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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 폭파 일지
-누가 명령을 내렸나?-
(자막) 6.25 전쟁은 남한 정부가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서 철저히 준비를 하지 못해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었다.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가 펄럭인다.
#1 경무대 영빈실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 고위급 장성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승만 : 미국에서는 북한의 정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미군 고위급 장성 : 아직은 북한은 정비가 안 되고 미숙하여 남침할 염려는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승만 :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다 미국 덕분입니다.
미군 고위급 장성 : 그러나 남침을 대비해서 철저히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1945. 10. 14. 평양광장
그 시각 평양에서는 소련군 환영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광장에 꽉 들어찬 인민들 손에 인공기가 들려 있다. 수많은 인파 앞에 단상이 마련되어 있고, 소련군 고위 군 간부들 옆에 김일성이 웃으며 거만하게 앉아 있다. 그 옆에 박헌영, 김책, 김원봉, 최용건 등이 앉아 있다. 단상 뒤에는 ‘김일성 장군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에 크게 걸려 있다.
(수런거리는 군중들).
A : 정말 김일성 맞아?
B : 그렇다네
C : 김일성 치고는 너무 젊지 않아?
A : 김일성 장군은 귀신도 잡는다는디
C : 그래도 너무 젊다. 가짜 김일성 아냐?
(김일성이 일제와 맞서 싸운 장군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김일성 장군이라 하기에는 너무 젊어 보인다. 그러나 김일성 장군이라고 하니까 의심을 하면서도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블리스키 : 김일성 장군을 소개합니다. 김일성 장군은 일제와 싸운 영웅입니다.
(김일성이 일어나 손을 흔들며 단상 앞으로 나간다.)
김일성 : 일제와 싸워 승리한 우리는 이제 위대한 인민의 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주역입니다. 이 나라는 양반과 상민도 없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없이 모두 잘살게 되는 천국이 될 겁니다.”
(일장 연설을 한다.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
#3 1948. 02. 08 평양 공설 운동장
‘축! 조선인민군을 창설’이라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육군 병력이 탱크부대를 앞세우고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총사령관 최용건, 부사령관 김책이 인사를 받고 있다. 탱크와 트럭에 로케트포가 실려 있다.
(자막) 북한정권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과 부사령관 김책은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총 병력 6만 명으로 된, 탱크 연대를 편성하였다.
#4 평양 대 운동장
인공기가 나풀거린다.
“축!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김일성 장군 만세”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김일성 단상으로 오른다)
김일성 : 오늘로서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부수상에 박헌영, 홍명희를, 국가 검열상에 김원봉을 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민족끼리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박수소리)
박헌영 : 김일성 장군 만세 (다 같이 따라 부른다)
#5 김일성 모스크바 행
(자막) 김일성 모스크바 행
1949. 03. 05. 김일성은 내각 수상이 되자,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로 달려간다. 기차 안에서 김일성이 창밖을 내다보며 손을 흔든다. 배웅하러 나온 군중들도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든다. 그는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스탈린의 의견을 타진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김일성 모습이 차창으로 보인다. 환송 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든다.
#6 소련 모스크바 호텔
김일성 박헌영이 스탈린과 소련 간부들과 회담한다.
스탈린이 거만하게 앉아 있다.
스탈린 : 꼭 전쟁을 해야만 되겠소?
김일성 : 전쟁을 하지 않으면 한반도는 영원히 둘로 나누어집니다.
박헌영 :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건 중국만이 아니고, 소련도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스탈린 : 알겠소. 생각해 봅시다.
#7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
(자막) 1949. 03. 17. 소련과 북한은 문화 및 경제 관계 조약과 비밀 군사원조 협정을 체결한다. 소련은 형의 위치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북한에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 부대, 8개의 국경수비 대대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 제공을 약속받았다. 다음날 18일 북한과 중국 공산당은 모스크바에서 조중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스탈린 :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 부대, 8개의 국경수비 대대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면 되겠소?
김일성 : 충분합니다. 언제 보내주실 겁니까?
스탈린 : 그렇게 급하오? 빠른 시일 안에 보내겠소. 꼭 성공해야 하오.
(체결에 사인을 하는 모습. 모스크바에 온 것은 성공적이었다고 얼굴에 웃음을 띠며 악수를 하는 김일성)
#8 정부 청사 앞
중앙청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것이 보인다.
(자막) 1949. 06. 30. 미국은 군사고문단 500여 명의 병력만 남기고 철수한다.
북한은 병력을 보강하는데 남한은 미군마저 철수를 하게 된 것이다. 오버랩 되면서 북한과 대조해 보인다.
#9 북한 공설 운동장
자막 : 1949년 7월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 사단과 제164 사단이 북한으로 들어가 각각 조선인민군 제6 사단과 제5 사단으로 개편되어 6.25 전쟁 직전에 제6 사단은 개성·옹진에 제5 사단은 양양에 배치하였다. (열병식하는 모습)
제15 사단 병력 1만 명은 1950년 4월에 중국에서 살다가 들어간 조선족으로 인민군 제12 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인민군에 편입된 조선족 병사들은 총 5만 명으로 추정된다. (플래카드와 각 사단 단기가 보인다.)
#10 소련 모스크바 호텔
1949. 08. 14. 스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와 김일성 마주 앉아 있다. 스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조속한 시일에 대남 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김일성 : 빨리 서둘러 주십시오.
스티코프 : 그럴 필요가 있소?
김일성 : 늦을수록 남쪽은 군비를 다 갖출 것입니다. 그러면 북남 통일은 요원해집니다.
스티코프 : 알겠소.
#11 소련 모스크바 호텔
1950. 01. 17.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38선을 돌파하겠다는 남침 계획을 건의한다.
스탈린 : 언제 거사할 거요?
김일성 : 도와만 주신다면 한 달 내로 남침할 겁니다..
스티코프 : 우리나라는 걱정 말고, 중국의 동의나 얻으시오.
#12 조선호텔
(자막) 1950. 01. 26. 한국은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을 체결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측 대표와 마주 앉아 사인을 하고 악수를 한다.)
#13 모스크바 중앙호텔
(자막) 1950. 02. 14. 중공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다. (중국과 소련의 깃발이 보인다. 체결 후 악수를 한다.)
#14 모스크바 중앙호텔
(자막) 1950. 04..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스탈린과 남침을 협의한다.
#15 크레믈린 궁
(자막) 1950. 05. 10.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허락한다.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허락하면서, 중국의 동의를 얻으라고 지시한다. 모택동은 5월 14일에 승인한다. (스타린과 김일성이 마주보고 앉아 있다.)
스탈린 : 계획을 말해보시오,
김일성 : 우리 인민 공화국 계획은 전쟁 개시 2일 만에 서울을 신속하게 점령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강 이남을 우회, 차단하여 남조선 주력 군대를 격멸한 다음, 남한 내 2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에 의한 인민 봉기를 유발하여 1개월 만에 전쟁을 끝내겠습니다.
스탈린 : 좋소. (스탈린이 만족한 듯 미소를 띠며, 박수를 친다.)
