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가까워진 어느 겨울밤, 리베르 펜트하우스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겨울 칼바람이 호텔을 벨 듯 불고 있지만, 적막만이 감도는 그의 펜트하우스엔 담배 타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그의 손에는 올해 리베르에 입사한 신입사원들의 이력서와 신상정보가 들려있었다. 우수한 학벌을 자랑하며 빽빽이 채운 이력서와 함께 면접 평가표를 넘기는 속도는 빠르기만 하다. 그중에는 고귀하신 의원님의 자식도 있었다. 바쁜 시기에 기어코 식사 자리를 마련해 날 불러 세웠다. 어디 빌붙을 때가 없어 여기까지 흘러와 놓고 그 자리에서까지 콧대를 세우며 나를 여전히 뒷골목 깡패 새끼 취급해 댔지.
순간 스쳐 지나가는 그날의 기억에도 그의 표정은 변함없이 냉랭하기만 하다. 날 때부터 가진 게 많지만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서도 멍청하게 제 발로 굴러들어 와줬겠지. 그들이 적당히 만족할 만한 부서에 배치된 것을 확인한 무진은 뒷장을 넘겼다. 유일하게 붉은 색 포스트잇이 붙어있던 종이를 읽는 무진의 눈이 금세 날카로워진다.
4살 때 천애 고아가 되어 동네 할머니 손에 이끌려 보육원에 맡겨졌다는 첫 줄부터 눈길을 끌었다. 태주가 따로 조사해 놓은 종이엔 그 보육원은 11년 전 화재 사고로 폐원되었다고 한다. 대학 생활마저도 휴학을 반복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뿐 아니라 기억하는 자도 거의 없는 그림자 같은 인생이었다.
무감각해 보이던 무진의 입술에 그제야 얕은 미소가 걸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벌어지는 수준 그대로였다. 우리에게 접근하는 잠입 경찰들의 수법은 이처럼 뻔했다. 완벽함을 도모할수록 설정이 많아지니 뒤를 캐기 시작하면 금방 허점이 잡혀 무너졌다. 매번 인창마수대의 정보가 우리 쪽으로 쉽게 새어 나가자가자 차기호가 마음이 급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차기호는 병적으로 나에게 집착하고 있었고, 경찰 내부에 존재한다는 동천에 줄을 댄 쥐새끼가 누군지도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심어둔 채널이 몇 개인지도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겠지. 마음이 급해진 차기호가 이제는 대놓고 의심을 사더라도 허점을 없애겠다는 작전으로 밖에 읽히지 않았다.
적당히 수입이 보장된 일은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비빌 언덕 하나 없이 외롭게 자라왔다면 무슨 일이든 수입만 안정적이면 닥치는 대로 하는 게 그 여자 인생에도 편할 텐데 그녀의 삶은 마치 제발 자기를 발견해 달라는 듯 나를 향하고 있었다. 경찰 쪽에 심어둔 사람들조차 그녀의 정체도 작전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우리가 현존하는 것 중 최상급인 다이아몬드를 일본과 중국에 공급하는 일에 집중하는 사이 국내에는 섀도우, 고스트, 크리스털 메스 같은 싸구려 신종 마약이 우후죽순으로 풀리고 있었다. 아무리 차기호라도 지금 잠입 경찰을 우리 쪽에 밀어 넣으며 작전 지원을 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최무진은 이내 파일을 내려놓고 창가를 바라보았다. 길게 빨아들였다 내뱉은 담배 연기가 그의 입술을 둘러싸며 흩어져 인창시의 밤바다로 사라져갔다.
모두가 퇴근한 어두운 사무실에 무시의 느린 타자 소리만이 들린다. 든든한 집안 내력도, 내세울 스펙도 없는 그녀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무실 모두에게 무시당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입사 첫날부터 일이 꼬였다. 호기롭게 준비했던 인사말을 읊어봤지만, 사무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나의 가족관계, 대학 생활 같은 내용들뿐이었다. 한 가운데 서서 나라는 사람의 신상에 대해 취조당했다. 잠시 잠깐의 연민과 동정의 눈빛은 며칠 만에 사라지고 없었다. 사무실 내에 누구와도 교집합이 없는 무시는 내내 투명 인간 취급하다 궂은일이 생기면 떠넘기기 만만한 사람이었다.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몸을 길게 늘이며 기지개를 켜던 무시가 그 상태로 고개를 뒤로 넘겨 어두워진 복도를 한 번 돌아본다. 배도 슬슬 고프고 어두운 곳에서 노트북 화면만 몇 시간째 쳐다보니 눈이 어른거렸다. 집중력이 떨어진 지도 한참 되었다. 툭 하니 힘없이 팔을 떨구고 자세를 고쳐 앉은 무시는 가슴 깊이까지 꾹 누른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자판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작성했던 내용을 몇 번이고 읽으며 마저 작성을 해보려 하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그때 어두운 복도에서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느긋하게 제 집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화들짝 고개를 돌린 무시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선명해지자 그녀도 조용히 숨을 죽이며 의자를 조심히 굴려 소리 없이 일어나 책상을 등지고서 복도를 마주 보고 있었다. 여전히 느리고 일정한 발걸음 소리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미친 듯이 심장 뛰는 소리에 이제 발걸음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누군가가 나타나도 문제였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도 문제였다.
