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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心訣
삼계를 윤회하는 고통은 마치 불난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면서 그 오랜 고통을 받으려 하는가?
그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길밖에 없다.
만약 부처를 찾으려면 마음이 곧 부처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을 것인가.
바로 이 몸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몸은 무상하여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지만
이 진심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는 죽으면 흩어져 불이나 바람의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 마음은 영원히 신령하여 하늘을 덮는다* 하였다.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미혹 된지가 오래되어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성품이 참 진리인 줄 알지 못해서 진리를 구하려고 하면 멀리 성인들만 추앙하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관조觀照하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뜻에 집착하여 佛道를
구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우고,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베끼며, 눕지 않고 오래 앉아 참선만 하며, 아침 한 끼만 먹으며,
나아가 모든 대장경을 다 읽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해도 이는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다만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알면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찾지 않아도 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널리 모든 중생을 관찰하니
다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다.*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가지 가지의 허망된 생각들이
다 원만히 깨달은 여래의 묘심에서 나온다.*하셨다.
그러나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여래도 오직 이 마음을 밝히신 분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역시 이 마음을 닦는 사람이다.
그러니 미래의 수행할 사람도 응당 이 진리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데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밖에서 찾지말라.
마음의 성품은 깨끗하여 본래 원만한 것이다.
단지 망령된 생각들만 여의면 곧 그대로 부처일 것이다.
묻기를
*만약 불성이 지금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이 몸안에 있으므로
범부를 떠난것이 아닌데 어째서 저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해석하여 속속들이 깨닫도록해주십시요.*
답하기를
*그대 몸에 있는데도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하루 가운데서 배고프다, 목마르다 하는 것을 알고, 춥다, 덮다, 하는 것을 알고,
혹 성내거나, 기뻐할 줄 아는데, 이것이 결국 어떤 물건인가.
이 몸은 地水火風의 네가지 요소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서
그 바탕이 둔하여 감정이 없으니 어찌 보고,듣고,지각할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듣고,지각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佛性이다.
그러므로 임제스님은*이 몸뚱이는 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도 못하고 단지 그대 눈앞에 밝음이 역력하지만
형상이 없는 그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하였다.
여기서 말하는*형상이 없는 그 것*이란 바로 모든 부처님의 바탕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므로 불성이 그대 몸에 있는데 어째서 헛되이 밖에서 구하겠는가?
만약 그대가 믿을 수 없다면 간략하게 옛 성현들이 도를 깨친 인연을 들어 그대의 의심을
풀어줄 테니 그대는 잘 듣고 믿기 바란다.
옛날에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부처라 합니까?*
존자가 대답했다.
*見性하는것이 부처입니다.
왕이 묻기를
*스님은 견성 했습니까?
존자가 말했다.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왕이 묻기를
*그 불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존자가 말했다.
*불성은 작용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왕이 묻기를
*그것은 어떤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존자가 말했다.
*지금도 나타나서 작용하고 있습니다만 왕께서 스스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왕이 묻기를
*나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존자가 말했다.
*만약 왕께서 작용하고 있다면 불성아닌 것이 없지만
왕께서 만약 그것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몸도 또한 보기 어렵습니다.
왕이 묻기를
*만약 작용할 때는 몇 곳에서 나타납니까?
존자가 말했다.
*나타날 때는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왕이 말하길
*그 나타나는 여덟 군데를 나를
위해 설명해 주십시요.
존자가 말했다.
*태胎안에 있을 때는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으면 보는 놈이라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 놈이라 하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고 혀에 있으면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으며발에 있으면 부지런히 걷습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세계를 다 감싸지만,
거두어 들이면 하나의 티끌속에 있습니다.
아는 자는 이것이 불성 인줄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精魂:(죽은사람의 영혼)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바로 열리었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귀종화상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하려 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스님이 말했다.
*화상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스님이 말했다.
*어찌 깨달은 경지를 잘 보호하여 닦아가는 보림을 해야합니까?
화상이 말했다.
*하나의 티끌이 눈에 들어가면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그 스님은 그 말에 곧 깨달음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옛 성현이 도에 들어간 이야기가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로움을 덜기에 도움이 될것이다.
