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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건너서
3 년 만에 인천공항엘 도착하니 아침의 공항은 여전히 해외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일본의 삿포로를 언제부터 한번 가고 싶은 생각을 가졌었는데 이번에 듯모음 회원(회장 이의영) 16명이 함께 가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상식의 홋카이도는 삿보로 동계올림픽이 열린 바 있고 겨울에 눈이 많아 오는 지역으로 눈 축제 때에는 세계 각국에서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는 정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는데 막상 가서 보니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출발하는 날 새벽부터 빗방울이 약간 떨어졌으나 출국수속을 하고 나서 날씨를 살펴보니 비행기가 이륙할 무렵에는 해가 반짝 나기도 하였다.
비행기는 10시 15분에 이륙 하여 양양을 거쳐 동해바다를 내려다 보며 가고 있었다.
안내 지도 판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2시간 15분 만에 치토세 공항에 무사히 도착을 하였는데 공항은 우리 김포 공항보다는 작은 편이었으나 공항통과는 내외국인 할 것 없이 속성과로 취급을 하여 일행은 쉽게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그 전의 이맘때의 기온은 한껏 20도를 오르내렸는데 몇 년 사이에 기온이 올라가 이 지역도 9월의 기온이 30도까지 치솟고 있어 아픈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하였다.
우리는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공항을 출발하였는데 산이며 구릉의 나무들까지 낯설지 않고 넓은 평야에는 감자를 재배하거나 말먹이 목초지대가 길게 뻗어 있었다.
첫 번째 우리가 방문하려던 곳은 혹가이도의 원주민이 살던 곳이라는데 2시간가량이나 차를 타고 가야 했다.
도착을 하고 보니 넓은 벌판에 우리나라 민속촌과 같이 용마루가 뽀족한 집들이 여러채 보였는데 아이누족의 민속박물관이라고 하였다.
입장을 하고 보니 전면에는 높이 16m의 촌장의 상이 검은 색깔의 조각으로 해서 세워놓았는데 산양을 하던 원주민 특유의 복장을 한 모습이었다.
입구를 지나니 이 고장 산이라고 하는 개와 곰을 사육하고 있었고 개는 진돗개와 닮아 있었다. 건축물은 옛날의 모형을 살려 갈대짚으로 엮은 지붕이었고 우선 공연장으로 안내되어 들어가니 백여 명이 실히 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있었는데 선풍기도 없어서 모두가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30대의 아이누족의 복장을 한 청년이 나와서 아이누족의 소개를 하는데 우리나라 말을 섞어서 재담을 늘어놓아 방문자들이 모두 그의 매력에 빠지는 것이었다.
이어서 아이누족의 기타연주와 간이가야금연주 고유의 의상을 입고 돌아가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데 단순한 동작의 춤이 반복이 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 박물관에 전시된 생활도구들을 돌아보았는데 옛날의 생활용품이 동서양 모두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전시장을 나오자 바로 차를 타고 산 협곡에 이르니 골짜기에는 온천호텔들이 즐비하였는데 좁은 계곡한쪽의 주차장에는 관광차 10여대가 빼곡하게 차지를 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언덕으로 100여m를 오르니 바로 지옥계곡이라는 곳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난간이 있어 더 이상 접근을 할 수 없었지만 계곡의 황회색 바위 사이에서는 유황냄새로 뒤덮여 있었다. 이곳이 마치 지옥을 연상케 한다 하여 지옥계곡이라고 이름이 붙여졌고 여기에서는 1분에 3000리터의 온천수가 솟아오른다고 하였다.
이 곳이 동양최고의 명성 있는 일본온천탕으로 유명한 노보리베츠로서 아이누어로는 하얗고 짙은 색의 강 즉 ‘희고 탁한 하천’”이라는 뜻 이라고 하였다.
그 많은 양의 온천수를 활용하자니 그 많은 호텔들이 들어섰을 것이며 관람객은 외국인 내국인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붐빈다고 하였다.
골짜기는 화산폭발 당시를 연상케 하듯 풀도 자라지 않았는데 황산까스가 하얀 김으로 변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도 활화산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는 일본이야말로 언제 어느 때 어느 지역에서 폭발을 할지 모르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 우리나라 사람과는 또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 일본은 지진으로 인해서 도시가스 설치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니 그들이 추운 겨울에도 난방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어 다다미방에서 새우잠을 자야하는 처지를 이해할만 하였다.
하루해가 짧은 것은 아닌데 오후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노보리 베즈파크 미야비데이(雅亭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정식으로 저녁을 들었다.
이 호텔은 특히 유황온천이 유명하다고 하여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회색갈의 온천수가 피부에 좋은 영양과 탄력을 준다고 하였는데 옥내에도 있었지만 옥외의 온천수도 마찬 기지였다. 욕장은 붐비지 않아서 좋았고 유황석의 사우나가 좋다고 하여 거기도 잠시 들려 보면서 오랜 시간 온천욕을 즐겼다.
