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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구의 이야기 소재
*두사충(모명재)
중국 두릉(杜陵)출신으로 시성 두보(杜甫)의 후손이기도 한 두사충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장군 이여송의 작전참모로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 라는 직책으로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그는 조선군과 긴밀한 작전회의를 했고 그 과정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매우 가까웠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1597)이 일어나자 진린(陳璘)도독의 비장으로 두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
두사충은1598년 정유재란이 끝나자 매부이기도 한 진린을 압록강까지 마중한 뒤 자신은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했다. 장차 명나라가 망할 것을 감지한 그는 귀화 후 대구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일대의 땅을 하사받아 살았는데 경상도 감영이 들어서자 계산동쪽으로 주거지를 옮기면서 그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어 길쌈을 했다.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두사충이었지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고향이 그리운 법, 고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崔頂山) 지금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에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모명재의 "모명"은 두사충의 호로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대문에 걸려있는 만동문(萬東門) 역시 백천유수필지동(白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것 또한 근본은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비문은 이순신장군의 7대손인 삼남수군통제사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왕래를 갖게 했음을 볼 수 있다. 모명재 주련에는 두번이나 조선을 위해 참전을 한 두사충에게 이순신장군이 감사의 마음을 전한 한시가 걸려있다.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北去同甘苦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같이 했고
東來共死生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 했네
城南他夜月 성곽 남쪽 타향의 달밤 아래에서
今日一盃情 오늘은 한 잔 술로 정을 나누세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다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 하였다.
모명재 뒷산 형제봉 기슭에 두사충의 묘소가 있다.
*수성못
대구 수성구 수성못 인근에는 매년 4월이면 추도식이 열리는 일본인 무덤이 있다. 수성구청장과 부산의 일본 총영사까지 참석한다. 무덤의 주인공은 미즈사키 린타로(水岐林太郞)로 수성못을 축조한 사람이다. 미즈사키는 1910년대 후반 개척농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대구에서 측량기사로 일하던 중 넓은 수성 들판에 홍수와 가뭄이 드는 것을 보고 저수지 만들기에 나선다. 1924년 9월 총독부의 지원에다 사재를 보태 1년여 만에 지금의 수성못을 축조했다. 39년 타계하면서도 수성못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다. 광복이 되자 유족은 고향인 일본의 기후현으로 돌아갔고 미즈사키의 묘는 수성못 옆에 남았다.
미즈사키와 대구의 인연은 서창교(71)씨에 의해 지속됐다. 수성못 축조 당시 농토를 기부했던 서씨의 부친이 미즈사키의 묘를 계속 돌보도록 아들에게 부탁한 것이다. 서씨는 7년 전쯤 지역 유지들과 미즈사키의 유족 등으로 한일친선교류회를 구성하고 묘를 관리해 왔다. 2000년부터는 수성구청에 요청해 4월 7일 추도식을 열고 있다. 이를 전해들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수성못을 찾고 있다.
일본과 인연이 깊은 관광지는 또 있다. 달성군 우록리의 ‘녹동서원’이다. 이곳에 있는 ‘한일우호관’에는 김충선 장군의 일대기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일본군의 복식 등이 전시되어 있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총사령관이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장수로 참전했다가 귀순했다. 그는 선조로부터 김씨 성을 받고 우록리에 정착했다. 녹동서원에는 그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매년 일본인 관광객 2000여 명이 찾는다.
중국과 인연이 깊은 관광지도 있다. 1912년 지어진 대구시 수성구 만촌2동의 재실 ‘모명재(慕明齋)’다. ‘모명’은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모명재 뒤에는 두사충의 묘가 있다. 그는 중국의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시인 두보의 21대손이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제독의 작전참모로 조선에 왔다. 그는 전쟁 후 돌아갔다가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에 왔고 이후 대구에 정착했다. 명나라가 망할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모명재 주변에는 그의 이야기가 담긴 올레길이 있다.
