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아나키스트
김창덕
아나키즘의 유입과 테러리즘의 계보
아나키즘이 서구문명의 특산이 아니라, 고대 인도나 중국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일찍이 알려졌다. 또한 일본에서는 에도(江戸)시대 안도 쇼에키(安藤昌益)과 같은 독창적인 사상가가 나와, 아나키스틱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19세기후반이 되어서야 동양 각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아나키즘은, 고대로부터의 전통을 이어받고, 그것을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체제에 적응시키려했던 조작을 거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구로부터의 수입사상이며, 그 直譯的 운동이라는 사실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일본 아나키즘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서구의 아나키즘 사상이, 언제 어떤 형태로 흘러들어왔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정설은 없지만, 대개 1880년대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테러리즘운동의 소개가 그 발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1882년에 다루이 토키치(樽井 藤吉)등이 결성한 동양사회당(東洋社會黨)을, 일본 최초의 아나키즘단체로 보는 역사가도 있지만, 그의 아나키즘은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바쿠닌주의도, 그 후에 등장한 크로포트킨주의도 아닌, 러시아의 나로드니키운동의 바쿠닌주의, 즉 테러리즘이었다.
다루이의 이 운동은 1881년의 러시아 황제암살사건에서 상당히 자극을 받은듯, 부호(富豪)들을 위협해 당비(黨費)로 채우기도 하고, 농민투쟁을 조직하거나, 비밀모임을 갖는 등, 나로드니키의 일본판이라 생각케 하는 점이 상당수 존재한다. 이 단체는 결성 후, 2개월만에 정부의 탄압을 받아, 이듬해에 완전히 해체되고 말지만, 이들이 주장한 사상은 자유당좌파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간된 아나키즘 소개서인, 게무야마 센타로(煙山専太郎)저 『근세무정부주의(近世無政府主義)』(1902년)도 그 내용은 거의 배부분 러시아의 테러리즘운동에 관한 내용이었으며, 그 용어로 인해 그것이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시대를 통해 일본의 아니키즘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도 이 책의 애독자였던 것 같았으며, 나중에 대역사건에 휘말리게 된 사카모토 세이바(坂本清場)가 쿠로테구미(黒手組)를, 그리고 테러리스트로 사형선고를 받은 나카하마 테츠(中浜 鉄)가 한 때, 분흑당(分黑黨)이라 불렀던 것도, 『近世無政府主義』로부터 얻은 지식에 의한 것일 것이다.
이같이, 일본에 처음 이식된 근대아나키즘은, 체르게조프등을 통하거나, 네챠에후 의 영향하에서 형성된, 근대아나키즘 가운데에서도 가장 파괴적이고, 과격한 테러리즘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실들은, 테러리즘이 일본 아니키즘의 세 기둥 중 하나였으며, 아나키스트로 알려진 뛰어난 인재들 중, 테러리스트라고 자칭한 사람과, 전술로서 테러리즘을 채택한 사람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선 일본에서의 테러리즘의 계보에 대해 알아본다.
초기의 테러리즘
1910년의 대역사건이 메이지정부에 의한 위작(僞作)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엔 이미 확연해 졌지만, 그러나 이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던 간노 스가(管野スガ), 미야시타 타이키치(宮下 太吉), 니무라 타타오(新村 忠雄), 후루카와 리키사쿠(古河 力作)등의 중심사상은 테러리즘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토쿠 슈스이의 경우 오히려 이 밖의 몇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에 휘말렸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당시 테러리스트의 사상을 가장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아나키스트단체인 복음회(福音會)회원이 1907년 11월 3일 공개한 메이지천황암살 성명(聲明)으로, 거기에는 「무정부당(無政府黨),암살주의자(暗殺主義者)」라는 서명이 보이고, 상당량의 부수(部數)가 일본에도 배포되었다 한다. 이 성명이 메이지정부에 끼친 충격은 상상(想像)이상이었으며, 그것이 대역사건을 날조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성명은 전문(全文) 약 3천5백자 정도의 짧은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천황을 정복자, 지배자, 착취자라는 실체를 폭로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요구하는 인간을 박해하고, 압박하는 정책으로 인민에 대한 도전이라 단정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최후의 한 방울의 피를 쏟아낼 때가지 족하(足下)에게 반항하고, 현재 이 질서에 거꾸로 반항해야 한다. 유세(遊說)나 선동과 같은 완만한 수단을 중지하고 오히려 암살을 실행하고, 간첩자(間諜者) 압제자(壓制者)는 모두 그 사람의 지위(地位)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암살해야 한다.」
이어서, 혁명은 필연(必然)이며, 테러리즘은 그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을 밝히고, 「암살주의는 지금이야말로 露國에서 가장 크게 성공하고 있으며, 佛國에서도 역시 성공했다.」고 하여 그 국제적인 연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천황제에 대한 이 같은 폭로와 공격은, 아마도 이 글이 가장 처음이 아닌가 하며, 이 글은 또한 간노 스가와 미야시타의 사상형성에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테러리즘뿐만 아니라, 아나키즘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당시 이들은 아직 미분화(未分化)상태였다.)도, 이 대역사건에 의해 일시에 숨이 끊기게 되었다. 대역사건은 실로 12명의 뛰어난 투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14명의 투사를 無期내지는 11년, 8년의 징역을 당하게 했던 것이다.
제2기의 테러리즘
이어 테러리즘은 제 2기로 들어선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테러리스트로는 나카하마 테츠(中濱鐵), 후루타 다이지로(古田大次郎)등 길로딘사 멤버지만, 그들 역시 러시아의 테러리즘을 모범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의 사상 역시 제1기의 그것과 거의 같아 보이지만, 다른 점은 활동자금을 자본가로부터의 강탈에 의해 충당하려 했던 것이다. 이 생각은 이미 다루이(樽井)의 동양사회당 운동에서도 볼 수 있지만, 제2기 테러리즘은 「혁명운동의 자금은 모두 자본가로부터 이것을 강탈해야한다.」를 정면에 내걸고 실행했다는 점이다. 후루타(古田)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러시아의 테러리스트가 그 정도의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금이 풍부했기 때문으로, 그 자금은 주로 부호나 공금의 강탈에 의해 채워진 것이므로, 그런 실례(實例)에 따라 우선 자금의 축적을 도모했던 것이다. 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금은 축적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몇 가지 상해사건을 일으키게 되고, 이로인해 거의 자멸(自滅)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이 약취주의(掠取主義))는 아나키즘에 대한 일반민중의 오해를 낳게 되고, 아나키즘을 민중의 생활과 격리시키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아나키스트가 약취(掠取)한 자금을 운동에 쓰지 않고, 생활비로 유용한 것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운동의 착실한 발달을 방해하게 되었다. 러시아 테러리스트의 활발한 운동을 지탱한 최대의 힘이 농민의 지지였으며, 자금(資金)은 2차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후루타등의 운동의 비극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제2기의 테러리즘은 1923년 9월에 군부에 의해 학살당한 오스기 사카에(大杉栄), 이토 노에(伊藤野枝)등의 보복투쟁을 목표로 했지만, 이 투쟁에는 아나르고샌디칼리스트 그룹의 와다 큐타로(和田久太郎), 무라키 켄지로(村木源次郎)등도 참가해, 중요한 역할 담당 했던 것이다.