#16 북경 호텔
(자막) 김일성-모택동 회담
1950. 05. 13. 김일성과 박헌영은 북경으로 건너가 모택동의 동의를 받는다. 북한의 발의와 스탈린의 승인과, 중국의 참여로 남침을 위한 국제적 동맹을 맺는다.
모택동 : 거사일은 언제로 잡아소?
김일성 : 6월 말쯤 될 것입니다.
(김일성, 주은래, 박헌영 얼글이 클로스업 된다.)
(자막) 남침 일자를 확정1950. 05. 29. 북한은 8월 15일까지 서울에 통일. 인민정부 수립을 목표로 남침 작전계획을 완성한다. 1950. 06. 7. 북한은 남침 계획을 완성해 놓고 남한에 평화적 조국통일 호소문을 발표한다. (박헌영이 호소문을 읽는다.)
1950. 6. 16.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 스탈린의 최종 동의를 얻고, 남침 일자를 확정한다.
스탈린 : 동지만 믿겠소.
김일성 : 소련과 중국이 이렇게 도와주시는데 안 될 리 있겠습니까.
#17 38선 부근
1950. 06. 12. 북한군 전투부대가 38선 부근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38선 표지판이 보인다.
#18 경무대1950. 06. 19. 이승만 대통령돠 미국 CIA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CIA : 북한이 남침할 거라고 믿는 거요?
이승만 : 그럴 가는성은 낮습니다.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없다고 봅니다.
CIA : 첩보에 의하면 북한이 6월 남침 설이 떠돈다는데
이승만 : 나도 들었습니다. 소련과 중국이 도아주지 않으면 북한 혼자서는 남침을 못합니다.
CIA : 만일 도와준다면 거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게요..
#19 남침 전투 명령 1호 하달(자막) 1950. 06. 22. 북한은 각 사단장 앞으로 남침 전투명령 1호 하달한다.
#20 북한군은 전투 배치를 완료
(자막) 1950. 06. 23. 북한군은 전투 배치를 완료한다, 북한군 제1군단은 금천에, 2군단은 화천에 군단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예하 사단은 서부전선으로부터 제6, 1, 4, 3, 2, 12, 5사단 순으로 배치한다.(북한 군인들의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21 국방부
(지막) 비상경계를 해제
1950. 06. 24. 국방부는 비상경계를 해제한다.
몇몇 장군들이 모여 있다. 소련제 T-34 인민군 탱크부대 북한군이 38선으로 집결하는 등 이상 동향을 보고 받는다.
장도영 정보국장 : 소련제 T-34 인민군 탱크부대 북한군이 38선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 걱정할 것 없어
장도영 :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채병덕 : 걱정할 것 없대두
#22 육군 본부
1950. 06. 24.
장도영 : 인민군이 전면 남침을 계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채병덕 : 걱정할 것 없대두 그러네. 우리도 전방의 지휘관들의 인사 이동을 단행했으니 잘 될 거야.
장도영 : 인사이동이 더 혼란을 가중시킬 것 같습니다.
#23 (자막) 북한군 침공
1950. 06. 25. 새벽을 틈타 북한군 남침 개시. 북한군 침공을 지도로 화살표로 해서 보인다.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화천을 거쳐 동쪽의 주문진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야포와 박격포의 포격을 20∼40 분간 가한 후 보병으로 돌격한다. (총성이 울린다)
#24 (전투 장면)
1950. 06. 25.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 300여 명이 청도 운문산 지구로 침투하여 남하 하다가 우리 군에 의해 사살 된다.
#25 유엔 안보리 회의
1950. 60. 25. (유엔 회의의 모습이 보인다)
(자막) 유엔 안보리는 북한군에게 북한군은 즉각 전투 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수하라”
#26 옹진반도 전투
1950. 06. 25. 옹진반도 전투
북한군 전차 중대에 맞선 방어 전투에서 국군이 패배한다. (후퇴하는 모습이 보인다.)
#27 의정부 전투
1950. 06. 25. 의정부 전투
북한군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의 남침에 국군이 패배한다. (후퇴하는 모습이 보인다.)
#28 고랑포 전투
1950. 06. 25. 고랑포 전투
개성 지역에서 백선엽 사단장이 북한군 남침을 저지한다. (치열한 전투 장면)
#29 대한해협 해전
1950. 06. 25. 대한해협 해전
경비함인 백두산함이 북한의 대형 무장 수송선을 격침시킨다. (격침 장면)
#30 춘천 전투
1950. 06. 25. 춘천 전투
김종오 사단장이 북한군 남침을 저지하면서 지연시킨다. (치열한 전투 장면)
#31 1950. 06. 25. 옥계 전투
동해안에서 국군 경비함이 북한 상륙정과 수송선을 격퇴한다. (격퇴 장면)
#32 치안국 상황실
치안국 상황실이 부산하다. (긴박한 상황. 전화 걸고 받는 소리)
1950. 06. 25. 04시에 38도선 일대 경찰들은 남침 상황을 치안국 상황실로 신속하게 보고한다.
경찰관A : 지금 괴뢰군들이 38선을 넘어 수백 명이 장갑차를 몰고 넘어오고 있습니다
1950. 06. 25. 05시경
치안국장 : 내무부 장관실 대라
장관님, 전쟁이 터졌습니다. 38선을 넘어 북괴군 몇 개 사단이 장갑차를 앞 세우고 넘어오고 있습니다.
신성모 국방장관 : 우리군은 어떻게 하고 있나?
치안국장 :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33 전군 비상령을 하달
(자막) 1950. 06. 25. 06시에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은 전군 비상령을 하달하고 비상소집을 실시한다.
1950. 06. 25. 06시 30분에 내무부장관은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전투태세를 갖추라고 한다.
#34 육군본부
앞에 한반도 지도가 걸려 있다.
1950. 60. 25. 07시경에 채병덕 육군총장은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지도를 보면서 남침 상황을 보고한다.
채병덕 육군총장 : 북괴들은 지금 세 군데로 나누어 남침하고 있습니다.
#35 중앙방송국
1950. 06. 25. 07시에 국방부 보도과장이 (KBS)를 통해 북한의 남침을 보도한다.
1950. 06. 25. 08시경에 신성모 국방장관은 후방 3개 사단 출동과, 수도경비사 예하 3개 연대의 출동 대기를 명령한다.
#36 개성을 함락
(자막) 1950. 06. 25. 09시에 북한군은 개성을 함락한다. 개성 도로 표지 판이 보인다.
#37 미 국무장관에 보고
1950. 06. 25. 09시에 미 군사 고문단도 북한의 전면 남침을 확인하고, 무초 대사가 10시에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한다.(전화로 보고하는 모습이 보인다.)
#38 종로 경찰서
1950. 06. 25. 10시경에 종로 경찰서장이 대통령에게 남침상황을 최초 보고한다.
1950. 06. 25. 10시경에 국방장관은 수색에 주둔하고 있는 1사단 사령부와 의정부의 7사단 사령부를 방문한다.(1사단과, 7사단 정문이 보인다)
1950. 60 .25. 10시부터 북한 전투기들이 김포와 여의도 공군기지에 출현하는 모습이 보인다.
