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알버타문학 민초 신인문학상 차상작품
재촉하지 않는 길, Alberta 남쪽으로
이경호 수필가
캘거리에 둥지를 튼 후 밴프와 재스퍼의 장엄함에는 자주 발길이 닿았으나, 알버타 남쪽의 묵직한 속살을 마주할 기회는 드물었다. 마침 11월 11일, 캐나다의 현충일인 리멤버런스 데이(Remembrance Day)를 맞아 그간 묵혀두었던 호기심을 따라 남쪽의 중심 도시 레스브리지(Lethbridge)로 향했다. 비록 겨울의 문턱에 선 워터턴 국립공원의 품까지 들진 못하더라도, 그 언저리라도 느껴보고 싶은 즉흥적인 여정이었다. 초겨울의 초입, 쌀쌀한 공기와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늦가을의 풍경을 무겁게 짓눌렀다. 디어풋(Deerfoot) 고속도로를 타고 도심을 벗어나자, 추수가 끝난 거대한 대평원이 바래지 않은 황금빛으로 일렁였다. 달리는 차창 오른쪽으로는 눈을 하얗게 이고 있는 로키의 영봉들이 거대한 성벽처럼 동행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 문득 석 달 전 방문했던 위성도시 오코톡스(Okotoks)의 기억이 스쳤다. 영화의 배경으로도 잘 알려진 그곳 근교에는 ‘빅 록(Big Rock)’이라 불리는 거대한 빙하 미스터리가 서려 있다. 무려 450km 떨어진 재스퍼에서 굴러왔다는 이 바위는 암석 DNA 분석 결과 실제로 재스퍼의 것과 일치한다. 몇 만 년 전 빙하기의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이 육중한 바위를 여기까지 실어 날랐으리라. 과학은 그것을 '빙하의 이동'이라는 메마른 건조체로 설명하지만, 가로막은 수많은 고봉과 장애물을 넘어 어떻게 이 넓은 평원에 홀로 안착했는지는 여전히 신비의 영역이다. 세상에는 명확한 논리보다 이렇듯 아득한 추정으로 남겨둘 때 더 아름다운 비밀이 있는 법이다.
2번 도로는 남부 알버타의 아담한 소도시들을 알알이 꿰어냈다. 농업과 목축의 본고장 답게 거대한 농기구 점포들이 즐비했고, 대지 위로는 간간이 석유 채굴기(Pumpjack)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초겨울의 눈보라를 예견하지 못한 채 누런 들판 사이로 푸르게 돋아난 이색적인 겨울 작물들이 나그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이리버(High River)를 지나 낸턴(Nanton), 클레어스홈(Claresholm) 같은 작은 마을들을 스쳐 갔다. 나이 들어가는 소도시의 중심가는 빈 상점들이 듬성듬성 보여 쓸쓸함을 자아냈다. 잠시 몸을 녹이려 들른 팀홀튼(Tim Hortons) 에는 노인들이 웅크려 앉아 느긋하게 신문을 읽거나 한가로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대도시의 조급함과 재촉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곳의 시간은 마치 대평원의 바람처럼 완만하고 느리게 흘렀다. 레스브리지로 꺾어지는 길목에서 만난 포트 맥클라우드(Fort Macleod)는 19세기 군사 요새로 시작된 유서 깊은 소도시다. 당시 병사들이 머물던 나무 요새의 자취를 보고 싶었으나, 휴일의 빗장은 굳게 걸려 있었다. 아쉬운 대로 적막한 시내를 걷다 가로등 아래 걸린 빛 바랜 사진들과 마주했다. 이 고장 출신의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이었다. 그들이 전장서 스러진 이들이든, 살아 돌아온 이들이든 상관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들을 영웅으로 대접하고 영원히 기억하려는 후손들의 숭고한 도리가 가슴을 뭉클하게 적셨다.
다시 길을 잡고 레스브리지에 가까워지자, 줄곧 평탄하던 대평원이 역동적인 오르막과 내리막의 파노라마로 돌변했다. 빙하기가 할퀴고 간 역동적인 지형은 정적인 풍경에 거친 숨결을 불어넣었다. 마침내 도시의 상징인 거대한 철교, '레스브리지 고가교(Lethbridge Viaduct)'가 저 멀리 거대한 위용을 드러냈다.
계곡 아래 주차장에 들어서자 아득한 상공 위로 100미터 높이의 거대한 철탑들이 2킬로미터나 뻗어 있는 장관이 펼쳐졌다. 20세기 초에 건설되어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작 간단한 유지 보수만으로 여전히 끝 모를 화물열차를 받아내고 있는 강인함. 그 철교 아래로는 유유히 강이 흐르고, 여름날의 낭만을 품었을 캠핑장이 초겨울의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한편에는 과거 치열했던 삶의 현장이었을 콜 뱅크스(Coal Banks) 탄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빛 바랜 사진 속 광부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거친 갱도 속에서 삶을 지탱해야 했을 그들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망대에 올라 숨을 고르니, 거대한 철교와 도시를 감싸 안은 야트막한 구릉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준비 없이 떠난 즉흥적인 여정이었기에 문을 닫은 박물관과 명소들이 많았지만, 아쉬움마저 여행의 묘미였다. 여행이란 단순히 자연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역사와 삶의 무늬를 관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장엄한 서부의 로키, 평탄하고 고요한 중부의 평원과 달리, 알버타 남부는 자연에 순응하며 삶을 개척해 온 이들의 땀방울이 서린 다채로운 파노라마였다.
돌아오는 길, 다시 끝없는 대평원이 펼쳐졌다. 추수가 끝난 누런 들판 위로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 늦가을의 붉은 해가 지평선 너머로 마지막 불꽃을 태울 때, 저 멀리 캘거리의 거대한 도시 불빛들이 밤의 서막을 알리며 마중을 나왔다. 안식을 향해, 우리는 마침내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경호 수필가
2014년 Canada이민
2026 한국문협 민초신인문학상 수상
현 알버타문학 사무국장
*2026년 5월28일 This Time신문에 기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