*고모령 전설:
대구시 수성구 고모역에 가기 위해서는 고개를 하나 넘어야하는데 그 고개의 이름이 고모령이다. 고모령은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에 고개 령(嶺) 자를 합친 말이다. 고모령에 얽힌 전설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옛날 옛적 고모령에 홀어머니와 어린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이 지나가다가 “이 집이 지금 가난한 것은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아서다”라는 말을 했다.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덕을 쌓기 위해 흙으로 산을 쌓게 되었는데 그 산봉우리가 현재의 모봉, 형봉, 제봉 이 세 개의 산봉우리이다. 그런데 덕을 쌓으며 우애도 쌓아야 할 남매가 서로 높이 쌓으려고 시샘하여 싸우는 모습에 실망한 어머니는 자식을 잘못 키웠단 죄스러움에 집을 나와 버렸다. 집 나온 어머니가 하염없이 걷던 길이 지금의 고모령 길이고, 고개 정상에서 집을 뒤돌아 본 것이 ‘어머니가 뒤돌아봤다’고 해서 고모령(顧母嶺)이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일제 강점기 때 징병 가는 젊은이들이 탄 열차가 고모령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증기기관차 성능으로는 높은 경사의 고모령을 한 번에 올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모령에서는 열차가 더디게 고개를 넘어야 했고 이 때 징병 가는 아들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모여든 어머니들로 그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가수 현인이 불렀던 ‘비 내리는 고모령’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고산골
신라 말엽 왕실에는 임금의 대를 이을 왕자가 없어 걱정이 컸다고 한다. 애가 탄 왕은 각지의 용한 의원을 모두 부르고 좋은 약을 다 썼지만 왕비의 몸에는 태기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서쪽으로 수 백리 되는 곳에 산 좋고 물 맑은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정성을 다하면 소원을 이룬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튿날 왕의 명을 받은 신하는 경주 서쪽 지방을 돌아다닌 지 보름 만에 다다른 곳이 이 곳 고산골이다.
앞뒤가 산으로 포근히 둘러싸여 사시사철 옥 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산세가 절 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왕은 곧 이 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고산사라 했다. 왕비는 이 절에 와서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곧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고 이듬해 또 왕자를 낳았다. 임금은 대단히 기뻐하여 전국의 죄수를 석방하고 큰 잔치를 여는 한편 고산사에 3층 석탑을 기념으로 세웠다.
그 뒤 고산사에는 자식 없는 부녀자들의 백일기도 행렬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 전설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고산골이란 이름은 고산사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형제봉 바위에 얽힌 이야기
옛날에 두 남매를 거느린 한 어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아주 가난하였습니다.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지나가면서,
"전생(前生)의 공적이 모자라서 가난을 벗지 못하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세 식구가 산을 하나씩 쌓기로 하였다. 해가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쌓은 뒤, 산 높이를 비교해 보았다. 오빠가 쌓은 산이 가장 낮았다. 그 까닭은 어머니와 딸은 치맛자락으로 흙을 날랐으나 아들(오빠)은 저고리 앞섶으로 날랐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본 아들(오빠)은 동생이 쌓은 산을 발로 뭉개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산봉우리가 뾰족한 산을 형봉(형봉), 밋밋한 산을 제봉(제봉)또는 매봉(매봉)이라고 하며 또 하나의 산을 모봉(모봉)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남매 사이에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는 두 남매를 집에 그냥 두고 떠나가다가 고개 마루에서 뒤를 돌아보았다.그래서 그 고개를 고모령(고모령)이라고 하여 동네 이름도 고모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1991년 10월에는 우리 고장 수성구 의회 개원 기념으로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를 망우 공원 안에 세웠다
*가찬우륵 남지장사 김충선
내환동(지금은 대흥동):내환동 꿩정마을에 얽힌 전설내환동 꿩정마을은 고산 2동에 속하는 마을이다. 옛날 시지동에 살던 부잣집에서 천을산에 묘를 쓰게 되었다. 그 부자가 묘터를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땅을 파다가 큰 바위가 나오더라도 그 바위를 뽑아 내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단단히 당부하였다.
일을 하던 일꾼들이 보니 정말 큰 바위가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일꾼들은 부자의 말을 잊어버리고 그 바위를 그만 뽑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위가 뽑힌 그 속에서 꿩 한 마리가 나오더니 멀리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후, 그 부잣집은 결국 망해 버렸고 그 꿩이 날아가 앉은 곳이 꿩정 마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꿩이 앉은 곳을 찾아 묘를 쓰면 부자가 된다고 하여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 묘를 많이 썼기 때문에 지금도 꿩정 마을 부근에는 산소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들안길(길, 먹거리골목, 시화거리)
대구지역 대표 맛집 거리인 수성구 들안길.
