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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오, 내 혼이 사랑하는 당신이여, 정오에 당신의 양떼를 어디에서 먹이시며, 어디에서 쉬게 하시는지 내게 말해 주소서. 어찌하여 내가 길을 벗어나 당신의 동료들의 양떼들 곁으로 가는 한 마리처럼 되어야 하리이까?
1:8 오 너 여자들 중에서 가장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 목자들의 장막들 곁에서 네 염소 새끼들을 먹이라.
7절은 목자인 신랑에게 말하는 것인데 긴즈버그와 벌링거는 여인의 목자 애인이 솔로몬 왕과 대립하는 삼각 관계라고 잘못 가르쳤다. 왕은 그녀를 유혹해서 금과 향수와 아첨으로 단장된 하렘(harem)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하고 그녀는 목동 애인에 대한 순정을 지키려 애쓴다는 것이다. 이런 스토리는 TV와 영화에서 너무 흔해 빠진 것이라 식상할 정도다.
나는 그 해석을 지지할 수 없는데 그것은 구약 전체에서 왕과 목자에 대해 사용되는 모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면서 목자이시며 이는 솔로몬, 다윗, 솔로몬도 마찬가지이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시 23: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요 10:11)
이는 너희가 길 잃은 양들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들의 목자와 감독에게로 돌아왔음이니라(벧전 2:25).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너희가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리라(벧전 5:4).
그러므로 본인은 솔로몬의 노래에 등장하는 왕과 목자는 역사적인 동일 인물로서 솔로몬으로 간주할 것이다. 솔로몬의 아비 다윗은 목자였고 다윗의 아들들 또한 양을 쳤다(압살롬도 그러했다. 삼하 13:23-24). 그러므로 솔로몬이 왕이면서 목자로 묘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본인은 솔로몬의 노래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건들을 100% 알지는 못한다는 것을 시인하지만, 그렇다 해서 구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모형을 헐리우드식의 진부한 줄거리에 맞춰 훼손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어쨌든 모든 소설이나 영화 줄거리들도 성경에서 나온 것이긴 하다. 그렇다 해서 육신적인 사랑 이야기에 집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왜곡하지는 않겠다.
자, 이것은 진실된 사랑인데 만일 당신이 혼을 다해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섬기며"(신 10:12)라 명령하신다.
NIV와 그 동료 역본인 NKJV는 이 구절에서 "혼"을 제거해 버렸다. NKJV는 KJV를 더 쉽게 만든 성경이 아니라 독자가 변개된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이 KJV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트로이의 목마"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진실된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해 보도록 하자. (항상 기억하라. 진실한 사랑은 섹스를 넘어선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을 것이다. 그들이 없으면 허전할 것이며 함께 대화하기를 바랄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들의 친구가 되려 할 것인데 누군가 그들을 대적하면 당신은 그 대적들과 싸울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에 대한 악소문들을 당신은 믿지 않으려 할 것이며 그 소문이 사실이라 해도 당신은 그것을 퍼뜨리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잘해주고 싶어 항상 신경이 쓰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당신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정오에 당신의 양떼를 어디에서 먹이시며, 정오는 하루의 가장 더운 시각이다. 이것은 죄인의 일생 중 가장 험악하고 시험이 많은 시기를 뜻할 수 있다. 우리에게 그런 시기가 찾아온다면 주 안에서 쉴 필요가 있다.
다윗은 시 23:2에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라 노래했는데 푸른 초장은 쉬는 장소이기도 하고 양이 먹는 곳이기도 하다. 그의 "침소"이며 동시에 "식탁"이다.
우리가 "주의 양"이라면 우리는 앉아 쉬면서 동시에 주께서 주시는 양식들을 먹을 수 있다. 성경은 우리의 "초장"이다. 성경은 주께서 우리에게 식량을 공급하시는 근원이며 고난이 찾아오면 우리는 성경으로 달려가 거기 나온 약속들로부터 위안과 평안을 찾아야 한다.
어찌하여 내가 길을 벗어나 당신의 동료들의 양떼들 곁으로 가는 한 마리처럼 되어야 하리이까? 그녀는 양식이 급히 필요한 상태이며 이전의 목초지들에서 필요한 양식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바른 양식을 내는 목장을 찾고 있고 바른 무리에 속하길 원하고 바른 목자에게 가기를 원한다. 이 말이 당신 마음에 와 닿는다면, 영적으로 그렇게 공감한다면 주변의 양떼들을 둘러보고 상태를 비교해 보라. 타임지나 라이프지, 에스콰이어, 플레이보이 같은 언론들에 의해 인도되는 양떼들을 보라. 불경건하고 타락한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쓰레기 속에 뒹구는 양들 말이다. 그들이 (성경대로 믿는) 당신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가? 그들이 안전할까? 당신보다 더 나은 점이 있던가?