이러한 공안을 의지해서 믿음과 이해가 있게 되면 바로 옛 성현들과 손을 잡고 함께 갈것이다.
묻기를
*스님은 성품을 보았다고 하시는데 만일 참으로 성품을 보았다면
바로 성인이시라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보통사람과는 다를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즘 마음 닦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나타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답하기를
*그대는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말라.
邪와 正을 분별하지 못하면 이는 미혹에 빠진 사람이다.
요즘 道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지만
마음은 포기 상태여서 도리어 분수에 없다는 잘못,
중생으로서는 성인의 경지에 들 수 없다는 착각에 떨어진 자들은
다 그대가 의심하는 것과 같다.
道를 배우되 先後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되 本末을 분간하지 못하면
이를 일러서 邪見이라 하지 수행이라고 하지않는다.
이런 이는 자신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겸하여 남도 잘못되게 만드는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 되겠는가?
대게 도에 들어가는 문은 많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頓吾와 점수漸修의 두 가지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와 점수는 최상의 근기를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애에 걸쳐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 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진리를 들으면 즉시 깨닫게 되어 일시에 모든 것을 끝낸다.
하지만 사실 이것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근기이다.
그러므로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다.
과거의 성인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 나갔고 그 닦음에 의해 증득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대가 말한 신통변화는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고 차츰 익혀야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은 즉시 나타나는것이 아니다.
經에 이르기를
*이치로는 돈오하여 깨달음과 동시에 모든 번뇌가 사라지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례 차례 없어진다.* 하였다.
그러므로 규봉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 가는 뜻을 분명히 밝혀 말씀하시길
*얼어있는 연못이 순전히 물인 줄 알지마는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곧 부처인 줄을 알지마는 법의 힘을 빌려서 익히고 닦가야한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야 바야흐로 그 물에 씻는 보람이 나타나고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 신통과 광명의 작용이 나타난다.* 하였다.
그러므로 사실상 신통변화는 하루 아침에 일어나는것이 아니라
차츰 익히고 닦아야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우기 사실상의 신통이란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는 오히려 요사하고 괴이한 일이고
또한 성인에게도 말단의 일이라서 혹 그것이 나타나더라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으면 즉시 한량없는 묘한 작용과 신통변화를 나타낸다.* 하고 있다.
만약 이런 견해를 가진다면 이는 先後를 알지 못하고 本末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요.
이미 선후와 본말을 알지 못하고 불도를 구하려 한다면
마치 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끼는 것과 같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미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절벽을 바라보는 듯한 생각을 내어 스스로 포기하여
부처의 種性을 끊는 이가 적지않다.
이미 스스로가 밝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깨달음까지도
믿지 않고 신통이 없는 이를 보고는 곧 업신여긴다.
이것은 성현을 속이는 일이니 참으로 슬프다.
묻기를 *스님께서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라 하였습니다.
깨달았다면 이미 돈오한 것인데 어째서 점점 닦아야 하며
그 닦음이 만약 점점 닦아야 할 것이라면 어째서 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돈오와 점수의 두 가지 뜻을 다시 설명하여 남은 의심을 끊게해주십시요.
답하기를
*돈오라는것은 범부가 미혹했을때 四大를 몸으로 삼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이 참 法身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신령한 지혜가 참 부처인줄 알지 못해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찿아 물결치듯이 흘러 다니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바른 길로 들어가 한 생각에 心光을 돌이켜서 자신의 본성을 보면
이 성품에는 본래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었서
모든 부처님과 더블어 털끝 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돈오라 하는것이다.
점수라는것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랜세월의 습기는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그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점점 익혀서 空을 이루고
또 오랜동안 성인의 자질을 잘 길러 나가야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하는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은 충실하지 못하므로 어느정도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성인이 되는 것과 같다.
어떤 방편을 써야 한 생각의 기틀을 돌려 自性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기를
*오직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쓴단 말인가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신의 눈인데 어째서 다시 보려고 하는가!
