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가양1동(佳陽1洞)은 동으로는 가양2동(佳陽2洞)·자양동(紫陽洞), 서로는 성남동(城南洞)·삼성1동(三省1洞), 남으로는 자양동(紫陽洞)·용운동(龍雲洞), 북으로는 용전동(龍田洞)과 연접해 있다.
〔유래〕굉잇들 가에 괭이, 갱이라는 마을이 있어 가양동(佳陽洞)이라 하였다. 또는 햇볕이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이 따뜻하다하여 가양(加陽)이라 불렸다가 후에 가양(佳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연혁〕백제(百濟)때는 우술군(雨述郡), 신라(新羅)때는 비풍군(比豊郡), 고려 초기에는 회덕현(懷德縣)에 속했다가 뒤에 공주부(公州府)에 속했다. 조선시대 태종(太宗) 13년(1413)엔 다시 회덕현(懷德郡) 외남면(外南面)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말 고종(高宗) 때에는 회덕군 외남면에 속해서 괭잇들 가에 있으므로 괭이 또는 가양(佳陽)이라고 불렀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매봉리(梅峰里), 원리(院里), 탁곤리(卓昆里)와, 내남면의 송촌(宋村) 일부를 병합하여 갱이의 이름을 따서 가양리(佳陽里)라 하여 대전군(大田郡) 외남면(外南面)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大田府) 신설에 따라 대덕군(大德郡) 외남면(外南面)에 편입되었다. 1940년 11월 대전부(大田府) 가양정(佳陽町)이라 하다가, 1946년 해방과 더불어 왜식 동명(洞名) 변경에 따라 가양동(佳陽洞)이라 고치고 대전시 동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동구 가양동이 되었다. 현재는 가양1동과 가양2동의 행정동이 하나의 법정동인 가양동을 관할하고 있다.
〔특이사항〕행정동으로서의 가양1동은 37통184반을 관할하고 있으며 1993년 12월 현재 면적은 1.04㎢이며 6,992세대에 24,628명(남 12,460, 여 12,168)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가양동은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어 각종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우선,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이 나당연합군에게 패해 항복한 후에도 무장 파가(波加)가 백제부흥군을 이끌고 이곳 산성에서 진을 치고 끝까지 저항했던 곳이다. 또한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연고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며, 우암 송시열이 글을 읽었다는 남간정사(南澗精舍)도 이곳에 있다.
<지 명>
갱이공원〔공원〕
〔위치〕대성여자중고등학교 북동쪽, 대성여중고교와 신촌교 사이에 있다.
경원아파트〔아파트〕
〔위치〕가양초등학교 동쪽, 신가양종합시장과 인접해 있다.
괭이(갱이)〔마을〕
〔위치〕매봉 남쪽, 흡내 동남쪽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의 가양초등학교와 대성여중고등학교 사이부근이었다.
〔유래〕숲이 우거진 괭이들 가운데 마을이 있어 괭이라고 하였다.
〔풀이〕''괭이 > 갱이''에서 ''ㅙ > ㅐ''는 반모음''W(오)''가 탈락된 것이다.
대성여자중고등학교〔학교〕
〔위치〕성남동사거리 남동쪽, 가양교와 중경공업대학 사이에 있다.
매봉〔마을〕
〔위치〕갱이 북쪽이며 흡내 동쪽에 자리했던 마을로서, 지금의 가양시장 부근이 된다.
〔유래〕마을 뒷산이 매의 형상을 띠고 있어 매봉이라고 불렀다. 또 삼매당기(三梅堂記)에 보면 매봉(梅峯)으로 쓰여져 매화로 해석하였다.
매봉공원〔공원〕
〔위치〕동부사거리 남서쪽, 한성잉꼬 아파트에 인접해 있다.
물빠대〔들〕
〔위치〕외흥룡 서쪽에 있던 들로서, 지금의 신도빌딩 부근에 있었다.
〔유래〕물이 잘 빠지는 곳에 있어 물빠대라고 하였다.
〔풀이〕''''''''물빠대''''''''에서 ''''''''물빠''''''''는 고유어이며, ''''''''대''''''''는 한자어로 집터 대(垈)이다.
성문장로교회〔교회〕
〔위치〕동부사거리 서쪽, 피어리스와 명신빌딩 사이에 있다.
시거리〔들〕
〔위치〕매봉 남쪽, 지금의 주택은행(가양동지점) 부근에 있었다.
신가양종합시장〔시장〕
〔위치〕가양초등학교 동쪽, 경원아파트와 안전로얄아파트 사이에 있다.
신촌교〔다리〕
〔위치〕가양초등학교 남동쪽, 가양천 위에 놓여있다.
안전로얄〔아파트〕
〔위치〕가양사거리 현대자동차서비스와 가양초등학교 사이에 있다.
홉내(흡내, 합내)〔마을〕
〔위치〕매봉마을 근처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의 가양초등학교 서쪽 부근이 된다.
〔유래〕가양천과 대동천 두 개울이 합치는 곳에 마을이 있어서, 합할 합(合)자에 우리말 내를 따서 합내라고 하였다. 이것이 변하여 흡내 혹은 홉내라고 하였다.
〔풀이〕합내>흡내>홉내
<토 속>
갱이마을의 장승
갱이 마을에는 화강 편마암으로 된 장승 1기가 현대APT 북쪽 삼거리에 서 있다. 애당초 장승이 세워졌던 곳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어귀의 논이었으나 이 곳에 집이 들어서면서 1980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옛날 마을에 질병과 우환이 잦아 이를 막기 위해 재앙이 들어오는 길목에 세웠다는 이 장승의 제작연대는 알 수 없지만 마을이 생기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거리제는 해마다 음력 정월 14일 저녁에 거행된다.
이 장승돌은 거북바위라고 한다