형제들, 이 세상은 돼지들이 놀기에 적합한 진흙탕이며 양들은 그런 쓰레기를 먹을 수 없다(눅 16:15). 양들은 그들을 만족시킬 다른 것이 필요하다. 그런 좋은 양식은 오직 초장에서만 발견되며 돼지 여물통에는 없다. 세상은 성경을 불신하며 "카인은 어디에서 아내를 얻었나?", "노아와 짐승들은 어떻게 방주에 다 탈 수 있었나?", "동정녀 탄생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 일어났는가?" 같은 시시한 질문이나 한다. 세상은 이 책이 멍청하고 권위적이며 무례하며 모순투성이라 생각한다. 그 잃어버린 자들에게 성경이란 먹을 게 없는 불모지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이 쇠고기 바베큐, 닭튀김, 스테이크, 매쉬드포테이토, 튀긴 숭어, 허쉬퍼피(hush puppies, 미국 남부의 작고 동그란 옥수수 빵),버터, 옥수수빵, 할라피뇨(멕시코 고추), 나초 같은 풍성한 식탁으로 보인다.
8절에서 화자가 전환된다. 이후 9-12절까지 왕이 말하고 있다. 왕이 여인에게 "너 여자들 중에서 가장 어여쁜 자야"라 말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교회에게 말씀하는 것과 같다. 이 여인은 참으로 여러번 "어여쁜", "가장 어여쁜"이란 찬사를 듣는데 1:15(두 번), 1:16, 2:10, 2:13, 4:1(두 번), 4:7, 4:10, 5:9, 6:1, 6:10, 7:6에서 그렇다. 8절에서 한번을 합하여 총 14번인데 그러나 그 중 두 번이(5:9, 6:1) 신랑이 신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물론 "어여쁜"(fair)이 현대어에서 그 의미 그대로 쓰지는 않는데 오늘날 fair라는 말은 그냥 밋밋하게 예쁘다 정도의 표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fair나 fairest라 할 때는 마치 "동화"(fairy tales) 속에서 나온 요정(fairy) 같다는 말이다. fairy라는 표현은 남자 동성애자들을 가리키는 은어이기도 한데 물론 그 의미는 전혀 성경과 무관하다.
그러므로 fair라는 말은 아름답다란 뜻이며 창 12:11, 14를 보면 사라가 65세였을 때 이 표현(fair)이 적용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그의 아내는 65세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아름답다에 덧붙여 fair의 또다른 의미로서 "피부가 하얗다"(light complexion)는 뜻도 있다. 여인이 fair skin을 가졌다라 할때 피부가 희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검은 피부"의 이집트인들 가운데 들어가면서 그들이 흰 피부를 가진 사라를 탐내서 아브라함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 것을 염려했다. 실제로 파라오는 사라를 아브라함의 누이로 오해하고 그녀를 자신의 하렘으로 데리고 갔다.
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나 우리가 집중 분석해야 하는 것은 "어여쁜"(fair)의 의미이다. 5-6절에서 이 여인은 분명 "투명한 피부"(fair-skin)를 갖지 못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러므로 피부가 희다기보다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녀의 피부는 여타 흑인 여인들보다 더 월등히 아름다웠다. 유색인종 여인들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경우는 "갈색 피부"인데 바네사 메이 같은 피부 말이다. 내가 자랄 때는 그런 여자들을 "물라토"라 불렀고 high yeller(피부가 황갈색인 흑인)라고도 했다. 그런 여인들의 혈통에 백인 혼혈이 있기 때문에 다른 흑인 여자들보다 피부가 하얗던 것이다.
우리가 구절을 보다 상징적 의미로 적용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남편이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할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인들이여, 당신들은 미스 아메리카나 미스유니버스 같이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 해서 그대들의 남편이 당신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단지 남편들은 사랑 덕택에 어떤 진실에 접근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말 않으시는 창조주로서 정말로 사실만 말씀하기 때문에 그분이 당신을 "아름답다", "가장 어여쁘다"고 말씀한다면 그 표현에는 어떤 과장이나 하얀 거짓말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100% 진실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존감"이 떨어진 상태에 있다면 잠시 생각해 보라. 당신이 "구원받아서 몸된 교회에 속한 상태"라면 그것은 주께서 가장 아름답다고 묘사한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신데 그분이 몸된 교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셨으면 정말로 그런 것이다.
8절로 돌아와서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 목자들의 장막들 곁에서 네 염소 새끼들을 먹이라. 를 살펴보자. 즉 당신이 좋은 꼴을 먹고 싶으면 양떼를 따라가면 된다는 말이다. 개들이나 돼지들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벧후 2:22). 혹은 여우들이나(눅 13:32) 들나귀들(욥 11:12), 혹은 박쥐들, 말똥가리들, 콘도르, 올빼미들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그런 자들을 따라가면 영적으로 파산해서 말라죽을 뿐이다.
세상이 주는 것들은 전부 "용두사미"와 같고 TV, 영화, 좋은 음식, 멋진 차, 아름다운 여인들, 비싼 술도 마찬가지다.