이튿날 아침엔 일어나자 바로 창문을 열고 지난 밤 잠결에 들리던 물소리의 출처가 어딘가 하고 알아보았더니 호텔 바로 옆으로 산에서 계곡을 따라 개울물이 요란스럽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은 흰 쌀죽에 쌀밥 겨란 찜이며 빵과 치즈가 나오고 특선으로 나이트라는 청국장을 작은 종지에 담아서 주는데 진이 많이 나고 우리나라의 쥐 눈이콩 종류였다.
특히 요구르트를 작은 대접에 담아서들 먹는데 일본사람들은 그것에 과일을 곁들여 아침을 때우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9시에 버스를 타고 길을 나섰는데 멀리 붉은 산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어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곳으로 우리가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한 40분 만에 도착한 곳은 주차장도 넓고 앞이 탁 트인 곳이었는데 이곳이 쇼와신산(昭和新山)관광지였다.
산을 올려다보니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바위 산인데다가 하얗게 유황수증기가 산등성이에서 올라오고 있었으며 그 온도는 300도여서 접근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1943년‒1945년 사이의 지진과 함께 이 산은 갑자기 평평한 밀밭에서 현재 높이인 290미터로 융기를 한 이후에 폭발하여 화산활동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443m의 성장 중인 기생활화산으로서 산이 붉게 타고 있는 모습을 코앞에서 볼 수가 있었다.
화산 앞은 넓은 공원으로 해 놓았고 쇼와신산이라는 간판을 설치해 놓았는데 특히 이 산을 매입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한 사람이 이곳 우체국장 출신이었는데 지금 공원 앞에는 이분의 동상이 세워져서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지진지역이라 위험을 안고 있으면서도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본 사람들은 원래부터 조상들이 하던 업을 자손만대에까지 이어가게 하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어 농사면 농사 어업이면 어업으로 일생을 살아간다고 하니 그네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도 짐작이 되는 것이지만 그런 자부심이 그들을 결속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소와신산( 소화신사(昭和神社)를 보고나서 우리는 2000년 3월 31일 오후 1시 7분 갑자기 서쪽의 땅이 움직이면서 솟아오르고 집이 기울어지면서 넘어가고 세워놓은 자동차가 곤두박질치는 지진이 일어나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유슈산(有珠山) 니시야마 분화구를 100여m 밖에서 바라볼 수가 있었다.
날씨가 덥지 않으면 그곳 현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까지 가서 보려고 하였으나 생략하였는데 멀리서 보아도 아직도 허물어진 건축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도야에서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최근에도 지진이 발생되고 있는 곳이 일본이니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일본이야말로 항상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민족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모로랑(室蘭)시로 가는 길에 목초를 많이 기르는 래이크힐폼(Lake hill form) 휴게소에 들려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었는데 신선한 우유로 만든 즉석 아이스크림이라서 그런지 시원하고 맛있는 것은 우리나라 것이나 별반 다른 게 없었다. 휴게소에서 나오는 길모퉁이에는 아이들이 낙서를 한 것 같은 글씨로 호박이며 옥수수 콩 참외 등의 가격을 보루 지를 찢어서 맥여 놓았는데 재배한 사람들의 무인판매대였던 것이다.
다시 차를 타고 모로랑(室蘭)시의 8경중의 하나라는 지구고(地球岬 호수나 바다로 뾰족하게 나온 땅)가 설치되어 있는 등대에 올라가 보았는데 여기에서는 지형이 바다로 둘러싸인 듯 이 바라다 보였다.
여기를 관광지화하기 위해서 주위를 잘 다듬어 놓았고 세계지도를 바닥에 각인해 놓았는데 지규고에 올라가서 한 바퀴 돌아보니 신기하게도 사방이 동그랗게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여기서 증명한다는 것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종을 하나 달아 놓았는데 그 종을 치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하여 모두가 한 번씩 힘껏 치는 것이었다. 나도 한번을 치고는 그 소리를 들어보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니 그 소리는 은은하게 파장을 일으키며 모로랑시로 퍼져가는 듯하였다.
다시 그곳을 내려와서 모로랑에서 바다를 건너질러 놓은 1380m의 하구조오하시(白鳥大橋)를 보고 기념관엘 들렸는데 인천대교처럼 화려한 디자인으로 설계 되었고 적설한냉지역(積雪寒冷地域)에 놓인 다리로는 최초라고 하였다.
차는 다시 사이로 재배지에 설치해 놓은 사이로 전망대에 이르렀는데 북해도 최대 규모의 칼데라호수인 도야호를 바라볼 수 있고 도야호수 안에는 4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있어 이 섬을 유람선이 돌고 있었다.
