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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순문학 원고 -
확률
출근길 가로수에서 무엇이 툭 떨어진다
하마터면 정수리에 맞을 뻔 했다
주어보니 아직 푸르고 물렁한 땡감
삶의 애착처럼 끈적이는 점액질 묻혀가며
모정의 뿌리 깊은 등걸에 붙여 두고
잰걸음으로 등교 길 오르며 생각한다
저 감에 내가 맞아 죽을 확률보다
한 백년 조용히 살 확률이 높을까
저 나무처럼 매년 새 잎을 틔우고 결실 맺는 확률보다
급락하는 영육의 생산성 서글프지만
다만 이렇게 확실히 열린 오늘 하루
미성숙한 과실의 만유인력 법칙 보며
내게 주어진 사명 100% 다 하기를
간구하며 묵상하니 새 힘 난다.
2010.09.04
청계천에서
도심의 밤은 찬란하였다
어릴 적 목 아프게 우러르던 삼일 빌딩
꼭대기 올라앉아 맥주를 마실 때
이만큼 올라와도 작아지는 세상
얼 만큼 올라가야 별처럼 보일까
까짓것
마구 사랑하고 용납하자
손바닥만 한 땅 손톱만 한 집
개똥벌레처럼 스멀대는 차량의 빛
안주로 씹는 한치 뒷다리
메마른 빨판에서 바닷물 샘솟는다.
2010.09.
가을 빗속의 축제
그래 그것은 하늘의 축복이었어
자만과 무대 공포 씻기고 다스리는
축제의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가을비
다시금 생각하니 그건 눈물이었어
우리의 땀과 열정 구름 되어 피어올라
무심한 하늘도 울린 보석 같은 저 눈물
아니야 그것은 하늘의 탄식이야
이천만 북녘동포 세끼 밥 못 먹는데
비만한 어린 황태자 삼대 세습 기가 막혀
부활한 청계천은 거침없이 흐르는데
그리운 대동강에 불어나는 피눈물
능라도 큰 멍석 삼아 축제 열 날 언제런가
2010/10/02 "시가 흐르는 청계천" 축제를 마친 후
백제의 부활
무대는 백마강 낙화암은 병풍이었다
시공을 넘나드는 스펙터클 축제의 꽃
오롯이 피고 질 때에 환호하는 만원 관중
물에서 태어나 물속으로 스러져 간
생명의 순환처럼 흘러가는 역사의 강
웅장한 대 서사극을 숨죽이며 바라본다
마지막 꽃잎으로 몸을 던진 내 사랑아
통곡의 저 절벽을 이제 그만 떠나거라
부활송 우렁찰 때에 불꽃으로 타올라라
2010/10 백제문화제 참관 후
뱃부에서
폭발을 자제하는 분출은 경이롭다
지옥을 순례하는 인간들 행복할 때
새벽 잠 흔들며 우는 부지런한 저 매미
아소산 모락모락 부글부글 분화구
끓는 물 유황 내음 땅기운 요동칠 때
아! 그래 허공 맴도는 천황의 감탄사
폭염아 물렀거라 열탕으로 들어간다
발바닥 배꼽 지나 목젖까지 잠길 때에
상쾌한 고행의 결말 소멸하는 진한 여독
2011.07
어떤 죽음
법 없이 어쩌면 종교도 필요 없이
착하게 살아 온 청년의 죽음 앞에
바치는 눈물의 애도 영안실이 비좁다
노벨상 꿈을 꾸던 과학영재 그 아들
어미와 애비 가슴 찢으며 묻힐 때에
폭우야 숨을 죽여라 이유 한 번 물어 보자
화려한 꽃일수록 허망하게 진다고
외치며 노래하고 먼저 떠난 가수야
남겨진 사람들 심장 터져야만 되겠니?
2011/07
춘천산사태로 숨진 지인의 아들 영전에
연두빛 우정
봄이다!