주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시니라(요 4:14).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혼을 만족케 하는 선물만 주신 게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는 "성령 안에서의 인내와 기쁨"을 같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미치거나 자포자기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뎌낸다.
여전히 모르겠다면 알려주겠다. 하나님께서는 킹제임스 성경 안에 여전히 풍족한 초장을 열어 놓으셨으나 기독교 칼리지들, 신학교들, 대학들이 당신이 그 사실을 깨닫게 될까 전전긍긍한다. 교단 교회들은 당신이 킹제임스 성경 안의 보화를 모르게 하려 서로 말을 맞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세우셔서 이 증거가 사라지지 않게 지키고 계신다.
럭크만은 남침례교는 물론이고 미국의 모든 주요 근본주의 신학교들로부터 배척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에 "럭크만보다 훨씬 나긋나긋한 말투의 여자 설교자들"을 세우셨고 그녀들이 라디오 채널들과 TV쇼에 나와서, 또는 기독교 대학들에서 현대 역본들을 휘두르며 마귀의 교리들을 읊어대는 동안 상황은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가? 그 여자들에 의해 2-3년 동안 기독교계가 망가진 속도는 럭크만이 10년 동안 기독교계를 괴롭힌 것보다 더 가공할 수준이다.
이 지구상의 모든 구원받은, 구원받지 못한 남녀들이 자기들의 혼을 어디서 만족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유는 단 두가지다.
1) 그들은 누군가 자기에게 그것을 알려주려 할때 듣기를 거부한다. 2) 누구도 그들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 증거란 것은 단지 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어디에 가면 풍성한 음식이 있는지 알려주는 것과 같다.
한 예를 들면 열왕기하 2:7에서 사마리아 성읍이 시리아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도시 거민들은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성문 밖에는 세 문둥병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문둥병으로 죽던지 식량이 없어 더 빨리 죽던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들은 시리아 진영에 가서 식량을 구걸하기로 하고 최악의 경우 칼에 맞아 죽을 각오로 간다. 그들이 시리아 진영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텅 비어있었고 시리아 군대는 퇴각한 후였다. 하나님께서 시리아 군대에게 엄청난 소리를 들려주셔서 그들은 대군이 몰려오는 줄 알고 무서워 도망친 것이다. 세 문둥병자는 먹고 마시고 보화들을 숨겨놓은 후에 이기적인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것이란 가책에 사로잡힌다. 그 가책은 지금 크리스챤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이다. 당신은 성경을 배웠고 어디에 가면 좋은 음식이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고 입을 닫고 있다면 "어떤 재앙"이 임하리라 생각하지 않는가?
1:9 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파라오의 병거의 준마 무리에 비교하였노라.
1:10 네 두 뺨은 보석줄로, 네 목은 금목걸이로 아름답도다.
1: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은장식이 있는 금사슬을 만들리라.
1:12 왕이 그의 상에 앉아 계실 때 나의 감송향유가 그 향기를 풍기는도다.
1:13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이는 내게 몰약 다발이니, 그가 온 밤을 내 가슴 사이에 누우리라.
1:14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에 있는 캠퍼 송이로다.
9절에서 왕은 신부를 파라오의 병거의 준마 무리에 비교하는데 솔로몬은 실제로 파라오로부터 받은 말들을 갖고 있었다(왕상 10:28-29, 대하 9:25,28). 9절에서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여성격을 가졌다. 여자를 "암말"(mare)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예의바르다고 생각하는가? 이 구절에 대비되는 신약 구절은 마 21:2-3이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러면 곧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함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그것들을 쓰신다.’고 말하라. 그러면 그 사람이 즉시 보내리라.” 하시더라(마 21:2-3).
여기서 나귀 한 마리가 "그녀의 새끼와 함께"(a colt with her) 매여있다고 영킹에 말씀하고 있는데 그 암나귀는 "두 길이 교차하는 문 밖에" 매여 있었다. 이는 영적으로 사탄에게 매여 있는 죄인들의 상태와 같은데 문 밖에(예수 그리스도 밖에) 머물고 있는 죄인들은 두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생명으로 가는 좁은 길이나 사망으로 가는 길 중 하나인데 그가 복음에 의해 풀려나면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된다.
9절 본문에서 "무리"란 그리스도의 몸 자체를 말하고 "준마"는 개별적 크리스챤들을 말한다. 파라오는 물론 세상 왕인 사탄을 상징한다(눅 4:5-6). 사탄의 재갈에 물려 불가항력적으로 묶여 있던 말이었는데 그때 당신은 사탄이 명령하면 움직였고 그의 통제에 따라야 했다. 바울은 잃어버린 죄인들이 마귀의 올무에 마귀의 뜻대로 사로잡혀 있다고 증거한다.
마귀의 뜻대로 그에게 사로잡혔던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깨어 나올까 함이라(딤후 2:26).
