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무늬 저 여자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까*
1
얼룩무늬 저 여자
오늘 같은 밤 겨울비는 내리는데
여자는 혼몽한 시선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아무도 없는 술청에 오도카니 앉아
장단도 없는 한 자락을
풀어내고 있는 주모처럼 저 여자
헛것으로 앉아 있네
빗소리가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로 들려오면 저 여자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내리고
실낱같은 희망은
바닥에 떨어져 내리네
물끄러미 흐려지는 유리창엔
주루룩주루룩 눈물같은 빗물이 흐르고
하나 둘씩 꺼져가는 불빛들로
거리는 더욱 더
어두워져 가는데 저 여자
지금 어느 골목쯤을 헤매다
돌아 나오고 있는 참인지
지나간 시간들의 모퉁이를
돌고돌아 발등은 부르트고
눈자위는 검은 너울을 쓰고 있네
혼자 마시는 술에
홍조는 띠어서 무엇할거나
청춘이라는 쓴 술잔을 마셔버린
입술마저 파리해져가는 저 여자
목으로 넘기지도 못한 서러움이
꺼이꺼이 저고리 앞 섶을 적시며
얼룩져 가는 저 여자
까마득한 세월을 건너고 있는데
발자국 같은 빗소리도
이미 끊긴 정적 속으로
싸늘하게 식어가는 저 여자
진눈깨비 되어 내리는 밤이었네
조윤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얼룩무늬 저 여자>를 읽는다. 얼룩무늬, 패션의 일종으로서의 얼룩무늬 여자를 상상하면서. 또는 얼룩말을 떠올리면서.
원래 얼룩말은 줄무늬가 없었다는 거다.
사실 줄무늬 없는 얼룩말이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훨씬 살아남기가 쉬웠을지도 모른다. 줄무늬는 사자나 호랑이의 이빨을 막아내거나 부러뜨리는 갑옷이기는커녕 오히려 포식자들의 눈에 더 잘 띄니까. 헌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얼룩막이 줄무늬를 갖게 된 이유.
어떤 진화생물학자의 이론에 의하면
얼룩말의 줄무늬는 체체파리를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적 진화의 결과란다. 체체파리는 아프리카에 사는 파리의 한 종륜데 수면병이라는,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고야 마는 무서운 병을 옮긴다는데.
빙하기 이후 아프리카로 건너온 얼룩말은 체체파리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결국 체체파리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로 얼룩말은 이름 그대로 얼룩줄무늬를 갖게 되었단다.
눈 구조상 큰 덩치는 잘 파악하지만 줄무늬는 해체되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는 체체파리의 시각적 단점을 얼룩말은 진화의 방편으로 삼은 거다. 덕분에 사자 같은 포식자의 눈엔 더 잘 띄게 되었지만 얼룩줄무늬가 없다고 해서 사자의 먹잇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그야말로 복불복.
청춘이라는 쓴 술잔을 마셔버린 / 입술마저 파리해져가는 저 여자 / 목으로 넘기지도 못한 서러움이 / 꺼이꺼이 저고리 앞 섶을 적시며 / 얼룩져 가는 저 여자
천지불인(天地不仁)이란 말도 있듯이 사실 우리의 ‘살아낸다’ 또는 ‘살아간다’라는 행위 자체는 세상- 혹은 하늘-의 어질지 않은, 참혹한 아니, 무심한 쌩얼(민낯)을 보기 위한 얼룩을 만들어 가는 진화-맞짱뜨기-의 과정이 아닐까?
세상 살면서 만드는 얼룩이란 결국 부끄럼이나 수치가 아니라 자기 정화를 위한 한풀이의 필요악쯤이나 안될라는가. 그리 안될라는가.
2
모항에 떨어지던 동백꽃
복중의 한 여름 동백을 보겠다고 그곳에 갔던가
무작정 내닫던 걸음이 그곳에 머물렀을 때
너무 일찍 와서 동백꽃을 볼 수 없었노라던 시인은 이미 돌아가시고
너무 늦게 가서 동백꽃을 볼 수 없었던 나는 동백꽃이 진 빈자리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 빈 자리에 나를 우두커니 세워놓고
들여다 보고 있었다
들여다 보는 대웅전의 웅숭깊은 속으로 성큼 들어서지도 못하고
미처 열리지도 못한 눈이 뒷걸음질로 물러나와
터덜거리는 버스를 타고 변산으로 향한다
해변가에 즐비한 상점들, 쾅쾅 울려대는 음악소리들
정작 바다는 잘 보이지도 않았고, 파도소리 들리지 않았다
민박집의 호객꾼들만 나를 붙들고 있었다
변산은 내외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땀 한 방울 식히지도 못하고
들끓는 지열의 野馬가 되어 격포로 내달린다
방파제를 거닐면서 채석강의 일부만을 본다
칠천만 년 전의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단애를 읽어내기에
나의 행보는 너무 짧았고, 내 마음이 벼랑이었다
조급증인가 조금때인가 고둥의 알맹이는 대부분 비어있었다
빈껍데기들을 바다에 다시 집어던지며 그곳을 떠나
다시 격포 우체국 앞에 한 꾸러미의 소포로 퍼질러 앉아버린다
지칠대로 지친 나는 수취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모항 가는 길을 물어본다
모항,
모항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다
어머니 모자냐고 묻기도 하고 아무개 모자냐고 묻고
모색할 모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 못한다
나는 나름대로 모항을 생각하기로 한다
모호해진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다
나는 그곳 모항에서 하루를 묵기로 한다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여장을 푼다
해가 지고 있었다
바다가 없어지고 있었다
이제 내가 사라질 차례다
나는 고창에서부터 끌고 온 술을
친구삼아 마시기 시작한다
동백꽃으로 빚은 술은 아니었지만
빛깔은 아주 붉었다
동백꽃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발목 한 번 담궈보지도 못한 바다가
내 속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비린내 나는 서러움들이 봇물터지듯 터져나왔다
내가 외면했던 길들이, 나를 외면했던 길들이
만장기를 나부끼며 노제를 지내고 있었다
모항,.