급히 펜트하우스에 들어온 정태주 이사가 오늘도 김무시가 야근을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경계심이 많아 사서 걱정을 하는 타입인 정태주는 김무시에게 매 순간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지만, 무진은 그날 이력서와 함께 신상정보를 보고받은 이후에도 별다를 게 없었다.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직원의 모습을 한 사람 치고는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이어가는 게 태주의 눈에는 영 거슬린 듯 보였다. 굳은 표정으로 중요한 일인 듯 보고하는 태주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무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퇴근이나 해"
불만이 가득한 무표정을 하고서도 두 번 반박하지 못하는 태주는 입술만 달싹이며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술잔을 조용히 기울이던 무진이 나가라는 말에도 고집을 부리듯 우뚝 서 있기만 한 태주를 쳐다보았다.
깊이 한숨을 쉬던 태주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2주일 전에 믿을만한 애 하나 붙여놨습니다. 김무시가 돌아다니는 경로가 대표님과 겹치는 게 많습니다. 이게 우연이래도...! ....김무시 그 여자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그쪽이 설령 목적을 가지고 잠입한 스파이래도 먼저 움직이기 전까지 지켜만 보라며 확실하기 전까지 신중히 처리하라는 무진의 말을 어기고 태주가 그녀를 미행해 따로 보고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놓고 잔을 내려놓는 무진의 손길이 거칠다. 쾅 하며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펜트하우스에 울려도 두 남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주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사과를 했지만 입술을 굳게 다무는 게 고집을 물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씁쓸한 입안을 훑던 무진이 잠시간 생각에 빠지더니 수트를 고쳐 입고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내가 직접 봐야겠다."
무진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 푸른 불빛이 새어 나오는 사무실 근처에 다다랐고 그곳에서 겁먹은 얼굴로 책상을 등진 채 서 있는 김무시를 발견했다. 노트북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밝게 보이진 않았지만, 조용한 사무실에 무진이 낸 인기척에 놀란 모양이었다. 퍽 순진한 표정을 짓고 얼어서 서있는 그녀를 한참 쳐다보던 무진이 시선을 돌려 그녀의 책상을 살폈다. 천천히 다가가자,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그녀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무진이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그녀의 얼굴에 꽂혀있던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가 멈추지 않고 천천히 다가오자, 그녀는 책상에서 벗어나 옆으로 한 발짝 자리를 옮기며 그와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무시는 긴장감과 어색함에 비어있는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 덕에 열린 그녀의 책상을 찬찬히 살피던 무진은 그녀가 정리하고 있던 보고서와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다 시선을 다시 그녀에게로 옮겼다.
"왜 이렇게 긴장하지""...아...갑작스러워서..죄송합니다"
그녀의 대답에 피식 웃은 무진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 닿았다. 가녀린 손목과 살짝씩 보이는 손가락은 운동이나 훈련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듯 어둠 속에서도 말랑해 보였다. 다가오는 나를 피한답시고 되레 구석으로 도망가는 꼴이 싸움에도 능해 보이지 않았다. 무진이 그녀를 살펴보며 침묵을 끌어 불편한 공기가 이 공간을 침범해도 먼저 대화를 트려고도 하지 않았다. 검은 면바지에 목티와 카디건을 입고 질끈 성의 없이 묶은 머리 때문인지 보고받은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이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불순하게 접근하려던 의도 같지도 않았다.
서로가 경계의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복도가 밝아지며 두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화장기 거의 없는 얼굴은 복도가 밝아지자, 눈만 한번 크게 깜빡이고는 다시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자신만을 쳐다보는 무진의 시선을 견디고 있는 게 보통은 아니었다. 밝아진 복도 끝에서 아까와 같이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전과 다른 건 아까와는 달리 빠르게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무진의 시선을 견디며 그를 마주 쳐다보고 있던 무시의 시선은 그제야 복도 끝을 향했다. 또 누가 오는지 살피는 듯 복도에 시선을 고정하자 동시에 살며시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쳐다보던 무진도 몸을 돌려 복도 쪽을 쳐다보았다.
잰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온 사람은 태주였다. 태주는 조금 가빠진 숨을 크게 쉬어 고르곤 사무실에 성큼 들어와 대표님 가까이에 다가섰다. 무시는 태주에게도 꾸벅 인사를 하며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대표님"
느긋하던 최무진 대표와는 다르게 뒤따라온 태주의 목소리는 많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를 한 번 쳐다보던 최무진대표도 이내 사무실을 벗어나고 있었다.
'꼬르륵'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 조심스레 자기 자리로 돌아와 보고서를 제자리에 넣으며 노트북을 끄던 무시가 놀라며 배를 움켜쥐었다.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나 10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자기 귀에만 들렸으면 좋으련만 두 사람도 들었는지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도 내려와 꽂혔다.
"김무시씨, 같이 식사나 하지"
지겨운 야근 중에 갑자기 나타난 최무진 대표이사는 어둠 속에서 나를 말없이 구석으로 몰아세우더니, 갑자기 쫓아오듯 나타난 정태주 이사는 나를 적대시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밤 10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고, 대표님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일개 직원인 나에게 갑작스레 식사를 제안했다.
"대표님.."
무시를 한 번 째려보고는 무진을 말려 보려는 정태주 이사의 행동에 그녀가 빠르게 노트북을 덮고 의자에 걸쳐둔 외투를 집어 들었다.
"네 대표님"
서둘러 가방을 메지도 못한 채 급하게 따라나서는 그녀를 보자 무진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나서자 아주 짧게 정태주와 김무시의 시선이 마주쳤다.
경계심이 가득한 시선을 맞받아치는 그녀의 눈동자는 공허하고 맑기만 하다.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녀의 눈이 먼저 정태주를 피했다. 다시 한번 느리게 꾸벅 인사를 하며 최무진을 따르는 그녀를 쳐다보는 정태주의 미간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