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8월, 내 출생지 전북 고창군 부안군 선운리에서
만년을 은거하시던 내 아버지가 58세로 돌아가시었는
데,
한마디의 유언도 없이, 앓는 소리도 없이, 붉은 웃수염
끝을 잠깐 만져 보시고는
긴 여행길의 나그네 소년이 잠시 한잠 붙이듯
스르르 눈을 감으며 숨을 거두시었다.
아버지도 고질의 장출혈로 돌아가셨고
나도 지금껏 그 병을 유전으로 이어가지고 있으니
내 임종의 꼴도 아마 이 비슷할 것이다.
나는 붉은 수염이 아니니 이것 하나나
다를 것이다.
아버지가 일생 벌어 내게 남긴 유산은
이곳 선운리의 모시밭 이삼십 마지기에
심원면이란 곳에 여기저기 사 두신 전답 이삼십 마지
기에
생명보험료 일금 일천 원야.
그러나 제물에는 자고로 언제나 왁자한 말썽도 붙는
것이라
심원면의 콩밭 몇 마지기 때문에는
재판소에도 귀찮게 끌려나가야 했고,
또 그 후렴의 시로는 그 원수에서 숭어회도 좀 얻어먹어
야만 했다.
…
이분이 내 아버지에게서 밭을 샀다고 그 이전 독촉 소
송을 걸어 왔고
내 어머니의 기억으론 그런 일이 전연 없다고 하시어
전주 지방법원 정읍 지청에서 재판에 걸렸는 바
조사해 보니 이 김억만 씨가 그 계약서와 내 아버지
도장을 위조한 게 판명되어
할 수 없이 또 감옥에 들어가게 된 걸
내가 제소 포기로 용서해 주었더니
감지덕지하여 심원면의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하고
손수 잡아 만들어낸 숭어회였네.
환갑 나이의 김억만 씨도 무척은 기뻐했으니
이것도 시는 시지 별것이겠나.
이러구러 기러기 우는 가을은 또 와서,
어느 이슬비 내리는 오후를 나는 우산도 안 쓰고
심원면에서 선운사 입구로 가는 신작로를
어슬렁어슬렁 축축이 젖어 가고 있었는데,
길가의 실파밭 건너 오막살이 주막이 하나 보여
“약주 있소?” 하고 들어서니
“예” 하며 맞이해 나온 주모는, 뭐라 할까,
나이 마흔쯤이 꼭 전라도 유자배기 그대로의 여인이었
네
“그렇잖아도 오늘은 한번 개봉해 볼까 하는
꽃술이 한 항아리 기대리고 있는디라우”
인사 말씀은 겨우 이것이었으나
그 말씀에 따르는 그 멜로디는 노련하신 육자배기 그
대로여서
이거야 정말 김억만 씨 작의 시보다는 한결 더 나은
것같아.
가뭄에 뛰어오르던 잉어 쏘내기에 다시 물에 잠기듯
“합시다”하고 앞장서 방에 쑤욱 들어가서는
물론 그 꽃술 개봉이라는 걸 시키고
그 육자배기 예편네와 함께 눈 깜짝 사이에
그 한 도가니를 온통 다 마셔 버렸네.
‘눈 깜짝할 사이’라는 건 물론
좀처럼 눈을 깜짝거리지 않는 그런 사람을 표준해서
말씀야.
술도 술도 이렇게 억수로 먹히던 건
내 생애에서도 이것이 최고 정상이었네.
그 육자배기 예편네는 술이 얼얼하자
그 한 많은 진짜 육자배기도 나한테 들려주고
작별할 때는 역시나 그 육자배기 멜로디로
“동백꽃이 피거들랑
또 오시오, 인이……” 하고
위아래 이빨을 꼭 다붙여 몰고
그 사이에서 나오는 ‘ㄴ’ 치모음 소리로
그 ‘인이……’ 를 세계 으뜸의 매력으로 발음해 주었나
니
(중략)
그런데 그 뒤 10년이 지난 1951년의 대 빨치산전투 때
경관들에게 밥을 지어 먹였다는 죄로
이 여자와 그 가족들은 빨치산에게 학살을 당하고,
그 주막도 불태워져 버리고
뒤에 내가 가 보았을 땐 그 실파밭만 남았더군.
그래 나는 그 뒤 선운사의 내 시비에 새긴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 그 육자배기 소리를 담아 보았
지.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유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 미당 서정주 시집 <질마재로 돌아가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