이 전망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 정상에서 지난해에 세계 G8 정상회담이 열렸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바로 그 유람선을 타고 호수 안에 있는 섬을 돌았는데 제일 깊은 곳은 수심 이 178m 나 된다고 하였다.
배에서 내리니 해는 서산에 기울어 우리는 도야 파크 호텔에 일단 여장을 풀고는 저녁 식사를 하였다.
저녁 후에는 호수에서 불꽃놀이가 있다고 하여 나가니 호수로 나가는 넓은 길에는 등을 몇백개 달아 놓았는데 각 호텔에서 기부를 해서 설치한 시설물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불꽃놀이는 30여분에 걸쳐서 하늘에 갖가지 수를 놓았는데 작은 배가 호수를 누비며 세군데서 쏘아 댔는데 그 비용만 해도 엄청날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관광 수입을 위해서의 투자는 그들에게 새로운 관광객 유치에 도움을 줄 것이다.
이곳 호수를 찾는 관광객은 사계절에 걸쳐 붐비고 있어서 호수주변에는 많은 온천호텔이 줄을 지어 서 있는가 하면 호수 인접에는 산책길을 해 놓았고 보트 대여 장이 있는가 하면 연주실 앞에는 트럼펫을 멋지게 부는 동상까지 세워 놓고 있었다.
관광지가 오락성에만 치우치지 않고 예술과 접목되어진다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도 새로운 창조적인 발표장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불꽃놀이가 끝난 후에는 9층에 있는 온천으로 올라갔는데 이 온천수는 강물처럼 맑긴 하였지만 전날과 비교해보니 수질은 한 등급 낮은 것 같았다.
온천 시설은 상당히 오래전에 한 것인지 쇠로 된 천정은 녹이 잔뜩 나 있었는데 시급히 페인트칠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들으니 온천수의 종류는 18종에 이르며 수질이 다 각각 다른가 하면 전국 3500개의 호텔 중에서 세 번 안에 드는 온천호텔은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 규슈에 벳부온천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 어떤 온천장에서는 우리나라 아줌마 부대의 입욕을 사절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공중탕에서 남을 배려하지 않고 너무 시끄럽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때 어글리 코리안이라고 해서 외국에 나가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지만 아직도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차를 타건 배를 타건 비행기를 타건 간에 아무 때고 손 전화 이용하기를 자기의 사무실처럼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또한 정말 고쳐야 할 우리의 잘못된 습관이다.
늦은 밤에 비가 간간이 내리는 것 같더니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빗방울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관광 사흘째에 비가 내리니 일정에 차질이 있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큰 비가 아니어서 우리가 가는데 는 오히려 시원한 것이 지난 이틀간 더웠던 날씨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아침 9시에 출발을 하고 50여분을 달리는 동안 감자밭과 전나무며 자작나무가 울창한 숲의 산을 넘어 도착한 곳은 약수로 유명하다는 요데이산 기슭이었는데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개울물이 관을 통해 나온듯한 인상을 갖게 할 정도의 약수였는데 약수가 강물처럼 수량이 넘쳐흘렀다.
이름은 약수지만 우리나라의 약수처럼 사이다 맛이 난다든가 입을 톡 쏘는 맛은 없어 무공해 물이었다.
다시 나까지마고개를 넘어 오타루에 가는 산굽이 길 앙쪽에는 높이 5-6m의 전선에 빨간 화살 표식을 해서 매달아 놓았는데 이것은 눈이 내리면 보통 5m이상이 오기 때문에 길과 구릉을 구분할 수가 없어 길 표시를 해 놓는 것이라고 하였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많이 드는 예산은 눈을 치우는데 드는 비용이라고 할만치 겨울의 눈이 내리면 우리나라도 도로 밖으로 눈을 쳐내면 빈축을 사지만 홋카이도에서는 벌금을 과할 정도라서 부유한 집은 눈 녹이는 기계를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그 뿐 아니라 공항이나 중요도로에는 열선장치를 해서 눈을 녹인다고 하니 겨울은 이 지역의 또 다른 극기(克己)의 계절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오타루에 도착을 할 때까지 비는 계속 내렸는데 도착해서 내린 곳은 홋카이도의 거점 무역항으로 발전했던 오타루 운하였다.
이곳은 1914년부터1923년까지 운하를 건설하고 선박들의 화물 하선작업을 위해 각 창고에 운반하는 하역작업으로 무역이 활성화되었으나 그 후에 모든 운반수단이 기계화 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운하를 지나서 우리는 카다 이치 가라스 마을 관광에 나섰는데 이곳은 메이지 25년경 석재창고를 이용하여 네덜란드와 덴마크 등에서 모은 600점 이상의 램프 그릇 유리공예 등을 전시 판매하는 마을이라고 하였다.
