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회 신학교 졸업하고 1월에 상남교회를 사임하고 울산중앙교회 전임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상남교회 교인들이 나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한 번도 당회를 운영해 보지도 않고 목사가 되어서 당회를 어떻게 인도하느냐 하는 걱정으로 부목사가 되어서 당회 운영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선배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울산 중앙교회 전임전도사로 온 것이다.
울산 중앙교회로 이사를 가는 날 중앙교회에 이사짐이 도착했는데 우리는 들어갈 사택이 없어서 교회 창고에 짐을 내리고 우리 가족은 이기우 집사님 댁으로 가서 사택이 준비되는 동안에 함께 살게 하였다. 얼마나 불편한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어서 설날이 왔는데 나는 고향으로 갈 수 없었다. 아내와 두 딸만 처가 댁으로 보내고 나는 혼자 남았다. 설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집이 없다. 집사님 댁으로 가자니 설날인데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교회에 머물다가 아침 식사는 식당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아침 식사하는 식당을 찾았지만 없었다. 그래서 설날 아침을 굶었다. 준비도 하지 않고 목회자를 이사 오라고 하는 것을 보고 일 처리 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였다.
울산 중앙교회 부임 당시 어버이 주일에 특송을 우리 가족이 하였다.
그 때 사진이다.
그리고 울산 중앙교회 어린이들을 데리고 야외 예배 나갔는데 그 곳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어느 날 길화와 명화 둘이 아무 이야기도 없이 집에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찾아봐도 없다. 우리 부부는 예쁜 두 딸을 잃었다고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온갖 불길한 생각을 다하며 찾았지만 못 찾아 속이 탄다. 나중에 나타났는데 둘이 뒷 복산동 산복도로가 있는데 콩크리트 관이 있는데 그 곳에서 놀았단다. 아주 우리는 혼이 나갔다.
그 당시는 장발이 유행이었다. 나도 장발을 하였다. 그런데 여름이 되어서 이발소에 갔다. 시원하게 좀 깍아 달라하고 나는 졸았다. 이발을 마치고 나니 머리카락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가발도 써 볼까 하다가 맞지 않아서 그대로 지냈는데 그 때 사진이 있다.
장발의 내 모습과 비교하면 머리카락이 너무 짧아 보인다.
이제 목사 안수를 받으면 다른 교회로 이동해야 한다. 이동할 교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이곳 저곳을 알아보는데 구영교회에 가 보라고 해서 갔었는데 자녀들 학교 다니기가 너무 멀어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대 구영교회에서는 오라고 하는데 아내는 반대한다. 아무리 어러워도 아무 곳에나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내가 구영교회 선을 보고 오던 날 아내가 1980년 3월 10일 가계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아빠 구영동 답사 가셨다가 오후 늦게 오시다. 모든게 너무 허술해서 가고픈 생각이 없다고, 아무리 신앙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맘에 안드니 어찌하겠나.
어제의 피곤으로 오늘 세탁도 못하고 아빠 목욕 가셨다가 휴일이라 못하고 대신 시장가서 쇠고기 사오심"이라고 적었다.
영천에 가서 영천읍교회에 찾아서 담임 목사님을 만났다.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시찰장이라고 해서 찾아가 임지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산 교회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는데 냇가에 자리하고 있어서 역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제 40일 철야기도를 하기로 하고 저녁 식사하고 교회에 가서 밤을 예배당에서 보내고 새벽예배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그 당시에 나는 가장 부러운 성직자가 있었다. 천주교 신부들이다. 신부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가정이 없이 혼자 생활하는 사람이니까 어디 간들 상관이 없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고 가정을 가졌으니 아무 곳이나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부를 부러워하였던 것이다. 철야 기도 시작한지 40일이 다 되어 가는 날인데 환상 같은 것이 보이면서 남쪽으로 임지가 날 것이라는 것이다. 집에 들어오니 아내도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는 남쪽으로 어느 곳일까 기대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이제 목사 안수 받을 날이왔다. 부산노회 110회 노회가 가야교회당에서 열리는데 그 당시 노회장은 김태동 목사님이시다. 나는 울산시찰 소속으로 울산중앙교회 부목사로 청빙을 받아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이 날 울산중앙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많이 와서 축하해 주었다.
이날 아내와 우리 딸 길화와 명화도 같이 와서 사진도 찍고 기뻐했었다.
목사 임직식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서 울산 중앙교회 주일 예배 때 처음으로 축도를 하라고 해서 했다. 그 때는 "축원하옵나이다."가 아니라 "있을 찌어다"라고 선포하는 축도였다. 그러다 총회에서 법을 바꾸어서 축도할 때 "축원하옵나이다."로 하게 되었다.
정말 어색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내가 이제 목사가 되었다"는 실감이 나는 것이었다.
울산 중앙교회에 왔을 때 중앙교회 권사님들이 딸 둘 뿐이라는 것을 알고 이제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대구에 큰 처남이 아들을 낳을 수 있는 확률이 높은 방법을 말씀해 주시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하였는데 해산 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6월 11일 아내의 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침에 이슬이 많이 비쳐서 이강현 서울 산부인과 병원에(울산 중앙교회 집사님이 경영하는 병원)갔다. 진찰하니 이강현 원장님 집사님께서 아기 나올 확률이 70%라고 하신다. 그래서집으로 다시 왔는데 진통이 너무 심해서 다시 병원으로 해산할 준비를 해서 갔다.
순산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라서 마취를 하고 해서 출산을 했는데 저녁 7시 41분이다.
감사합니다. 아들을 주셔서,.
안혜숙,우금희 집사님이 다녀가셨다고 기록하였다.
인창(仁昌)이라고 이름을 지은 분은 인창이 할아버지, 그리고 나의 아버지이시다.
어질고 창성하라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