#39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 : (손원일 총장에게) “미국에서 구입한 군함(3척)을 끌고 빨리 귀국하시오”
#40 경무대
1950. 06. 25. 11시35 분에 무초대사는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전쟁 상황을 논의한다. (무초대사와 지도를 가리키며 의논한다. 국민에게 담화를 발표하라고 내무부 장관에게 지시한다.)
이승만 : 국방부 대변인은 담화를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침공 사실을 알리시오.
(1950. 06. 25. 12시에 국방부 대변인 국방부 담화를 발표한다. 침공 사실을 알린다.)
#41 야크 전투기 출현
1950. 06. 25. 12시경에 야크 전투기 4대가 서울 상공에 출현하여 용산역과 통신소 등 서울 시내 주요 시설에 기총소사를 한다.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간다.(투하하는 모습과 폭발하는 모습)
#42 정부청사
1950. 06. 25. 13시경에 이승만 대통령은 주미 한국대사관 장면 대사에 전화를 걸어 미국이 지원하도록 지시한다.
이승만 : 장면 대사, 지금 우리나라는 풍전등화 상태에 있소. 빨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을 만나 군사를 보내 달라고 하시오.
장면 : 알겠습니다. 유엔 대사와도 통화했습니다.
이승만 : 유엔 총회를 열어 이 문제를 다루게 하시오. 이건 분명 남침으로 38선을 그어놓은 소련과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오.
장면 : 유엔 사무총장도 만나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43. 경무대
1950. 06. 25. 15시에 무초 대사는 이승만과 회담 후 국무장관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이승만 :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장갑차 기관포 등 엄청난 무기를 지원 받고 있소, 이 전쟁에서 지면 한반도는 적화통일 될 거요. 0.5밀리 곡사포 90문, 60밀리 박격포 700문, 카빈 소총 40,000 정을 주시오
무초 대사 : 알겠습니다. 본국에 요청하겠습니다.
(이승만 직접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지원을 촉구한다. 전화거는 모습)
#44 야크기의 공습
1950. 06. 25. 17시경에 2대의 야크기가 김포비행장의 관제탑과 유류 저장 시설을 공격하여 큰 화재가 발생하고, 야크기와 공중전으로 미 공군 수송기 1대와 한국 공군기 1대가 손상을 입는다.(폭탄 투하하는 모습)
1950. 06. 25. 19시경에 6대의 북한 전투기들이 김포 비행장을 다시 공격하여 미 공군 수송기 1대를 파괴한다. (야크기가 공격하는 모습)
#45 육군본부
1950. 06. 25. 14시 경에 외출 외박 장병들 전원 부대로 복귀하라고 명령한다.
(라디오를 듣는 장병들이 보인다)
#46 육군본부 국무회의
1950. 06. 25. 14시에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 국방장관은 육군본부로 복귀하여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 참석한다. (상황이 급박하게 움직인다. 어수선한 모습)
#47 북한 무장 수송선을 격침
1950. 06. 25. 20시 30분 해군 1호 백두산함은 부산 북동쪽 54km 해상에서 북한군 특수부대 600여 명을 태우고 항해하던 1000 톤급 북한 무장 수송선을 격침시킨다.(격침 장면)
#48 (전화)
이승만 대통령이 1950. 06. 26. 03시에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로 지원을 요청한다.
#49 (전단 살포)
1950. 06. 26. 북한 전투기들이 용산 일대와 군 시설과 여의도 및 김포 비행장, 경무대, 중앙청 일대에 기총소사를 하며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을 살포한다. (전단이 바람에 날리면서 떨어진다)
#50 kbs 방송국
1950. 06. 26. 06시에 무초 대사가 방송하고, 08시에는 국방장관이 국군이 선전하고 있다는 요지로 방송한다.
#51 의정부를 함락
1950. 06 .26. 13시경 북한군은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함락하고, 서울 도심 진입을 시도한다.(도심 진입하는 전차들이 보인다)
#52 치안국 상황실
1950. 06. 26. 14시 경에 이승만은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을 방문하여 전황을 파악한다.
1950. 06. 26. 이승만은 맥아더에 도움을 요청하고, 미 대사 장면은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한다.
#53 조선중앙방송
1950. 06. 26. 김일성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여 조선인민유격대 임무를 지시한다.
#54 비상 국무회의실
1950. 06. 27. 02시에 국방장관이 서울 함락을 알리고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수도를 수원으로 옮길 것을 결정한다. (서로 다투는 소리)
#55 청량리에 적의 전차 진입
1950. 06. 27. 03시 경에 청량리에 적의 전차가 진입하는 것이 보인다.
경찰의 보고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를 출발한다.
1950. 06. 27. 03:30. 이승만이 기관차와 3등 객차 2량의 특별열차에 탑승하여 피신하는 모습이 보인다.
#56 유엔 안보리 회의장
1950. 06. 27. 유엔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 참전을 7대1로 결의한다.
#57 미국 국무회의실
1950. 06. 27. 07 미국은 해군과 공군 해병대에 출동 명령이 내린다.
#58 우이동~창동 일대에 방어선 붕괴
한편 의정부에서 철수한 제7사단과 증원부대인 제2사단은 우이동∼창동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이마저 27일 오전 10시쯤 무너진다. (퇴각하는 국군장병들)
#59 육군본부
신성모 국방장관은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에게 미아리와 회기동을 연결하는 선에서 ‘서울 사수’ 하라 명령했으나 무너지고 만다.
#60비상 국무회의실
27일 오전 1시에 소집된 비상 국무회의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 국군의 반격으로 전환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입니다. 걱정들 마십시오.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 : 지금 전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시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게요? 빨리 대통령을 모시고 수원으로 천도(遷都)해야 합니다.
국무위원A : 어떻게 150만 명의 서울 시민들을 놔두고 천도한다는 말입니까? 대통령이 선조 임금이랍니까?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 가지 않았습니까?
국무위원B : 150만 명의 서울 시민을 어떻게 하겠다는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61 Kbs 중앙방송
정부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경무대를 떠나 수원으로 피난길에 오른 지 3시간 뒤인 6월 27일 오전 6시 ‘수원 천도’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시민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사태가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수런거리는 시민들)
1950. 06 .27. 22시∼23시에 3 차례에 걸쳐 국민들에게 '미국의 지원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요지의 라디오 방송을 한다. (방송에 귀를 기울이는 시민들의 모습)
#62 서울 시내에 진입
북한군 전차의 미아리고개 진입
1950. 06. 28. 00:30∼01:00. 북한군 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 시내에 진입하고 서울을 점령한다. 미아리 고개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국군은 결국 28일 오전 1시쯤 북한군 전차의 미아리고개 진입을 허용함으로써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 무너졌다. (미아리 고개 넘어오는 북한 전차들)
#63 비상 국무회의실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정부를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새벽 4시) 한다.