이 투쟁의 목표는 오스기, 이토를 비롯해 많은 사회주의자, 조선인학살의 직접책임자였던 당시의 계엄사령관 후쿠다 마사타로(福田雅太郞)의 살해에 있었지만, 결국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역으로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일으킨 상해사건을 포함해, 나카하마, 후루타는 사형당하고, 십여 명의 동지 모두가 체포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와다(和田)와 기무라(木村)도 체포되어, 기무라는 예심 도중 병사(病死), 와다는 무기(無期)판결을 받았지만, 후에 옥중에서 자살을 결행한다.
이 투쟁은 당시 가장 활동적인 분자를 잃어버렸던 것에 비해, 얻은 것이 별로 없고, 그 이후, 테러리즘은 아나키즘운동의 표면에서 그 모습을 감추고, 단지 약취주의만이 테러리즘의 불행한 유산으로서 쇼와(昭和)초기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일본의 크로포트킨주의
이어 일본 아나키즘의 두 번째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크로포트킨주의이다. 크로포트킨주의는 러시아의 테러리즘에 이어 일본으로 이식(移植)된 아나키즘사상이며, 또한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크로포트킨주의라고 할 만큼 커다란 영향을 일본 아나키즘운동에 미쳤던 것이다.
크로포트킨주의가 일본에 건너온 연대와 경로 역시, 오늘날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주의를 자신의 입장에서 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운동의 전개를 생각한 첫 번째 인물이 고도쿠 슈스이였다. 하지만 고도쿠가 처음부터 여기에 동감(同感)한 것은 아니었다.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
고도쿠 슈스이는 일본 고치현(高知縣)나카무라쵸(中村町)출신으로, 호상(豪商)출신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자유민권파의 하야시 유조(林有造) 나카가와 초민(中江兆民)등의 서생(書生)으로 들어가, 프랑스풍의 계몽주의를 받아들이고, 진보적인 저널리스트로 출발하지만, 이윽고 사회주의에 접근해, 『帝國主義』(1910년),『社會主義神髓』(1903년)과 같은 저서를 계속 내놓았다. 이것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으로, 특히 제2인터내셔널의 중심이었던 독일사회민주당 운동이 당시의 고도쿠 행동의 밑받침이 되었다. 그가 당시 아나키즘을 테러리즘과 동일시하고, 크로포트킨주의에 대해 별로 잘 알고 있지 못했던 사실은,『社會主義神髓』의 문장 중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러일전쟁에 대한 반전운동을 계기로 해서, 평민사가 결성되고. 고도쿠는 그 중심의 한사람이 되지만, 이 시기에도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파 사회주의자였으며, 『평민신문(平民新聞)』 일주년 기념호에 『공산당선언』을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함께 共譯 게재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크로포트킨의 이름을 알게 되었던 듯 평민사가 발행한 5매 1조의 그림엽서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베벨과 함께 톨스토이와 크로포트킨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마르크스, 엥겔스, 베벨의 이름을 넣은 것은 당시까지의 경과에서 보아도 수긍이 가는 것이며, 톨스토이의 경우 러시아에 있어서 당시 대표적인 반전론자로 유명했지만, 크로포트킨이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일본 유일한 무정부주의자」라고 자임(自任)해온 구즈미 켓손(久津見蕨村)이, 자주 평민사에 드나들면서,『평민신문』에 기고했으므로, 그를 통해서 테러리즘이 아닌 아나키즘이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해본다.
구즈미는 후에 『무정부주의』(1906년)라는 서적을 출판하고, 후에 나가사키(長崎)로 가서 『長崎新聞』이라는 평민사의 지국적인 신문을 발행하고, 그 무렵 나가사키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러시아의 혁명가들을 응원하기도 했다.
한편 고도쿠 역시 1904년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레오․드비치의 『시베리아에서의 16년』
을 『露國革命奇談神愁鬼哭』라는 제목을 붙여 『평민신문』에 抄譯연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것은 재미있는 읽을거리로 번역하기 시작했겠지만, 이 번역과정이 의외로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듬해 1월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그로 하여금 한층 더 아나키즘의 쪽으로 나가게 했다. 더구나. 같은 1월에 『평민신문』은 정부의 연이은 탄압에 결국은 폐간당하게 되고, 고도쿠 자신도 筆禍로 2개월에서 5개월의 禁錮에 처해지게 된다.
옥중에서 고도쿠는 지금까지의 운동, 이번의 운동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했다. 入獄 3개월 후에 그가 사카이 토시히코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만약 지금의 나의 우주관, 인생관에 대해 묻는 자가 있다면, 의연하게 유물론자, 과학적사회주의자라고 대답하시오. 금후 6旬의 독서와 사색은, 짐작컨데 이 주장을 굳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오.」라 했지만, 이 무렵 에는 이미 그의 아나키즘에의 전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샌프란시스코의 老아나키스트 존슨과의 편지왕래가 있었고, 존슨으로부터 크로포트킨의 『전원, 공장, 작업장』을 받아, 옥중에서 애독(愛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출옥 후 곧바로 존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도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처음엔 마르크스파 사회주의자로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만, 출옥하기에 이르러, 과격한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사바(裟婆)로 되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일본)에서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무기징역내지는 유기도형을 의미하는 것이며, 위험천만하므로, 무정부주의의 확장운동은 전적으로 비밀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진보와 성공을 거두기에는 오랜 세월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생각합니다.」
그 후, 고도쿠는 미국에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존슨을 비롯해 IWW(세계산업노동자-미국의 독특한 샌디칼리즘조합)의 회원과 러시아사회혁명당의 망명자등과의 교제를 통해, 그의 신념을 한층 굳힌 후 이듬해인 1906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다시금『평민신문』의 발행계획에 몰두하여, 1907년 1월부터 일간『평민신문』으로 그 결실을 맺지만, 이 16호에서 그는 마르크스주로부터 아나키즘에의 전향을 공식적으로 밝힌다. 이것이 『내 사상의 변화(余が思想の変化)』라는 글이다.
우선「나는 정직하게 고백한다. 나의 사회주의운동의 수단방침에 관한 의견은 일 년 전 입옥당시보다 약간 변하고, 또한 작년 여행에서 크게 변하여, 지금 수년전을 되돌아보면 내 자신이 거의 다른 사람과 같다는 느낌이 든다.」라 하고, 나아가,「보통선거와 의회정책으로는, 참된 사회혁명을 성취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사회주의의 목적을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로 단결하는 노동자의 직접행동(디렉트 액션)밖에는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이 글에서, 의회주의에서는 어째서 사회혁명을 달성할 수 없는 가의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 자신도 직접보고 들었던 자유민권운동의 비참한 타락상황을 예로 들고, 그의 아나키즘으로의 전향 근거의 하나로 하고 있다.
