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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邦俊(안방준)
(1573년 11월 20일 ~ 1654년 11월 13일)
2.1. 가족 관계2.2. 성리학 수학2.3. 임진왜란2.4. 인조 반정 이후2.5. 현실 정치에 참여
3. 안방준의 졸기 : 효종실록(1654년 11월 13일)4. 평가
4.1.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에 대한 석학들의 평가
4.1.1. 당대 석학들의 평가
4.2. 후대 석학들의 평가4.3. 현대 학자들의 평가
5. 작품
5.1. 《은봉전서(隱峯全書)》(1864년)
5.1.1. 구잠(口箴) ; 입을 경계하는 글5.1.2. 학문이란 과연 무엇인가?5.1.3. 독서와 강학 보다는 몸소 실행하고 가슴에 새겨라5.1.4. 국가에 있어서 절의(節義)란?5.1.5. 진유(眞儒)란?5.1.6. 안방준이 많은 기록을 남긴 이유?
5.2. 《항의신편(抗義新編)》 (1625년)5.3. 《혼정편록(混定編錄)》 (인조 연간)5.4. 《기묘유적(己卯遺蹟)》 (조선 후기)5.5. 《은봉야사별록(隱峯野史別錄)》 (1663년)
조선 중기의 유학자 겸 의병장
초명은 삼문(三文), 본관은 죽산(竹山)[1],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峯)·우산(牛山)·빙호자(氷壺子)·우산병복(牛山病覆)·은봉암(隱峰菴)·매환옹(買還翁)·대우암(大愚庵)·왈천거사(曰川居士)이며, 시호는 문강(文康)[2]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 막하에서 참모로 활동했고,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당해서는 호남 의병장이 되어 출병했다.
◯ 1573년(선조 6년) 11월 20일에 보성군 오야리(梧野里, 보성읍 우산리)에서 태어남.
◯ 1583년(선조 16년) 이황(李滉)의 제자 박광전(朴光前)에게 배움.
◯ 1586년(선조 19년) 고경명(高敬命)의 제자 박종정(朴宗挺)에게 배움.
◯ 1589년(선조 22년) 경주 정씨(慶州鄭氏) 정승복(鄭承復)의 딸과 혼인함.
◯ 1591년(선조 24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함.
◯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에 박광전·임계영(任啓英) 의병 막하에서 종사관(從事官) 정사제(鄭思悌)와 은봉이 참모로 활동함.
◯ 1596년(선조 29년) 진주성 전투를 기록한 《진주서사(晉州敍事)》를 집필함.
◯ 1613년(광해군 5년) 조헌(趙憲)의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함.
◯ 1614년(광해군 6년)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보성 소뫼(牛山)으로 낙향하여 우산전사(牛山田舍)에서 강학을 시작함.
◯ 1616년(광해군 8년) 《호남의록(湖南義錄)》을 집필함.
◯ 1622년(광해군 14년) 조헌(趙憲)의 〈동환봉사(東還封事)〉를 편찬하여 간행함.
◯ 1625년(인조 3년) 오수도 찰방(獒樹道察訪)에 19일 동안 있다가 사직하고 돌아온 뒤로 한양에 발걸음을 끊음.
◯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에 창의하여 호남 의병장으로 출병함.
◯ 1632년(인조 10년) 스승 성혼(成渾)의 《위학지방(爲學之方)》을 간행함.
◯ 1635년(인조 13년) 능주 매화정(梅花亭)에 터를 잡고, 당쟁 자료를 모아 《혼정편록(混定編錄)》을 편찬함.
◯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에 창의하여 수백 명을 이끌고 여산까지 진군함. 성혼과 이이(李珥)를 변론하는 장문의 상소를 지음.
◯ 1640년(인조 18년) 상소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시국을 비판함.
◯ 1641년(인조 18년) 동복 용안(龍岸)[3]에 터를 잡고 강학을 펼쳐 다수의 제자를 배출함.
◯ 1642년(인조 20년) 《기묘유적(己卯遺蹟)》을 편찬하여 기묘사화의 전말을 정리함.
◯ 1643년(인조 21년) 〈기축기사(己丑記事)〉·〈우산답문(牛山答問)〉을 지음.
◯ 1646년(인조 24년) 매화정에 은봉정사(隱峯精舍)를 짓고 다수의 제자를 양성함.
◯ 1647년(인조 25년) 은봉정사를 찾은 송시열(宋時烈)에게 〈충효전가서(忠孝傳家序)〉를 지어줌.
◯ 1652년(인조 30년) 상소하여 김육(金堉)의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고, 유민(流民)의 추쇄(推刷)를 파해 주기를 청함.
◯ 1653년(효종 4년)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 1654년(효종 5년) 11월 13일 은봉정사에서 세상을 떠남.
◯ 1656년(효종 7년) 능주의 유생들이 도산사(道山祠)를 세움.
◯ 1657년(효종 8년) 보성의 유생들이 대계서원(大溪書院)을 세움.
◯ 1670년(현종 11년) 호남 유생들이 동복(同福)의 도원서원(道源書院)을 세움.
◯ 1687년(숙종 13년) 도원서원에 사액(賜額)을 받음.
◯ 1704년(숙종 30년) 대계서원에 사액(賜額)을 받음.
◯ 1773년(영조 49년) 대계서원에서 《우산선생집(牛山先生集)》을 간행함.
◯ 1821년(순조 21)년 문강공(文康公) 시호를 받음.
◯ 1864년(고종 1년) 대계서원에서 목활자로 《은봉전서(隱峯全書)》를 중간함.
박광전[4], 박종정[5].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6]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보성으로 낙향 한 후 1614년(광해군 6년) 보성의 북쪽 우산[7](牛山)에 들어가 학문을 닦고 충절들의 기리기 위한 저술 활동에 몰두했고, 이어서 1635년(인조 13년)에는 능주 매화정[8](梅花亭)에 새로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는 학문 연구에 주로 치중하였고 여러 차례 조정에 천거되어 관직은 공조 참의에 이르렀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신독재 김집(金集)과 함께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이 등장하기까지 서인 세력의 정신적 지주였다.