#64 Kbs 중앙방송
6월 27일 오전 6시
김신자 아나운서 :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65 이승만 대통령 대전으로 떠남
6월 27일 전세가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수도 서울이 위협을 받게 되자 새벽 2시에 수원에서 대통령은 특별열차 편으로 대전으로 떠난다.
#66 충청남도지사 관저
김신자 아나운서가 방송할 때 대통령 이승만, 신성모 국방부 장관 등은 이미 수원에서 다시 대전으로 피난 간 뒤였다. 27일 저녁에 대전 충청남도지사 관저에서 제작된 이승만의 육성이 녹음된 방송이 KBS 제1라디오로 방송됐던 것은 밤 10시였다.
김신자 아나운서 :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십시오. 서울 시민들은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전일 이미 피신하여 충남 도지사 관저에 있었다.
#67 치열한 서울 시가전
군은 서울을 사수하기로 하고, 가용 전력을 창동 방어선에 집중시켰으나 붕괴된다.(시가전 모습)
#68 김신자 아나운서 방송
김신자 : 긴급 뉴스입니다. 오늘(6월27일) 오전 6시 정부와 각 군 본부를 시흥 및 수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경무대를 떠나 대전으로 피난길에 오른 지 3시간 뒤인 6월 27일 오전 6시 ‘수원 천도’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시민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사태가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피난길에 오른다. 이 서울 사수 방송을 믿고 피난을 떠나지 않은 서울 시민들은 다음날 한강 교량들이 폭파되어 발이 묶이고, 서울시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69 의정부 방어선 붕괴
한편 의정부에서 철수한 제7사단과 증원 부대인 제2사단 등은 우이동∼창동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이마저 무너진다.
#70 육군본부
탁자 위에 지도가 펼쳐져 있다.
채병덕 : 장관님, 서울 철수를 해야 합니다. 각 군 본부를 시흥 및 수원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신성모 : (아무 말이 없다가) 여러 위원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선부대의 철수 문제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어 의견이 분분하다.
#71 창동 방어선을 지키다가 지휘 체계가 무너진 부대는 부대장이 소대원들을 이끌고 자력으로 후퇴를 결정한다. (후퇴하는 모습)
#72 서울 사수 라디오 방송
6월 27일 20시 이승만은 대전에서 서울 사수하라는 라디오 방송을 3회 방송한다.
방송 : 동포여러분,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국군이 반격 중이니 도망가지 마십시오. 나, 이승만이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동요하지 마십시오.
#73 작전참모실
28일 오전 1시45
작전국장 강문봉(姜文奉) 대령 : 총참모장님 북한군 전차가 서울 진입했습니다.
채 참모총장 :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전방부대 지휘는 김백일 참모부장이 하시오.
(참모부장에게 맡긴 후 자신은 용산의 육군본부를 떠나 시흥으로 향했다.)
#74 공병감실
(공병감실에 채병덕 총참모장, 공병감 최창식 대령, 공병학교 교장 엄홍섭 중령 들이 모여 있다.)
채병덕 : 최창식 대령, 북한군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소. 절대 한강을 건너게 해서는 안 되오.
공병감 최창식 대령 : 준비하겠습니다.
공병학교 교장 엄중령 : 언제 폭파해야 합니까?
채병덕 : 북괴군이 넘어오기 직전에 해 되지 않겠나?
#75 육군공병학교
그 전날인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육군공병학교의 작업조는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27일 오후부터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공병감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76 용산 국군본부
6월 27일 23시 30분(미아리 방어선에서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 되었으나 미아리 고개 방어선이 무너지고 북한 전차부대가 돈암동으로 진입한다.
#77 육군본부 상황실
채 총참모장 : 적군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한강교 다리 폭파를 철저하게 하시오. 한강교 폭파는 절대로 실수란 있을 수 없소.
공병감 최창식 대령 : 알겠습니다.
#78 공병학교 임시 막사
6월 27일 새벽 3시 공병학교 임시 막사에 전화가 울린다.
#79 비상 국무회의 회의실
6월 27 새벽 4시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신성모(申性模) 국방부 장관. 공병감 최창식(崔昌植) 대령. 장경근(張暻根) 국방부차관·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가까이서 대포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신성모 : 이 사람인가?
엄중령 : 그렇습니다.
총참모장 : 자네 다리를 폭파한 경험이 있나?
이중위 : 아마 다이나마이트를 쓰는 것이므로 같을 겁니다. 어느 다리입니까?
최공병감 : 한강 다리이네. 자네는 어디서 배웠나?
이중위 : 일제 강점기에 격납고를 만드는 데 동원되어 배웠습니다.
엄중령 : 우리 학교 교관입니다.
국방장관: 좋아, 엄 중령이 책임지고 해야 하네. 임진강은 시간이 없어서 폭파 못했어. 미아교를 폭파해야 했었는데, 그것도 실패하고 말았지.
(포탄 소리는 더 가까이 들려온다. 미아리 고개가 뚫리고 북한군이 돈암동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80 노량진 공병학교 임시 막사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과, 이정규 중위가 임시 막사로 돌아온다. 거기에는 공병학교 부교장인 정희치 소령, 민승호 대위가 기다리고 있다.
엄중령 : 이번 일은 책임이 커. 격납고 굴을 뚫는 것과는 달라.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동시에 폭파해야 하네, 다이나마이트는 충분히 있는가?
정소령 : 아마 충분 할 겁니다.
엄중령 : 누가 계산하고 있는가?
황중위 : 제가 계산하고 있습니다.
엄중령 : 틀림없어야 하네. (공병감에게) 언제 폭파합니까?
최공병감 : 북한군이 건너오기 직전에 해야지 않겠나?
엄중령 : 지금 한강교는 피난민으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소령 : 잘못하면 수많은 인명이 다리와 함께 수장될 것입니다.
#81 한강교 아래
이 중위의 지시하에 수십 명의 공병학교 군인들이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82. 공병학교 임시 막사
6월 27일 12시∼15시 30분
엄중령 : (공병감에게) : 한강 인도교, 경부선 철교, 경인선 철교 폭파장치를 완료했습니다.
최공병감 : 채총장 전화 대봐
채총장 : 준비는 다 됐나?
최공병감 : 네 그런데 인도교는 수많은 피난민으로 꽉 차 있어 걱정입니다.
채총장 : 사람이 문제가 아니야. 지금은 전시야. 피난민을 생각하다가는 폭파 못해
최공병감 : (정 소령에게) 김백일 참모부장을 대봐
지금 형세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폭파를 해야 합니까?
참모부장 : 무슨 소리야. 국군의 주력부대가 다 강북에서 싸우고 있어.
#83 11시 긴급회의
(그때 채 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 사수를 포기하고, 육군본부의 서울 철수와 함께 한강 상의 교량을 폭파하기로 결정한다. 폭파 시기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2시간 뒤로 폭파하기로 했다.
채총장 : 뭣 하는 게야. 적군이 한강을 건너면 그때는 끝나는 거야
최공병감 : 국군의 주력부대가 아직 강북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때 육군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는다)
채총장 : 최 공병감 빨리 폭파하게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폭파를 명령한 후에 육군 본부가 있는 시흥으로 향한다.)
