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보문화(보령문화) 제 6집(1997년)에 실린 글입니다.
가. 소년나무꾼
1950~1960년대의 시골 어린이들은 어려서부터 나무를 하면서 자랐다. 나도 초등학교 취학 전부터 나무하러 다닌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다섯 살 위인 형을 따라가서 조금씩 같이 하였고 8~9세 때 부터는 구럭을 짊어지고 가서 솔방울, 버급쟁이, 솔가루 등을 담아오곤 하였다.
내가 난생 처음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간 것은 초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아홉 살 되던 해 늦여름으로 기억된다. 집에서 작은 들을 건너 500~600m정도 떨어진 불걱산(흙이 붉은 황토로 된 산이라서 그리 불렀음)이란 작은 야산에 가서 푸장나무를 해 왔던 것.
이렇게 시작된 나무하기는 학교에 안가는 공휴일이나 방학 때는 물론 평일에도 집에 돌아왔을 때 어둡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의 여유만 있으면 나무하러 산으로 가는 생활로 이어졌다. 시계가 없던 시절(한 동네에 한 두개정도 있었음)이었으므로 시간을 측정하는데 서산에 기우는 해를 기준으로 하여 그날그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서산으로 해가 넘어갔으면 나무하러가지 않는 날이고, 아직 해가 보이면 나무하러 가는 것으로 정해놓고는 해가 넘어가기 전에 집에 도착하기 위해 빨리 뛰어오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요즈음 초등학생들이 집에 가서 일을 하기 위해 빨리 달려가는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러나 그때는 많은 학생들이 으레 그렇게 하는 걸로 알았고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했기에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풍요를 이룰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중학생 때의 어느 일요일엔 5~6km정도 떨어진 통점절(용주암, 주산면 금암리 소재)부근에 가서 먼산나무를 해오는데 도중에 학교가 있는 면소재지를 거쳐야했다. 그때 신나게 뛰어놀던 같은 반 친구들이 나뭇짐을 지고 지나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고생한다며 눈깔사탕을 주었을 때 배고픈 참에 먹던 그 맛이 어찌나 좋던지 그 후 아직까지도 그렇게 좋은 맛은 다시 보지 못한 것 같다. 어느 땐가는 집에 땔나무가 떨어져 그 날 저녁밥 지을 나무도 없는 형편에 이를 때가 있었다. 고3인 형과 중1인 나,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인 동생 등 3형제가 짜기를 “우리가 오늘 학교를 결석하고 나무를 하기로 하자.”라고 의견을 모은 후 이 사실을 아버지께서 아시면 날벼락이 떨어 질 터이니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다. 선친께서는 당시 우체국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데 우리는 꾸물꾸물 책보를 챙겨가지고는 천천히 집을 나오다가 아버지께서 서낭댕이(성황당) 고개를 넘어가셔서 안보이게 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나무를 한 기억도 난다.
나. 쐐기 쏘이고, 벌 쏘이고, 독사 물리고, 손 베이던 푸장나무
더운 여름 날씨에 푸장나무를 하려면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다. 땀으로 멱감으며 나무를 뜯거나 짊어 나르는 것은 기본이고.