그 일원에 이상화와 박해수의 시(詩), 이인성의 그림 등을 감상할 수 있는 거리가 조성됐다.3일 수성구에 따르면 지난 3월부터 수성못 쪽 입구 장승과 솟대를 필두로 들안길(두산동 무학로 91~107)에 위치한 상가 담장(180m) 일원에 시화 및 그림으로 꾸민 ‘들안길 시화거리’ 조성을 최근 완료, 시민들에게 개방했다.들안길 시화거리는 지난해 4월 여성친화도시 조성을 위해 만든 ‘로즈서포터즈단’ 카페의 아이디어 제안 란에 수성구지역에 거주하는 박숙이 시인이 제안하면서 만들어졌다.
또 조규화·김삼조 수성구의원이 구정질문을 통해 공식 제안하면서 박해수 시인의 자문을 받아 수성구미술가협회의 재능기부를 통해 탄생했다. 상가 담장 180m 구간에 총 13곳의 코너가 마련된 시화거리에는 수성못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사진 갤러리’에서부터 전통 자수로 수를 놓은 도종환의 ‘담쟁이 시’, 김춘수·정호승 등 유명시인들의 ‘시 갤러리’, 대구를 대표하는 근대화가 이인성·이쾌대·박명조·정점식의 ‘그림 갤러리’, 화가 이중섭과 시인 구상, 대구 미문화원장을 지낸 맥타카트와의 스토리 등 색다른 볼거리들을 만날 수 있다.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상화와 들안길’, ‘바다에 누워’ 코너로 ‘상화와 들안길’에는 ‘비갠 아침’이라는 이상화의 시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배경인 들안길과 그림으로 만났다.
아울러 박해수 시인의 ‘바다에 누워’는 통영 앞바다를 배경으로 벤치를 실제 설치했다. 이밖에도 꼬마버스 ‘타요’, 교통경찰 ‘루키’ 캐릭터 코너도 마련됐다. 이진훈 수성구청장은 “시화거리가 생태복원사업으로 새 단장한 수성못과 들안길 외식업지구, 연말 완공 예정인 수성호텔 뒤 법이산 전망대 등 다양한 관광 인프라와 함께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을 것으로 기대 된다”고 말했다. 한편 수성구는 5일 시화거리 현장에서 수성구미술가협회, 시인, 들안길 번영회,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시화거리 준공 제막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범어
범어동(泛魚洞)은 1450년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역임한 구수종(具壽宗)이 정착하여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현재 천주교범어교회(天主敎泛魚敎會)가 있는 동산은 남북으로 길이 400m되는, 마치 한 마리의 고기 모양을 연상케 하는데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이 동산의 북쪽 끝은 범어 시장의 서쪽 끝과 접하고 있다.
이곳에서부터 남쪽으로 향하여 갈수록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높아지고 폭도 점차 넓어지다가 고기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남쪽 끝 부분에서 폭이 갑자기 좁아지고 급경사를 이루면서 범어천(泛魚川)에 머리를 맞대고 끝난다.
그 옛날 이 마을을 일구던 당시 이 산의 형세가 마치 붕어가 입을 벌리고 산 아래 흐르는 냇물(泛魚川)에 떠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며 이 마을의 이름을 "뜰 범((泛)"자와 "고기 어 (魚)" 자를 합하여 "범어(泛魚)"가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천주교범어교회가 있는 이 동산 기슭에는 아름다운 나무로 숲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붕어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남쪽 끓은 범어천(泛魚川)이 흘러와 닿으면서 동산의 서쪽 가장자리로 감들아 북쪽으로 흘러가고 있고
부근의 냇가를 따라 싱그러운 나무숲이 동산의 북쪽 끝까지 이어져 있어 아름다웠던 당시의 자연 경관을 연상케 한다.범어동(泛魚洞)에는 옛적부터 자연부락인 주일골, 관골, 장촌, 야시를, 밤자골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역(驛)이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범어역(液魚驛)이라고 하였다. 1914년 범어동(泛魚洞)이라고 명칭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38년 대구부가 확장되면서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범어(汎魚)라는 지명처럼 물 위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조형이 있다. 냇물에 고기가 떠있는 형성을 지녔다는 범어의 동명 유래처럼 물고기가 물살이 세고, 거친 용문에 뛰어 올라 용이 되어 승천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또 범어도서관이 무한한 지식의 바다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등용문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첫댓글 수성구의 이야기 소재를 찾아보았습니다.
더 새로운 소재나 삶의 이야기를 그려내 보셔요. ^^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읍니다. 많은 소재가 글 감이 되는데 공부 해 나가야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