이 성명이후, 일본의 사회운동은 의회정책파와 직접행동파로 확실히 분열되고, 각각 당파를 조직해 논쟁을 벌이게 되지만, 고도쿠는 직접행동파의 수령으로 이 논쟁을 리드하고, 직접행동파의 이론을 크로포트킨주의에서 찾았던 것이다. 고도쿠는 이미 미국에서 귀국 후, 런던의 크로포트킨과 편지왕래를 하고 있었으며, 그의 주요 저서는 거의 읽고 있었지만, 직접행동론은 반드시 크로포트킨주의에서 연역된 것이 아니라, IWW의 산디칼리즘과 나르도니키계통을 이은 러시아의 사회혁명당의 투쟁에서 배운 것으로 생각되며, 크로포트킨주의는 그 이론형성에 있어 추후에 원용(援用)된 것으로, 여기에 고도쿠의 크로포트킨주의의 특징이 있다.
고도쿠는 치밀한 이론가라기보다는, 육감이 빠른 저널리스트이며, 자유민권운동의 유풍(遺風)인 장사(壯士)기질을 지니고 있는듯하지만, 아마 그가 크로포트킨을 이해하고 있는 것 역시 이와 상관이 깊을 것이다.
그는 그 후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를 번역, 1909년에 평민사역으로 비밀출판 했지만, 『빵의 쟁취』는 그 무렵의 직접행동파 사람들이 다투어 읽은 책으로, 고도쿠도 이 책의 번역은 수년의 전도(傳道)보다 낫다, 고 까지 말하고 있다.
고도쿠는 그 외에 그가 애독한 크로포트킨 자서전의 번역을 계획했으며, 시간을 들여 크로포트킨연구를 해 나갈 생각이었지만, 주변의 정세는 그것을 허락지 않고, 1908년의 적기사건(赤旗事件)에 의해 도쿄의 사회주의자가 거의 검거되기에 이르자, 같은 해 상경, 이듬해, 『자유사상』을 출간했다. 이 신문의 이름은 아마 크로포트킨의 주선으로 발행된 영국의 아나키즘지 『프리덤』을 모방해 붙인 이름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도쿄에 있는 동지들이 당하고 있는 수난에 대해 보복을 할 생각으로 상경하기는 했지만, 간노스가와의 불행한 연애사건의 결과, 도리어 많은 동지, 친구들로부터 배척당하고,『자유사상』역시 2호로 발행정지 되었으며, 고도쿠는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생각지도 않게 일어난 것이 대역사건이다. 미야시타와 간노스가의 회합(음모라 할 정도의 것은 아니다.)에, 어느 정도까지 고도쿠가 개입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도쿠는 항상 직접행동파 젊은 동지들의 과격한 움직임, 어쩌면 테러리즘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던 그들을 제지하고, 직접행동이란 테러리즘이 아니라, 노동자의 스트라이크이며, 혁명운동이란 언론에 의한 선전과, 노동조합의 조직화 등의 운동이라고 말했던 점들을 생각해 볼 때, 그 같은 내용에 찬성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고도쿠의 크로포트킨주의는 항상 그의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손과 발 몸에는, 젊은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테러리즘과 사회혁명당의 투쟁정신이 스며있었던 점등을 생각해 볼 때, 적극적으로도 반대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생각된다. 특히, 상경 후 고도쿠가 처해있었던 상황이 운동내에서도 고립되고, 경제적으로도 꽉 막혀있었던 점등을 생각해 볼 때, 위의 상황은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시의 형법으로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대역사건은 지배계급에 의한 계급재판이었으며, 비합법 학살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고도쿠가 크로포트킨주의를 받아들였을 때는, 그 대본(大本)인 이론보다는 혁명전술에 이끌렸으며, 따라서 그가 혁명에 대해, 혁명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는가를 말해주는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것은 극심한 탄합 하에서, 우선은 어떻게 국가권력과 싸워야할지가 문제가 되기도 했겠지만, 대역사건으로 체포된 후, 옥중에서 변호사에게 보낸 서간문 중에 그 단서를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들 서간문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고도쿠의 혁명에 대한 정의(定義)는,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으로 구별하고, 무정부공산주의(크로포트킨주의)혁명은 사회혁명, 즉 「인민대중의 혁명」으로, 一黨一派의 혁명이서는 안 된다, 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혁명을 소수자가 폭력을 이용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위험한 오해입니다. 과거의 모든 혁명은 종종 이 같은 현상을 가져왔으며, 평민은 항상 희생이 되었습니다. 금후에는 공산당, 혁명당의 혁명이 아닌, 평민자신의 혁명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운동은 우선 인민자신의 자각(自覺)을 높이는 것이어야 하며, 「평민 교육사상의 개척」에 있다, 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언론뿐만이 아니라, 동맹파업과 같은 직접행동, 폭력암살도 포함되어있으며, 어떤 방법을 쓸지는 그 국가의 사정, 사회정세에 따른다는 애매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들은 아무래도 무척 소박한 생각으로도 보일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고도쿠는 크로포트킨주의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만약 그가 41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죽음을 당하지 않고, 좀 더 그의 운동을 이어나갔다고 한다면, 이들 생각이 더욱 깊어지고, 굳어졌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사상가로서의 고도쿠는 위대한 미완성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도쿠를 중심으로 당시의 직접행동파로는 오스기 사카에(大杉栄), 아라하타 칸손(荒畑寒村), 우쯔노미야 타쿠지(宇都宮卓爾),다케우치 젠사쿠(竹内 善作),모리오카 사토루(森岡 悟),아카바 간케츠(赤羽巖穴), 요시카와 모리쿠니(吉川守圀)등이 있으며, 이밖에 대역사건에 휘말려 고도쿠와 함께 사형당한 오이시 세노스케(大石誠之助), 우치야마 구도(内山愚童)등도 잊을 수 없지만, 특히 『농민의 복음』의 저자 아카바 간케츠(赤羽巖穴)애 대해 살펴본다.
아카바 간케츠(赤羽巌穴)
아카바는 앞서 언급한 샌프란시스코의 무정부주이 단체인 복음회(福音會) 출신으로, 기독교적 평화주의를 통해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반드시 고도쿠파 라고는 할 수 없고, 특히 농민들 간의 선전활동을 중요시했다. 그가 농민운동에 뛰어들려했던 동기(動機)로, 아시오동산(足尾銅山)과의 투쟁으로 유명한 다나카 쇼조(田中正造)의 행동을 들 수 있지만, 한편으론 미국 체재(滯在)중 몸을 담았던 나로드니키와 사회혁명당의 농민중심주의운동도 역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도쿠도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동지들은 가능한 한 지방에서 직장을 구하고, 농민과 접속해 운동 하라, 고 말한 적이 있다.
『농민의 복음』은 말하자면 그가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선전의 무기로 쓰인 것이지만, 곧바로 발금(發禁)되고, 아카바 자신도 필화(筆禍)로 체포되어, 1912년 치바(千葉)감옥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던중, 아사(餓死)와 같은 형태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이 팜플렛 속에서,「연공(年貢)을 지불하지 않는 동맹」「전지(田地)를 빌리지 않은 동맹」을 만들어, 「토지도둑」인 지주에 대항하라, 고 농민들에게 호소했지만, 이것은 아마도 일본농민사에서 최초의 정돈된 사회주의적 발언일 것이다. 이점에서도 아카바는 기억될만한 인물일 것이다.