증조부는 1516년 문과에 급제해서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지낸 안수륜(安秀崙), 조부는 1542년 문과에 급제한 후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낸 안축(安舳)이고, 아버지는 진사 안중관(安重寬)이고, 어머니는 진원박씨(珍原朴氏) 박이경(朴而儆)의 따님이다. 1561년 사마시(생원·진사)에 합격했으나 아들이 없이 일찍 죽은 숙부 안중돈(安重敦)에게 입양되었다. 양모는 군수를 지낸 남원양씨(南原梁氏) 양윤순(梁允純)의 따님으로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의 후손이다.
성장해서 순천에 살던 을묘왜변의 명장인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지낸 정승복(鄭承復)의 딸 경주정씨(慶州鄭氏) 와 혼인해서 5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안후지(安厚之), 안신지(安愼之), 안심지(安審之), 안익지(安益之), 안일지(安逸之)이고, 사위는 정창서(鄭昌瑞), 양일남(梁一南), 조정유(曺挺有)이다. 안후지의 후손들은 보성읍 우산리에 있는 안방준의 종가와 사당을 중심으로 큰 마을을 형성해 살아왔고(택촌파 / 宅村派), 안신지의 후손들은 보성군 복내면 지역(옥평파 / 玉坪派), 안심지의 후손들은 화순군 동복면 지역(동복파 / 同福派), 안익지의 후손은 화순군 이양면 지역(매정파 / 梅亭派), 안일지의 후손들은 보성군 문전면(현재 순천시 송광면)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우봉파 / 牛峯派).
전라남도 보성 출신의 안씨들 중에 많은 수가 안방준의 후손이다.[9]
또한 보성읍에는 안방준의 호 중 하나인 '우산(牛山)'을 딴 우산리[10]가 있으며, 여기에는 안방준의 종가와 불천위 사당도 있고, 그를 기리는 대계서원(大溪書院)도 2012년 10월에 복설되었다.
어머니 진원박씨(珍原朴氏) 집안의 죽천 박광전(朴光前)의 문하(보성군)에서 배우다가 매부인 박종정(朴宗挺)의 문하(광주광역시)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특히 박광전은 퇴계(이황) 학파를 계승한 인물이었고, 박종정은 제봉 고경명(髙敬命)의 제자이다. 15살 때 녹도 만호 이대원(李大源)이 왜적과 싸운 의리를 기려 <이대원전(李大源傳)>을 지었다. 그 이듬해 향시(鄕試)에 나아갔으나 시험장이 문란한 모습을 보고 부끄럽게 여겨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해 버렸다. 다시 경기도 파산(坡山)[11]으로 당대의 최고 스승인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12]
안방준은 20살에 스승 박광전을 따라 전라좌의병(全羅左義兵)의 참모(參謀)로 활동했다. 전라 좌의병은 전라 좌도의 호남 사림이 주축을 이룬 가운데 1592년 7월 2일, 7백여 명의 군사를 모아 보성 관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호남 의병은 김천일 부대와 고경명 부대가 주축이 되어 임진왜란에 참여했다. 그러나 김천일 부대가 북상하여 도성 근처에서 활동하고 고경명 부대는 금산성에서 왜병과 접전을 벌이다 패전하여 와해된 상황이었다. 이에 호남 지역의 방비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해지자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전라 좌의병을 조직하게된 것이다.[13]
전라 좌의병은 박광전을 의병장으로 추대했지만 박광전이 67세의 노령에다가 병까지 겹쳐 직접 지휘를 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에 진보 현감 임계영(任啓英)을 의병 대장으로 추천해 지휘권을 맡게 했다. 그러나 주요 조직 구성원은 박광전의 친인척과 문인으로 구성되어 장남인 박근효(朴根孝)가 참모관, 처남인 문위세(文緯世)가 양향관(糧餉官)[14], 문인인 정사제(鄭思悌)가 종사관을 맡았다.
안방준은 전라 좌의병에서 관군과 연락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연보>에 따르면 전라 좌의병이 체부(體府)[15]와 의논할 일이 있자, 마땅한 사람을 물색하던 중 안방준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당시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던 안방준이 체부를 오가면서 정보를 교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방준이 당시 체찰사였던 정철에게 군사 계책의 타당성을 인정받았다[16]는 점은 그의 식견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무렵 안방준의 의병 활동은 미미한 편이나 국가가 위급할 때 거침없이 의병에 나설 수 있었다는 점은 그의 실천가로서 면모가 일찍부터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 중에는 원균의 실상을 상세하게 비판한 글도 있다. 안방준의 숙부인 안중홍이 원균과는 먼 인척이어서 안중홍과 원균이 만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원균은 자신이 어떤 작자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자세한 내용은 원균 문서에 있다. 원문 출처는 은봉전서(隱峯全書) 권8 기사(記事) 백사론임진제장사변(白沙論壬辰諸將士辨).
광해군이 즉위한 뒤 한양 낙산 매계동[17]에서 살면서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학자로서 역량을 길렀다. 이 무렵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의병장 조헌(趙憲)의 남은 가족들을 보살피고 그의 사적을 정리하여 <항의신편(抗議新編)>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 때 실권자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명성을 듣고 등용하려 하였으나 정치에 대한 회의를 품어 거절하고, 1614년(광해군 6년) 가을에 고향이던 보성의 옛집 즉, 조부 안축(安舳)[18]과 양부 안중돈(安重敦)[19]이 거처했던 솔뫼[松山][20]로 낙향했다가, 다시 보성군 소뫼(牛山)[21]로 들어가 은둔, 숨어살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자신과 평소 친하게 지내며 교유가 깊던 친구인 공신 김류(金瑬)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1624년(인조 2년) 4월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동년 8월에는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25년(인조 3년) 2월에 다시 오수도 찰방(獒樹道察訪)에 제수되자 군신간의 예의로 안방준은 단 19일 동안만 관직에 있다가 사직하고 돌아왔으며, 그 뒤로는 한양 땅에 발걸음을 끊었다. 그 후로도 조정으로부터 14차례나 천거를 받았으나 당시 현실이 관직 생활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일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22]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을 당했을 때 당시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이 조정에 아뢰어 안방준을 의병장으로 삼자 55세의 나이로 창의해서 호남 의병장으로 출병했고, 1632년(인조 10년) 스승 성혼(成渾)의 《위학지방(爲學之方)》[23]을 간행했으며, 1635년(인조 13년) 63세에 전라도 능주의 매화정(梅花亭)에 터를 잡고 당쟁 자료를 모아 《혼정편록(混定編錄)》을 편찬했으며,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을 당하자 안방준은 64세의 노구를 이끌고 호남 의병장이 되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매우 다행한 일이겠노라.”는 격문을 도내의 여러 고을에 보내어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진군하다 여산[24]에 이르자, 남한 산성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되어서 통곡하고 돌아왔다. 같은 해 성혼(成渾)과 이이(李珥)를 변론하는 상소, 1642년(인조 20년) 《기묘유적(己卯遺蹟)》을 편찬하여 기묘사화의 전말을 정리하고, 1643년(인조 21년) 〈기축기사(己丑記事)〉·〈우산답문(牛山答問)〉을 짓고, 1646년(인조 24년) 능주 매화정에 은봉정사(隱峯精舍)를 짓고 다수의 제자를 양성했다.
