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채에 옮긴 시
<부채시로 안부를 묻다>를 내리며
윤 정 구
붓글씨를 시작하고 10년쯤 되었을 때였다. 방산 선생님께서 붓글씨 부채를 보시고, 『문학과 창작』에 부채시를 연재하자고 하셨다. 2019년 여름호에 <붓글씨로 근황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최승범, 고창수, 강우식, 박제천, 김여정, 고정애 여섯 분의 시를 판본체, 궁체, 민체 등 각기 다른 글씨체로 쓰고, ‘설청의 아침’, ‘우물에서 잡아 올린 시의 봉황’, ‘사행시초의 힘’, ‘노장 사상과 서기(西技)의 습합’, ‘섬이 되는 인간’, ‘핵심을 찌르는 단검 승부’ 등 원고지 8장 정도로 몇 마디씩 덧붙였다.
지금 생각해도 약간 무리한 시도였는데, <6인전>으로 3년을 지속하고, 4인전으로 줄였다가, 『문학의 창』에서는 다시 절반으로 줄였다. 어쨋거나 7년 가까운 동안 98분의 시를 읽고 쓴 것은 따지고 보면 공부시키려는 방산 선생님의 지도에 힘입은 바 큰 것이 사실이다. 나도 열심히 찾아 읽으면서 가능하면 대표작으로 시의 핵심을 가려 소개하고자 애를 썼다.
애초에 붓글씨를 배우게 된 것은 중학교 때 국어와 문예반을 맡아 지도하셨던 박용식 선생님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같은 시골 중학교 음악 선생님과 결혼하신 선생님은 건국대학교 국문과에 재직하셨는데, 부족하나마 시를 쓰는 제자가 나온 것을 기특해하셔서 첫시집 『눈 속의 푸른 풀밭』의 발문을 써주시기도 하였다. 연초에 댁으로 세배를 가면 명사들의 붓글씨가 주욱 걸린 거실에서 큰절을 올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서예는 수양도 되고 깊은 맛이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시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바쁜 생활인으로서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셈인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서법이라는 게 만만치 않은 데다가 무엇보다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결국 내게 있어 서예는 시에게 우선권을 빼앗기고, 오히려 몰두를 경계 받게 되는, 어중간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100분의 부채시 고지를 코앞에 두고 채우지 못하고 하산하는 것, 순서가 가까이 되었는데 써드리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된 점 등 아쉬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쯤에서 모두 내려놓는다. 붓을 놓지는 않을 것이다. 남은 시간 나아가야 할 방향이 모색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김창희 시인의 「의자의 정석」과 이용하 시인의 「바닥론」은 명징하고 깔끔한 작품이어서, ‘시는 그 사람이다’라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두 분이 모범적으로 세상을 살아오신 분이어서 그런지 작품도 단정하고 정석에 가까운 정공법으로 시의 격을 높인다.
‘지나온 길들이 저마다 영롱한 빛이었다는 걸/ …깨달았나니/ 아이야/ 등나무 깊은 의자에 몸을 묻고/ 나란히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는 날/ 따로 또 같이/ 우리 숨 막힌 결정으로 깊어져 보자꾸나’로 끝낸 김창희 시인의 「의자의 정석」은 긴 여운을 남긴다. ‘내 한 생 걸어온 길은 늘 처음이었다’고, ‘나 아직도 처음의 길을 찾아가네’의 「길에서 문득」은 새롭다.
이용하 시인의 시집 「튜링의 상자」는 산문시에서 특별히 매혹적인 문체를 보여준다.
‘인간은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됐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언제 어디서나 물어야 하게 됐다 너는 진짜 인간인가?’
인공 사랑, 플라스틱 웃음. 급발진, 흉내인간, 화이트라이 등 새 시대의 흥미있는 제목들이다. 시인으로서 Ai 시대를 맞는 과학자에게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앞으로 전개될 예측불허의 변화 속에서 시인은 어디로 가야 하나?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하는 Ai의 빠른 발전을 지켜보노라면, 시인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대중으로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지면을 주고 응원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시인들에게 복음과 같은 위로를 주는 시로 인사를 대신한다. ‘나무 아래 앉기만 해도/ 그 사람은 시인이다/ 시를 안 써도 시인’이라는 ‘나무 아래 시인’으로 매듭짓고 싶다.
광야에 선 나무 한 그루
그 아래 앉은 사람
그는 시인이다
나무는 광야의 농부
그 사람은 광야의 시인
가지 뻗어 하늘의 소리 받들고
뿌리 내려 땅의 소리를 알아채는 나무
그런 나무 아래서 우주를 듣는
그런 사람
그 또한 시인이다
나무 아래 앉기만 해도
그 사람은 시인이다
시를 안 써도 시인이다
― 최명길의 「나무 아래 시인」 전문◑
1994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한 뼘이라는 적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