고도쿠라는 가장 유능한 혁명가를 빼앗긴 일본의 크로포트킨주의는, 이윽고 오스기 사카에(大杉栄)가 그 뒤를 잇게 되지만, 오스기는 크로포트킨주의를 넘어서, 아나르고샌디칼리즘이라는 제3의 기둥에 크로포트킨주의를 접목하려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직역(直譯)이 아닌 아나키즘이 일본에도 싹트기 시작했지만, 이것을 만약에 좌파(左派)크로포트킨주의라고 한다면, 이 같은 아나르고샌디칼리즘과의 결합에 반대하여, 어디까지나 크로포트킨주의의 기본선을 무너트리지 않으려 했던 우파(右派)크로포트킨주의 운동도 있었다.
우파(右派)크로포트킨주의
우파「순정아나키즘」이라고도 자칭하면서, 크로포트킨주의의 정통을 지니고 있다고 자임하지만, 실제로는 테러리즘의 유산인 약취(略取)주의가 가미(加味)된 것으로, 크로포트킨주의의 보수적인 점을 완전 그대로 이어받은 측면도 있다.
이 우파는 샌프란시스코 복음회의 지도자였던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郎)(복음회는 그의 귀국 후 자연 소멸했다.)와 목사출신인 핫타 슈조(八太舟三), 흑색청년연맹이라는 아나키즘단체를 다이쇼(大正)말기에 조직하고 지도한, 마에다 준이치(前田 淳一), 기쿠오카 쿠리(菊岡久利)등으로 대표되지만, 그 특징은 철저한 반마르크스주의로, 계급투쟁을 권력투쟁으로 이해하고 그 혁명적 의의를 인정하지 않으며, 조직활동은 권력을 동반한다는 이유로 이를 부정하고, 노동조합은 자본가와의 상거래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아나르고샌디칼리즘과 정면으로 대립하고 직접행동을 칭하면서 자주 폭력행위를 행사하게 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우파크로포트킨주의는 현존의 모든 혁명행위를 고발하고, 갖가지 불평을 쏟아냈지만, 그것에 대신하는 적극적인, 건설적인 이론과 운동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로 인해 민중들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는 유아독존격인 설교(說敎)주의나 단순한 뒷골목 수준의 정의파운동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커다란 힘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나키즘운동전체를 혼란에 빠트려, 내부붕괴로 이어지게 한 불행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스기사카에(大杉栄)
좌파(左派)크로포트킨주의 혹은 아나르고샌디칼리즘(이는 일본에서의 특수한 형태로 유럽에서는 이 양자를 동의어로 취급하는 경우는 드물다.)을 대표로 하는 것은 오스기 사카에다.
오스기는 가가와켄(香川県)마루가메시(丸亀市)출생으로, 아버지는 육군군인, 아버지의 임지관계로, 도쿄, 니하다(新發田)로 옮겨, 1899년, 나고야의 유년학교에 입학하지만, 동료와의 큰 싸움으로 퇴교당하고, 상경 후 잠시 외국어학교 불어과에 입학, 동년(1903년)창간된 『평민신문(平民新聞)』을 통해 사회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평민신문』이 발송일등을 돕기도 하면서, 그의 어학력을 높이 평가받아 외국신문잡지의 번역기사드을 『평민신문』해외사정란에 기고하기도 했지만, 그 무렵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종사할 결심은 서지 않았던듯하다.
그러나, 1906년 3월의 전차 소각사전은, 그를 좋든 싫든 사회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던 것 같다. 이 사건으로 그는 3개월간 이치가야(市ヶ谷)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옥중에서 에스페란토어 배우고, 보석출옥, 9월에 구로이타 카즈미(黑板勝美), 치후 토시오(千布利雄)등과 함께 일본에스페란토협회를 창립한다. 21살 무렵이었다. 이해 6월에 고도쿠 슈스이는 미국에서 귀국해, 귀국환영연설회에서 「세계혁명운동의 조류(潮流)」라는 제목으로, 그의 직접행동론을 처음으로 공표했지만, 오스기도 이 연설회에 참석했으며, 바로 공감(共感)했다.
오스기가 처음으로 사회주의사상과 접한 것은, 고도쿠의 『사회주의 신수(社會主義神髓)』를 통해서라 하지만, 그 후에도 고도쿠의 직계로서, 그로부터 가장 강한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고도쿠 역시 오스기를 아껴, 옥중의 그에게 바쿠닌전집을 보내기도 했다.
이 바쿠닌전집은 아마 프랑스어판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어판 바쿠닌전집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고, 독일어는 오스기가 아직 몰랐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오스기가 옥중에서 바쿠닌을 읽었다고 한다면, 그는, 고도쿠 이상으로 깊이 아나키즘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을 것이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도쿠는 주로 영어를 통해 아나키즘을 이해했지만, 영어에 의한 아나키즘문헌은 극히 적었으며, 행동적아나키즘의 주체가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등 라틴계였던 것은 잘 알려진 것이다.
따라서 오스기가 외국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다는 우연은, 그를 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론가로 만들어내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시가와 산시로(石川三四郎)도 프랑스어를 통해서 아나키즘사상의 이해를 깊이해 갔으며, 일본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사상이식의 역사와 프랑스어와는 상당히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역으로 일본에서 아나키즘 사상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기는 고도쿠의 직접행동론에 곧바로 공감하고,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07년 2월에 고도쿠가 『내 사상의 변화(余が思想の変化)』를 일간 『평민신문』에 발표했지만, 오스기는 그 바로 다음에 『구주사회당운동의 대세(欧州社会党運動の大勢』를 발표해, 고도쿠의 직접행동론이야말로 세계의 대세(大勢)라는 점을 확실히 하려 했다.
즉, 그는 이 논문에서 「요즘, 구주(歐洲)에서의 사회당운동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즉 이 非軍備主義(안티밀리터리즘)와 노동조합주의(샌디칼리즘) 이 두 가지라 단언할 수 있다.」고 하고, 그것이 유럽뿐아니라, 국제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처음으로 직접행동파로서의 자기의 입장을 확실히 했던 것이다.
이 무렵 그의 아나키즘사상의 이해와 그 깊이정도는, 이미 수령급인 고도쿠를 능가했다는 사상사가도 있지만, 그가 당시 특히 힘주어 연구한 비군비주의(非軍備主義)와 샌디칼리즘의 이해방법 등을 통해 보아도, 이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다.
비군비주의(非軍備主義), 즉 반군국주의(反軍國主義)는 평민사(平民社)이래의 전통이라 할 주장이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은 오스기의 그것과 『평민신문』당시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도쿠, 사카이 토시히코, 이시가와등이 러일전쟁에 반대해 외쳤던 비전론(非戰論)은 주로 인도주의적이며, 기독교적 평화주의 입장이었지만, 오스기는 이 반군국주의운동을 혁명운동의 중요한 한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예를 들면, 1908년 일간『평민신문』에 실린 그의 논문『非軍備主義運動』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비군비운동이 생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초기의 사회주의자, 혹은 무정부주의자」는 혁명의 수단으로서 바리케이트에 의한 시가전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도시의 도로가 넓어지고, 정부의 군대, 병기도 충실해 졌기 때문에, 이 같은 전술로 정부와 맞선다는 것은 생각지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군대는 때때로 노사분쟁에 개입해, 그 분쟁의 시비는 막론하고 항상 자본가 편을 들고, 노동자를 탄압하는 도구로 변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대를 구성하고 있는 병사는, 노동자들과 같은 계급출신이다. 그들을 움직여, 군복무를 거부하게 할 수만 있다면, 정부를 쓰러트리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비군비주의는 이 같은 혁명운동의 필요에서 생긴 것이다, 고 말했다.
