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타이시마치(太子町)
- 에이후쿠지(叡福寺)와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묘
타이시마치는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에 있는 ‘태자마을’이다. 동네 이름이 ‘태자마을’인 것은 여기에 쇼토쿠 태자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곳은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차로 한 시간 못 걸리는 산동네로, 도래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하였던 ‘치카츠 아스카(近つ飛鳥, 가까운 아스카)’이다.
▣ 가까운 아스카, 먼 아스카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의 『아스카-그 빛과 그림자』에 따르면 일본에는 아스카라는 지명을 가진 데가 40곳이나 된다고 한다.『일본서기』『만엽집』등 고대문헌에는, 아스카의 표기가 安須可(안수가), 飛鳥(비조), 明日香(명일향), 安宿(안숙) 등 여러 가지로 나오는데 모두 ‘아스카’라고 발음한다.
그중 초기 도래인이 살던 오사카 가와치의 ‘가까운 아스카(近つ飛鳥’라는 고을은 본래 ‘安宿(안숙)’이라고 표기했다고 한다. ‘편안히 잠잘 곳’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를 떠나 멀고도 험한 여행 끝에야 겨우 편안히 잠잘 곳을 마련했다는 뜻이겠다.
그러다 여기에 새로 온 도래인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이들을 금래(今來, 이마키)인, 즉 ‘이제 막 온 사람’이라고 했다. 금래인들은 이곳을 떠나 또다른 아스카를 찾아나섰다. 그들이 도착한 곳이 지금의 아스카다. 이때부터 오사카의 아스카를 ‘가까운 아스카’, 나라현의 아스카를 ‘먼 아스카’라고 했다. 당시 야마토 정부가 오사카 나니와(難波)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먼 아스카를 왜 명일향(明日香) 또는 비조(飛鳥)라고 표기했을까? 이어령 선생은 이를 두고 이두식 우리말로 읽으면 비조는 날 비(飛)자, 새 조(鳥)자로 ‘날(日)새’가 되어 ‘내일’이 되고, 명일향의 명일(明日)은 내일이고 향(香)은 고을 향(鄕)과 발음이 같은즉 둘 다 ‘내일의 고을’이란 뜻이 된다고 해석했다. 탁견이다.
내일에의 희망! 고향을 떠나온 도래인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동네 이름이다. ‘먼 아스카’는 메이지유신 이후 행정지명을 ‘明日香村(명일향촌)’으로 하여 지금도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2 -
치카츠 아스카 산자락에는 엄청나게 많은 옛 무덤이 떼를 이루고 있다. 쇼토쿠 태자의 묘뿐 아니라 스이코 여왕을 비롯한 네 명의 왕릉도 있고, 소가씨 일족의 집단묘역도 있다. 아스카시대 지배층의 묘역으로, 이 고분군은 ‘미나미카와치 고분군’이라 불린다.
치카츠 아스카는 동네 이름만 남았고 한반도 도래인들이 살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현재 확인된 280여기 고분 중 40기의 고분을 복원하고 ‘치카츠 아스카 풍토기(風土記)의 언덕’이라는 약 30만 평의 넓은 사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쇼토쿠 태자의 묘는 왕릉의 계곡으로 불리는 시다가다니 고분군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엔 태자의 세 부인도 한곳에 뭍혀 있기 때문에 3골(骨) 1묘(墓)라고 불린다. 2002년 궁내청(일본의 왕릉은 문화청이 아니라 황실 궁내청에서 관리함)이 태자묘 주위를 정비하는 도중에 봉분의 흔적을 발굴해 일본 고고역사학학회 대표 등 몇몇 전문가들에게 처음으로 묘소의 상황을 공개했는데, 봉분 직경은 55미터 정도이다.
태자묘 앞에 세워진 절이 에이후쿠지(叡福寺)로 태자의 제사를 맡고 있다. 오사카 시텐노지(四天王寺), 나라 호류지(法隆寺)와 함께 태자 신앙의 중심 사원으로 꼽힌다. 전하기로는 쇼토쿠 태자가 622년 세상을 떠나자 묘를 수호하고 영혼의 복을 빌기 위해 법당 하나를 세운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하며, 724년 쇼무(聖武) 천황의 칙령에 가람이 세워졌다고 한다. 본래는 호류지와 마찬가지로 동원과 서원으로 구성되었고 동원을 덴호린지(轉法輪寺), 서원을 에이후쿠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의 가람은 1574년 오다 노부나가의 병화(兵火)로 소실된 뒤 바로 재건된 것으로 경내에는 금당, 성령전, 보탑 등이 있다. 태자당이라고도 불리는 현재의 성령전은 160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로 복원된 것이다. 보탑, 금당, 종루 등도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모두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6세기 후반에 용명천황(用明天皇)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최초의 절 법흥사(法興寺:593년 창건)에서 고구려승 혜자와 백제승 혜총으로부터 불교를 배웠다. 일본에는 538년 불교가 전래되어 공인되긴 하였으나 토착 종교인 신도가 성행하였고, 유교도 도입되어 생활규범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특히 쇼토쿠태자 시절의 조정은 배불파와 숭불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용명천황이 죽자 두 파간에 투쟁이 벌어졌는데, 숭불파인 소가씨를 지원하여 승리하였다.
일본이 불교국가로 자리잡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불교를 포교하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 호류지(法隆寺)를 지었고, 17조헌법을 만들어 삼보를 공경할 것을 명하고 선악의 도리로 불교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불교만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며, 불교를 중심으로 토착 종교인 신도와 유교의 좋은 점을 모으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신불유습합사상(神佛儒習合思想)이라 하며 좋은 점은 재빨리 받아들이는 일본인의 독특한 사상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는 또한 17조헌법과 관위12체계를 통해 국가제도를 정비하였다. 17조헌법의 제1조는 '화합은 가장 고귀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대화로 정해야 한다'인데, 이 정신은 오늘날 일본 관료제도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일본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외교사절을 중국에 파견하였고, 수도를 아스카(飛鳥)에서 이카루가(班鳩: 지금의 나라)로 옮기기도 하였다. 622년에 사망하였다.
태자당(성령전)- 160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지시로 복원된 것, 쇼토쿠 태자와 그의 세 부인도 한곳에 묻혀있다.
예복사(叡福寺-에이후쿠지) - 쇼토쿠 태자의 제사를 맡음.
예복사 보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