출근길에 스쳐 지나는 여의도 윤중로는 벚꽃으로 덮여 있고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물결처럼 흘러간다
폭발하듯 피어난 연분홍 벚꽃은 화사하여 좋고 갓 피어난 연두색 버들잎은 애련하여 사랑스럽다
벚꽃은 육안으로 보고 경탄을 하지만 연둣빛 버들잎은 심안으로 보며 가슴 속에 새긴다
경탄은 이내 소멸하지만 새겨진 감흥은 길게 남는 것
계절에 봄이 있다면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
이미 인생의 초가을에 접어든 나이에서 추억하는 유년시절은 슬픔처럼 아름답다
지나간 유년시절이 연두색 옷을 입고 이 아름다운 봄날 아침에 차창으로 들어온다
강아지처럼 뛰놀던 우리 동네 뒷동산에 아롱져 핀 연분홍 진달래의 앙증맞은 이파리와 병아리처럼 종종거리며 등교하던 학교 길에 환하게 웃어주던 샛노란 개나리의 꽃받침도 연두색이었다
쑥과 냉이 씀바귀 등 봄나물과 그들을 품고 있는 데부뚝(제방)도 연두색일 때가 제일 좋았다 연둣빛이 점차 짙어져 녹색이 되고 청록으로 한여름을 살다가 단풍으로 물들어 마침내 낙엽으로 지건마는.....
자연과 인생의 엄연한 순환고리에서 연둣빛은 뻗쳐 오르는 꿈과 희망의 색깔이라서 좋다
철이 안들어서 이해타산이 없는 순수의 빛깔이라서 더욱 좋다
6년간 한 교실에서 연둣빛으로 함께 자라던 초등학교 동무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아직도 변함없는 빛깔로 나를 보면 웃어주는 그들의 연둣빛 우정이 있기에 살 맛이 난다
한강을 바라보며
아파트 숲사이로 한 뼘쯤 한강이 보인다.
2학기 중간고사가 한창인 교실 유리창에 가득 차는 가을 하늘은 천하일색 고려청자를 낳은 나라답게 영롱한 비췻빛이다.
치열하게 시험지와 씨름하는 아이들보다 이미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많은 이 공간, 시험 감독의 눈길은 자꾸만 창밖으로 돌아간다.
이 학교에 몸을 담은 지 어언 22년, 빛 동산 배움터에 오늘도 변함없이 햇살은 저리도 고운데, 그토록 싱싱하던 나의 젊은 날은 이미 가을의 문턱을 넘어섰다.
내가 근무하는 광성중고교는 116년 전 평양에서 개교하여 해방 후 월남하여 우여곡절을 겪은 이래 50여 년 전 이 곳 서울 마포구 신수동 한강 변 언덕으로 이전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
처음 부임하여 천방지축으로 심신이 흔들릴 때, 남쪽으로 탁 트이게 보이는 한강은 큰 위안과 격려를 보내며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노고산과 서강대가 지금도 마주 보이고, 서쪽으로는 아파트 붕괴사고로 유명해진 와우산, 북쪽으로는 신촌로터리를 지나 연세대 뒷산인 안산과 태고종의 본산인 봉원사도 보였었다. 그 중에서도 마포대교로부터 여의도 고층빌딩을 거느리고 양화대교까지 거침없이 흐르는 한강과 그 뒤로 아스라히 보이는 관악산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얼마 후 가뜩이나 좁은 학교의 남쪽으로 거대한 병풍처럼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교직원들이 현장으로 몰려가 시위도 해 보았지만 무자비한 공룡의 횡포를 막을 길 없이 마포대교와 여의도와 관악산의 조망권을 상실하였다.
이어서 신촌에 고층빌딩이 하나 둘 세워지면서 안산과 봉은사가 안 보이고, 와우산은 과거의 치욕을 덮으려는 듯 아예 고층아파트의 숲으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절묘한 위치의 교실에서만 명함 한 장 크기의 한강을 볼 수 있게 된 오늘, 운 좋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한 뼘쯤 드러난 한강을 바라보며 과거를 더듬자니 숨이 가빠진다.