#84. 공병학교 임시 막사
엄중령 : 지금 폭파하면 피난민 수백 명이 죽습니다.
공병감 : 그러니 어쩌나? 위에서는 어서 폭파하라고 야단이니
엄중령 : 게다가 우리의 주력 부대가 강북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명령을 따라야 한다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인민군 제1군단이 김포·금촌, 미아리로 서울을 향해 각축을 벌이던 중 28일 01:00경부터 인민군 제4사단을 지원하던 전차가 돈암동 쪽으로 진입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와 함께 국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일부 부대가 철수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더 이상 조직적인 저항은 불가능하였다. 이는 서울 고수를 위한 최후 방어선의 붕괴를 의미한다.
#85 28일 01:45경 시흥 육군 본부
채 총장은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적 전차가 시내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보고 받는다.
채총장 : (공병감 최 대령에게) 지금 적 전차가 시내에 들어와 싸우고 있다. 즉시 한강에 가서 한강교를 폭파하라.
#86. 한강 인도교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다리를 건너려고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다
#87 시흥 육군 본부
채 총장 : 빨리 한강철교를 폭파해야 한다고 말한다.
#88. 27일 09:00 공병학교 임시 막사
공병감 (엄홍섭 중령에게) 폭파를 준비하시오.
엄중령 : 피난민들이 이렇게 많은데 꼭 지금 폭파해야 합니까?
최공병감 :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엄중령 : 알겠습니다. 최대한 인명 피해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 소령에게) 실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네
남한강파출소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황원회(黃元會) 중위와 이창복(李昌馥) 중위에게 폭파임무를 부여한다. 이들은 이날 15:30까지 한강 상의 5개 교량에 폭약설치를 완료하였다.
최 공병감은 총참모장으로부터 적의 서울시내 진입 2시간 전에 파괴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이때 상황으로는 27일 16:00를 폭파 예정시간으로 계획하여 준비 작업을 추진하였다.
#89 한강인도교
이 무렵 시흥으로 내려갔던 육군본부가 다시 용산으로 복귀함에 따라 폭파부대는 폭파장치를 일단 제거하여 차량과 열차의 통행에 지장이 없도록 조치하고 대기하고 있던 중, 전방상황의 악화로 27일 23:30경 재차 폭파준비 명령을 받는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제거한 폭약을 재장전해 둔다. (폭약을 설치하는 장면)
#90 용산 육군본부
한편 총참모장이 떠난 직후, 미아리 선에서 육군본부에 당도한 이응준 소장, 유재흥 준장, 이형근 준장 모두가 한강교 폭파 명령 하달 소식을 듣고 모여 있다.
이응준 소장 :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에게) 아직 일선 병력은 철수 명령이 없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병력이 철수한 후 폭파합시다.
(김 대령이 동의하여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에게) 교량 폭파를 중지하도록 하게.
#91 한강 인도교
장창국 대령은 즉시 지프차로 폭파 지휘소가 위치한 남한강 파출소로 향한다. 도로가 막혀 늦어지고 있다. 당시 26일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서울 시민들의 이동 금지명령을 하달하였으나, 그 명령은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강(江) 북단에는 폭주하는 인파와 차량으로 대혼란이 야기되고, 군의 차량과 장비는 피난민들에 의해 거의 완전히 차단된 상황이었다.
#92 오전 2시30분 공병학교 임시 막사
공병감 : 엄 중령 어떻게 하면 좋겠나?
엄중령 : 지금 폭파하면 시민들이 너무 많이 죽습니다. 최대한 늦춰야 합니다..
공병감 : 할 수 없지 않나. 우리는 군인이야. 명령을 따를 수밖에
공병감 : (한강으로 이동, 대기하고 있던 폭파조에 명령한다) 28일 오전 2시30분쯤 한강 인도교와 3개의 철교를 폭파하고 오전 4시쯤 광진교도 폭파하라.
#93 한강 인도교 철교 폭파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 인도교 철교는 무서운 굉음과 함께 하늘을 훤하게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난다.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한다. 대교 구간의 2, 3, 5 번째 경간이 폭파되어 사용 불능 상태가 되었다.
#94 희생된 사람들
종로서 경찰 77 명을 포함 최소 500, 최대 800 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폭사 하거나 익사하였다.(물속으로 떨어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여 준다.)
북쪽 두 번째 아치가 끊겼는데,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다. 그 많던 차량은 온 데 간 데 없고, 불길이 반짝거리며 타오르는데, 일대는 피바다를 이루고 있고, 그 위에 살점 등이 엉겨있다.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박박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다.
폭파 당시 한강 인도교 위에는 차량과 수많은 피난민이 엉켜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파 작전에도 불구하고 2 개의 철교는 완전히 폭파되지 않고 일부만 폭파됨으로써 며칠 뒤 북한군 전차의 도강을 허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성급하고도 무계획적인 결정이었다. 비록 적군이 가까이 온다고 해도 한강다리 앞에서 서울역까지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있었던 것이다. 중앙청 앞을 지나 용산 한강인도교에 이르는 동안 길 가득히 메운 차량대열(군·민)은 흡사 홍수였다. 뿐만 아니라 이 한강 인도교 폭파는 당시 수백만 서울시민을 아무 대책 없이 적 치하에 묶어놓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무려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적에게 피살되거나 북으로 납치당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참담한 비극이었다. 이외에, 한강대교 폭파 이전까지 임진강 철교 등 국군의 주요 교량 폭파 시도가 여러 이유로 모두 실패하여 공세 둔화에 실패하였던 이력과 한강 도하를 허용한다는 것의 상징성 때문에 지나치게 조급증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로써 서울 지역에 투입됐던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가 차단, 국군 주력 4만 4천명 이 뿔뿔이 흩어지는 엄청난 결과 초래했다. 차량 1,318 대를 비롯한 중장비와 공용화기들이 한강 이북에 유기되었다.
#95 1사단의 서울 방어
다리가 폭파되던 당시에 북한군 주력은 아직 서울 외곽에 있었다. 7사단 등 몇 사단은 북한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개성-문산의 경의선 축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던 제1사단처럼 서울 방어를 위해 투입된 많은 아군부대들이 한강 북쪽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또한 동부전선의 제6, 8사단과 옹진반도에서 퇴각한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7연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부대들이 이곳에 투입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96 5개의 교량
당시 한강에는 용산에서 노량진을 잇는 한강대교(인도교), 경부선(복선) 철교, 경인선 상하행선 철교, 광진교(인도교) 등 5개의 교량이 있었다. 한강교 폭파 당시 국군의 주력은 한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서울 시민에 대한 대책도 전혀 강구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강교가 폭파되면 한강 이북의 국군 주력과 서울 시민의 퇴로는 자동적으로 차단되게 돼 있었다.
미군사고문단 참모부장 월터 그린우드 대령은 작전국 고문이었던 조지 세드베리 소령으로부터 한국군이 한강교를 폭파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즉시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과 협의하여 서울에 있는 부대 보급품, 장비들이 도강을 완료할 때까지 폭파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미 폭파된 뒤였다.