만약 잃지 않았음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보지 못한다는 마음이 있겠는가.
자신의 신령스런 앎도 역시 그와 같아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째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알려고 한다면 곧 알지 못할 것이며
다만 알 수 없다는 것임을 알면 바로 성품을 봄 見性이니라.
묻기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들은 즉시 알겠지만
중,하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방편을 설하여 모르는 사람을 깨닫도록 해주십시요.
답하기를
*도를 알고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어리석게도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버리고 나의 말을 잘 들어라.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수아비와 같다.
그러므로 망령된 생각은 본래 고요하고 진경
즉 감각의 대상이 객관세계 즉 안이비설신의에 비춰지는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은 본래 空한 것이다.
모든 법이 공한 곳에는 신령스런 지혜가 어둡지 않으니
이 공하고 고요한 신령스런 지혜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 면목이다.
모든 사람이 갖추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성품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과 천하의 선지식이 은밀하게 전한 진리(法印)이다.
만약 이런 마음을 깨친다면 참으로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올라 걸음 걸음이 삼계를 초월하고
집에 돌아가 담박에 의심을 끊을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대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므로 하루에 만량의 황금을 소비하듯이
한량없이 귀한 공양을 인간과 천상으로부터 받게 될것이다.
그대가 만약 이와같으면 참다운 대장부로서 일생의 할 일을 다 마쳤다. 하겠다.
묻기를
*저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것이 空寂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靈知의 마음입니까?
대답하기를
*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다.
어째서 돌이켜 비추지 않고 밖에서 찿는가.
내가 지금 그대의 입장에 의거해서 바로 본래의 마음을 가리켜
그대를 깨닫게 할 것이니 그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 말을 잘 들어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보고 듣고 웃고 말하며 혹은 성내거나 기뻐하거나 옳다 그르다
하는 갖가지의 행위와 동작은 필경 누가 그렇게 하는가를 말해보라.
만약 육신이 동작하게 한다면 어째서 금방 명이 끊어진 사람의 몸은 아직 썩지 않았는데도
눈은 보지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고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걷지 못하는가.
이러므로 보고 듣고 동작하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본심이지 그대의 육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사대(地水火風)의 성품은 비어서 거울속의 형상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은데 어떻게 항상 뚜렷이 알고 분명하고 어둡지 않아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이
한량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신통과 묘한 작용은 물을 긷고 나무를 운반하는데 있다.* 하였다.
즉 물을 긷고 나무를 나르는 일상의 생활을 뜻한다.
그리고 진리에 들어가는 길은 많지만 그대에게 한 길을 가리켜서
그대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리라.
'그대는 저 까마귀 우는 소리와 까치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예 듣습니다.
그대는 돌이켜서 그대가 듣고 있다는 성품을 들어 보아라.
거기에도 많은 소리가 있는가?
거기에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없습니다.
기특하고 기특하구나 이것이 바로 관음보살이 진리에 들어간 문이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거기에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얻을수 없다고 하였다
이미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면 그러한 때는 허공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空하지 않아서 밝고 밝아 어둡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것이 공하지 않은 것의 본체인가?
형상이 없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그러므로 '성인의 지혜라고 해서 빛나는 것도 아니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있다고 해서 어둡지가 않다.'하였다.
이미 성인이라 해서 불어나는 것도 아니요
범부라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면 부처나 조사들이 어찌 보통사람과 다르겠는가.
그러나 보통사람과 다른것은 자기 마음을 잘 보호하는 것뿐이다.
그대가 만약 이 말을 믿어서 의심이 담박 없어지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참되고 바른 견해를 일으켜서
직접 그 맛을 보고 스스로 긍정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닦는 사람의 깨달은 자리가 되는것이다.
여기에는 계급의 차례가 없으므로 頓 문득 또는 담박이라 한다.
이것은 믿음의 요인이 모든 부처의 果德:(최상의 결실로 얻어지는 덕) 과 일치하여
조금의 차이도 없어야 비로소 믿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 말과 같다.
묻기를
*이미 이런 이치를 깨달아서 다시는 계급이 없다면
어째서 깨친 뒤에도 닦아서 점차로 닦아야 하는 것입니까?