그러나 당신이 구원받았을 때 왕께서 당신을 사탄의 병거에서 풀어서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신 것이다. 솔로몬은 열왕기상에서 파라오의 말들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옮겨왔고 그것은 즉 당신이 사탄의 지배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마굿간, 새 예루살렘으로 인도된 것과 같은 것이다.
첫째로, 크리스챤은 용기에 있어 말들과 같다. 욥기 39:19-25를 보게 되면 전쟁터에서 말들이 떨치는 위용을 알 수 있다. 말들은 총염과 포화가 작렬하는 언덕을 향해 질주하고 총검, 창, 칼이 번쩍이는 지점으로 돌격한다. 혹은 검과 철퇴를 든 기수들이 탄 상대방 군마들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한다. 말들은 기수가 낙마한 후에도 돌진해서 상대방 인원과 말들을 걷어차고 공격한다. 내가 이런 것을 아는 것은 옛날 기병대들을 묘사한 전쟁 그림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나운 말들이 200에서 500마리 정도 라인을 형성하고 나팔 소리와 함께 당신에게 돌진해 온다면 지옥과 맞닥뜨리는 기분일 것이다. 알프레드 테니슨 경이 서사시에 "경기병대의 돌격"이라 묘사한 크림전쟁 때의 유명한 전투가 있었다. 영국 경기병대 600여명은 5마일 넘게 펼쳐진 러시아 포병대 진영 속으로 들어가 전열을 붕괴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돌격해 들어갔다. 기병대가 전후좌우에서 쏟아지는 포화를 받아내며 러시아 참호에 도달했을 때 많은 말들이 기수가 없는 채로 달려들어 적을 걷어찼다. 그 말들은 기수가 떨어지고 포화가 사방에서 쏟아지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돌진한 것이다.
전쟁터와 싸움에는 분명 말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그런 말들처럼 용맹스러워야 한다. 에베소서 6장에 묘사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무장은 전부 정면 돌격에 맞게 구성된 것이다. 물러설 때를 고려해 후면을 보호하는 장비들은 전혀 없다.
둘째로, 말은 매우 강인한 동물이다. 욥 39:19은 네가 말에게 힘을 주었느냐? 네가 그 목을 천둥 같은 소리로 옷입혔느냐? 라고 질문한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시는 것인데 즉 사람이 말들에게 그 힘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원리로 오늘날 "마력"이라는 단위를 여전히 사용하는 것이다. 말들이 일정 수가 모이면 일정한 힘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용기와 힘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강건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며(수 1:9)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남자답게 처신하라"고 주문한다(고전 16:13). 그리스도인의 힘은 말의 힘처럼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엡 6:10).
말의 능력은 훈련을 통해 더 강해질 수 있고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잠 26:3은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어리석은 자의 등에는 매니라."라 말씀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에게 훈련된 말들처럼 되어야 한다. 구원받기 전에는 "들나귀" 같이 날뛰었다 해도 구원받았다면 이제 "주인의 채찍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변화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말은 매우 아름다운 동물이다. 솔로몬은 실제 한 여인에게 말처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주께서 자기 신부인 교회를 다른 시대의 모든 성도보다 더 아름답다 여기시는 것이다. 이는 시편 45:11에도 나타나는데 주께서 자기 신부에 대해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크게 탐내리니 이는 그가 너의 주심이라. 너는 그를 경배할지니라." 라 말씀한다.
10절, 네 두 뺨은 보석줄로, 네 목은 금목걸이로 아름답도다.
동양 여인들은 일반적으로 많은 보석들을 두르고 머리와 얼굴과 목에 장식하는 관습이 있다. 이에 대해 궁금하다면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상위 카스트의 인도 여성들을 찍은 사진들을 보라. 재판관기 8:26에 보면 미디안 군대는 낙타의 목에까지 금사슬을 둘렀다. 그러므로 파라오의 말들도 그런 식으로 치장했을 것이라 볼수 있다.
그가 청했던 금 귀고리의 무게는 금 일천칠백 세켈이었으며, 그 밖에 장식들과 목 장식들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그 밖에 그들 낙타의 목에 둘렀던 사슬들을 청하였더라(판 8:26).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파라오의 병거를 끄는 육신의 말 같은 말들을 번식시키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나 그는 어겼다.
그러나 왕은 스스로 말들을 많이 번식시키지 말 것이며 그가 말을 번식시킬 목적으로 그 백성을 이집트로 돌려보내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제부터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라(신 17:16).
주께서는 유대인들이 말을 구하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는데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칠십인역 같은 사본들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 것과 관련있다. 이집트로 돌아간 배교한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성경 역본도 가치가 없다. 또한가지 주께서 왕이 말을 번식시키지 말라 한 이유는 그 말이 이집트산이든 아니든 이스라엘 주위의 이방은 그들의 말들을 태양신에게 봉헌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그리스 신화를 읽어봤다면 거기서 아폴로가 하늘을 날아 태양을 가로질러 갈때 불말이 끄는 병거를 타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계시록에서 아폴로는 "아폴루온"(계 9:11)이라 불리며 그는 "끝없이 깊은 구렁의 천사"(계 9:11)이다. 그 이름의 뜻은 "저주"인데 그는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이다.