그런데 이때 참모부장으로 명령을 받은공병감 최창식(崔昌植) 대령은 한강으로 이동, 대기하고 있던 폭파조에 명령해 28일 오전 2시30분쯤 한강 인도교와 3개의 철교를 폭파하고 오전 4시쯤 광진교도 폭파한 것이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바로 그 시각에 북한군 전차 2대가 창경원에 들어 왔을 뿐 아직도 그들의 주력은 미아리 북쪽에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아군 병력은 한강 이북에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파와 차량이 범벅이 되어 인도교를 향하여 밀어닥치고 있을 때에 폭파했다.
#97 강북에 남이 있던 국군들
특히 국군 장병들은 정말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한강교가 끊어졌다는 소식에 분노가 치솟았다. 사단장은 더 이상 전의를 상실한 장병들에게 사복으로 갈아입고 강을 건너서 안양에서 만나자고 했다. 장병들은 뗏목과 쪽배를 얻어 타고 도강했다.
#98 주력부대의 철수
중랑교 부근을 방어하던 8연대 2대대는 한강교가 폭파된 상황에서도 비교적 건재를 유지한 상태에서 광나루 부근에서 한강을 도하해 철수했다. 역시 미아리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며 고군분투했던 20연대 1대대도 부대 통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광나루를 통해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미아리 고개 서쪽에 배치돼 있던 15연대 2대대도 광나루를 통해 비교적 많은 병력이 한강 남쪽으로 이동했다.
#99 국군 1연대
하지만 이미 북한군 전차가 서울에 침입한 상태에서 모든 국군 부대가 이렇게 조직적으로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두천 북방에서 북한 4사단을 상대로 성공적인 지연전을 펼치고 동두천 역습의 선봉에 섰던 국군 1연대는 서울 성북경찰서 부근에서부터 병력이 분산된 상태에서 철수하게 됐다.
#100 후퇴하는 각 부대들
국군 1연대 3연대 3대대도 안국동 풍문여고를 거쳐 경복궁 앞 중앙청에까지는 조직적으로 이동했지만 그 이후에는 사실상 각개 분산으로 철수했다. 25연대도 사정이 비슷했다. 이렇게 철수한 부대들 중 일부는 북악산을 통해, 일부는 서울 시내를 통해 마포에 도달한 후 한강에서 운행하던 나룻배 수준의 민간 소형 선박을 이용해 한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포천-의정부 일대에서 방어전에 참전했던 9연대 1대대와, 5연대 2대대, 16연대 일부 병력과 육군사관학교 요원들은 광진교를 통해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101 1사단의 철수
하지만 28일 새벽 4시 무렵 국군 공병에 의해 광진교마저 폭파됨에 따라 나머지 후퇴 병력은 나룻배를 이용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마포와 하중리ㆍ광나루 나루터, 한남동과 서빙고 도선장 등 소형 선박을 입수할 수 있는 곳마다 국군 병력과 민간인이 몰려들어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대형 선박은 없었으므로 야포와 중ㆍ대형 차량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민간 복장을 하고 침투한 북한 편의대 등이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철수 작전을 방해해 더욱 어려움이 가중됐다. 하지만, 그 어느 부대보다 위험 상황에 내몰린 부대는 문산-봉일천 방면에서 선전 분투하고 있던 국군 1사단이었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1사단은 포천-의정부-미아리-서울 축선이 무참하게 붕괴되던 그 순간에도 여전히 봉일천과 고양 일대에서 북한군 1사단을 상대로 비교적 성공적인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다.
#102 국군 1사단의 계획
한강교가 폭파되는 그 순간에도 국군 1사단은 단순히 방어전을 펼치는 정도가 아니라 역습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11연대와 13연대로 역습해 문산천 남안의 고지군을 회복하겠다는 것이 1사단의 계획이었다. 한강교가 폭파되고 미아리 방면 각 부대가 필사의 탈출 작전을 감행할 때까지도 1사단은 이 같은 상황을 제대로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27일 전선 상황을 시찰하러 왔던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장군이 중서부전선이 위기 상황이라며 1사단의 철수를 이미 권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육군본부의 정식 명령이 없는 한 임의로 철수할 수 없다는 것이 1사단 지휘부의 판단이었다.
1사단은 28일 오전 8시 계획대로 대대적인 역습을 개시했다. 북한군도 강하게 맞서 전선 상황이 고착된 가운데 사단에 속속 비보가 전해졌다. 1사단 부상자들을 태우고 서울 외곽 현재의 녹번동 방면으로 진입한 아군 차량이 북한군 전차와 마주쳤다는 소식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더구나 행주에서 한강 건너편인 김포비행장에서까지 총포성이 울려오자 1사단 장병들은 더욱 긴장했다. 잘못하다간 사단 전체가 적의 포위망 속에 들어갈 염려마저 있었다. 서부전선과 중서부전선을 통틀어 가장 선전했던 1사단도 결국 눈물을 머금고 전면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103 목재를 모아 급조된 도하 장비
(목재로 급조된 도하 장비로 행주와 이산포 두 곳에서 도하하는 모습이 보인다.)
도하 장소는 행주와 이산포 두 곳으로 결정됐다. 도하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지만 묘안을 짜낸 것은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공병으로 근무했던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은 병력들을 지휘, 강변에서 목재를 모아 급조 도하장비를 만들어 냈다.
급하게 만들어 낸 장비였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지프까지 실을 수 있는 제법 그럴듯한 뗏목 형태의 선박이었다. 이런 급조 도하장비에 힘입어 적이 추격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사단은 철수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중장비와 대규모 인원 손실을 피할 수는 없었다.
#104 18연대의 철수
이처럼 한강 이북에 잔류한 각 부대의 철수 작전은 처절했다.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18연대 주력 부대의 철수 작전은 특히 처절했다. 18연대 주력은 26일 아침부터 동두천 역습 작전에 참가한 부대였다. 의정부에서 동두천으로 북상한 18연대는 26일 오후 포천을 거쳐 의정부로 들어온 북한군 때문에 퇴로가 차단당했다.
#105 국군 7사단 사령부 연병장에 모여 있는 적군들
(국군 7사단 사령부 연병장에 모여 있는 적군 들이 보인다)
장병A : 저게 누구들이야
장병B : 우리 국군은 아닐 테고
장병C : 혹시 미군들이 아닐까?
장병D : 야, 저게 미군으로 보이냐?
18연대 장병들은 6월 27일 오전 의정부 시가 서쪽까지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이 산 위에서 목격한 것은 국군 7사단 사령부 연병장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차가 가득한 광경이었다. 후방에 적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던 18연대 장병들은 혹시 미군이 참전을 결정해 전차가 지원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106 척후 장교의 보고
척후장교 : (7사단 사단장에게) 전차는 적군 것이고, 아군은 이미 서울로 철수한 것 같습니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7사단 사령부로 정찰을 나갔던 척후장교는 27일 오후에야 18연대 지휘부로 복귀해 “전차는 적군 것이고, 아군은 이미 서울로 철수한 것 같다”는 청천벽력 같은 보고를 했다.