뜻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그러나 의심을 풀지 못했으니 거듭 설명하겠다.
그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세히 들으라
범부는 시작이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다섯 갈래의
세계에 흘러다니며 태어나고 죽고 하되 '나'라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뒤바뀐 망상(현재의 번뇌)와 무명의 습기(근본번뇌)가 오랫동안 지금의 성품을 이루었다.
비록 금생에 이르러 자신의 성품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금방 깨달았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익혀온 습성은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기 때문에
역경이나 순경을 만나면 성내거나, 기뻐하며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이
불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객관세계에 대한 번뇌가 그전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지혜로써 공들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무명을 다스려 크게 쉬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단박 깨치면 부처와 같지만 여러생의 습기가 깊구나.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엄습한다.'하는 말과 같다.
또 대혜종고선사도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이런 이치를 알고는 아주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다시는 닦지 않는다.
그대로 세월이 가면 그 전처럼 유랑하게 되어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된다.' 하였다.
그러니 한번 깨쳤다 하여 뒤에 닦는 일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친 뒤에도 늘 비추고 살펴서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거든 따르지 말고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究景이니 천하의 선지식이 깨달은 뒤에 소 먹이는 행이 바로 이 때문이다
비록 뒤에 닦는 다고는 하지만 이미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임을 먼저 깨쳤기 때문에
악을 끊되 끊어도 끊음이 없고 선을 닦되 닦아도 닦음이 없어야 이것이 참다운 닦음이고
참다운 끊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행을 다 닦으나 오직 무념으로 근본을 삼는다.'하였다.
규봉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총괄하여 말하기를
*이 성품은 원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와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담박 깨닫고
이 깨침에 의해 수행하면 이것을 일러 最上乘禪 또는 여래청정선 이라 한다.
만약 생각 생각에 닦고 익히면 저절로 차츰 차츰 백천삼매를 얻을 것이니
달마 문하에서 서로 전하여 내려온 것이 바로 이런 禪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이치는 마치 수레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없으면 안된다.
혹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조복 받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聲聞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 하였다.
다만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음행하는 것이 성품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자세히 관조한다면 일어남이 곧 일어남이 없는것이다.
본바탕이 고요한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하였고
또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진다.'하였다.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객관세계에 대한 번뇌가 있다해도 그것은 다 제호(부처님의 성품)을 이룬다.
다만 미혹이란 근본이 없는 것임을 관조하여 알면 허공의 꽃처럼 실체가 없는
三界는 바람에 사라지는 연기와 같고 허수아비와 같은
객관세계는 마치 끓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을것이다.
만일 이처럼 생각 생각에 닦고 익히며 마음을 관조하기를 잊지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없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밝게 드러날것이다.
죄업이 자연히 없어지고 공덕이 절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도 끊어질 것이다.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화신을 나타내되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용이 무궁하여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고 즐거움만 있고
근심이 없으리니 이를 일러 크게 깨친 세존이라 한다.
묻기를
*깨친 뒤에 닦아나가는 문중에서는선정과 지혜를 동등히 가진다는 뜻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자세히 말씀하시어 미혹을 없애고 해탈의 문에 들게 해주십시요.
답하기를
*만약 법과 그 뜻을 말한다면 진리에 들어가는 천가지 문은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그 요점을 든다면 단지 자기 성품의 본체와 작용의 두가지 뜻이니 앞에서 말한 바고
고요함과 신령스럽게 아는것이 그것이다. 선정은 곧 본체요. 지혜는 작용이다.
그래서 본체를 떠나지 않는 작용이므로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았고
작용을 떠나지 않은 본체이므로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선정은 곧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도 항상 아는 것이고
지혜는 곧 선정이므로 알면서도 항상 고요한 것이다.
그래서 조계스님이 마음에 산란함이 없는 것이 자기 성품의 선정이요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자기 성품의 지혜다.'한 말과 같다.