이방의 말들이 태양신에게 봉납된 것은 즉 마귀에게 바쳐진 것과 같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카나안을 정복할 때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 말들의 뒷다리 힘줄을 끊어 서지 못하고 쓰러져 죽게 만들었다. 카나안에서는 수간이 행해지고 있었기에 그것은 레위기 18:23의 실행이기도 했다.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로 인하여 무서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 몰살시키리니 너희는 그들의 말 뒷다리의 힘줄을 끊고 불로 병거들을 태우라.” 하시므로(수 11:6)
다윗이 시리아와 싸워 이겼을 때도 똑같이 했다(삼하 8:4; 대상 18:4). 이방 민족들이 신뢰하는 육신의 말들(시 20:7)에 관해 주께서는 "안전을 위해서는 부질없는 것이요"(시 33:17)라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왕들에게 말들과 병거들로 대군을 모으지 말라고 하신 또다른 이유는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말들을 자랑할까 해서였다(판 7:2). 오늘날 미국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쿠웨이트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들은 육신적 말들과 같지 않다. 스카랴 10:3에서 "내 분노가 그 목자들을 향하여 타올랐으며 내가 숫염소를 벌하였으니, 이는 만군의 주가 유다 집에 그의 양무리를 찾아보고 그들을 전쟁터에서 그의 준마같이 만들었음이라."라 말씀하시는데 여기 나타난 말들은 "좋은 말들"로서 악인들을 심판하는 데 사용되는 하늘의 불말이다(계 19:11).
계 19:11의 그 말들이 흰 말들이긴 해도 살가죽을 가진 지상의 말이 아닌 불로 된 말이다. 신화 속의 아폴로는 제우스에게서 불말과 병거를 받은 게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그 개념을 훔쳐간 것이다.
그들이 아직 가면서 이야기하는데, 보라, 불병거 한 대와 불말들이 나타나서 그들 둘을 갈라놓더니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 2:11).
그때 엘리사가 기도하여 말하기를 “주여, 내가 청하오니 그의 눈을 여시어 그로 보게 하소서.” 하자, 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어 그가 보니, 보라, 엘리사를 에워싼 말들과 불병거들이 산을 가득 채웠더라(왕하 6:17).
천년왕국 기간 동안 이 하늘의 말들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머물 것이고 장식으로 치장될 것이다.
그 날에는 말들의 방울들 위에 ‘주께 거룩함’이 있을 것이요, 주의 집에 있는 솥들도 제단 앞에 있는 대접들과 같게 되리라(슼 14:20).
슼 14:20에서 방울은 대제사장이 두르는 장식과 같은 것인데(출 28:36-37) 이 불말들이 땅의 군대와 접전하며 불로 살라 버린 후에(고전 3:12-14) 거기에 남은 금을 모아서 만든 승전 기념물을 장식으로 두르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얻는 우리의 교훈은 단순한데 그리스도인이 가진 것은 전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모든 창조물은 주의 것이고 당신이 하나님의 것을 나눠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다시 봉헌해야 한다.
11절, 우리가 너를 위하여 은장식이 있는 금사슬을 만들리라.
11절의 장식들은 10절에 나온 것에 더 추가된 게 분명한데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관련해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는지 자세히 알수는 없다. 유대인들은 옷단에 술을 만들고 거기에 청색 끈을 붙이라고 명령받았다(민 15:38). 이 "은장식"은 그 안에 보석으로 장식하기 위한 것인데 금은 신성을, 은은 구속을 뜻한다. 그러나 구절이 구체적으로 무엇의 예표인지 나는 모른다.
사실 11절의 화자가 누구인지도 불명확한데 9-10절이 왕이 여인에게 말하는 것이 분명한 것에 반해서 11절의 "우리"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또 누가 은장식이 있는 금사슬을 "너"를 위해 만든다는지도 알수 없다. 나는 "우리"나 "너"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4절로 다시 가 보면 거기서 "우리"는 여인들이었고 3절에서 언급된 그 처녀들이다. 4절에서 "당신"은 솔로몬이었으며, 그러나 4절과 11절이 같은 식으로 화자가 적용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12절, 왕이 그의 상에 앉아 계실 때 나의 감송향유가 그 향기를 풍기는도다.
"감송향유"는 향이 진한 향수인데 동양 여인들은 그것을 가죽 주머니에 담아 목에 걸고 다녔다. 감송향유는 귀한 향수일 뿐 아니라(마 26:7) 아주 비쌌다(요 12:3).
이 "감송향유"란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다섯 번 사용되는데 세 번은 솔로몬의 노래에 나온다(1:12, 4:13, 14). 그리고 두 번은 복음서에서 마리아가 주님께 그것을 붓는 사건에 등장한다(막 14:3; 요 12:3). 다섯은 죽음의 숫자인데 특별히 이번 케이스는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된다.