이것이 오스기 논지의 요점이다. 이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이시가와 산시로의 『평화주의대관(平和主義大觀)』(1906년 1월 『新紀元』3호)과 비교하면, 같은 반군국주의라도 그 받아들이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도쿠에게서도 이 정도의 실제적으로 혁명운동과 연관 지을 수 있는 반군국주의론(反軍國主義論)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샌디칼리즘에 대해서도, 그는 노동조합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 하나는 혁명적인, 반정치적인 노동조합으로, 총동맹파업을 결정적인 무기로 삼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개량적, 노사협조적인 노동조합으로, 정치적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고 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고전적인 정의를 이미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도쿠도 이점을 인정하고, 샌디칼리즘에 대해서는 오스기나 야마가와 히토시(山川均)가 잘 연구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물어보면 대강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1907년, 요시카와 모리구니(吉川守圀)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고 있다.
이같이,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후의 오스기의 사상은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지만, 이와 함께 官憲의 압박 역시 극심해져, 1907년 5월 스가모(巣鴨)감옥에 들어간 이후, 1910년 11월 치바(千葉)감옥에서 출옥할 때까지, 신문지조령위반(新聞紙條令違反), 관리항거, 치안경찰위반등의 죄명으로 거의 3년2개월에 걸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감옥생활은 그에게 두 가지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 중 하나는, 옥중에서의 지나치다싶응ㄹ 정도의 독서,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때의 축적이, 그의 그 후의 운동에 그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추측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옥중에 있었기 때문에, 대역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정부가 옥중 사람들에게까지 이 사건에 끌어 들이려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리를 해서 억지로 끌어들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역사건이후, 일본의 사회운동은 일시 완전히 질식상태에 빠지고, 정부의 탄압은 효력을 보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기껏 2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다.
왜냐면 오스기등의 『근대사상(近代思想)』이 창간된 것이 1912년 10월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스기는 우선, 문예․사상잡지의 형식으로 정부로 부터의 탄압의 눈을 돌리려 했던 그 힌트는, 1891년에 프랑스에서 나온 『란돌(문외한)』이라는 아나키스틱한 문예지로 부터 얻은 듯하다. 이 잡지에는 미르보와 같은 문학자뿐만 아니라, 장그라브와 샤를마라트아 같은 당시의 대표적인 프랑스의 아나키스트도 관계하고 있었다 한다.
오스기는 이무렵 아나키즘을 사회적개인주의(社會的個人主義)라는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아나키즘을 공공연히 선전할 수 없었기에 나온 고육책이었겠지만, 그러나 이런 표현방법을 통해서 의외로 오스기의 아나키즘을 이해정도를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도쿠 슈스이는 나카에 초민의 흐름을 수용하는 유물론자였지만, 그의 유물론과 아나키즘과의 연결고리는 그만큼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오스기의 경우, 그의 철학은 그의 사회윤리와 상당히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오스기 철학은 그 무렵 유행했던 니체와 베르그송등의 생의 철학(生의 哲學)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았던 듯 하며, 다른 한편으론 프라그매틱(pragmatic:실용주의적)한 방법도 받아들였다. 그가 즐겨 사용했던 것은 본능(本能)이라든가 생명(生命), 자아(自我), 정신(情神)이라는 비합리적인 개념으로, 체계적인 이론과 주지적인 합리적인 판단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나는 정신을 좋아한다.(僕は精神が好きだ)」라는 그의 시 속에서, 그는 「나는 정신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정신이 이론화(理論化)되면 대개 싫어진다.」혹은「정신 그대로의 사상은 드물다. 정신그대로의 행위는 더더욱 드물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정신(精神)」은 오히려「생명」이라든가「본능」이라고 해석해야 하겠지만, 오스는 이 「생명」은 그 자체「확충(擴充)」하고,「충실(充實)」해 가는 힘(力)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거기서 힘은 활동으로 현상(現象)한다. 이 「생명」에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가 있지만, 좁은 의미의 「생명」은 「자아(自我)」라고, 그는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정복의 사실」이 「거의 그 절정에 달한」시기이다. 거기에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두 계급으로 나누어지고, 피정복자의 「생의확충(生의 擴充)」의 요구는 당연히 반역(叛逆)으로 나타나게 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반역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생활은, 참된「생명」「자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다.
「정신 그대로의 사상」「정신 그대로의 행동」이란, 따라서, 반역의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 반역이야말로, 그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한 개념인 것이다.
오스기는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인용하면서 「정복의 사실」을 설명하지만, 그러나「자아」「개성」의 「확충」「충실」의 입장에서, 정복에 대한 반역을 계급운동으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개인발의(個人發意)의 자유와 창조」를 기초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생의 창조』라는 논문에서, 마르크스파의 사회주의자는 「자각이 사회생활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이 자각을 만드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항상 이를 과장하고 있다.」 그것은 진실이긴 하지만, 동시에 「이 자각이 새로운 사회생활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고 논(論)하고,「이리하여 우리들은, 자아의 개인발의(個人發意)의 자유와 창조를 생각하고, 또한 여기에 개인및 사회의 진화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맺고 있다.
오스기가 그의 두 번째 논문집 『사회적개인주의』의 서문에서,「사회적개인주의란 각 개인의 개성의 다종다양(多種多樣)한 자유스런 발달이 사회조직의 첫 번째 조건이며, 사회진화의 첫 번째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적 학설이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이 같은 사상의 사회적 현상의 전형(典型)으로 샌디칼리즘을 예로 들고, 샌디칼리즘이 어떤 기성의 사회이론의 실천이 아니라, 노동자의 본능적인 반역의 운동이라는 점, 소수자의 자각에 바탕을 둔 선구적인 행동을 존중하고, 노동자의 자주적인, 자유스러운 발의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샌디칼리즘과 그의 철학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 경우, 아나키즘, 특히 크로포트킨주의와 샌디칼리즘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지만, 이에 대해 오스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완전히 과학적 방법에 의해 형성된 무정부주의와, 실제적 방법에 의해 형성된 샌디칼리즘이, 즉 개별적인 방법에 의해 획득된 각각의 사회적 진실이, 그 마지막 결론에 있어서 거의 합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샌디칼리스트)은, 무정부주의자와 일치해, 공산(共産)과 연합(聯合)과의 신제도(新制度)를 이상(理想)으로 한다.」
이와같이 그는 샌디칼리즘과 아나키즘을 이상으로 하는 목적의 일치라는 점으로 연관 짓고, 이론적인 설명은 아나키즘으로부터, 실천적긴 방법은 샌디칼리즘에서 찾으려하는 절충주의를 채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싱용주의적인 방법의 하나를 나타낸 것이다.
오스기에게는 「노동운동과 실용주의」라는 논문도 있고, 일찍부터 니체, 베르그송등의 생의철학과 함께, 퍼스, 제임즈등의 실용주의에 관심을 갖고, 공감했던 듯, 앞서 말한「실제적 방법」도「실용주의적인 방법」의 의미인 것이다.