만약 이처럼 깨달아서 고요함과 아는 것이 자유로와서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니게 된다면
이것이 돈문에 들어간 뛰어난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아울러 닦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고요함으로써 반연하는 생각들을 다스리고 그 다음에 깨어있는 정신으로
혼미함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면서 선후를 따라 다스려 혼미함과 산란함을 가라앉혀
고요함에 들어가는 사람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
그는 비록 깨어 있음과 고요함을 평등하게 한다고 하지만 고요함 만을 취하는 수행을
면하지 못하니 어찌 깨달은 사람이 본래의 고요함과 본래의 앎을 떠나지 않고
자유롭게 두 가지를 함께 닦는 것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계스님은 '스스로가 깨쳐서 수행하는 것은 따지는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따지면 그는 미혹된 사람이다.'하였다.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경지에서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뜻은 애써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원래 無爲라서 어떤 특별한 때도 없다.
즉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에도 그러하고 옷입고 밥먹을 때에도 그러하고
똥누고 오줌 눌 때에도 그러하고 남과 이야기 할때도 그러하고
내지 걷거나 서있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언제든지 항상 그러하다.
마치 빈 배가 물결을 따라 올랐다 내렸다 하고 흐르는 물이
산을 돌아갈때 굽이 돌아가기도 하고 바로 흘러가기도 하듯이
마음 마음이 알음 알이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무심하여 자유롭고 내일도 무심하여 자유로와서
온갖 반연을 따라도 아무런 장애가 없고 악을 끊거나 선을 닦는다는 생각도 없다.
또한 순박 솔직하고 거짓이 없으며 보고 들음에 무심하여 한 티끌도 상대하는 것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한 생각의 망령된 감정도 일어남이
없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업의 장애는 두텁고 습기는 무거우며 관행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서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적으며 선악의 경계에서는
마음이 동요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여 담담하지 못한 사람은 반연을 잊고
없애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육근이 경계를 대해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않는 것을 선정이라하고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공해서 미혹됨이 없음을 비추어 아는 것을 지혜라 한다.
이것은 비록 수상문(隨相門:경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공부)의 선정과 지혜이고
점문(漸門)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라지만 경계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없을 수가 없다.
만약 망상이 들끓거든 먼저 선정의 이치대로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서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 고요함에 계합하게 하며 만약 혼침이 더욱 많으면 이젠 지혜로써 법에 따라 空함을 관조하여
미혹됨이 없음을 비추어서 본래의 앎에 계합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써 멍청함(無記)을 다스려서 동요함도 고요함도
서로 없어지고 경계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노력도 없어지면 경계에 대하여 생각 생각이
근본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道에 계합하는 등
마음대로 안팍을 닦아 나가야 비로소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 될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져
불성을 밝게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 말과 같다.
묻기를
*스님의 말씀대로 깨친 뒤에 닦는 방법을 보면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성품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자기성품이란
'걸림없는 고요함과 아는것이
무위여서 하나의 티끌도 상대함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한 생각의 망령된 정(精)도 일어남이 없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필요도없다.'하고는
결론 짓기를 '이것이 담박에 깨닫는 문(頓門)에 들어간 사람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을 따르는 문(隨相門)은 이치에 따라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법에 따라 공을 관조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서 무위에 들어간다.'하고
결론 짓기를 '이것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 '하셨읍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수행함에 있어서 먼저 자기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은 뒤에
다시 수상문 즉 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경계를 다스려 나가야합니까?
아니면 먼저 상을 따르는 공부로써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린 뒤에 자기의 성품에 문으로 들어가야합니까?
만약 먼저 자기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 한다면 고요함과 아는것이 자재하여
다시 대상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공력이 없을텐데 어째서 수상문 즉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마치 흰 옥에 무늬를 새김으로써 본바탕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먼저 상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얻어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완성한 뒤에 자기성품의 문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점차로 수행하는 동안 열등한 근기가 깨닫기 이전의 점차로 닦아 나가는 공부이니
어째서 돈문의 사람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가 나아가되 노력없는 노력을 쓰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만약 전후가 없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돈문과 점문의 두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가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즉 돈문의 사람은 자기성품에 따라 걸림이 없으니 노력할 것이 없고 점문의 열등한 근기는
상을 따라서 대상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돈문과 점문의 두문은 서로 서로 근기가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방법
가운데서 어떻게 두 가지를 아울러 말씀하십니까? 다시 잘 설명하여 의심을 풀어주십시요.