12절은 문자적으로 요한복음 12장의 그리스도와 관련되는데 거기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와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다(요 11:1-2).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는데 그것은 감송향유였다(요 12:3). 그녀는 그 향유를 그리스도의 머리에(막 14:3) 또 발에도 부었다(요 12:3). 그렇게 하자 "그 집이 향유 냄새로 가득 차더라."(요 12:3) 라 성경은 말씀한다. 12절의 상황과 같이 감송향유 향기가 온 집에 퍼져나갔다. 그리스도께서 "그녀는 나의 장례 날을 위하여 이것을 간직해 둔 것이라."(요 12:7)고 하셨기에 우리는 감송향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13절,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이는 내게 몰약 다발이니, 그가 온 밤을 내 가슴 사이에 누우리라.
그리스도가 장사되실 때 니코데모가 와서 "몰약과 알로에 섞은 것 약 일백 리트라"(요 19:39)를 드렸다. 또한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병사들은 그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막 15:23)를 마시게 하려 했으나 (몰약은 장사되심에 관련되므로) 주님은 거부하셨다. 따라서 감송향유는 주의 죽으심에, 몰약은 장사되심에 관련이 있다.
여기까지 살펴보고 확인된 진리는 이러하다.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그가 하나님을,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던지)을 알게 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 장소로 와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사랑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곳이 바로 갈보리다. 현대인들은 미친듯이 사랑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갈보리로 오지 않는다. 어떤 죄인도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거하지 않는다. 구원받지 않은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진노 가운데 머무는 것이다(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더라(요 3:36).
아들을 믿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라.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요 3:18).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임에도 사랑하셨고, 또 우리를 구원하실 정도로 사랑하신 것에 감사드리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롬 5:8).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를 벗어난 그 어느 곳에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속이지 말라.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를 거절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에게 더 남아있지 않으며 오직 불못에 들어갈 날만 남아 있다. 그 날이 올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거절한 그 죄인을 위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 사실이 잠 1:26에 나와 있다.
나도 너희가 재앙을 당할 때 비웃을 것이요,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 조롱하리니(잠 1:26)
여러분이 갈보리의 사랑을 얻고 싶으면 곧장 십자가를 향해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하신 희생을 믿고 붙잡으면 된다.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요일 4:10).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죄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불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또 믿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16절에서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10절에서 이미 정의한 것과 같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사랑을 의미한다.
13절로 돌아와서, 몰약은 "그리스도와 그 신부의 관계"에 있어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몰약은 정결케 하는 역할을 한다.
궁녀들의 관례를 따라 각 소녀가 열두 달을 지낸 후에 아하수에로왕에게 들어갈 차례가 되었으니 (그렇게 하여 그들의 몸을 정결케 하는 날들이 찼으니, 즉 여섯 달은 몰약 기름을 쓰고 여섯 달은 향품과 여자를 정결케 하는 다른 물품들을 쓰는 것이더라.)(에 2:12)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롬 10:9-10). 마음은 당신의 감정들이 자리잡은 곳으로서 그 위치는 가슴 사이에 있다. 마음을 다해 믿는 것은 머리로만 믿는 것과 다르다. 입으로만 고백하는 신자와 참된 크리스챤을 구별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 속에 들어오실 때 먼저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는데 이는 베드로가 행 10장에서 회심한 이방인들에 대해 설명하는 15장에 나온다.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증거하시어 성령을 주셨으며
우리와 그들 사이에 어떤 차이도 두지 아니하셨으니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셨느니라(행 15:8-9).
이 "정결"이라는 작용이 육신적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차이점이다. 잃어버린 죄인들이 아는 사랑은 단지 육신적인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을 만족키 위한 사랑이다. 기독교 문화권에 사는 기독교인인 체 하는 부부들도 본질적으로 여기에 속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 있어, 바른 관계를 정립하려면 먼저 둘의 마음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 변화는 마음의 "순수성"이다. 야고보 사도는 "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약 3:17)라 언급한다.
세상은 "사랑과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다하라(모든 것이 정당하다)"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의 감정이 꼭 육체적 사랑만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방식으로 쟁취하려는 것은 틀렸다. 성경은 사랑이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이라고 말씀한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주께서 크리스챤 부부의 결혼 생활을 지도하신다. 당신의 사랑과 결혼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기도생활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면 당신의 감정은 전부 육신적인 것이다.
둘째, 몰약은 값비싼 것이다. 동방의 현자들은 아이 예수께 와서 예물로서 몰약을 드렸다. 몰약은 "보물함"(마 2:11)에서 꺼내졌다. 베드로 사도는 네 번이나 베드로전서에서 주 예수를 "귀중한"(precious)라 언급한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이다.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되도록 하심이라(고후 8:9).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들을 자랑하지 말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기 때문이니라.
