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장 맘대로 - 서성수
이런 메뉴를 파는 식당이 있을까? 주문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아니면 오히려 궁금증을 생기게 하는 선전효과를 볼 수 있을까?
속리산에서 1박 2일의 산행을 하는 종주 코스의 중간쯤에 피앗재라는 옛길 고개가 있다. 그 아래, 산꾼들 재워주고 밥해주려고 간판 내건 민박집 피앗재 산장이 있다. 가끔 식당인 줄 알고 밥해 달라는 사람들이 있으면, 보통은 식당이 아니라 당장 해줄 수는 없다고 한다. 특별히 산장을 다녀갔던 손님이나 아는 분이 부탁하면 식사를 준비해주기도 한다.
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아는 분의 소개를 받았는데 다음날 점심을 준비해달라는 문자를 받았다. 누군지 모르는 분이라, 갑자기 밥은 안 되고 차나 막걸리 한 잔은 대접해드릴 수 있다고 답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아는 분은 얼마 전 산장을 다녀간 보은에 같이 사는 송시인 부인인 구 선생님이고, 누군지 몰랐던 분은 옥천에 사는 김 시인이었다. 구 선생님이 먼저 전화를 했다면 그런 실례를 하지 않았을 텐데, 통화 순서가 바뀐 탓에 벌어진 사태였다. 뒤늦은 구 샘의 전화를 받고 나서, 송 형과 구 샘 부부와 같이 온다니 기꺼이 점심 대접하겠다고 다시 답장을 보냈다.
곧바로 답이 왔다. 메뉴가 무엇이 있나 물어보았다. 메뉴는 따로 없고 ‘주인장 맘대로’만 있다고 했더니, 그럼 ‘주인장 맘대로’ 4인분을 주문하겠다고 한다. 손님은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점심을 주문하였고, 주인은 주문을 받고 나서야 무엇을 준비할까 생각한다. 희한한 식당이고 그 손님에 그 주인이다. 자 그럼 어떤 메뉴가 나올까.
이 메뉴는 한 가지로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옻닭백숙이 되기도 하고, 다른 때는 돼지고기 솔잎가마솥찜이 되기도 한다. 주요리가 뭐가 되던 밑반찬은 같게 나온다. 홑잎나물이나 취나물, 참나물, 뽕잎나물 등등의 나물 한두 가지와 오가피, 두릅, 깻잎, 울외, 표고버섯, 고추 등등의 장아찌 몇 가지,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남도식 김치와 묵은지가 차려진다.
피앗재 산장 ‘주인장 맘대로’의 이번 메뉴는 자연산 버섯전골이다. 지나친 양념은 생략하고 좋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맵지도 짜지도 않은 싱거운 자연주의 요리다.
멸치와 다시마, 말린 표고버섯으로 육수를 낸다. 양파, 대파, 미나리, 양배추, 애호박에 당근까지 갖가지 채소는 손질해서 가지런히 채를 썰어둔다. 이 요리의 주인공은 지난해 가을 산에서 따서 염장해둔 자연산 버섯이다. 싸리버섯, 밤버섯, 솔버섯, 가지버섯, 밀버섯, 굽두덕이버섯에 운이 좋을 때면 능이도 들어갈 수 있다. 이런 것은 소금기를 우려내기 위해 이틀 전부터 미리 물에 담가 두어야 한다. 손질된 버섯은 알맞게 찢어 놓고 고기도 조금 넣어준다. 양념은 최소한으로 하고 버섯의 제 향을 살려주기 위해서는 국간장과 된장을 조금 넣어 간을 맞춘다.
전골냄비에 보기 좋게 담아내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센 불로 끓이면 어느새 버섯의 진한 향이 피어오른다. 냄비에서 끓어오르는 향이 예술이다. 향연이 따로 없다. 다른 음식점의 버섯전골과 비교하면 투박하고 밋밋하지만, 그 맛은 훨씬 진하고 순수하다. 양념으로 만든 맛이 아니라 재료에서 우러나는 자연의 맛이라 할 것이다. 이건 자화자찬이 아니라 손님의 인사를 그대로 옮긴 말이다.
버섯전골 안에서 자연이 우러나온다. 주인장의 마음이 배어난다. 요리는 상상력이다. 요리가 시가 된다. 내 시와 닮은 요리다. 같은 손에서 닮은 요리와 시가 나온다. 주인장 마음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