그는 이 실용주의를, 자유발의(自由發意)의 자아확장(自我擴張)이론과 연관지어, 스티르너의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自我」사상을 발판으로, 모든 권위나 기성의 관념에 맹종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 실제 맞부딪힌 후에 비로소 올바른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고, 이것이야 말로 기성의 여러 가지 많은 지식을 배워 얻을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지 않는 노동자의 철학의 한 방법이며, 또한 노동운동이 한 방법이기도 하다 고 했다.
그는 그 같은 방법을 백지주의(白紙主義)라고도 했다. 백지주의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인생이나, 노동운동에서, 그것은「이미 정해진, 즉 확실히 만들어진 한권의 책이 아니다. 각 사람이 거기에 한 글자 한 글자 써가는 백지(白紙) 책」이다.
정말로 노동자들 앞에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견본(見本)이 몇 가지 등장했다. 아나키즘도 있고, 사회민주주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견본을 소중이 껴안고,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운동(運動) 한다면, 결국은 운동자들은 지도자라 칭하는 무리들에게 배반당하고, 이용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견본의 매입(買入)보다도, 그 견본의 자극 하에,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오스기는 일본의 노동자에게는 일본의 노동자로서의 갈 길이 있고, 수입사회주의에 만족하지 말고,「우리들 자신의 기질과 주위의 상황에 맞추어, 우리들의 현실을 높이도록 노력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들 상응(相應)의 관념과 이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고, 수입사상의 극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애용한 「신자(信者)와 같이 행동하면서, 회의자(懷疑者)와 같이 사색한다.」라는 슬로건은, 일본의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을 서구의 흉내가 아닌, 일본토착의 것으로 끌어 올리려 했던 그의 의욕의 결정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스기는 위와같이 아나키즘 내지는 샌디칼리즘을 이해하고, 이런 관점에서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평민신문』(1915년)『노동신문』(1918년)『노동운동』(1919년,1921년,1923년)의 발행이 그것인 것이다.
오스기의 노동운동
예를 들면 『평민신문』창간사라고도 할 수 있는 「노동자의 자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노동자다. 자기및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자각하는 노동자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과 이 지위를 개선해야 하는, 현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촉구하려는 반역적노동자이다. 우리들은 이 자각을 동료인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환기시키고자 한다. 진실로 그 자기와 그 사회적 지위를 자각시키고 싶어 한다.」고 하여, 그의 선전활동의 의도를 확실히 하고, 이어 「고용주는 우리들 생활의 협력자는 아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약탈자인 것이다.」고 단언하면서, 「그리하여 그들 약탈계급이 제조하여, 우리들 피약탈계급에서 무리하게 강요하는 모든 사회적, 정치적도덕의 이론과 감정을 내팽개치고, 인간 본래의 본능에 따라서, 우리자신의 기질에 따라서, 우리자신의 자각적 경험에 따라서, 우리자신의 개인적 세계를 건설함과 함께, 또한 그 사회적 실현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노동운동(勞動運動』(제1차) 창간호에 실린 「노동운동의 정신」에서도, 오스기는 노동운동이,「자금(資金)의 증가와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생산적 요구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며, 「그 이상으로, 좀 더 앞선, 어떤 인간적 요구를 지니고 있다.」고 하고, 「노동운동의 이런 인간적 요구를 찾아볼 수 없는 것에서는, 노동운동의 진정한 이해는 있을 수 없다.」고 고 했다.
그러면 이 「인간적 요구」란 무엇인가, 그것은「근대적 자의식」「자신이, 자신의 생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싶어 하」는 요구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못하다. 임금도 노동시간도, 고용도 경영도 시설도, 나아가 생산물의 처리도 모두 자본가의 뜻대로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자신의 생활을, 자신의 운명을, 거의 모두 자신이 지배하고 있지 못하다. 모든 것이 타인에게 맡겨져 있다. 타인의 뜻대로 자신의 생활과 운명이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자기획득운동, 자주자치생활획득운동이다. 인간운동이다. 인격운동이다.」고 오스기는 결론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노동운동을 계급투쟁으로 보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근대적인 개인주의와 연관지어,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것은 노동자가 자기생활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그는, 완전고용이라든가, 생활의 향상과 같은 「생물적 요구」의 충족으로 충분하다 생각하고 있는, 복지국가류의 사회주의자보다 훨씬 올바르게 노동자해방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기는 이 「자주자치적 생활획득」의 깃발을 치켜들고, 유아키이(友愛會)의 노사협조주의(勞使協調(主義)의 기만(欺瞞)을 파헤치고, 또한 총동맹속으로 파고 든 볼셰비키의 중앙집권주의(中央集權主義)의 야심을 공격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도 약점이 없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운동을 「인격운동이다」고 하여, 「무엇보다도 우선, 노동자 스스로가 성취하는, 철저한 자주심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고 하는 것처럼, 마음각오 문제, 생활태도 문제로 까지 넓혀, 거기에 중점을 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계몽적 방법에의 경사(傾斜)는, 그 첫 번째로 당시의 심각한 탄압을 피하기 위한 필요에서, 부득이 하게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노동운동이 아직 제대로 발전하지 않았고, 소수 투사의 운동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한, 오스기의 본능이라든가 생명, 정신이라는 것과 같은 비합리적이면서 애매한 개념에 바탕을 둔 실제적인 방법이, 노동운동을 「인격운동」화 하고, 사회경제적인 방침을 명확히 내세우지 못했다, 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사회에 대체할 새로운 사회체제(社會體制)에 대한 오스기의 고찰의 빈약함과도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연합주의, 경제적으로는 공산주의」라는 막연한 규정밖에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것들은 그때가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2차『노동운동』에「일본의 운명」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논문은 말하자면 오스기의 예언으로, 그는 제1차 대전 후의 동아시아의 정치정세를 분석하고, 러시아, 중국, 조선에 동맹이 맺어져, 일본은 이 동맹을 적으로 삼아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반드시 온다고 하고, 그 때는 「일본 그것의 분열이 온다.」고 예언하고 있다. 그가 예언한 상황은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 본다면 어쩌면 맞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올바른 정치정체를 파악하고 있으면서, 오스기는 그렇다면 우리들 일본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우리들의 태도는, “그 때”가 되어 정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앞서 말한, 언제든지 일어설 준비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밖에는 말하지 못하고, 그 준비의 내용에 대해서도 「노동자자신의 판단, 노동자자신의 상식을 키워야 하며, 그리고 그 상식을 구체화하는 노력을 얻기 위한, 충분한 단체적 조직을 가져야 한다.」라는 정도의 추상적인 발언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분열」을 1년 혹은 2년 후로 예상하고, 다카츠 마사미치(高津正道)등 볼셰비키와 협동으로, 그 준비를 목적으로 제2차 『노동운동』을 시작했지만, 「일본 그것의 분열」즉,「혁명」의 예상을 앞두고, 이 같은 희미한 지침밖에 제시 못했던 것은, 그의 새로운 사회체제에의 고찰의 빈약함 때문이며, 그 근원은 오스기류(流)로 이해되는 생의 철학및 실용주의의 직관적, 실제적방법과, 크로포트킨주의의 형식이론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바쿠닌으로부터 그 감성적인 반역의 정신뿐 만 아니라, 지배 권력과 정면으로 맞붙어, 이를 제대로 분석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행동의 강령을 명확히 내세우는 방법을 배웠다면, 더욱 유효하게 투쟁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약점들은 그의 경우, 그의 날카로운 직감과 강한 자아에 의해 충분히 커버되었지만, 그가 1923년 군부에 의해 살해당한 후, 그가 생애에 걸쳐 키워온 아나르고 샌디칼리즘의 약점으로서 크게 부각되게 된다.