그곳을 돌아본 후에는 명치시대부터 열었다는 레스토랑엘 들려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는데 홀은 20명이 채 앉을 수가 없는 협소한 곳이고 방이래야 우리들 16명이 들어앉으니 여유가 없을 정도였다.
점심메뉴로는 김밥 3개와 초밥 3개 튀김 한 접시와 오이 조금 김치가 조금 나왔는데 명소치고는 음식이 너무 초라하였다.
지배인의 명함을 주기에 받아보니 내가 일본교류를 할 때의 여자교장선생 사사기와 같아서 반갑다고 하니 일본의 3대성중의 하나로 제일 많은 성씨라고 하였다.
점심 후에는 삿포로로 이동하여 사보로 맥주박물관을 견학하였다.
1987년 7월에 개관한 이 맥주박물관에는 원료 공정 제조 과정 등을 이해하기 쉽게 영상으로 전시해 놓았다 .
구 홋카이도 도청청사와 함께 중요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으나 맥주시음은 유료였다.
저녁은 게 요리로 하였는데 우리나라 영덕 게보다도 엄청나게 큰 것으로 속은 꽉 차지는 않았으나 청정지역에서 잡힌 일산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달게 저녁을 자시는 것이었다.
두부찌개와 불고기도 아울러 나왔지만 모두가 게요리만 먹는 바람에 다른 찌개는 빛을 보지 못하였다.
마지막 날 자는 호텔은 게이오 호텔로 외국인들이 많이 유숙하는 호텔이었다.
시내의 도로는 깨끗하고 행인도 별로 많이 다니지를 않았다.
4일째 되는 날 아침을 간단히 먹고 우리는 바로 사보로 구 도청 청사를 관람하기 위해 갔는데 홋카이도의 개척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붉은 벽돌의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아까랭가의 애칭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약 250만개의 벽돌을 사용하여 미국풍의 네오바라크양식으로 1888년 건설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꽤 오래된 건물이었다.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연못가에는 몇 백 년이 됨직한 미루나무가 서 있었으며 현관입구 땅 바닥에는 홋카이도의 지도를 그려 놓고 있었다.
지사 실에는 역대 지사의 사진이 걸려 있는가 하면 당대의 회의실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과 거 개척시재의 역사적 자료가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서 주목을 받을만한 것은 사할린에 관한 자료였는데 사할린은1905년 구소련과 일본 간에 전쟁 종말에 양국으로 분단이 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말엽인 1945년 8월8일 구소련은 대일 선저포고를 가하여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고 종전과 동시에 사할린은 구소련에 의해 러시아 영토가 된 것이다.
사할린 하면 일본에 의해 약 4만 명의 우리청년들이 강제로 징용을 당해 간 곳으로 종전과 동시에 무국적자로 전락하고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는 등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하는 운명으로 있다가 1990년 소련과의 국교가 수립되는 바람에 일시 고국을 방문하는 계기가 되고 영구 귀국한 동포들이 있긴 하지만 정부의 무관심으로 아직도 사할린에 살고 있는 2세 동포들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현재 그 영토를 끈질기게 돌려받고자 하나 지금까지 그것이 되지 않고 있자 청사안의 한 구역은 그들의 영토반환에 대한 줄기찬 투쟁의 장면들의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의 영토인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쓰고 있는 그들의 이중적 성격을 보며 그들 또한 국토에 대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면면이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구 도청청사를 관람한 것을 끝으로 이번의 관광을 마치게 되었는데 2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을 하였다.
이번 홋카이도의 관광을 통해 알게 된 것은 홋카이도야 말로 우리 남한 면적과 거의 비슷하나 인구는 고작 530만 명에 머물고 있어 그 넓은 영토가 부러웠다.
인구가 적다는 것은 자연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조건이고 더구나 온천 광광지가 많아 얼마든지 외국관광객을 유치하여 경제적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홋카이도의 어느 호텔도 물건 도난은 일체 없다고 할 정도로 종업원들이 일치단결하여 국가의 면모를 세워주고 있는 것이었으니 이 얼마나 일본에 대해서 신뢰를 갖게 하는 것인가.
전통을 중시하구 조상들이 일군 가업을 계승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일본 사람들의 철저한 기업정신은 우리가 다시한번 그들을 새로이 인식하는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본 하면 그들로 인해 피맻인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좀 더 미래를 내다보고 정치를 하였던들 우리가 왜 일본에게 먹혔겠는가 .
나라를 빼앗긴 것은 물론 침략근성을 가진 일보에게 책임이 있겠지만 우리가 세계사적 흐름을 감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우리의 안보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매일같이 점검을 하여야 한다. 모처럼의 일본 방문의 기회를 통해 우리나라가 좀 더 발전하는 나라로서 세계를 넘나볼 수 있는 위대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金 斗 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