효종이 즉위한 뒤 지방의 유일(遺逸)로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좌의정 조익(趙翼)의 천거를 받아 1649년(효종 원년) 공조 좌랑, 사헌부지평, 1651년(효종 2년) 사헌부장령, 1653년(효종 4년)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었지만 출사하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하였다.
1652년(효종 3년) 안방준은 김자점(金自點)이 광양(光陽)에 유배된 뒤로 여러 번 편지를 보내와서 몇차례 왕복 서찰을 보낸적이 있다면서 스스로 죄를 받겠다는 상소를 하였다.[25] 그 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우의정 김육(金堉)이 ‘경기도에 실시하고 있는 대동법(大同法)을 먼저 호서 지방에 시험하고 다음으로 양남(兩南)에 실시하자’는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대해서 여러 대신들은 백성들의 부역을 가볍게 하고 국가의 재정(財政)을 풍부하게 할 것이라 여겼을 것이나 지금 삼남 지방은 계속되는 흉년으로 좀도둑이 들끓고, 난리[26]를 겪고 난 뒤 유랑민들이 산으로 들어가 총으로 짐승을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자가 수도 없이 많아져서, 백성들이 원망과 배반감으로 가득찬 것이 국가의 커다란 걱정인데도, 조정의 신하들은 서울에서 실시할 때 이미 인심을 잃은 대동법만이 오늘날의 제일가는 계책으로 여긴다며 반대했고, 또한 무차별한 유민의 추쇄(推刷)로 인해 유민이 발생하는 이유를 고려하지 않고 추쇄의 명령만 내리면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숨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27]
80 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들어오고 나갈 때를 명확히 하였고, 학문적 경향과 처신에 있어서 절의(義節)을 높이 숭상했다. 일찍이 이이, 성혼, 정철, 조헌 등 서인계 인사들을 사후에 변론했고, 우암 송시열 등에게 존장으로 대우를 받아 정치적으로 서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생각은 달랐다. "'붕당을 혁파하자[破朋黨]’라는 세 글자를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서 항상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쓰면서 오직 이 세 글자를 천명하는 일에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노력했던 분"이라며 칭송했다.[28]
3. 안방준의 졸기 : 효종실록(1654년 11월 13일)[편집]
“전 공조 참의 안방준(安邦俊)이 졸하였다. 방준은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절의를 숭상하였다. 평생토록 포은(圃隱) 정몽주(鄭蒙周)와 중봉(重峰) 조헌(趙憲)을 사모하여 은봉(隱峰)이라고 스스로 호(號)를 붙였다. 비록 시골에 물러나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여러 차례 항소(抗疏)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부름을 받았으나 나오지 않다가 이때에 와서 졸하니 82세였다. 저술로는『혼정록(混定錄)』·『항의신편(抗義新編)』 등의 책이 세상에 전한다.”[29]
4. 평가[편집]4.1.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에 대한 석학들의 평가[편집]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하여 김인후(金麟厚) 사후 호남 지방에서 저명한 유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절의를 숭상하여 포은 정몽주와 중봉 조헌을 사표로 모시고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隱峯)이라 하였다.
인조 반정 공신인 김류, 김자점, 이귀와 비공신인 산림 학자 김집, 성문준(成文濬)[30], 송시열, 송준길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 집권 하에서는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여러번 천거되었다.
사후 1656년(효종 7년) 능주의 유생들이 그를 모시는 도산사(道山祠)를 세워 배향했다. 1657년(효종 8년)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그를 포상할 것을 청하는 상소와 증직 상소를 올려 증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송준길은 그의 도학과 사림이 서원을 건립하여 제향하게 된 사유를 아뢰고 '조정에서도 마땅히 증직하여 포상해야 할 것입니다'하여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던 것이다. 같은 해 보성의 유생들이 대계서원(大溪書院)을 세워 배향했으며, 1670년(현종 11년) 호남 유생들이 동복(同福)의 도원서원(道源書院)을 세워 최산두(崔山斗)·정구(鄭逑)와 함께 배향을 했다. 그리고 1687년(숙종 13년) 도원서원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국을 장악한 후 1691년(숙종 17년) 남평(南平)에 사는 남인 정무서(鄭武瑞)가 정개청(鄭介淸)의 신원(伸寃)을 위해서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己丑獄死) 때 정개청과 관련된 상소를 올린 결과로 정철(鄭澈)의 관작(官爵)은 추삭(追削) 당했고, 또 남인으로 안동(安東)에 살던 유후상(柳後常)이 그의 고조부 유성룡(柳成龍)을 변무(辨誣)하는 상소까지 추가되면서, 정철의 문도(門徒)라는 이유[31]와 기축옥사(己丑獄死)의 전말(顚末)을 매우 상세히 기록한 것을 미워하여 안방준(安邦俊)을 모시던 대계서원(大溪書院) 등이 한때 훼철[32] 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년)에 다시 복권되고 서원이 재건되었으며, 1704년(숙종 30년)에 대계서원(大溪書院)이라 사액을 받았다.
1813년(순조 13년)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되고, 1821년(순조 21년)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정철과 함께 남인의 주적으로 낙인찍혀서 서인과 남인 정권의 소장(消長)에 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
◯ 성혼(成渾, 1535년 ∼ 1598년) “안방준(安邦俊)은 나에게 배울 사람이 아니다. 나를 깨우칠 사람이다.”
◯이정구(李廷龜 : 1564~1635) 우리 동방의 만고 강상은 중봉(趙憲)이 아니었다면 거의 땅에 떨어졌을 것이요, 중봉의 사업은 사언(安邦俊)이 아니었다면 장차 없어져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이 이미 중봉을 내고 또 사언을 내니 그 뜻이 우연이 아니다
◯ 오윤겸(吳允謙, 1559년 ∼ 1636년) “벼슬을 구하는 풍조가 이미 만연되었는데도 초연히 물러간 사람은 안방준 한 사람 뿐이다.”