당장 자전거를 채찍질하여 한강 변에 잘 가꾸어진 올레길을 따라 질주를 하고싶다.
익어가는 가을 하늘에 뭉게구름은 높아만 가고 풍성한 햇살이 더욱 빛나는 오후, 콘크리트 옹벽에 갇혀 탈출을 꿈꾸는 중년교사의 달콤한 회상이 시험 종료 차임벨에 산산이 부서진다.
2010/10
잊혀진 계절
철석같은 약속을 지키는 듯 다시금 10월의 마지막 날이 다가온다. 노오란 은행잎은 눈부신 황금빛으로, 붉은 단풍잎은 결재된 보증수표의 인주 빛으로 물들어 저마다 갚아야 할 1년의 빚을 아름답게 청산하고 있는데, 5년 전 이맘때 한마디 변명도 없이 떠나신 어머니는 오실 줄을 모른다.
10여 년 전 겨울날, 어머니는 살점을 에이는 대한 추위 속에 언 밭에서 점심도 거른 채 고추농사에 쓸 말뚝을 뽑고 귀가한 직후, 텅 빈 집에서 홀로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우연히 집에 들른 동네 아주머니가 발견하고, 외출하셨던 아버지께서 돌아와 황급히 읍내 병원으로 옮겼으나, 초기 대응의 실패와 의료사고까지 겹친 불운으로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의식불명이 되고 말았다. 명색이 종합병원인데 신경외과가 없어 어머니의 증세를 폐렴으로 오진하고, 발작하는 몸부림을 침대에 팔다리를 묶어 제압한 무지몽매한 행위는 지금도 용납 못 할 만행이었다. 부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구급차 안에서 몸부림치는 어머니를 부여잡고, "괜찮아 엄마!, 조금만 참으세요."를 수없이 외치며 자동차에 날개가 돋아 날아가기를 얼마나 갈망하였던가? 지금도 운전 중에 경적을 울리며 질주하는 구급차를 만나면 그때가 생각나 심장이 떨리고 그 안에 있을 환자를 위해 기도를 하게 된다.
세상에 나 같은 불효자가 어디 있으랴. 어머니가 고통 속에 쓰러져 신음하던 때에 나는 최고의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 동료교사의 권유로 패러글라이딩에 입문한 후 처음으로 100m 고지에 올라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기쁨을 만끽하였고, 첫 비행의 성공에 축배를 드는 중 걸려온 형님의 전화는 청천벽력같은 비보였다. 조금 전까지 고마웠던 낙하산이 원수가 되고 우렁차던 건배의 외침이 비명으로 바뀌는 희비의 쌍곡선은 예리한 칼날처럼 내 가슴을 베었다.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온 후 그제야 뇌경색임을 알았으나 이미 시간이 늦어 병세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후 5년 9개월 동안 어머니는 자체호흡만 하시면서 한마디 말도 못하고 누워 계시다가 5년 전 10월 말에 고단한 눈망울을 영영 닫으시고 귀천하시었다. 24시간 간병인이 딸린 요양병원이지만 거의 매일 통원하여 어머니의 병상을 지킨 아버지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돌아가며 병원을 찾은 5남매의 정성도 헛되이 숨을 거두시던 날 새벽 그 곁에 피붙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가 안 계신 고향은 고향이 아니었다. 어미 새가 없는 고향 집은 이제는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명절마다 온종일 걸려도 피곤을 모른 채 마음 설레며 달려가던 귀성길은 잊혀진 추억이 되고, 고향 집은 폐가로 전락하였다. 어머니 손길로 윤이 나던 장독대엔 낙엽이 쌓이고,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옹기들과 농기구들이 하나 둘 사라져갔다. 아버지의 섬세한 손길과 애환을 머금고 사철 아름답던 화단과 문전옥답은 대숲으로 변해버렸다.