○ 나뭇잎에 붙어있는 쐐기는 곤충의 애벌레인데 등에 나있는 수많은 가시가 모두 독침으로 되어있다. 종류에 따라 독성도 차이가 있고 쏘였을 때 아픈 정도도 차이가 나지만 아무튼 모두가 보호색을 띄고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방심하고 나무하는 사람의 손이나 팔뚝이 닿으면 ‘톡’하고 쏘는데 그 통증이 대단하고 퉁퉁 부어올라 하루 이틀 정도 가므로 나무꾼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며
○ 정신없이 나무를 뜯다보면 모르는 사이에 벌집을 건드려 갑자기 덤벼드는 산벌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쏘여서 고생하는 수도 종종 있게 된다. 그나마 왕탱이(말벌)는 덩치가 크고 동작이 떠서 윙윙 소리를 듣고 피하기도 하고(한방만 쏘여도 크게 고생함) 바다리도 동작이 빠르지 못하며 몇 마리가 덤비는데 불과해 피할 수도 있지만 옷빠시(땅벌의 일본말) 집을 건드렸다간 작고 날쌘 놈들이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덤벼오는 통에 아무리 동작 빠른 사람이 재빨리 도망쳐도 한두방에서부터 많게는 십여방까지 쏘이는 일이 예사여서 얼굴이 퉁퉁 부어 가지고 다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 또한 칠월독사란 말도 있듯이 독사들이 한창 살이 찌고 독이 오른 푸장나무철에 한번 물리기만 하면 크게 고생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데(핏줄을 물리면 죽는다고 함) 푸장나무를 하다보면 종종 뱀을 볼 수 있고 재수 없이 물려서 고생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푸장나무 말린 것을 걷으려고 들어 올리면 그 밑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대가리를 번쩍 들어 놀래키는가 하면 나무전을 들어 올릴 때 그 속에서 뱀이 툭하고 떨어져 혼비백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 어디 그 뿐인가, 서툰 낫질은 물론 숙달된 나무꾼도 손을 버지기(베이기) 일쑤인데 산에서 손을 베이면 고운 흙가루를 상처에 뿌려 피를 굳게 하기도 하고 담배가루나 쑥잎을 짓이겨 붙여 지혈을 시키기도 하며 상처가 심한 경우에는 메리야스를 찢어 묶어 매기도 하였지만 웬만큼 다쳐서는 상처를 응급처치한 후 그대로 나무하기를 계속한다. 낫으로 베이는 것 이외에도 왁새(억새)잎으로도 흔히 손을 베었고 가시에 손을 찔리거나 등컬에 다치기도 하는 등 수난이 많았다. 그래서 나무꾼(특정인이 아니라 시골사람 거의가 농한기에는 나무꾼임)들의 손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고 그때 그분들의 손은 20~30년 동안 나무를 하지 않고 세월이 흐른 지금 보아도 옛날의 상처자국이 흐릿하게 보인다.
다. 산말림과 도둑나무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산은 대부분 주인이 있어 남들이 나무를 못하게 말린다. 대개의 산주인은 산 아래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에 가끔 자기네 산을 바라다보고는 나무하는 사람이 있으면 큰 소리로 “나무 하지 마아~.”하고 외친다. 그래도 나가지 않고 나무를 하면 쫓아가며 소리를 지르는데 그러면 슬그머니 다른 산으로 나가버린다. 간혹 고약한 산주인은 소리 없이 다가가 나무하는 사람을 붙잡아 혼을 내주거나 아예 지게를 빼앗아 버리기도 하고 나무꾼이 생나무를 베었거나 솔가지를 쳤을 땐 홧김에 지게를 부수어 버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산말림과 관련하여 웃지 못 할 이야기를 한 가지 소개하면 어느 성씨 종중이든 대개 조상 산소가 집단화된 종산에는 산지기를 두고 산을 지키며 벌초도 하고 시제 때 제물도 장만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인데 산지기는 대개 가난한 천민출신들이 하게 마련이었다. 양반계급이 없어졌다지만 당시엔 양반 상놈을 따지는 사람들이 많던 때였다.
어떤 양반이 자기네 종산에 들어가서 나무를 하는데 산지기가 이를 보고는 “나무 하지마아.” 하면서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놈이 양반을 몰라보고 반말을 하네! 괘씸한 놈!” 하면서 나무를 계속하다가 산지기가 가까이오자 “야 이놈아 양반보고 함부로 나무 하지마?” 하면서 씨근덕거리니까 산지기가 하는 말, “그럼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무 하지 마시오.’ 하나요? 그렇게 반말이 듣기 싫으면 나무를 하시지 말면 될 거 아니요.” 하고 따지고 들으니 이 양반(사실은 양반일 것도 없는 다 같은 서민처지이나 성씨 덕분에 양반입네 하는 것뿐이지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산을 지키는 일은 이렇게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정부차원에서 훨씬 더 엄하게 다루었다. 우리나라의 산림은 일제시대의 착취, 해방 후의 무분별한 남벌, 그리고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훼손되어 삼천리금수강산이 벌거숭이산으로 변해 버렸고 땔감으로 계속 채취하기 때문에 정부에서 아무리 치산녹화를 부르짓어도 그 효과가 미미하였다. 결국은 1970년대 대대적인 지붕개량으로 짚이 땔감으로 사용되고 이어서 연탄이 보급되어 땔감의 일대 혁신을 이루면서 우리 산들이 푸르름을 되찾았지만 그러기전인 50~60년대에는 나무베기를 엄격히 통제하고 산림조합과 산림직공무원들을 앞세워 민간인들이 몰래 나무를 베고 솔가지 치는 것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가끔씩 돌아다니면서 불법으로 나무 베는 사람들을 적발하는데 이들을 속칭 산림감사(산림감시)라고 불렀으며 이들 산림감사들의 서슬이 어찌나 퍼렇던지 어느 동네에 산림감사가 나타났다하면 집집마다 장작개비, 생솔가지 등을 감추느라고 온 동네가 완전히 비상이 걸리고 말았던 것. 그러다가 들켜서 애걸복걸 사정하거나 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빼기도 하고(빼다=없었던 것으로 해주다) 끝내 해결치 못하고 벌금(또는 과태료)을 물기도 하였다.
