어 추조(형조)에 잡혀간 사실만 언급되어 있다. 다행히 1981년 후손 소장 고문서가 발견돼 그의 행적과 가계도 윤곽이 드러나고, 같은 해 외손의 도움으로 파묘함으로써 궁금증은 상당 부분 풀려 도배지가 충청도 단양이 아니라 밀양 단장이란 새로운 학설이 그 무렵에 제기되었다.
현재 부산교구에서는 가계 전승이나 이 지역 후손 및 교우들의 진술을 토대로 대체로 순교자 김범우가 도배된 곳을 이곳 밀양 단장으로 보고 있으나, 그의 도배처가 충청도 단양(또는 청주)이라는 그의 친지들의 관변 진술이 있으므로, 향후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공동으로 모여 학술적 재검토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사인은 형벌의 여독?
한편 그를 증거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순교자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의 불씨도 남아 있다. 한국 교회 최초 순교자는 1791년 당시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전라도 진산 고을에서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참수된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이라는 것이 최근 정립된 교회사학계의 통설이다. 2003년 9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 펴낸 자료집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도 윤지충과 권상연이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형벌을 받고 그 후유증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사망한 김범우는 한국 최초 순교자로 공경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최근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최근 교황청에서 김범우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여부를 품의한 부산교구 측의 질문에 대해 순교자의 절차로 추진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음으로써, 교황청은 김범우의 직접적 사인(死因)이 형벌(杖刑)의 여독(杖毒)이라고 인정한 셈이 된다. 이 경우 김범우는 교회의 최고 공식 기관에서 인정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자리매김 되어진다.
순교자인가? 증거자인가?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사학계에서 인정하는 최초의 순교자는 윤지충이었고, 김범우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분류되었다. 그 이유는 김범우의 직접적 사망 원인이 정부의 박해(형벌) 때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데에 있었다. 그의 도배 이후 약 1~2년 정도를 도배지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두고, 만약 도배를 떠나기 전 당시 관례적으로 당하던 장(杖) 60 이상의 형벌로 인해 그 장독이 악화되어 도착 즉시 죽었다고 본다면 분명 순교이지만, 도착한 후에도 최소 1년 이상 더 살았기 때문에 박해자가 가한 형벌인 ‘도배’가 그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김범우에 대한 학계와 교계의 평가는 순교자, 증거자를 수시로 반복하여 변해 왔으며, 아직까지도 매우 예민한 문제로 취급되어 오고 있다.
순교자로서의 시복 청원 준비
이런 과정에서 한국 교회는 1990년대에 각 교구별로 시복시성 작업이 시작됐다. 부산교구에서는 30여명의 순교자가 있었지만,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두 사람만 순교자로 시복 청원을 하였고, 김범우 토마스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시복 청원을 하였다. 순교자 현양 위원회는 시복 청원 분위기가 고조되자 본격적인 묘지 작업을 진행, 2005년 9월 14일 김범우 묘역 준공 미사를 거행했다. 그 후 교회사 연구를 통해 유배지에서 신앙을 증거하다 죽은 이들도 순교자로 시성된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부산교구에서는 김범우를 증거자가 아닌 순교자로 시복 청원을 준비하고 있으며, 매년 김범우의 기일인 9월 14일에 김범우 묘역에서 기일 미사를 지내고 있다.
부산교구에서는 가계 전승이나 지역 교우들의 진술을 토대로 대체로 순교자 김범우가 도배된 곳을 이곳 밀양 단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귀양처가 충청도 단양(또는 청주)이라는 그의 친지들의 관변 진술이 있어서, 향후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공동으로 모여 학술적 재검토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최근 교황청에서는 김범우가 도배를 떠날 때 맞은 형장(刑杖)의 장독(杖毒)이 악화된 것이 그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었음을 인정하여 순교자로서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하도록 부산교구 측에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는 김범우 토마스가 되는 셈이고, 1791년 신해박해로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은 한국 교회 최초의 참수(斬首) 순교자가 된다.
묵상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였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어떤 고통을 감수하였는지,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 활동에 대하여 묵상해 보자.
첫댓글 저도 직암회원으로서 이벽성조의 성교요지 등을 공부하며 자연스레초기 우리 신앙선조들의 모습을 보게되는데, 김범우 토마스 순교자의 모습이 중인이라는 신분으로 잘 드러나지 않음에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부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의 대해 알게되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