◯ 송시열(宋時烈, 1607년 ∼ 1689년) “하늘이 사문(斯文)을 도와 우산 안 선생을 낳으니 거의 도학과 절의를 겸비했다 하겠다.” 또 “호남의 선비들이 이 어른의 가르침에 힘입어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은 자가 매우 많으니 호남에 지극한 공이 있다.”
◯ 이경석(李景奭, 1595년 ~ 1671년) “(인조 임금에게) 안방준 등은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곧 일국의 선사(善士)입니다.”
◯ 민정중(閔鼎重, 1628년 ∼ 1692년) “호남에서 백년 사이에 이 어른을 다시 얻기 어려울 것이다.”
◯ 황세정(黃世楨, 1622년 ∼ 1705년) “중봉(趙憲, 1544년 ∼ 1592년) 이후 제일가는 사람이다.”
◯ 김류(金瑬, 1571년 ~ 1648년) “청송(成守琛, 1493년 ~ 1564년) 이후 제일가는 사람이다.”
◯ 조익(趙翼, 1579년 ∼ 1655년) “(효종 임금에게) 이 사람은 나이가 많아 벼슬에 종사할 수는 없으나, 서울로 불러와 그의 덕행을 ‘온 나라의 본보기’로 삼기를 청합니다.”
◯ 유계(兪棨, 1607년 ∼ 1664년) “기절(氣節)이 굳세어 평생의 의지와 행동이 모두 충효의 큰 근본에서 힘을 얻어 표출되었으니, 지금 세상에는 매우 드문 것이요, 옛 사람도 능히 여러운 것이다.”
◯ 윤증(尹拯, 1629년 ~ 1714년) "붕당을 혁파하자[破朋黨]라는 세 글자를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서 항상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쓰면서 오직 이 세 글자를 천명하는 일에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노력했던 분이다.“[33]
◯ 박세채(朴世采, 1631년 ∼ 1695년) “공은 넓은 학문과 독실한 행동으로 고명정대(高名正大)한 경지에 이르렀다.”
◯ 안방준의 문인 서봉령(徐鳳翎, 1622년 ~ 1687년)은 스승의 평생 학문을 평하기를, "마음은 정암(조광조)의 마음이요, 말은 반드시 중봉(조헌)의 말이었네. 숨기를 좋아함은 파옹(坡翁 : 성혼)의 영향이니, 도를 닦느라 임원(林園)에서 늙었네. 지은 글들은 훈고(訓詁, 자구의 해석)가 아니었으며, 오직 충·효·우에 관계된 것들이니, 주문(朱門) 말학들의 폐단을 물리치고 나니 참으로 확연(廓然)하도다."하였다.[34]
◯ 안방준의 학문 연원과 실천 유학에 대해서 송시열은 「안방준 신도비명」에서,"하늘의 도를 세워서 음과 양이라 했고, 땅의 도를 세워서 유(柔)와 강(剛)이라 했으며, 사람의 도를 세워서 인(仁)과 의(義)라 했다(「說封傳」). 아아! 오직 선생께서 이에 가까울진저, 의(義)의 실천 방법은 충(忠)만한 것이 없고 인(仁)은 효(孝)만한 것이 없다. [학문의] 대강이 이미 수립되고 만목(萬目)이 이에 행해지니, 미쁠손 군자이시어! 핵행(學行)을 펼치시되 집성(集成)하시었도다."하였다.[35]
◯ 이의현(李宜顯, 1669년 ∼ 1745년) “전라도 보성(寶城)의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은 유현(儒賢)과 절개를 지킨 선비이다.”[36]
◯ 홍직필(洪直弼, 1776년 ~ 1852년) “호남의 학문에서 하서(河西: 김인후), 고봉(高峯, 기대승), 일재(一齋 : 이항), 은봉(隱峯 : 안방준), 손재(遜齋, 박광일)가 가장 두드러진다.”
◯ 김희순(金羲淳, 1757년 ~ 1821년) “학문·절의·지조를 빛내 사림의 본보기가 되고 후생의 거울이 되니, 천고에 사문(斯文)을 붙잡아 정도(正道)를 지킨 사람이다.”
◯ 이민보(李敏輔, 1720년 ~ 1799년) “호남의 높은 희망이요 북두성 같은 고매한 명성으로 수많은 선행(善行)을 남겼다.”
◯ 이도중(李度中, 1784년 ∼ 1872년) “도학과 절의가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뿐 아니라, 덕행의 성실함과 사공(事功, 공훈과 업적)의 탁월함을 겸비했다.”
◯ 김종후(金鍾厚, 1721년 ∼ 1780년) “선생의 덕업(德業)과 풍의(風儀)는 후학들이 칭송하고 흠모하는 바이다.”
◯ 송환기(宋煥箕, 1728년 ~ 1807년) “선생의 깊은 학문, 높은 절개, 위대한 문장, 넓은 의견은 세상에 밝혀져 있다.”
◯ 황현(黃玹, 1855년 ~ 1910년) “고심하며 충현처럼 죽고자 하였고 직필은 야사 통해 전하려 하였네.”
◯ 윤사순(고려대학교 명예교수·동양철학) "은봉은 성리학자들의 선비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여 실천한 학자이다.”
◯ 이해준(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명실공히 당대 호남 지역을 대표했던 선비·학자였고, 또 그와 연결된 이 지역의 학맥(學脈)이 분명 크게 존재했음을 감안할 때, 은봉의 생애와 사상·학문은 매우 주목되어야 한다.”
◯ 황의동(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말과 글이 아니라 삶과 실천으로 보여주었고, 현실적 이해(利害)나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여 인간 본성의 의리(義理)를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삶 속에서 ‘진유(眞儒)’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은봉의 의리적 삶이 주는 교훈은 매우 의미가 있다.”
◯ 최영성(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도학과 절의는 둘이 아니다는 그의 학문관이 응축된 표어의 참된 의미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되새겨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나아가 한국 유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 제대로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많은 시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편저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서사(晋州敍事)》를 기술한 것을 비롯하여 《항의신편(抗義新編)》《이대원전(李大源傳)》《호남의록(湖南義錄)》《삼원기사(三寃記事)》《사우감계(師友鑑戒)》《혼정편록(混定編錄)》《매환문답(買還問答)》 등을 저술하였는데, 이 글들은 임진왜란의 의병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기묘유적(己卯遺蹟)》 《노랄수사(老辣瀡辭)》 등은 당쟁사에 대한 연구의 밑바탕이 되었다.