답하기를
*해석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심을 내는구나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다시 의혹이 생기고
뜻을 얻고 말을 잊으면 물을 필요가 없다.
만약 그 두 문에서 각기 수행할 바를 판단한다면 자기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자는
이 돈문의 노력없는 노력으로 두가지 고요함 즉 돈문의 고요함과 수상문의 고요함을
아울러 운용하여 자기성품을 스스로 닦아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그리고 상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 사람은
깨치기 전의 점문의 열등한 근기로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력으로 인해
마음마다 의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해서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두 문의 수행은 頓과漸이 다르니 혼돈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깨달은 뒤에 닦는 문에서 겸해서 相을 따라 다스리는 법을 말한것은 점문의 근기가
닦는 것을 전적으로 취한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해서 길을 빌리고 숙소를 의탁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이 돈문에도 역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있으므로 한가지 예로 가는 길을
판단할 수 없기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대해서도 무심하고
여덟가지 번뇌(이익,쇠퇴,훼손,명예,칭찬,비난,고통,즐거움)에도 동요하지 않고
세가지 느낌(괴로운 느낌,즐거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도 고요한 이는
자기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 하여 겸해서 닦아 나아가되 천진하여 조작됨이 없다.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정에 있으므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한 것인데
왜 상을 따라 다스리는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먼저 깨달았다 하더라도 번뇌가 두텁고 습기가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면 생각 생각에 잠겨 감정이 일어나고
반연을 만날적마다 마음은 대상을 만들어 혼침과 산란에 빠져서
고요함과 아는 마음이 흐려지는 사람은 곧 상을 따라 수행하는 선정과 지혜를 빌려서 다스려야
함을 잊지말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감이 마땅하다.
비록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빌려서 잠시 습기를 조절하지만
이미 마음의 本性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에
점문의 열등한 근기에 물들은 수행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치기 전의 수행이란 공부를 잊지 않고 생각 생각에 익히고 닦지만
곳곳에서 의심을 일으켜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는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항상 나타난다.
그러다가 오랜세월이 지나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가 익으면 마음과 몸과 객관의 대상이 편해진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편안한것 같으나
의심이 뿌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 돌로 풀을 눌러 놓은것 같아서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 자재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의 닦는 것은 참다운 닦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도
비록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방편이 있지만 생각 생각에 의심이 없어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랜세월이 가면 자연히 천진하고 묘한 성품에 계합되어 고요하고 아는것이 자유롭고
생각 생각 일체의 경계에 반연하면서도
마음 마음은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버리되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히 가져
무상보리(無上菩시)를 이루어
앞에 말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다름이 없게되는 것이다.
상을 따르는 수상문의 선정과 지혜는 비록 점차로 수행해야 하는 근기를 가진 사람이 행하는 것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쇠로 금을 이루는 것이라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안다면 어찌 自性門 隨相門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있어서 앞뒤의 차례가 있다는 두 가지 견해의 의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바라건데 모든 道닦는 사람은
이 말을 깊이 음미해서 다시는 의심으로 인해 스스로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하라.
만약 장부의 뜻을 가지고 최상의 보리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버리고 어떻게 할것인가.
결단코 글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참 뜻을 깨달아서 일일이 자기에게 돌아가 근본에 계합한다면
스승없는 지혜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고 천진한 이치가 분명하여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말미암아 깨닫지 않으리라.
이러한 묘한 뜻은 모든 사람에 해당되긴 하나 일찍이 지혜의 종자를 심은 대승의 근기가 아니면
능히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지 못할것이다.
한갓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방하여 무간지옥에떨어지는 자가 허다히 많다.