바울이나, 아폴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현재의 것들이나 장래의 것들이나,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로다(고전 3:21-23).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소유하고 있다면 세상 자체보다도 더 값진 것을 소유한 것인데 문자 그대로 "값을 헤아릴 수 없다".
셋째, 몰약은 쓴 것이다. 주님은 요한이 계 10:10에서 먹어야 했던 "작은 책"처럼 배에서 쓰게 된다. 주님을 입으로 고백할 때 입에서는 "꿀처럼 달지만"(시 34:8) 그분이 여러분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말씀대로 살지 않고 그분과 교제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 심히 쓰게 느끼게 된다.
내가 땅 위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주께서 세상에 오실 때 가져오신 칼은 "양날이 있는 예리한 칼"(히 4:12)로서 자기 의를 믿는 사람들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를 나눈다. 성경을 "최종권위"로 믿고 사는 사람들과 자기 주장이나 종교 전통을 신뢰하는 자들을 나누는 칼이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와 서로 대적하게 하려 함이니라(마 10:35-36).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 기준 없이 사람들 간의 상호 존중과 우애로 세워진 기독교는 바로 지옥에서 올라온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는데(약 2:23)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상을 버리고 나와 성별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 4:4).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살기 시작하는 이유는 그들이 배교자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계속 교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실족한 그리스도인들이나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고 멸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속적으로 가깝게 교류하는 친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열매맺고 있는 구령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자 하면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라.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당신이 영적인 사람이면 당신 주변에 영적인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당신이 육신적이라면 육신적인 사람들이 온다.
넷째, 몰약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뜻한다. 시 45:8에서 "당신의 모든 옷에서는 상아 궁전에서 나온 몰약과 알로에와 계피의 향내가 나며 그것들이 당신을 기쁘게 하였나이다." 라 말씀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향기다. 몰약에서 나오는 향기는 찌르는듯 강하게 나며 자극적이지만 그럼에도 좋은 냄새다.
몰약은 담배 연기처럼 향이 세기 때문에 밀폐된 방에서 그 냄새를 맡게 된다면 당장 나오고 싶어질 것이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면 세상은 당신을 보고 뭐라고 할 것이다. 당신의 말, 당신이 자주 보는 것, 듣는 음악을 갖고 말할 것이다. 몰약과 같은 그리스도의 향기는 너무 강력해서 때로는 당신이 냄새를 없애고 싶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복음전도자인 "렉스 해리슨"은 그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기 이전에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었다. 어느 밤, 한 술취한 여자가 그가 피아노 치고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피아노에 기대 술잔을 홀짝거리며 물었다.
여자가 "당신 크리스챤 맞지?" 라 묻는다.
해리슨은 깜짝 놀라서 "네,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라 대답한다.
여자는 "당신이 치는 블루스곡에서 그게 느껴지는데?"라 말한다.
만일 성경이 여러분 마음에 최종권위로 자리잡는다면 그때부터 여러분은 더이상 삶이 중립지대가 없다 느껴질 수 있다. 일단 성경이 여러분 마음 속에 들어왔다면 그때부터는 항상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킹제임스 성경이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남기는 향취는 너무 강해서 열심히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14절,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에 있는 캠퍼 송이로다.
캠퍼는 여성용 향수로 애용되는 또다른 아로마과 식물이다. 성경에 단 두번 등장하는데 솔로몬의 노래 1:14, 4:13이다.
이런 "희귀 단어"가 등장할 때는 어김없이 멍청이 학자들이 나와서 번역에 대해 씹어대기 시작하는데 그중 윌리엄 스미스라는 자는 "의심할 바 없이 이 캠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캠퍼 대신 사이프러스(cypress, 삼나무)라 불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캠퍼의 히브리어 단어 발음은 "copher"인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사이프러스(삼나무)는 "tirzah"이다. 이 단어는 이사야 44:14에 한번 등장한다. 나는 킹제임스 번역자들이 "camphire"와 "cypress"를 구분할 줄 알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서로 분명히 다른 단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몰약 다발"이 이집트 원산의 "헤나 식물"(염색용)이라고 보는데 누비아인들은 그것을 khofreh라 불렀다.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어를 충실하게 번역한 것이며 실수한 것이 아닌데 학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잘난 체 할 뿐이다.
엔게디는 사해의 서쪽 해변 중앙에 있는 도시인데(수 15:62) 다윗이 사울로부터 도망할 때 거기 머물렀었다(삼상 23:29, 24:1). 그 도시는 하사손타말(대하 20:2)이라고도 불렸다. 천년왕국 때는 엔게디가 사해로부터 지중해로 물이 흘러가는 입구가 될 것이다. (사해가 죽은 바다가 된 이유는 물이 외부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해가 증발하면서 막대한 소금이 생성되고 그것은 바다 생물들을 죽여 버린다.)
솔로몬의 치세 기간 엔게디에는 "포도원을 포함한 다양한 식물들의 식물원"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에서 캠퍼 같은 헤나 식물이 재배되는 유일한 장소였다. 이 구절의 역사적 해석을 마치고 이제 영적 의미를 캐 보도록 하자.