"난 80이나 살지 몰라."라는 아버지 말씀에 "난 100살까지 문제없어요."라고 장담하시던 어머니, 올해 82세이지만 아직도 정정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할 때마다 그분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진다.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을 부흥시킨 황무지의 개척자였다. 이른 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농사일과 가사노동으로 쉴 틈이 없는 중에도 소와 돼지를 키우고, 철 따라 병아리와 시보리(일본 수출용 보세가공품)장사 등 부업을 하셨다. 이런 결과 시집올 때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축에 들던 우리 집이 부잣집 소리를 듣게 되고, 슬하의 5남매가 대학을 졸업하는 중에도 논을 한 평도 팔지 않으셨으며, 자녀가 보내준 용돈도 꼬박꼬박 모으셨다. 어머니가 쓰러지신 후 아버지가 10개에 가까운 통장을 내보여주셨는데 그중에는 장례비와 손자 손녀 대학 입학 축하금을 위한 것도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 교육을 위해 육탄으로 돌진한 교육혁명가였다. 금쪽같이 소중한 새끼들을 서울로 공주로 미련 없이 내 쫓았으며, 두 여동생을 시골 우리 동네 최초의 여대생으로 만드셨다. 장래가 불투명한 음악공부를 하는 나를 위해 자신은 행상 중 끼니를 거르시면서도 식솔처럼 키운 송아지와 돼지를 아낌없이 팔아 레슨비로 보내주셨다.
어머니는 혈족과 이웃을 가리지 않고 사랑을 실천한 박애주의자였다. 어디 다녀오실 때면 할아버지를 위해 꼭 빈손으로 오지 않으셨고, 많은 시누이와 친정 형제들을 정성으로 돌보아 우애의 중심축이 되셨으며, 마을의 대소사를 항상 앞장서 추진하신 여걸이셨다.
푸른 계절에 태어나 10월의 마지막 날에 고운 단풍 옷 입은 뒷동산에 누워 풍성한 결실의 가을을 상실의 계절로, 나의 애창곡 "잊혀진 계절"을 사모곡으로 바꿔 놓으신 내 어머니, 그 고된 삶의 옹이가 박힌 손마디를 다시 한번 만져보고 싶다. 돌아가시기 전 모습 그대로 비록 말씀은 못 할지라도 초췌한 그 얼굴을 바라보며 가녀린 숨결을 절절히 느끼고 싶다. 메마른 그 가슴에 볼을 비비며 속 시원하게 한바탕 펑펑 울고 싶다.
2010/10/27
자비로운 도둑님
거센 찬바람에 고운 단풍이 속절없는 낙엽으로 휘날리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일본이 강탈해 간 ‘조선 왕실의궤’를 비롯한 우리나라 희귀문서와 병인양요 때 프랑스해군이 가져간 외규장각도서를 돌려받는 실무협정이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비록 외규장각도서는 반환이 아닌 대여라는 형식을 취하여 아쉬움이 남지만 돌아올 길을 열었다는 점은 환영할 일이다. ‘조선 왕실의궤’는 일본의 만행으로 참살당한 명성황후의 장례절차 등 왕실의 각종 행사를 그림과 함께 낱낱이 기록한 귀중한 책인데, 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과 조선총독부에서 불법으로 반출해 간 것을 돌려받게 된 것이다. 외규장각도서는 강화도의 왕실 서고에서 귀한 대접을 받다가 1866년 졸지에 들이닥친 푸른 눈의 외국군에게 약탈을 당하여 이역만리 타국으로 끌려가던 치욕의 항로보다 돌아오는 길이 더 험난하였다. 프랑스 국립박물관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던 중에 지각있는 후손인 박병선 박사가 발견하여 그 실체를 세상에 알렸고, 우리 정부의 반환요청이 때마침 프랑스가 참여하게 된 고속철도사업과 맞물려 받아들였고, 이후 반환형식을 둘러싼 양국 문화계의 상반된 논란 속에 일단 실제로 반환과 다름없는 임대형식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포악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로부터 물품을 강제로 뺏는 것을 강도질이라고 한다.