안방준이 저술한 「임진기사」 「노량기사」 「진주서사」 세 편의 글을 모아 1663년에 고흥 향교에서 『은봉야사별록(隱峯野史別錄)』(목판본)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 내용으로 <임진기사>는 왜군이 쳐들어와 임진왜란이 발생한 때부터 안방준이 존경했던 조헌(趙憲)의 의병활동까지 쓴 것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노량기사>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물리치면서 전사하는 일을 기록한 것이다. <진주서사>는 왜군이 두 번째로 진주성을 공격할 때(진주성 전투) 군사들과 백성들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끝내 함락된 일을 몸소 겪은 임우화(林遇華)의 진술을 바탕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 후 1849년(헌종 15년)에 일본 사람 와타나베(渡邊)가 조선에서 취득한 이 책을 에도[江戶]에서 『隱峯野史別錄』으로 재간행했는데, 당시 일본 사회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원인과 전황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임진왜란 사적을 객관적으로 검증하여 정리한 안방준의 저술을 특별히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원본은 전해오지 않는다.
유학자 안방준(安邦俊)의 시문집. 40권 20책. 전라도 보성 대계서원(大溪書院)에서 1864년(고종 1년)에 간행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편목 중 <항의신편>·<혼정편록>·<기묘유적>·<은봉야사별록> 및 잡저편 소재 3편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바 있다. 이 전서는 중종에서 효종후초년에 이르는 조선 중기의 기묘사화·임진왜란·동서 분당·광해 정권과 인조 반정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말해야 할 때는 말하고 / 言而言(언이언)
말해서 안 될 때는 말하지 말라. / 不言而不言(불언이불언)
말해야 할 때 말 안해서도 안 되고 / 言而不言不可(언이불언불가)
말해서 안 될 때는 말하면 안 된다. / 不言而言亦不可(불언이언역불가)
입아, 입아, / 口乎口乎(구호구호)
그렇게만 하여라. / 如是而已(여시이이)
세상에 이른바 학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얼언일행(一言一行)을 예법에 맞게하고 충효대절(忠孝大節)이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자는 학행지사(學行之士)가 되지 못하고, 기송(記誦)에 종사하여 그저 입과 귀만을 돕고, 고상하게 성명(性命)을 말하여, 말은 교묘하고 행동은 어긋나는 것을 이에 학문이라 할 수 있겠는가.[37]
5.1.3. 독서와 강학 보다는 몸소 실행하고 가슴에 새겨라[편집]
독서하고 강학하는 것은 이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많이 알아서 그 덕을 쌓는 것에 불과하다. 선비된 자가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소학』한 책이면 족하고, 치평(治平)의 대업을 구하고자 한다면 『대학』 한 책이면 족하다. 오늘의 학자는 종신토록 강학하며 만 권의 책을 독파하지만, 하루도 몸소 실행하지 않고 한 글자도 가슴에 새기지 않으니, 이는 아침이 다 가도록 밥 먹는 얘기만 하고 하나도 배부름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글을 읽은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38]
국가에 있어서 절의는 사람에 있어서 원기(元氣)와 같다. 사람에게 원기가 있으면 비록 심한 병이 들었다 하더라도 죽음에 이르지 않듯이, 나라에 절의가 있으면 비록 큰 변이 있더라도 망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라의 존망은 오직 절의와 부식(扶植, 뿌리를 박아 심음) 여하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39]
옛 사람은 절의를 학문 가운데 두었으나, 오늘날 사람은 절의를 학문 밖의 것으로 한다. (······) 우리 동방의 학문은 정포은(鄭圃隱·정몽주)·권양촌(權陽村·권근)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데, 그 학문으로 말하자면 양촌이 훨씬 뛰어나지만, 절의로 말하자면 양촌은 볼만한 것이 없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도 그 페단이 아직 남아있어 학문과 절의를 나누어 둘로 여긴다. 명현(名賢)이 비록 많더라도 진유(眞儒)는 적은데, 온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분변하지 못한다.[40]
초야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정진하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절의로 으뜸이라 여겼던 그는 조헌을 추모하여 1613년(광해군 5년)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는데, 1635년(인조 13년) 연평 부원군(延平府院 君) 이귀(李貴)는 이를 보물이라며 격찬하고 이를 국가에서 지원하여 영인, 간행,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41]
1643년(인조 21년) 〈기축기사(己丑記事)〉의 마지막 구절에서 안방준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옳고 그름은 비록 한 때에 뒤섞일 수 있지만, 공론은 곧 만세에 정해지는 것이니 참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즉, 공의가 있는 곳에서는 자식도 부모의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칭찬할 수 없고, 신하도 임금의 잘못을 꾸며 넘길 수 없는 것이다.[42]
은봉 안방준은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는 결코 둘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했고, 또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중심으로 충절들을 기리기 위한 저술과 활동에 일생을 바쳤다.
은봉(隱峯)의 학맥은 멀리 정몽주(鄭夢周)로부터 발단하여 김종직(金宗直) - 김굉필(金宏弼) - 조광조(趙光祖) - 성수침(成守琛) - 성혼(成渾)에서 이어진다.
