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인물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아주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인물을 만난다. 몇 줄뿐인데도 그 몇 줄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는 사람.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이 그렇다.
배경은 이렇다. 소돔에 살던 롯, 아브라함의 조카가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끌려갔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집에서 훈련된 사람 318명을 데리고 밤에 기습을 감행한다. 결과는 큰 승리였다. 롯을 구출하고, 빼앗겼던 재물과 사람들까지 되찾아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 사웨 골짜기, 흔히 왕의 골짜기라 불리는 곳(지금의 기드론 시내로 추정된다)에서 두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멜기세덱, 다른 한 사람은 소돔 왕. 승리 후의 짧은 정적 속에, 서로 다른 두 왕이 아브라함 앞에 나란히 서 있었던 셈이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히브리어로 엘 엘욘 — 모든 신들 위에 계신, 천지의 주재이신 그분의 제사장이었다. 동시에 살렘 왕이기도 했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옛 이름이다. 왕이면서 제사장. 흔치 않은 조합이다.
의의 왕, 평강의 왕
히브리서 7장 2절은 이 이름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멜기세덱, 말키(왕)와 체데크(의)가 합쳐진 이름. 그래서 의의 왕. 살렘은 샬롬과 같은 어근을 갖고 있다. 그래서 평강의 왕.
의와 평강. 이 두 단어가 한 사람 안에서 만난다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꽤 드문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 안다 — 의로움을 따지기 시작하면 평화는 깨지기 쉽다는 것을.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자리에는 보통 긴장이 남는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강은, 그저 마음을 편하게 먹는다고 오는 게 아니다. 이사야 59장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죄가 갈라놓은 것이다. 그러니 평강이 찾아오려면, 그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는 말,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회개가 삶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누려지려면, 죄의 대가인 죽음이 어디선가 치러져야 한다. 그래야 의가 세워지고, 구원의 길이 열린다.
바로 그 일을, 의의 왕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이루셨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장 25절)
그리고 살렘 왕과 관련된 구절.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장 1절)
시편 85편 10절은 이 장면을 노래로 옮겨놓았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의와 평강이 서로 입을 맞추는 자리. 그게 바로 십자가였다.
침묵이 말해주는 것
멜기세덱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이 그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브리서 7장 3절)
전통적으로 왕은 유다 지파에서,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서 나왔다. 그런데 왕이면서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어느 지파 사람인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성경은 철저히 침묵한다. 어떤 인물에 대해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이 침묵이 오히려 웅변적이라고 생각한다. 시작도 끝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왕이자 제사장.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신, 스스로 있는 자, 영원히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에 더없이 알맞은 침묵이다.
멜기세덱 자신이 구약 시대에 나타난 예수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의 강력한 예표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떡과 잔
여기에 또 하나, 이 이야기에서 조용히 지나칠 수 없는 장면이 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다는 것.
세월이 흘러,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도 떡과 잔이 있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고린도전서 11장 24-25절)
성찬식은 그저 예식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떡과 포도주를 실제로 먹고 마시는 몸의 행위를 통해 경험하는 시간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받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다른 무게가 있다.
아브라함은 그 은혜를 몸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다음 장면에서 드러난다.
소돔 왕의 제안
멜기세덱 옆에는 또 한 사람, 소돔 왕이 서 있었다. 소돔은 죄악의 상징이다. 그래서 나는 소돔 왕을, 이 세상의 신 노릇을 하는 존재의 그림자로 읽는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제안한다.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창세기 14장 21절)
언뜻 들으면 합리적이다. 아브라함이 목숨 걸고 싸워 되찾은 재물이니, 그 정도는 그의 몫이라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을 다르게 읽고 싶다.
"사람들의 영혼 문제는 나한테 넘기고, 재물은 네가 가져라." "영원의 문제는 나한테 맡기고, 너는 이 세상에서 부요하게 살아라."
아브라함은 거절한다. 신발 끈 하나도 받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왜였을까. 재물을 받는 게 뭐가 문제였을까.
문제는 재물의 액수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재물을 받는 순간 그의 삶에 하나의 이야기가 새겨진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브라함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소돔 왕이 말할 수 있게 되는 이야기. 아브라함은 자신의 부요함과 정체성의 근원이 소돔 왕이 아니라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흐릿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팔아 비트코인을 사라던 제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여러 번 faith mission으로, 그러니까 정해진 사례 없이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지하며 지낸 시절이 있었다. 궁핍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나는 단 한 번도 복권을 산 적이 없다. 가볍게 생각하면 별일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의 정체성을 그런 우연 위에 세우고 싶지 않았다. "복권이 되어서 문제가 풀렸다"는 간증을 하고 싶지 않았다.
12년, 13년쯤 전이었을까. 한 미국계 목사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동시에 아시아와 중동, 유럽 여러 지역의 비즈니스맨과 법률가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이끌고 있었다. 한두 시간쯤 함께 대화를 나눈 그가, 여러 번 간곡하게 나에게 말했다.
"모든 것을 다 파셔서 비트코인을 사셔야 합니다."
나는 사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설사 확신이 있었다 해도, 나는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으로 내 삶의 정체성을 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자리에서 내가 거절한 것은 사실 비트코인이 아니었다. 창세기 14장의 아브라함이 소돔 왕 앞에서 거절한 것이 재물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가 정말로 거절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어떤 물건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다. "이것이 너를 살렸다"고 말할 자격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게 내어주는 이야기.
지금도 나는 가끔 그날의 대화를 떠올린다. 그가 내민 제안은 매력적이었고, 논리적으로도 그럴듯했다. 그러나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삶을 설명하는 주어가 조용히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주어를 지키고 싶다.
첫댓글 아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