평범한 개인의 강도행위는 비교적 법의 심판이 준엄하지만 국가나 국가의 비호를 받는 개인이나 단체의 강도짓은 역사적으로 심판은커녕 영웅시되기까지 하였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에 가 보면 세 번 놀라게 되는데 첫째, 그 소장품의 방대함과 훌륭함이요, 둘째 그 소장품의 대부분이 타국에서 약탈해온 것이요, 셋째, 그 나라 사람들이 뺏어온 소장품들을 자국의 보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일본의 국보 1호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대영박물관이 자랑하는 로제타석이나 람세스 상, 그리고 루브르박물관의 명품인 비너스상은 모두 어떤 경로를 통하여 갔던지 우리나라와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의 유물인 것이다. 로마에 가 보면 도심의 명소마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종교시설인 판테온과 베드로성당도 예외는 아니며 심지어 어떤 성당은 정복지의 이교도신전들을 파괴하고 가져온 기둥들을 모아 지은 것도 있었다. 승전의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전장에서 막대한 전리품과 수많은 포로를 끌고 개선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라지만 패전국의 역사와 전통을 짓밟고 세계공유의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는 야만이다.
정당하게 나간 유물일지라도 그 유물은 본래의 자리에 돌아와 있어야 그 의미와 가치가 극대화되는 것이다. 하물며 강제로 빼앗거나 훔쳐간 유물은 무조건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원칙이다. 수년 전 로마에 갔을 때 석양에 빛나는 캄피돌리오광장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집트 사자 상의 눈망울을 보며 가슴이 아려오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생명이 없는 석상이 이럴진대 하물며 산 인간이야 오죽했으랴!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일본을 거쳐 베니스까지 끌려간 우리 조상은 ‘베니스의 개성상인’이란 소설로 부활하였고, 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끌려가 환향을 못한 채 낯선 땅에 고혼을 묻은 수십만의 유골은 치욕의 역사 속에 진토가 되고 말았다. 유한한 인생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민족유산은 그 땅에 되돌려 대대로 물려주어야 한다. 얼마 전,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고려불화 전을 보러 갔었다. 전 세계에 현존하는 고려불화 300여 점 중 국내에는 30여 점 뿐이고 250 여점이 일본에 있으며 나머지는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전시작품 중 최고의 걸작인 ‘수월관음도’는 불화에 문외한인 나의 눈에도 경이롭게 비쳤다. 불법을 구하는 선재동자를 바라보는 관음보살의 얼굴에는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신비한 경지가 담겨 있었고 버들가지를 든 섬섬옥수에서 향긋한 봄바람이 일렁이는 듯하고 극치로 섬세한 필치와 색채는 700년의 세월을 어제처럼 무색하게 하였다. 전시회를 위해 작품을 빌리려고 일본의 사찰에 간 문화재청장이 어렵게 만난 수월관음도 앞에 삼배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한 주지가 결심을 하여 보내 준 이 명작이 어떻게 바다를 건너갔는지 알 길은 없지만, 평생에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었다. 이 명품이 우리나라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찾아와 위안을 얻을텐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는 등 뒤에서 선재동자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돌아와야 할 것이 어찌 ‘수월관음도’ 뿐이랴 ‘몽유도원도’, ‘왕오천축국전’, ‘직지심경’은 우리나라로, 영국인이 파르테논신전에서 무자비하게 뜯어간 조각상은 그리스로, 나폴레옹의 군대가 캐내 간 로제타석은 이집트로 돌아가야 한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잡혀와 대영박물관에 갇혀 오매불망 귀향을 꿈꾸는 람세스 상은 도도히 흐르는 나일강과 함께 조국을 지켜야 한다. 잘못된 의식으로 저지른 만행을 뉘우치고 장물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도둑님의 자비심을 간절하게 빌며 바라보는 창가에 황혼이 진다.
201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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