1613년(광해군 5년)에 안방준(安邦俊)이 편찬한 의병장 조헌(趙憲)의 유문(遺文) 및 행록(行錄)을 수록한 책. 4권 2책. 목판본. 1619년(광해군 11년) 판각(板刻)에 착수, 1621년(광해군 13년)에 완성하여, 1625년(인조 3년)에 발행, 광포(廣布)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이 침입할 것을 확신하고 굳건한 자세로 이에 대비하자면서 왜사(倭使)를 받아들이지 말고 참수하자는 글과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면서 대책을 강구한 조헌의 글을 모은 책이다. 1614년에 쓴 이정구(李廷龜)의 서(序)와, 편자 안방준의 서(書)가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이다.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동서 당쟁의 기사를 적은 책. 필사본. 18권 10책. 이 책은 동서 붕당에 대한 시말과 당시의 유학자 율곡 이이(李珥)와 저자의 스승이었던 기호파(畿湖派)의 거두 우계 성혼(成渾)의 신원(伸寃)을 제의(提議), 변호하기 위하여 1575년(선조 8년)부터 1650년(효종 1년)까지 상소된 신원 상소문과 이것과 연관되는 사건들을 서인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으로 당쟁에 관한 일종의 정치 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초기 당쟁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안방준(安邦俊)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가 축척(逐斥)된 일을 모아 기록한 책. 3권 2책. 필사본. 조광조의 5세손 조창현(趙昌賢)이 초본(草本)을 정리하려다 완성하지 못한 것을 안방준이 편집한 것이다. 권1에는 조광조가 집권한 4년, 5년간의 공과(功過)에 대한 논의 및 경연에서 진설(陳說)한 내용과 여러 행사를 수록하였다. 여기에서 기묘사림파(己卯士林派)의 개혁 정치의 방향이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권2에는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조광조 일파를 무고한 사실과 이신(李信)의 고변으로 화를 당한 사람들에 관한 일 및 송사련(宋祀連)의 고변으로 일어난 신사 무옥에서 안처겸(安處謙) 등 11인이 주살된 일을 기술하였다. 권3에는 남곤의 죽음과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심정 등이 처형당한 일 및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사적(事蹟)을 수록하였다. 부록으로 이황(李滉)이 지은 조광조의 행장과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신도비문, 이이(李珥)가 지은 묘지명과 사원기(祠院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기묘사화와 관련된 각종 사건이나 여러 인물들을 집대성한 기록이며, 중종 때의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5.5. 《은봉야사별록(隱峯野史別錄)》 (1663년)[편집]
유학자 안방준(安邦俊)이 저술한 임진왜란과 관련된 야사(野史). 1권 1책. 안방준이 저술한 「임진기사」 「노량기사」 「진주서사」 세 편의 글을 모아 1663년에 고흥 향교에서 『은봉야사별록(隱峯野史別錄)』(목판본)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 내용으로 <임진기사>는 왜군이 쳐들어와 임진왜란이 발생한 때부터 안방준이 존경했던 조헌(趙憲)의 의병 활동까지 쓴 것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노량기사>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 수군 통제사였던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물리치면서 전사하는 일을 기록한 것이다. <진주서사>는 왜군이 두 번째로 진주성을 공격할 때 군사들과 백성들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끝내 함락된 일을 몸소 겪은 임우화(林遇華)의 진술을 바탕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 후 1849년에 일본 사람 와타나베(渡邊)가 조선에서 취득한 이 책을 에도[江戶]에서 『隱峯野史別錄』으로 재간행했는데, 당시 일본 사회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원인과 전황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임진왜란 사적을 객관적으로 검증하여 정리한 안방준의 저술을 특별히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수록된 3편의 임진 관계 야사는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후손들 중에 조선 시대 과거 시험에서 문과 급제는 1명으로 1855년 7대손 안명석(安命奭), 무과 급제는 4명으로 1651년 손자 안회(安𡼾), 1835년 5대손 안집(安㙫), 1845년 6대손 안풍현(安豊鉉), 1850년 7대손 안명택(安命澤)이고, 생원(生員) 합격자는 4명으로 1657년 손자 안음(安崟), 1859년 5대손 안혁(安{王+奕}), 1888년 7대손 안호일(安灝一), 1894년 9대손 안창환(安暢煥)이며, 진사(進士) 합격자는 총 2명으로 1648년 손자 안전(安峑), 1894년 10대손 안규석(安圭奭) 등이 있다.
김집(金集)과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으로 1680년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 손자 안음(安崟), 1689년 남인들에 의해 관작(官爵)을 빼앗기고 대계서원(大溪書院)이 헐리는 일을 당했을 때부터 1694년 안방준이 복관(復官)되고 서원이 복설(復設)될 때까지 큰 공을 세운 증손자 안두상(安斗相), 유의(儒醫)로 추천받을 정도로 의술에 뛰어났고 동복현감을 지낸 증손자 안수상(安壽相), 향약(鄕約)과 의고(義庫)로 빈민을 구제하고 학재(學齋)를 지어 인재를 가르쳤던 증손자 안후상(安後相), 정약용(丁若鏞)이 <기변(幾辨)>을 읽고 “그 정밀하고 명석함이 사람을 감복케 하였다”고 했던 7대손 서운헌(棲雲軒) 안호(安浩), 송매정(松梅亭)의 주인으로 목미암(木美庵)에서 향촌 교육에 힘을 쏟았던 6대손 안수록(安壽祿), 한말·일제 시대에 도학(道學)을 이념으로 삼아 교육 활동에 헌신했던 도학자 10대손 회봉(晦峯) 안규용(安圭容),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 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머슴 출신 의병장 10대손 안규홍(安圭洪)·유격대장 9대손 안택환·군량 담당 10대손 안규창(安圭昌), 1919년 4월 낙안과 벌교장터에서 '낙안 3.1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10대손 안규삼(安圭三)·안규진(安圭晉)·9대손 안덕환(安德煥), 1950년 한국 전쟁 때 보도연맹원 480명을 풀어줬던 ‘한국판 쉰들러’ 11대손 안종삼(安鍾三) 등이다.
또 후손들 중에서 광주광역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15대 종손 안재호, 목포시장을 지낸 14대손 안주섭, 국회의원을 지낸 15대손 안재홍, 현직 국회의원 10대손 안규백, 환경부차관 13대손 안병옥, 군 인사로는 35보병사단장을 역임한 13대손 안병태 육군소장, 전 경찰대학장 15대손 안재경 등이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큰 족적을 남겼고, 교육계에서 한국공자학회 회장을 역임한 전남대 철학과 교수 13대손 안진오, 제2·3대 광주광역시교육감을 지낸 12대손 안준, 한국교총 회장을 지낸 12대손 안양옥(전 서울교대 교수)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13대손 안병욱(전 가톨릭대 교수) 등이 있으며, 서예가로는 10대손 송곡 안규동이 있다.