그곳은 또 하나의 다른 모서리의 항구 였나보다
떠나오던 날 모항엔 “선창”이라는 노래가사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난 모항을 가본 적이 없다. 변산과 채석강은 가보았는데 모항이라······.
모항이란 말은 익히 들었다. 그 쪽은 막걸리 맛이 좋다는 것도 안다. 그쪽 막걸리 안주로는 사람씹는 맛이 제일이라는 것도. 그게 다 박형진의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란 책 때문이다.
난 모항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적이 없다. 그저 그런 동네가 있구나 했다. 어쩌다 갈 기회가 되면 사람 씹어가며 막걸리나 마시리라 하고 말았다.
헌데 시인은 다르다.
모항, / 모항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다 / 어머니 모자냐고 묻기도 하고 아무개 모자냐고 묻고 / 모색할 모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 그러나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 못한다 / 나는 나름대로 모항을 생각하기로 한다
복중에 고창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간 것도 모자라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내처 모항까지 발품을 팔았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 모항은 또 하나의 다른 모서리의 항구라는 것.
모서리를 돌아서본 적이 있는가. 이 길 끝까지 가서 저쪽 모서리로 돌아서는 순간 만화경 같은 신천지가 펼쳐질 것이라 믿으며 가슴 두근거린 적 있었던가? 축복있을진저, 설레임이 기다림이, 희망이 그대의 것이니!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순결하다. 우아하다. 고귀하다. 그녀는 새하얀 드레스를 더럽히지 않으려 애쓰며 천사처럼 웃는다. 요염할지언정 그녀의 피는 성스럽다.
그 성스러움으로 그녀는 또 다른 성스러움과의 합일을 꿈꾼다. 흰색의 순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은 검정 예복. 그러니까 검정의 신비로움. 신비로움은 신의 영역일 터. 둘의 완전한 합일이 성사되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부서지면?
시인은 쓴다. <그들의 검은 옷자락 밖으로 나무줄기가 되어 자라고 그들의 검은 옷자락 속에서 부화된 새들을 날리고 싶어진다. 그와 내가 한 몸이 되어 뿌리내리고 마침내 숲을 이루고 싶>다고. 성스러운 피로 말미암아.
그러나 청춘이라는 쓴 술잔을 마셔버린 여인이 찾아온 모항은 또 다른 모서리의 항구? 아니다. 모항은 피곤하고 너저분한 삶의 연속일 뿐이다. 버렸거나 버림받은 길에 색바랜 만장기만 나부끼는. 모서리를 돌아서면 나오는 신천지? 개나 물어가라고 해라.
동백꽃처럼 붉은 술을 들이켜도 차오르는 것은 비린내 나는 서러움뿐이다. 늙어가는 술청의 주모가 그렇듯이. 그리하다가 문득 계시처럼 솟구치는 의문 하나. 끝내 이리 울기만 하려고 내가 왔던가?
3
돌 쌓는 예술가
어느 마을에 한 사람이 살았다지
그는 돌 쌓는 예술가라지
수많은 세상의 돌들을 그냥
쌓아보았다고 하지
마치 형체도 없는 삶의 그 부조리함을
일으켜 세워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하, 그냥 아무런 의식도 없었는지도 모르지
일상의 삶이 그러하듯이
꼭 그 자리에 무슨 의미를 가지고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끝나는 것도 아니기에
이미 그는 알고 있었겠지
그렇게 흘러가는 하루가 일상이 허무해서
돌을 세워보았겠지
돌 같은 자기,
자기 같은 돌들
수없이 널려있는 뒹구는 돌들을 가지고
일상처럼 가지런히 세워보았겠지
아침에 깨어 일어나는 자기를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를
영원히 누워버리고 싶은 자기를
사람의 형태로
그러니까 존재의 뿌리를 세우고, 내리고
세상에 발 딛고 있다는 실감을 위해
몸통을 만들었겠지
그리고 몸을 만들다 보니
바라보는 시선의 꼭대기를 세웠겠지
마음을 그 위에 얹어놓고 싶었겠지
위태위태한 그것을 가까스로 세워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겠지
비록 쌓았다 허물어지는
삶이지만 그래도 믿고 싶었겠지
자기를 그렇게 위로하고 싶었겠지
휘청거리는 자신의 무게중심을
혼신의 힘으로 견디면서
아슬아슬하게 비대칭의 모습으로
존재의 이유에 대해, 왜 살아가느냐에 대해 시시콜콜 중언부언 중얼거리고 싶지 않다. 아슬아슬한대로, 비대칭인대로, 눈비 오는 대로 맞는 대로 그냥 버텨나가는 거지.
맞아. 예술가인 척 하면서. 그러다 해 한줄기 비치면 얼굴 한 번 훔치고 젖은 신발 말리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땅이 원래부터 질퍽거렸던 것은 아니잖아. 맞지?
*양인자가 가사를 쓴 김국환 노래 ‘타타타’변형. 원 가사는 이렇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조윤희 : 전남 장흥 출생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모서리의 사랑>, <얼룩무늬 저 여자> 가 있음
첫댓글 예전에 시 배울때 저 첫시집을 보았던 것 같은데,우리 선배님이셨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