신부는 세 가지 타입의 장신구와 세 가지 향수들을 갖추게 된다. 장신구는 보석들, 금, 은이며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주어지는 보상도 "금, 은, 보석들"이다(고전 3:12). 신부는 그리스도를 섬긴 댓가로 그 장신구들을 취한다.
또한 세 가지 향수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세 직분, 왕, 제사장,선지자에 관련된 것이다. "감송향유"(12절)는 왕의 직분, "몰약"은 선지자, "캠퍼"는 제사장 직분과 관련있다.
1:15 보라, 나의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보라, 너는 어여쁘도다. 너는 비둘기의 눈을 가졌도다.
1:16 보소서, 나의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아름다우시며 참으로 사랑스러우시니 우리의 침상도 푸르나이다.
1:17 우리 집의 들보들은 백향목이요, 우리의 서까래들은 전나무로다.
이 단락은 확실히 왕이 신부에게 말하는 것인데, 1-7절에서는 신부가 왕에게 말하다가 8-11절에서는 왕이 신부에게 말했고, 12-14절에서는 신부가 왕에 대한 묘사를 했으며, 이제 15-17절에서는 왕이 신부에게 다시 말씀하고 있다.
"어여쁘다"(fair)라는 단어는 주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그래서 주목해서 살펴야 한다.
"너는 비둘기의 눈을 가졌도다" 비둘기의 눈은 회색이고 날카로운 느낌이며 한 번에 사방을 주시할 수 있다. 신부만이 아니라 신랑도 비둘기의 눈을 가진 것으로 언급된다(솔 5:12). 신랑과 신부의 눈매는 서로 닮았다.
주께서는 몸의 빛은 눈이라. 그러므로 네 눈이 순전하면, 네 온몸이 빛으로 가득 찰 것이요,(마 6:22) 라 말씀하셨고 또한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요 9:5)이시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골 1:27)을 소유하고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면 그 눈도 그리스도와 닮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것처럼 사물을 봐야 한다.
주께서는 정결한 눈을 가지셨기에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죄악을 볼 수도 없나이다(합 1:13).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사악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타락한 자들의 행위를 미워하오니 그것이 내게 붙어 있지 못하리이다(시 101:3).
16-17절로 넘어가서, 본문은 신혼부부의 "허니문"을 설명하는데 방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야외를 언급한다. 그것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아담과 이브가 정원에서 "야외 결혼식"을 했던 것을 기억해 보라.
과학과 교육은 하나님의 개입 없이 인간을 에덴으로 돌려보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인간을 다시 벌거숭이로 만들어 완벽한 여건 속에 살게 만들어 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낙원 같은 세상을 자신의 방식대로 가져오실 것인데 야수들이 먹잇감과 놀고 아이들이 맹수들과 뛰놀게 만드실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이새의 뿌리"이시며 "깃발"이신 분(사 11:10)이신 분이 등장해서 천년왕국을 세워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평화도 없다. 단순한 문제다.
평화의 왕이 통치하러 오기 전에 세상은 점점 더 큰 전쟁들에 시달릴 것이며 운석들이 땅에 떨어지고 짐승들은 사람들을 해치고 마귀같은 괴물들이 구렁에서 올라오며, 식인이 전세계적 종교 의식으로 행해지고, 환경 대재앙들, 즉 크라카토아 화산 폭발(1883), 인도네시아 쓰나미(2004), 강력한 허리케인 같은 일들이 쉴새없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계 6-18장에 묘사된 예언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평화 계획"이며 UN을 정리하시는 해법이다. 반세기 전부터 헐리우드는 그때 일어날 재앙들을 미리 묘사해서 돈을 벌고 있다.
17절은 역사적으로 솔로몬이 지었던 큰 집들 중 하나를 암시하고 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고, 자신의 궁궐을 지었으며 셋째로 파라오의 딸, 자기 아내를 위한 집을 따로 지었다. 솔로몬이 지은 집들은 항상 백향목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유독 성전에는 "전나무" 널판이 사용되었다(왕상 6:15). 17절에서는 건물의 서까래가 전나무라 말씀하지만 왕상 6:15에서는 전나무가 성전의 마루에 까는 용도로 쓰이고 있기에 차이점이 확인된다.
그러나 솔로몬이 자신의 궁을 십삼 년에 걸쳐 지어 그의 모든 궁을 준공하니라.
그가 또한 레바논의 산림에서 나는 것으로 집을 지었는데, 그 길이가 일백 큐빗이요, 그 너비가 오십 큐빗이며 그 높이가 삼십 큐빗이고, 백향목 기둥 네 줄 위에 백향목 들보를 그 기둥 위에 놓았으며,(왕상 7:1-2)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할 유형으로 보자면 땅이 에덴처럼 회복된 이후에 우리는 "진실로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6)가 될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요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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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영상 강의 기다리고 있었는데 올려 주셨군요~~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