후손들은 대원군의 서원훼철 때 철폐된 <대계서원> (보성), <도원서원> (동복), <도산사> (능주) 중 1975년에 <도원서원>이 복설되었고, <목우회>를 만들어 1999년 5월 29일 보성 우산리 밖감질 종가집에 <불천위 사당(우산재사)>을 중건했고, 2002년 6월 20일 《국역 은봉전서(1)》를 발간했으며, 2003년 11월 20일 대계서원 복설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아 2005년 1월 14일 <사단법인 은봉선생 기념사업회>로 허가를 받아서 2012년 11월 10일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544-10에서 <대계서원>을 복설하고 준공식을 열었으며, 2010년 5월 11일 ~ 28일에 조선대학교박물관에서 <'선비 안방준, 도를 묻고 의를 행하다 - 은봉 안방준 가 소장유물 특별전'>을 열었고, 2014년 4월 30일 《은봉 안방준 종가의 옛 서간집》을 발간했다.
현재 대계서원 유물전시관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303호로 지정된 대계서원 관련 『진신장의안(搢紳掌議案)』, 『유안(儒案)』, 『심원록(尋源錄)』, 『전답양안(田畓量案)』과 당시 명현(名賢)들이 안방준에게 보낸 간찰을 첩본으로 만든 『제현간독(諸賢簡牘)』과 『선유왕복(先儒往復)』등 132점이 소장되어 있다.
(舊) 죽산 안씨의 시조 안방준(安邦俊)이 있다. 그와는 무려 약 1,200년 이상 연대 차이가 발생하는 동명이인이다.
[1] 안원형을 시조로 하는 '신' 죽산 안씨이다.[2] 신사년(순조 21년, 1821년) 문강공(文康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도덕박문(道德博聞, 도덕이 널리 알려졌다) 왈(曰) 문(文), 연원유통(渊源流通, 연원에 두루 통했다) 왈(曰) 강(康)[3] 지금 화순군 남면 龍里[4] 퇴계 이황의 제자였다.[5] 그의 자형(姊兄, 매형)이고 제봉 고경명의 제자였다.[6] 처음 접한 학문은 첫 스승 박광전의 영향을 받아 이황의 학문이었지만,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한 후 우계와 율곡의 문생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으며, 송시열의 존숭을 받게 된다.[7] 현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8]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매정리[9] 대표적으로 항일 의병장 안규홍(安圭洪)이 있다. 항렬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알아보기가 쉬운데, 대표적인 항렬자로 죽산 안씨(신) 시조 안원형(安元衡)으로 부터 20세손은 환(煥), 21세손은 규(圭) / 기(基), 22세손은 종(鍾) / 용(鎔), 23세손은 순(淳) / 태(泰), 24세손은 병(秉) / 주(柱), 25세손은 섭(燮) / 열(烈), 26세손은 재(在) / 교(敎), 27세손은 진(鎭) / 현(鉉), 28세손은 영(泳) / 식(湜)이 있다.[10]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11] 경기도 파주의 별칭이다.[12] 성혼의 문하에서 그는 이름있는 친구들을 사귀는데 뒤에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류, 이귀, 김자점, 반정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저명한 성리학자인 김집 등을 만난다.[13] 조원래, <朴光前의 擧義와 그 一家의 의병운동>, <韓國의 哲學> 32(경북 대학교 퇴계 연구소, 2003년), 136쪽 ~ 141쪽 참조[14] 군량 담당[15] 당시 체찰사(體察使)였던 정철의 주영(主營)[16] <은봉전서> 3, 부록, <연보>, 545쪽 : 조원래, 위 논문, 139쪽[17] 현재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이화마을로 추정된다. 고조부 안범(安範, 1460년 ~ 1523년)이 서울에서 관직 생활할 때 마련하여, 아들 3형제 안수륜(安秀崙, 1483년 ~ 1517년), 안수잠(安秀岑, 1486년 ~ 미상)과 안수금(安秀嶔, 1488년 ~ 1542년)을 교육시켰고, 그 뒤 조부 안축(安舳, 1500년 ~ 1572년)에 이어 양부 안중돈(安重敦, 1541년 ~ 1565년)까지 거쳐했던 집을 안방준(安邦俊, 1573년 ~ 1654년)이 물려받아 1611년 ~ 1614년 가을까지 약 3년 정도 거처했던 집으로, 그 뒤로 맏손자 안전(安峑, 1614년 ~ 1686년) - 증손자 안두상(安斗相, 1636년 ~ 1723년) - 고손자 안세현(安世賢, 1660년 ~ 1716년) - 5대손 안처악(安處岳, 1725년 ~ 1750년)의 대까지 소유했던 것으로 보여진다.[18] 안축(安舳, 1500년 ~ 1572년) : 자는 해빈(海賓), 호는 둔암(鈍庵), 1531년 사마시(생원·진사)에 합격하고 1542년 문과에 급제한 후 남원 부사를 지낸 후 보성 솔뫼로 물러나와 빙호정사(氷壺精舍)를 축조하고 배회정(徘徊亭)을 짓고 살았다.[19] 안중돈(安重敦, 1541년 ~ 1565년) : 자는 덕혼(德渾), 1561년 사마시(생원·진사)에 합격하고 1564년 성균관 제술시에 3차례 장원을 했고 1565년 동직당부시(東堂直赴試)에 급제했으나 창방하기 전에 죽었다.[20] 전라남도 보성군 우산리[21]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22] 안방준의 일생동안 19일 간의 오수도 찰방(獒樹道察訪)이라는 관직 생활은 유일한 것이었고, 그 후 사헌부 장령,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지만 사직 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23] 조선 시대 성리학자로 기호 학파의 큰 스승 이었던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년 ~ 1598년)이 남긴 저술로 송나라 주자(朱子)의 편지 중에 학문하는 방법에 관한 것을 가려 뽑아 “학문을 배우는 자들은 모름지기 먼저 이것을 읽어서 기본을 세워야 하니, 읽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학문하는 방법을 논한 것으로 《위학지방(爲學之方)》이라 이름 하였는데, 뒤에 《주문지결(朱門旨訣)》로 이름을 바꾼 책이 있다. 