그 단적인 예가 오스기의 심복이라고 할 와다 큐타로(和田久太郎)가 스스로의 입장을 버리고, 테러리즘으로 질주한 사건이며, 또한 오스기의 사후 샌디칼리즘계 노동운동이 한쪽에서는 볼셰비키의, 다른 한쪽에서는 순정아나키즘의 공격을 물리치지 못하고 쇠약해버린 것도, 그 약점이 이유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의 리버타리안니즘
이시가와 산시로(石川三四郎)
이시가와 산시로는 고도쿠 슈스이, 오스기 사카에 등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즘 사상가라 할 사람이지만, 그의 아나키즘은 고도쿠, 오스기의 그것과 상당히 달라, 소위 계몽적 아나키즘의 일본에서의 대표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 있어서는 근대아나키즘은 우선 급진적인 리버탈리안니즘의 발전으로 탄생해, 그 중의 한 분파가 사회주의와 연관되어 행동적 아나키즘으로 변형했지만, 일본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생략하고, 행동적 아나키즘이 이식되어, 급속하게 발전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국가권력의 강력한 지지하에서 지배체제를 공고히 했던 과정과 조응(照應)하는 것으로, 인민의 이익을 지킬 필요상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한편으론, 행동적 아나키즘을 탄생시킨 모체라 할 수 있는 일련의 사상을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던 약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가와의 작업은 기본적으로는 이 사상을 일본으로 이식해, 그것에 의해 눈앞의 투쟁에 요청되는 한편, 이제 막 발돋움 하려는 일본의 아나키즘운동을 안에서부터 보강하려는, 볼품없고 눈에 띄지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시가와는 고도쿠, 사카이등의 뒤를 이어 『요로즈초호(万朝報)』를 사퇴하고, 『평민신문』의 창간에 참가한, 일본 사회운동의 개척자중 한 사람이지만, 『평민신문』의 폐간후, 고도쿠, 사카이, 니시가와등의 유물론파와 갈라져, 기독교사회주의를 내 세운 『신기원(新紀元)』을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尙江), 아베 이소(安部磯雄)등과 함께 시작한다. 그가 다나카 쇼조와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시가와가 요로즈초호(萬朝報)이래의 동지이며, 선배였던 고도쿠, 사카이등과 갈라져서 『신기원(新紀元)』을 시작한 이유는 첫 번째로는 신앙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와 함께, 고도쿠, 사카이등의 정당운동에 대한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기원』에 실린 「사키이형에게 보내어 정당을 논한다.」라는 문장은, 당시의 이시가와가 생각한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정당을 사회개혁의 수단으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라고 단언하고, 그 이유로서,「정당의 세력은 당원의 머릿수와 통일에 있으며」「복종을 요하고,」「형식적으로 다수결로 정하는 것을 상례로 하」므로,「소재자(小才者), 속물(俗物), 통속, 분주함과, 아첨이 판치게 되고, 열성적이고, 진지한 인물은, 항상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상례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시가와는 「나는, 오늘의 일본은 여전이 전도(傳導)의 시대라는 것을 믿는다.」라 하고, 「전도의 생명은 전도자의 열성과 인격에 있으며」「자유를 필요로 하고」「따라서 전도자는 오히려 정당밖의 자유로운 천지에 있는 것이 낫다.」고 하고 있다.
이 반정당론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켜, 미국에서 막 돌아온 고도쿠 슈스이도, 그의 직접행동론 입장에서의 견해를 『신기원(新紀元)』에 발표하고 있다.
「정당이란 것이, 단순히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당파, 즉 선거에서의 승리만을 목적하는 자라면, 그 폐해가 자네가 말한 대로다.」고 의회정책파를 공격하고, 한편 「자네가 말하는 것처럼 정당이게 하는 것, 또는 혁명적이게 하는 것은, 첫째로 우리들 책임 하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무정당을 변호하고 있지만, 이 논쟁 속에 고도쿠와 이시가와의 생각의 차이를 찾아 볼 수 있다.
도한, 스가모(巣鴨)감옥에 투옥 중에 썼다, 발행금지가 된 그의 저서 『허무(虛無)의 영광(靈光)』의 1절에는, 더 확실하게 이시가와의 마르크스주의와 크로포트킨주의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마르크스의 혁사주의적혁명론도, 크로포트킨의 이상주의적 혁명론도, 모두 자유해방의 운동으로서는 일종의 공상이다. 역사과정에 따라 강권(强權)으로 사회정책을 실시 하더라도, 해방은 되지 않는다. 또한 단순히 폭력혁명에 의해 자유평등의 이상사회를 확립하려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이시가와의 마르크스와 크로포트킨에 대한 이해는 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종교적, 정신적인 쪽으로 깊이 경사(傾斜)된 마음의 소유자였던 이시가와에게는, 마르크스나 크로포트킨의 유물론은 아무래도 정붙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스가모의 옥중에서 그가 진심으로 감동해 읽은 것은, 카펜터의 『문명, 그 원인과 구치(救治)』와 『영국의 이상(理想)』이었다, 이들 서적은 「나의 수년간의 번민오뇌(煩悶懊惱)를 일도(一刀)하에 절개(切開)해 주었습니다.」고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
그 후, 이시가와는 중국동지의 도움을 받아 벨기에로 망명, 후에 프랑스로 옮겨, 전후 8년에 이르는 망명생활을 거친 후 1923년 귀국한다.
귀국 후, 이시가와는 「토민생활(土民生活)」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토민생활」이라 진짜 데모크라시라는 의미로, 카펜터의 시집 『데모크라시를 향해』에서 힌트를 얻어, 그 번역어로서 그가 만들어 낸 말이다. 풀어 말하면,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그것을 위해 이 사상을 농본주의(農本主義)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시가와 자신은 두가지 점에서 「토민생활」이 농본주의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로 농본주의는 농민에 대한 온정주의(溫情主義)에 지나지 않지만, 토민사상은 온정주의에 의해 속임을 당하지 않는 토착(土着)의 민(民), 정복자에게 마지막까지 반항하여 자신의 흙을 지키려는 반역자의 사상이다. 또한 토민(土民)은 흙(土)의 자식이지만, 반드시 농민에 한정하지 않고, 토착해 생산에 종사하고, 정치적 야심과 이기적인 이윤추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과 동포의 자유만을 바라는 민중 모두를 말하며, 농민이라도 정치와 돈벌이에만 열중인 무리는 토민(土民)이 아니다.