한편 그 시절에 세무서에는 밀주 단속을 심하게 하였는데 그 또한 산림감사 못지않게 악명(?)이 높아 ‘산림감사’와 ‘술조사’는 시골지역이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라. 나무꾼의 쉼터
나뭇짐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중간 중간에는 쉴 바탕이 있다. 아무리 무겁고 힘들어도 도중에 쉬는 일은 별로 없고 모두들 참고 쉴 바탕까지 와서야 나뭇짐을 받쳐놓고 쉬는 것이다. 쉴 바탕은 대개 모이마당(산소마당=묘의 둘레)과 같이 널찍하고 지게를 바치기 쉽도록 언덕이 진 곳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꺼번에 5~10명씩 와서 쉴 수 있는 것,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할 때쯤이면 여러 개의 나뭇짐들이 나뭇길(나무하러 다님으로서 난 좁은 산길)을 따라 일렬로 내려오는 광경이며 쉴 바탕에 짐을 받쳐놓고 땀을 닦으며 왁자지껄 떠들며 농담하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간혹 양심 나쁜 사람들은 묘 봉분에다 지게를 바치기도 하고 근처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를 캐먹기도 한다. 배고픈 김에 캐먹는 고구마의 맛이야 좋겠지만 밭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두 사람도 아닌 여러 사람들이 계속 캐 먹으면 고구마 농사는 완전히 망쳐버리는 것이므로 고구마 밭에 아카시아나무를 쳐다가 덮어놓기도 하고 나무꾼들이 돌아오는 시간쯤이면 밭에 나와 지키기도 해보는 등 안간힘을 쓰지만 그 피해는 상당히 컸다.
마. 나무 따먹기
사람이 사는 곳엔 으레 노름(도박)이 있기 마련인가, 나무꾼들이 산에서 나무내기 노름(?)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나무 따먹기라고 한다. 나무가 귀한 봄판(겨울동안 모두 채취했으므로 봄에는 채취할 나무가 적음)에 따뜻한 양지편 모이마당에 둘러앉아 잡담도 하고 씨름도 하고 실컷 놀다가는 집에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면 2~3명이 갈퀴나무 한전(한 아름 정도)씩을 내놓고 갈퀴치기 또는 낫치기로 승부를 가려서 이긴 사람이 몽땅 가져가는 것인데 나무를 딴 사람(이긴 사람)이야 의기양양해서 나무를 짊어지고 가지만 잃은 사람은 집에 빈 지게를 지고 갈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날이 어둑어둑 해지면 통나무를 베거나 생솔가지를 쳐가는 등 불법행위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 갈퀴치기
갈퀴의 자루는 땅에 대고 갈퀴발 중 맨 끝의 것 한 개를 한손으로 잡아 갈퀴 전체가 지상과 40~50도 정도로 비스듬하게 한 다음 흔들흔들 하다가 갈퀴가 뱅그르르 여러 바퀴 돌아 땅에 떨어지도록 힘껏 돌려서 던지는데 갈퀴가 엎어지면 이기는 것이고 잦혀지면(배 부분이 위로 오르면) 지는 것이 되며 모두가 엎어지거나 반대로 모두가 잦혀지면 갈퀴 돌리기를 계속해서 승부를 낸다.
○ 낫치기
낫치기는 낫자루 부분을 잡고는 앞으로 뱅그르르 여러 바퀴 돌아서 떨어지도록 힘껏 돌려서 던진 후 낫이 땅에 떨어져 꽂히면 이기는 것이고 안 꽂히면 지는 것이 되며 승부가 나지 않으면 던지기를 계속하여 승부를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