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을 넘어 지배계급의 도덕을 심문하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기이한 사례>
[송승철의 '책'으로 보는 세상]
과학자 지킬이 추악한 살인자 하이드로 변신하는 내용,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당대사회의 도덕적 편협성에도 책임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들은 적 많아도 읽은 적 없는 게 고전이란 말이 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기이한 사례>(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 1886)야말로 읽어보지 않고도 내용을 안다고 착각하는 작품이 아닐까? 아마 원작을 직접 읽은 독자보다도 아동용 축약본으로 읽거나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된 공연물을 통해 작품을 접한 독자가 훨씬 많을 것이다.
어쩌면 작년 조승우가 역을 맡아 인기리에 공연된 뮤지컬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통해 처음 접한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1886년
1월에 출판된 이후 이 작품은 드라마, 영화, 오페라 등 대중장르로 끊임없이 각색되었다.
그러나 대중적 공연물 대다수는 원작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각색본이었다.
예를 들면, 작품에는 주요 배역을 맡은 여성인물이 없는데도,
뮤지컬을 보면 지킬의 약혼녀 애마가 주요인물로,
그리고 창녀 루씨까지 조연급 배역을 맡고 있다. 원작과 각색본을 비교할 때 같은 부분은 지킬과 하이드가 동일인이라는 점 정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각색과 변용은 원작의 대중문학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작품을 쓸 당시, 스티븐슨은
“파산 직전까지 몰린 상태”였기에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 (각색본에서 강조하는)
선과 악의 윤리적 갈등, 지킬과 하이드의 동일성, 끔찍한 살인사건,
일탈적 성적 관심 등을 작품 내로 도입했다.
게다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기이한 사례>는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추리형식을 도입했다.
오늘날 독자는 지킬과 하이드가 동일 인물임을 상식으로 알면서 작품이나 뮤지컬을 볼 것이다.
그런데,
당대 독자들은 지킬과 하이드 관계에 대해 계속 추리하며 읽다가 작품의 끝에 가서야 고매한 과학자와 추악한 살인자가 동일인이란 엽기적 사실에 깜짝 놀라기 마련이다.
작가는 지킬과 하이드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숨기고 독자에게 단서를 슬금슬금 흘리면서 독자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하다가 마지막에 극적 반전을 가져다 준다(심지어 책장을 덮고 난 후에도, 마지막에 지킬의 진술서를 쓴 사람이 지킬인지 하이드인지 독자들로 하여금 헷갈리게 플롯을 설정해 놓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독자들로 하여금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며 읽도록 하는 장치가 아주 뛰어나다.
그런데,
각색본이 대중의 인기를 끌었기 때문인지,
지킬을 순수한 과학자, 하이드는 악의 화신, 작품은 성적 억압을 다룬 멜로드라마 정도로 이해하는 독자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어본 독자라면 지킬이 하이드로 변신을 꿈꾸게 된 진짜 이유는 성적 욕망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남의 존경을 받고 살려는 “사회적 열망”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지킬은 나중에 약을 개발하여 하이드로 변신하여 욕망을 해결하고 표리부동한 이중인격자가 되지만, 개인 욕망의 솔직한 발현을 허용하지 않는 당대사회의 도덕적 편협성에도 책임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지킬박사는 의학 및 화학을 전공한 과학자이고,
자선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신문에 칼럼을 쓰는 성실한 기독교인이다.
말하자면 그는 상류사회의 지도적 이념인 전문성, 교양, 봉사, 신앙심 모두를 체현하고 있다. 이렇게 당대를 대표하는 도덕적 인물이 실제로는 하이드처럼 사악한 짓을 했다라고 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달리 말해 작가가 공포소설 장르를 채택한 것은 작가가 상업적 이익을 최대한 얻기 위한 전략이지만,
텍스트는 당대의 진지한 사회적 문제, 예를 들면 당대 지배계층의 위선, 성적 가부장적 억압, 인간 심리의 분열적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 19세기 과학의 문제점 등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 결과,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기이한 사례>는 이급의 공포소설 차원을 넘는 고전급의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사족: 이 작품은 추리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을 이해하려면 번역 상태가 아주 중요하다. 현재 30종 이상 출간되어 있지만 믿을 수 있는 번역본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결국 나 자신이 직접 번역해서 창비세계문학전집의 일부로 지난 달 출간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아직도 소소하게 고칠 곳이 여럿 보인다. 번역은 그 자체로 저주가 아닌가 싶다.)
강원희망신문 2013.11.20(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