두 번째는 농본주의는 현재의 사회체제의 개혁없이, 그 주어진 범위 내에서 농본적자치(農本的自治)를 실시하려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토민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 토민은 우선 자본과 강권의 철조망을 없애버릴 것을 요구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섣부른 망동(妄動)을 자제하고, 뿌리 깊게 민중의 사상 속으로 파고들어, 서로간에 망상(網狀)조직을 세워, 서로 굳게 믿고 시기의 도래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은 그의 저서인 『근세토민철학(近世土民哲學)』 서문의 요지(要旨)이지만, 이들 기술(記述)속에 그가 구상했던 아나키즘사상의 아웃라인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토착주의는 중세의 연방주의(Federalism)사회를 연상케 하는 사상으로, 대개 농업과 가내공업, 직인층의 생산자를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현대산업의 중핵을 이루는 대공업 공장노동자에 대한 배려가 충분치 않은 점이 아쉽지만, 실은 거기에 이시가와의 아나키즘사상의 한계와 특징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는 자작농과 소상공업자등 이른바 부르조아계급 가운데 가장 많은 토민을 찾아내고, 인간을 이용하지 않고, 인간에게 이용당하지 이들 계층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것 같았다. 그가 만년에 이르기까지 프루동을 높게 평가하고, 특히 그 인민은행에 의한 사회개혁안에 흥미를 보였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시가와는 이러한 사상을 품고 프랑스에서 돌아와, 당시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던 샌디칼리즘계의 노동조합과 시모나카 야사브로(下中 弥三郎)등과 시작한 농민자치회등의 이론가로서 활약했지만, 이윽고 그 무렵 아직 도쿄의 교외에 있었던 치토세촌(千歳村)(현 세다야구 후나바시쵸)로 옮겨, 거기서 농경생활에 들어가,「토민생활」을 실천하려했다.
『디너믹』이 발행된 것도, 치토세촌으로 옮긴 후이다. 이 개인지의 이름은 그가 상당히 영향을 받았던 콩트의 『실증철학』에서 따온 것으로, 그는 『디너믹』을 사상 선전의 무기로, 미적아나키즘이라고도 할 토(흙)의 아들의 사상운동의 전개를 기도했다.
이 사상운동이 「토민생활」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은 물론이지만, 그와 함께 이 사상에 철학적인 뒷받침과 역사적인 전망을 부여하려하여, 그는 사회역학, 사회미학등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여기서 이시가와가 결코 사회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사회과학과 마르크스주의와는 동의어와 같이 해석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를 감정적이라 할 정도로 싫어했던 그는, 사회과학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사회역학, 사회미학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창했던 것이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할 때에 쓰던 무기는, 경제적결정론에 대한 생명적 창조론이었다. 그는 『역사철학서론(歷史哲學序論)』에서 유물변증법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물변증법은, 첫째로, 생명의 창조적 발전을 무시한다. 두 번째로 생명 특히 인생에 존재하는 환영착각(幻影錯覺)」의 중대한 작용을 무시한다. 세 번째로 생명의 가장중요한 점인 보수적 원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에 예를 든 생명의 3원칙이, 그의 생명관의 근본테제로 되어있다.
이시가와에 의하면, 생명은 대소 종류를 막론하고, 자기고유의 의식(이데아)(그는 이것을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있다.」을 실현 확충하기 위해 활동을 개시하는 힘, 염력(念力)(이데 홀스)을 가지고 있다. 생명은 자기고유의 의상(意想)을 실현하는 데에 가치를 느끼고, 그것을 위해 끝까지 투쟁한다. 여기에 자유의 요구가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생명이 빛나는 광명의 그늘에는 반드시 환영(幻影), 무명(無明)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이 환영이 인간사회에는 이루는 역할은 큰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현상(現象)은 생리적인 것과, 환영에 바탕을 둔 병리학적인 것으로 구별해 취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환영이 어째서 생겼 났는가하면, 그것은 생명 그것의 원칙이 보수에 있으며, 소위 진화현상은 자기의 개성을 보수(保守)하기 위해 환경이 적응한 결과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으며, 환경에 올바르게 적응하지 못하고, 개성에 집착했을 때 환영(幻影), 착각(錯覺)이 생긴다.
우주는 그에게 있어서는 끊임없이 자지자신을 표현하려하는 생명의 이데홀스가 엮어내는, 진실과 환영이 교차하는 일대종합드라마이며, 그것은 「천차만종의 형태로, 다원적으로 발전하며, 단순이 공간적으로 다취(多趣)할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변화무쌍한 행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유전(流轉)하는 우주만물의 일대 드라마 속에서, 우리들 인간의 생활은 어쩌면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느껴지는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허무감 역시 이시가와의 아나키즘의 한 특색이다.
그러나 그것은「인생의 객관」으로「인생의 실감(實感)」이 아니다. 우리들 생명은 스스로 표현하기를 원하며, 표현하는데에 즐거움과 만족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 즐거움과 만족은 공리적인 것도, 의무적인 것도 아니라, 바로 미적인 감동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이 무상(無償)의 즐거움, 만족을 구하는 미적감동이야말로, 모든 생명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미(美)야말로 우주의, 세계의, 그리고 인간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며, 기본원리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철학적인 설명에 너무 깊이 들어갔지만, 이시가와의 아나키즘의 본령(本領)은, 이 미적우주관 혹은 인생관이며, 사회원리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논의되어있지 않은 점이 아쉽다.
예를 들면, 이시가와는 사유재산과 계급제도의 성립을 그의 입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적불평등이 환영(幻影)으로 되어 인간을 현혹시킨다. 의식작용을 가진 인간을 혼란시켜 사회적불평등을 낳고, 그리고 정치를 낳는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연의 불평등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혼란이며, 환영(幻影)이다. 「따라서 만약 인간이 이런 죄악, 이런 미몽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이런 정치 그것으로부터 해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에 대해서도 같다.
「이 무렵, 자본주의라든가, 계급투쟁이라든가 하는 말이 유행한다. 그것들도, 필경은 사랑과 욕망과 갈등, 신과 악마와의 투쟁에서 생기며, 투쟁으로 끝나는 현상에 불과하다.」고 정리하고 있다.
이같이 그는 사회현상을 미의원리를 수단으로 해서 설명하고, 비판하려하지 않고, 항상 인간의 의식작용, 심리현상으로 바꾸어, 그의 애용하는 무기로 비판하는 수법을 써왔지만, 그의 사회원리의 약점이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사가와는 무정부주의의 실현방법으로 우선 모든 대중단체 속으로 들어가 아나키즘의 영향력을 키우고, 특히 대중의 자치능력을 높이려는 훈련에 노력하고, 청소년의 교육, 노장년의 계몽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여, 계몽적 아나키즘의 입장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는 시야를 넓혀, 지리적중점주의(地理的重點主義)를 외치고, 한 가지 예로 야마나시(山梨), 나가노(長野), 시즈오카(静岡),니가타(新潟)의 4현에 걸친 자유협동사회의 건설을, 상호은행의 설립을 통해 우선 실시하고, 이어 타지방으로 확대해가면 좋을 것이라고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목가적인 구상이 1947년 2․1 파업전후에 공개적으로 나왔다는 점에, 사회사상가로서의 이시가와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본령(本領)이었던 철학적인, 인생론적인 미와 생명에 관한 사상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분야에서 그가 일구어 낸 아이디어는, 지금부터의 사회이론, 아나키즘사상속으로 충분히 살려 가야 할 것 들이다.
이시가와에 대해서는 그 유미사관(唯美史觀)라고도 할 수 있는 독특한 역사관과, 80년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평화주의 등은 앞으로 더욱 연구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