신묘년(1591년)에 경기도 파산(坡山)으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찾아 그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으나, 우계(牛溪)는 사양하고 그를 맞아주지 않았다. 그는 물러가지 않고 청송서원(廳松書院)에서 자고 이튿날 새벽부터 문밖에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서서 날이 저물도록 물러가지 않았다. 우계가 그 정성과 독실함을 가상히 여겨 비로소 제자의 예를 허락하였다. 그 곳에 머물면서 수업을 하는데 견해가 높고 밝아 심오한 뜻을 밝히니, 우계가 이를 매우 칭찬하고 인정하였다. 일찍이 손수 쓴 ‘구방심(求放心, 잃어버린 마음 찾기)’ 세 글자와 손수 간추린 《위학지방(爲學之方)》이란 책을 주었는데 평생 마음 속 깊이 새겼다.”라는 기록이 전해온다. 이《위학지방(爲學之方)》즉《주문지결(朱文旨訣)》은 그 후 대대로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년 ∼ 1654년) 집안에 전해져 왔는데, 그 원본은 망실되었다. 그 후 1632년(인조 10년) 《위학지방(爲學之方)》을 판각하여 간행했고, 또 18세기 ~ 19세기 연도 미상의 해에 송매정에서《주문지결(朱文旨訣)》이라하여 필사본으로 재간행된 것이 있고, 1923년 보성 죽곡정사(회봉 안규용)에서 목판본으로 《주문지결(朱文旨訣)》이라하여 재간행된 것도 남아있다.[24] 현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25] 효종실록(1652년 2월 11일) : 안방준이 김자점과의 교분을 이유로 죄를 받겠다는 상소를 올리다.[26] 2번의 왜란과 2번의 호란[27] 효종실록(1652년 5월 16일) : 전 장령 안방준이 대동법 실시의 폐단을 상소하다.[28] 윤증(尹拯)의 『명재유고(明齋遺稿)』(1732년) 권32 《당(黨)을 세우지 않은 사우(師友)들의 연원(淵源)에 관한 설》 뒤에 쓰다/題不立黨師友淵源說後 a136_169a/에서 "有以破朋黨三字。爲己任。其發於口筆於書。矻矻焉唯此三字是明。以至歿身而後已者。隱峯先生安公。其人也。"라 했다.[29] 효종실록(1654년 11월 13일) : 전 공조 참의 안방준의 졸기 / ○前工曹參議安邦俊卒。 邦俊性慷慨尙節義, 平生慕圃隱 鄭夢周、重峰 趙憲之爲人, 自號隱峰。 雖退居山野, 無意世事, 而累抗疏, 不避忌諱。 被徵不起, 至是卒, 年八十二。 所著《混定錄》、《抗義新編》等書行于世。[30] 스승 성혼의 아들. 훗날 성문준의 딸과 안방준이 장남 안후지가 혼인하여 서로는 사돈 관계가 되었다.[31] 숙종 실록(1692년 - 4월 14일) 1번째 기사 : ○癸巳/故相柳成龍之孫前敎官柳後常, 自稱爲其祖辨誣, 上疏曰:安邦俊, 卽故相臣鄭澈之門徒也。 作己丑僞錄, 以爲崔永慶之殺死, 先祖臣成龍實主之。 刪改聖祖罪澈之敎, 進退先臣拜相之日, 欲以伸澈而加誣於先臣, 爲澈左袒者, 悅其書。 刊布中外, 立邦俊祠以尊之。 士林之痛恨, 爲如何哉? 上納其言, 命毁邦俊祠宇。[32] 숙종 실록(1691년- 11월 - 22일) 2번째 기사 : 末端又請撤去故參議安邦俊祠宇。 邦俊卽先正成渾門人, 而嘗有著述, 錄己丑獄顚末甚悉, 故特惡之也。.... 竟削澈職。 邦俊祠宇, 亦因柳成龍後孫後常疏, 廟堂奏毁之。[33] 윤증(尹拯)의 『명재유고(明齋遺稿)』(1732년) 권32 《당(黨)을 세우지 않은 사우(師友)들의 연원(淵源)에 관한 설》 뒤에 쓰다/題不立黨師友淵源說後 a136_169a/에서 "有以破朋黨三字。爲己任。其發於口筆於書。矻矻焉唯此三字是明。以至歿身而後已者。隱峯先生安公。其人也。"[34] 『은봉전서』부록 권2, 29b <연보, 선생 82세조> “心爲靜庵心。言必重峯言。好遯自坡翁。隨道老林園。著書非訓誥。惟忠孝友篇。朱門末學弊。闢之信廓然”[35] 『은봉전서』 부록 권3, 23b「신도비명」 “立天之道。曰陰與陽。立地之道。曰柔與剛。立人之道。曰仁與義。於惟先生。庶幾於是。義莫如忠。仁莫如孝。大綱旣立。萬目是擧。允矣君子。展也集成”[36] 이의현(李宜顯, 1669년 ∼ 1745년)의 『도곡집(陶谷集)』(1766) 권28 雜著 / a181_438a : 祖宗朝。兩南人物。最多登顯。... 寶城則安牛山邦俊。... 無非儒賢節士文人名臣良將也。[37] 『은봉전서』권6, 13b「임진기사」“且世所謂學問者 果何事耶? 一言一行, 動遵禮法, 忠孝大節. 無愧于古人者. 不得爲學問之士. 而從事記誦. 只資口耳. 高談性命. 靜言庸違者. 乃可謂學問乎?”[38] 『은봉전서』부록 권6, 2a ~ 2b「遺事」<徐鳳翎錄> “先生嘗以爲讀書講學. 此不過多識前言往行. 以蓄其德矣. 爲士者欲爲學問. 則小學一書足矣. 欲求治平之大業. 則大學一書足矣. 今之學者. 終身講學. 讀破萬卷. 而無一日之躬行. 無一字之服膺. 是猶終朝說食. 不得一飽者也. 然則讀書有何所益.”[39] 『은봉전서』권3, 5b 「與延平李相公別紙」“節義之於國家. 猶元氣之於人也. 人有元氣. 則雖甚病不至於死. 國有節義. 則雖大亂不至於亡. 故國之存亡. 惟在於節義之扶植如何耳”[40] 『은봉전서』권10, 20a「牛山答問」“古之人。節義在學問中。今之人。節義在學問外。愚請粗陳厥由。試詳聽之。吾東方學問。自鄭圃隱,權陽村始。論其學問。則陽村過圃隱遠矣。論其節義。則陽村無足可觀。至于我朝。其弊猶存。學問節義。分而爲二。名賢雖多。而眞儒則少。擧世之人。莫之能辨”[41] 인조 실록(1625년 10월 24일) : 연평 부원군 이귀가 《항의신편》을 인출·반사하기를 청하다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10024_003[42] 『은봉전서』권5, 392a 「己丑記事」“公議所在。子不得以溢父之美。臣不得以飾君之非。是非雖混於一時。公論乃定於萬世。可不懼哉。可不懼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