#107 18 연대의 퇴로
북쪽, 남쪽, 동쪽에 모두 적이 있는 상황에서 18연대 주력이 선택한 길은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18연대는 북한산-도봉산 북쪽 기슭을 따라 고양 쪽으로 철수하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철수 작전마저 쉽지 않았다. (철수하는 장병들의 모습)
18연대가 북한산 서쪽 기슭을 통과해 구파발 인근에 도달했을 때쯤에는 이미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18연대의 철수 경로 앞으로 사이드카를 탄 북한 정찰부대가 지나가고, 북한 T-34 전차가 부대 행군로 인근을 통과하고 있었다.)
#108 8연대의 철수 작전
포위 상태에 빠진 18연대는 이미 식량 공급이 끊기고 육군본부 등 상급부대와 연락도 두절됐지만 의연하게 부대 건재를 유지했다. 그리고 행주에서 도하해 탈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의연하게 철수 작전을 감행했다. 18연대 주력이 행주 나루터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28일 오후 3시가 넘어선 순간이었다.
당시 18연대 소속이었던 이병형 대위가 행주 나루터에 도착한 시간은 28일 오후 5시, 한강교가 폭파된 지 이미 12시간이 훌쩍 넘어선 후였다. 북한군이 산발적인 사격으로 도하작전을 방해했지만 18연대는 기어코 한강을 도하해 김포 방면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도하하는 모습, 북괴의 기관총 소리가 들린다)
18연대 주력 병력은 26일 정오 무렵부터 48 시간 이상 사실상 적 후방에 고립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두천-의정부-북한산-구파발-행주나루로 이어지는 기나긴 우회로를 거쳐 아군 지역으로 탈출하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109 일반인들 부교 이용
(한강은 인도교 근처에 설치된 부교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느라고 피난민들로 아수라장이다.)
#110 서울 시내 - 적 치하에서 3개월
전쟁 발발 만 3일도 채 안된 상황에서 적에게 수도를 내주고 한강교를 폭파한 사건은 후퇴하지 못한 국군 주력부대의 붕괴와 함께 150만 명의 서울 시민이 적 치하에서 3개월을 신음하게 만든다. (적 치하의 공산당들이 서울 시민을 총살하는 모습)
#111 한강교가 폭파되자 국군은 야포·박격포·차량 등 주요 장비를 폐기하고 소총만 휴대한 채 나룻배를 이용, 소부대 단위로 도하하게 됐다. (버려둔 장비들이 보인다.)
#112 서울에 고립된 민간인의 '부역자' 처벌 논란
서울 수복 이후, 서울에 고립되어서 북한군의 노역에 동원된 시민들을 '부역자' 혐의로 처벌하면서 이 사건과 맞물려 큰 논란을 일으켰다.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의 상당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허위 방송을 믿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한강대교의 폭파로 도망가지 못하고 서울에 고립(당시 서울시 인구는 약 150만 명이었고, 피난간 사람들은 극소수였을 뿐. 대다수의 서울시민들은 피난가지 못한 채 '잔류파'가 되었다) 되었는데, 서울 수복 후 이승만 정권은 서울에 잔류한 모든 시민들이 '빨갱이'라서 서울에 남아 북한군을 환영하고 친북 활동을 벌였다며 처벌하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당시 북한군에게 협조한 사람 중 남한 경찰이나 군대, 정부에 연줄이 있던 사람은 후일 서울이 탈환되었을 때 부역자 혐의에서 쏙 빠졌다.
#113 끌려다니는 부역자들
이때 잔류파는 곧 부역자로 간주되었는데, 한국 정부는 군대와 검찰과 경찰이 합동으로 조사를 벌여 10월 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총 555,915 명을 부역자로 검거하였다. 그들 중 867 명이 사형을 당했고, 나머지는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너무 지나친 조치라는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1951년 3월 무렵에 석방되었다.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04년 발간/ 117쪽) 심지어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것 때문에 잔류파로 몰린 검사 정희택은 이렇게 울분을 토로했다. “1개 사단 규모의 전향자들을 책임지고 있는 정보 검사에게까지도, 그것도 최후의 순간에 전화 문의까지 했는데도 거짓말을 하고 저희들만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배신과 기만으로 애국시민들을 내버리고 도망친 자들인데 무슨 염치로 잔류파를 재판한다고 하는 겁니까?”
#114 종로 경철서 안
시민 A ; 서울을 사수한다고 해 놓고 자기네만 살자고 도망을 가
시민 B : 그러면서 우리를 빨갱이로 몰아?
시민 C : 이런 개 같은 나라가 어디 있어
#115 6월 28일 오전 10시 교량이 폭파된 지 7시간 반이 지난 후 (인민군 전차 한강대교 북단 출현한다.)
#116 대동강 다리 폭파
북한의 경우 10월 국군이 평양에 입성할 때 백선엽의 1사단이 대동강 입구에 당도한 시점에서 다리를 끊었다. (한강철교와 대조되어 보여 준다)
#117 서울대병원
. 1950. 06. 28. 서울대병원 집단 학살, 북한군이 국군 환자, 부상병, 애국지사 등 약 1천 명 학살한다.
북괴군 A : 이 간나 새끼들 반동분자들이야
북괴군 B : 그래도 다 죽이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학살하는 장면)
#118 군사 재판
거짓 방송으로 군대와 시민들의 피난 기회를 원천 차단하고 다리를 폭파함으로써, 참담한 비극을 불러온 정부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행태를 질타한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부랴부랴 군사재판을 연다. 그리고 기념 묘비석 설치와 진혼제 추진을 제안하고 분향과 자유발언, 음복으로 마무리되었다. 같은 시각 노들섬 위에서는 ‘육탄용사호국정신선양회’라는 단체 주최로 빨간 조끼를 입은 30여 명이 제2회 ‘민.관.군 합동 추모 위령제’를 지낸다.
#119. 군사 재판소 안
재판장 : 폭파의 적절한 시기에 폭파했는가?
A 증언 : 일단 폭파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강대교 폭파 자체는 전략적으로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한강철교의 폭파가 불완전했고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공세 재개까지 3일 여의 휴지기를 가짐으로써 효과가 반감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인도교 폭파가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이루어짐으로 폭파 당시에도 서울 이북에서 여전히 전투 중인 국군 부대가 건너오지도 못한 상황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재판장 : 병력 상실은 없었나?
B증언 : 방어부대의 전투의지의 상실을 가져 왔습니다. 폭파 소식이 그렇게 신속히 전파되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실제 당시 참전 병력들의 수기를 보아도 패주 당시까지도 상황을 모르고 있다가 후퇴 여정에서 철교 폭파 이야기를 듣고 우회로를 찾아갔다는 식의 이야기가 다수 확인됩니다.