그러나 믿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한번 귀를 스쳐 잠시라도 인연을 맺은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유심결)에'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부처가 될 수 있는 인연을 맺고
배우고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이렇게만 해도 성불할 바른 인연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워서 이루고
이를 잊지 않고 수호하는 사람의 공덕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과거에 윤회하던 업을 돌이켜 보면 몇천겁을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온갖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또 불도를 구하고자 해도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여 그 얼마나 오랜 겁을 나고 죽고
바다에 빠져든채 깨닫지 못하여 많은 악업을 지었던가.
때때로 한 번씩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긴 한숨이 나오는데 어찌 또 게으름을 피워
지난날의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그리고 누가 나로 하여금 지금의 인생으로 태어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진리의 길을 닦도록 하였는가.
실로 눈 먼 거북이 나무를 만나고 작은 겨자씨에 바늘이 꽂힘과 같으니 그 다행함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내가 지금 만일 스스로 물러날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악도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한 구절 불법을 들어서 믿고 알고 받들어서 고통을 면하고자 해도 다시 얻을수 있겠는가.
위태로운데 이르러서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
원컨데 모든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심하지 말고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살피고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말라.
더없는 세월은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석양과 같으니 비록 오늘 살았다
해도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새기고 간절히 마음에 새겨라.
또 세상의 有爲의 선을 따라도 삼악도의 고통을 면하고 천상과 인간에서 뛰어난 과보를
얻어 온갖 즐거움을 누리는데 하물며 이 최상승의 깊은 법문이겠는가.
잠시 믿더라도 그 공덕은 어떤 비유로도 말할 수 없다.
經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세상 중생들에게 보시하고
공양하여 다 만족하게 하고 또 그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함의
사과(四果)을 얻게 한다면 그 공덕은 한량없고 끝없을것이다.
그러나 밥 한그릇 잠깐 동안만이라도 이 법을 바로 생각하여 얻은 공덕만은 못하다.*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이 가장 높고 귀하여 모든 공덕에 견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經에 말하기를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道場)이니
갠지스강의 모래수와 같은 칠보탑을 만든것 보다 훌륭하다.
칠보탑은 마침내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생각 깨끗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 것이다.
원컨데 수도하는 모든 사람은 이 말을 깊이 음미하여 간절히 마음에 새겨야 할것이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 할것인가.
지금 만약 닦지 않으면 만겁에 어긋나고 지금 만약에 억지로라도 닦으면
닦기 어려운 수행도 점점 어렵지 않게되어 功行이 저절로 나아갈 것이다.
슬프다
지금 사람들은 배가 곱프면서도 만난 음식을 보고 먹을 줄을 알지 못하고
병이들어 의사를 만났어도 약을 먹을줄 모르는구나
참으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하며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수 없다.
또 세상 有爲의 일은 그 형상을 볼수 있고 그 공덕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한가지 일만 얻어도 희귀하다고 감탄한다.
그러나 나의 이 마음은 그 형상을 볼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마와 외도들이 훼방하려 해도 길이 없고
제석천과 범천의 모든 하늘이 칭찬하려 해도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얄팍한 범부의 무리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우물안의 개구리가 어찌 바다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찌 사자의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법세상에 이 법문을 듣고 희유한 생각을 내어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니는 자는
이미 한량없는 겁동안 모든 성인을 받들어 모든 선근을 심고 지혜의 바른 인연을 깊이 맺은
최상의 근기임을 알수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 이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의 처소에서
모든 심근을 심는 것이다.'하였고
또 이 法은 대승의 마음을 낸 사람과 최상승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하였다.
원컨데 道를 구하는 사람은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내지 말고 부디 용맹스러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숙세에 맺은 거룩한 인연 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처럼 수승한 근기를 믿지 않고 스스로 못났다고 하여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금생에 닦지 않으면 비록 숙세에 선근이 있다해도
지금 그것을 끊어 버리는 것이 되므로 더욱 어려워지고 점점 멀어질 것이다.
이미 보배있는 곳에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한다.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회복하기 어려우니 청컨데 부디 삼가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찌 보배 있는 곳을 알고도
그것을 구하지 않다가 오래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하겠는가.
만약 보배를 얻으려거든 그 가죽 주머니를 놓아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