실제로 전쟁 초반에 청단-개성-문산을 방어하던 1사단은 6월27일까지 방어하였으나, 우측의 7사단이 북한군 9전차 여단에 의해 괴멸되어 서울이 점령됨에 따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참모총장의 오판으로 1사단도 전투력의 60% 이상을 상실하였고, 그 결과 1사단 사단장인 백선엽 장군 부대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후퇴해서 한강 이남에서 다시 살아 만나자"고 이야기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한강 이남에서 김홍일 장군이 재수습해서 최악의 상황은 피했습니다. (김홍일 소장이 자기 책임 아래 부서진 군대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이 참변으로 서울 지역에 투입됐던 국군 5개 사단과 지원 부대의 퇴로 차단, 국군 주력 4만 4천명 이 뿔뿔이 흩어지는 엄청난 결과 초래했습니다. 이렇게 막대한 인명과 장비가 손실되고, 한강 북쪽에서 싸우던 아군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켰으며, 국군의 공용화기 및 장비의 대부분을 유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으니, 국군 수뇌부는 적 공격에 의한 손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대 타격을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 됩니다. 게다가 이 참화를 직접 목격한 국민들의 분노와 원성이 한때 국군에 대한 불신으로 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C증언 : 28일 낮 이후에도 경의선 축선 등 한강 이북에서 일부 부대가 선전하고 있었던 점을 지적하기도 하나, 28일 북한군이 이미 김포 평야에 도달했던 것을 고려하면 결국 한강대교 폭파라는 단일 사건 때문에 서울 수비가 실패하거나 조기 함락되었다는 주장은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재판장 : 인명 피해는 얼마나 되나?
황 중위 :어림잡아도 500∼800 명이 희생됐을 겁니다.
재판장 : 중장비 손실은 없었나?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의 증언
전쟁 발발 만 3일도 채 안된 상황에서 적에게 수도를 내주고 한강교를 폭파한 사건은 후퇴하지 못한 국군 주력부대의 붕괴와 함께 150만 명의 서울시민이 적 치하에서 3개월을 신음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강교가 폭파되자 붕괴된 국군은 야포·박격포·차량 1,318대를 비롯한 중장비와 공용화기들을 한강 이북에 유기되었습니다. 주요 장비를 폐기하고 소총만 휴대한 채 나룻배를 이용, 소부대 단위로 도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개전 당시 10만여 명의 국군은 2만5000여 명으로 급감했습니다.
D증언 : 폭파 결정이 불러온 주된 피해는 상실된 중장비와 병력 피해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E증언 :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폭파 직후, 몇 만 단위의 국군이 증발하였다는 이야기는 당시 지휘체계 내에서 통제 가능한 병력의 규모를 근거로 하는 이야기로, 당연하게도 단순 퇴각 중 명령체계 붕괴로 상실된 전력들은 이후 수 일에 걸쳐 한강 방어선 및 여타 패잔병 수집소에서 대다수 복귀하였습니다.
재판장 : 폭파 명령의 배후는 누구인가?
최창식 대령의 증언
채 총장의 명령을 받아서 했습니다. 나는 누구의 따르느냐고 여러 번 물었습니다. 그 때마다 채 총장이라고 들었습니다.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엄중령과 명령을 따르느냐, 인명 피해를 최소화 하느냐로 고민을 많이 했으나, 빨리 폭파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폭파 지휘소에서는 총장의 폭파명령을 받은 뒤 28일 02:20경 엄중령에게 폭파 명령을 하달하였으며, 엄중령은 즉시 대기하고 있던 황중위에게 장약 점화를 지시하였습니다.
F증언 : 폭파 명령의 주체자는 채병덕 총참모장이 아니라 신성모 국방장관의 명령이거나 혹은 당시 국방차관이었던 장경근 차관의 명령이라고 봅니다.
당시 이 문제 관련해서 최창식 대령의 군사재판 때에는 채총장의 명령을 받아서라고 했다지만 군사재판이나 당시 최대령은 지프에 타고 있었던 채총장의 동승자들에 대한 증언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채병덕 총장은 당시 의식불명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노골적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 재판을 빨리 종결하라는 압박을 해왔던 전례를 감안해 보면 더욱 의심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G증언 유력한 인물은 결국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과 장경근 당시 국방차관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둘 중 하나가 독단으로 저질렀거나 혹은 두 사람의 상호 묵인하에 명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채병덕 장군은 "군사지식이 있는 자가 그런 명령을 내릴 리 없습니다.
참모부장 김백일 : 상식적으로 보아 이런 중차대한 일은 보다 더 고위층인 국방부 차관 장경근의 명령이라고도 봅니다.
당시 작전국에 근무했던 장교 : 장경근 차관이 지시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국방차관 장경근 : 나는 절대 명령하지 않았소.
채장군 : 나는 다만 적절한 시간에 폭파하라 했지 그렇게 빨리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미 고문관 : 이는 채병덕 장군이 최창식 대령에게 지시한 것이며, 최창식은 단순히 그 지시대로 실시한 것뿐입니다
크로포드 육군 소령 : 당시 최창식 공병감의 미군측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짚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었으며,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중언하였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채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하우스만 : 나는 채병덕 참모총장의 고문관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방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한강철교와 관련하여 나는 채병덕 장군에게 교량 폭발 권한을 한 사람이 행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와 채병덕 장군의 경우 전선 부대 시찰 목적으로 본부를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24시간 본부를 지킬 어느 누군가를 교량 폭발 책임자로 임명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들 요건을 완벽히 충족시키는 사람은 김백일 장군이었습니다. 채병덕 장군이 김백일 장군을 교량 폭발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폭파 지휘 계통
명령체계가 총참모장-참모부장-공병감-공병학교장으로 되어 있었다. 결국 한강교 폭파의 책임 문제가 대두되고 이를 규명하기 위한 군사재판이 부산에서 열렸으나 신장관·장경근(張暻根) 국방부차관·채총참모장 등 수뇌부가 “한강교 폭파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바람에 최창식 공병감이 모든 책임을 지고 50년 9월21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판결 : 결국 폭약을 장치한 현장 책임자였던 육군본부 공병감 최창식은 군사 지식도 없이 미리 폭파함으로 수많은 인명과 작전 수행에 큰 피해를 입혔으므로 이 스위치를 누른 책임을 지고 사형에 처한다. (사형 장면)
#120 공병감 최창식 대령 총살되다.
(자막) 1964년(14년 후) 유족들이 62년 재심을 청구 제기한 항소심에서 그의 조치는 상관 명령에 복종한 것으로 판단, 최 전 공병감의 무죄가 확정됨으로써 그는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따라서 한강교 폭파와 관련해 실질적인 책임자는 없는 셈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전쟁 지도를 책임진 국방부장관 · 총참모장이 전방에 배치된 군과 150만 서울시민의 생사가 걸린 사건을 명확하게 조치하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의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4년. 117쪽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강영훈. (당시 육본 인사국장) p.138-139, 153-154
⁕http://koreanwar60.tistory.com/490 [세대공감 6.25]
⁕내가 겪은 6.25. 이재전 예·육군중장(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국방일보 2003 년 7월 31일자)
⁕漢江橋의 爆破.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한강철교 폭파 사건 : 신성모 국방장관의 조급한 결정이 서울시민의 발을 묶어버렸다. 작성자 : 산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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